8화(5,286자)

흑선

빙의한 엑스트라가 최종 보스의 누나였다 · 하진명

칼이 칼집에서 나오는 소리는 대련장에서보다 짧았다⁠. 셋방은 좁았다⁠. 오웬이 칼을 다 뽑자 칼끝이 천장 들보에 닿을 뻔했고⁠, 칼을 낮게 겨눴다⁠. 루벤의 가슴 높이로⁠.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이 사이에 섰다⁠. 맨발이 차가운 판자를 밟았다⁠. 몸은 가벼웠다⁠. 동생이 밤새 내 통증을 가져갔으니까⁠. 이 가벼움이 발바닥부터 역겨웠다⁠.

“⁠비켜⁠. 약속대로다⁠.⁠”

“⁠그 줄⁠, 내 통증으로 생긴 거예요⁠.⁠” 내가 말했다⁠. “⁠내가 베티 걸 받았고⁠, 루벤이 그걸 다시 받았어요⁠. 내가 받지 않았으면 루벤이 받을 것도 없었어요⁠.⁠”

“⁠누구 통증이든 상관없다⁠. 산 사람의 통증을 끌어와 바꿨다⁠. 둘째 계단이다⁠.⁠”

침대 가장자리에서 베티가 몸을 일으켰다⁠. 어젯밤까지 열에 들떠 있던 여자가 무쇠 프라이팬을 들고 있었다⁠. 언제 집었는지 아무도 못 봤다⁠. 프라이팬을 쥔 손목이 떨렸는데 이 떨림이 열 때문인지 화 때문인지는 몰랐다⁠.

“⁠우리 집에서 칼 뽑으면 아침 없어요⁠.⁠”

“⁠아주머니⁠, 물러나십시오⁠.⁠”

“⁠여기는 아주머니 집이고⁠, 아주머니는 지금 막 살아났어요⁠. 다시 죽이고 싶으면 그 칼로 해 보세요⁠.⁠” 베티가 프라이팬을 들어 올렸다⁠. 팔이 버티지 못해 프라이팬이 반쯤 내려왔다⁠. 베티는 이걸 두 손으로 고쳐 쥐었다⁠.

루벤이 의자에서 일어섰다⁠. 내 어깨를 잡아 옆으로 밀었다⁠. 힘이 셌다⁠. 줄 생긴 손목이 내 어깨에 닿았는데 아무것도 건너오지 않았다⁠. 이 손 안에는 이제 아플 것이 남아 있지 않았다⁠.

“⁠베⁠, 그럼⁠.⁠” 루벤이 오웬을 봤다⁠. 덤덤한 얼굴이었다⁠. “⁠누나 통증을 내가 썼어⁠. 방이 따뜻했어⁠. 그게 죄면 베⁠.⁠”

오웬의 칼끝이 올라갔다⁠.

“⁠성녀의 이름으로 재판을 청합니다⁠.⁠”

문간에서 난 목소리였다⁠. 클라라가 두건을 벗고 서 있었다⁠. 어젯밤 이 두건이었다⁠. 베티를 한 번 더 보러 오겠다고 했었다⁠. 클라라의 팔에는 어젯밤 받은 열의 멍이 손목까지 내려와 있었다⁠.

오웬의 칼이 멈췄다⁠. 루벤의 쇄골 위 한 뼘⁠.

교단 법은 원작에서 세 번 나온다⁠. 성기사는 흑선 있는 자를 이 자리에서 벨 수 있다⁠. 다만 성녀가 재판을 청하면 칼을 거둬야 한다⁠. 원작의 오웬은 이 법에 한 번도 걸린 적이 없다⁠. 베려 할 때 클라라가 막은 적이 없었으니까⁠.

“⁠성녀님⁠.⁠” 오웬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이게 무엇인지 모르십니다⁠.⁠”

“⁠알아요⁠. 흑선이죠⁠. 교단 금서 셋째 권⁠, 저도 읽었어요⁠.⁠” 클라라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저는 어젯밤 이 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알아요⁠. 오웬 경이 이 집 문을 교단에 닫게 하지 않았으면⁠, 이 사람은 그 줄을 얻을 일이 없었어요⁠.⁠”

오웬은 칼을 오래 들고 있었다⁠. 칼날에 창틀의 서리가 비쳤다⁠. 칼을 칼집에 넣었다⁠. 들어가는 소리가 아주 길었다⁠.

“⁠그럼 교단 재판이다⁠. 오늘 정오⁠, 강변 대성당⁠.⁠” 오웬이 문간의 벨로에게 턱짓을 했다⁠. “⁠부관⁠, 이 방을 지킨다⁠. 문 앞이 아니라 방 안에서⁠.⁠”

*

교단 재판이 무엇을 하는지 원작은 한 번 보여 준다⁠. 1권 아홉 번째 장⁠. 아래 도시 술식사 하나가 손목에 줄을 달고 대성당 제단 앞에 꿇는다⁠. 사제들이 이 손을 제단 위에 올린다⁠. 다음 문장은 짧다⁠. 줄 있는 손은 교단의 것이 된다⁠. 술식사는 성도 지하 수도원으로 실려 가고⁠, 이후로 이야기에 나오지 않는다⁠.

나는 이 문장을 루벤에게 말하지 않았다⁠. 말할 필요가 없었다⁠. 클라라가 떠나기 전 베티에게 해열 약초를 건네며 작게 말하는 것을 루벤도 들었다⁠. 손목은 교단이 거둬 간다고⁠.

루벤은 침대 벽 쪽에 등을 붙이고 앉아 자기 손목만 봤다⁠. 엄지로 이 줄을 문질렀다⁠. 지워지지 않았다⁠. 문지른 자리만 붉어지고⁠, 줄은 이 붉은 살 밑에서 그대로 검었다⁠.

“⁠도망가자⁠.⁠” 내가 말했다⁠.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목소리를 낮췄다⁠. 벨로가 문간에서 못 들은 척 천장을 봤다⁠. “⁠정오 전에⁠. 강 따라 내려가면 짐배가 있어⁠. 남쪽 항구 도시까지 가면 교단 성당보다 술집이 많대⁠. 거기서 다시 시작하면 돼⁠.⁠”

“⁠뭘 다시 시작해⁠.⁠”

“⁠사는 거⁠.⁠”

루벤이 손목에서 눈을 떼고 나를 봤다⁠. 이 눈이 원작 삽화의 눈과 처음으로 닮아 보였다⁠. 성벽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눈⁠.

“⁠도망가면 마탑은 끝이야⁠. 입학금 낸 지팡이도 끝이고⁠, 아쉬포드라는 이름도 끝이야⁠. 아버지가 마탑 교수였던 거 누나도 알잖아⁠. 쫓겨났지만⁠.⁠” 루벤이 말했다⁠. “⁠남쪽 항구에서 짐배 타는 몰락 귀족 남매⁠. 그게 누나가 말하는 다시 시작이야⁠? 누나가 아픈 걸 다 받아 주면서⁠?⁠”

“⁠손이 잘리는 것보다는 낫잖아⁠.⁠”

“⁠누나는 지난 한 달 동안 아픈 것보다 나은 걸 한 번도 안 골랐어⁠.⁠” 루벤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크지 않아서 더 깊이 들어왔다⁠. “⁠늘 누나가 아픈 쪽으로 골랐어⁠. 나 대신⁠. 베티 대신⁠. 그 할머니 대신⁠. 나는 그거 보는 게 손 잘리는 것보다 싫어⁠.⁠”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회사에서도 그랬다⁠. 일이 넘치면 내가 야근했고⁠, 남의 일이 늦으면 내가 받아서 끝냈다⁠. 이게 제일 빨랐으니까⁠. 그러다 새벽 두 시 사무실에서 휴대전화로 소설을 읽다 여기로 왔다⁠. 이 몸의 주인도 비슷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지팡이를 팔아 입학금을 내고 생색을 내던 사람⁠. 생색이라도 냈으니 나보다 나았을지도 몰랐다⁠.

베티가 프라이팬을 화덕에 올리며 말했다⁠. “⁠두 분 다 똑같아요⁠. 나리도 그랬어요⁠. 아프면 숨기고⁠, 숨기다 들키면 화내고⁠.⁠”

벨로는 방 한가운데 의자에 앉았다⁠. 의자가 벨로의 무게에 비명을 질렀다⁠. 베티는 프라이팬을 내려놓고 이 프라이팬으로 빵을 구웠다⁠. 구워서 벨로에게 내밀었다⁠.

“⁠감시도 먹고 하세요⁠.⁠”

“⁠근무 중이라서⁠…⁠…⁠.⁠”

“⁠식어요⁠.⁠”

벨로는 빵을 받았다⁠. 세 입에 반을 먹었다⁠. 남은 반을 입에 넣으려는 순간 루벤이 창틀을 넘었다⁠.

이층 창이었다⁠. 이 아래는 공방 쪽빛 통이었다⁠. 첨벙 소리가 났고⁠, 벨로가 빵을 입에 문 채 일어나다 의자를 부쉈다⁠. 나는 창으로 달려갔다⁠. 루벤이 쪽빛 통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허리까지 잠겼다가 통 가장자리를 짚고 뛰어나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파랬다⁠. 공방 여주인이 뒤에서 소리쳤다⁠.

“⁠사흘 담가야 빠지는 물이오⁠!⁠”

루벤은 돌아보지 않았다⁠. 파란 발자국을 골목에 찍으며 강 쪽으로 달렸다⁠.

*

나는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일곱 번째 판자를 밟았는지도 몰랐다⁠. 벨로가 뒤에서 빵을 뱉으며 따라왔다⁠. 골목 끝에서 흰 외투 하나가 합류했다⁠. 오웬은 처마 밑에서 창을 보고 있다가 루벤이 뛰어내리는 것을 봤을 것이다⁠.

파란 발자국은 마탑 정문 다리로 이어졌다⁠. 다리 위 소원 쪽지들이 우리가 지나가는 바람에 떨었다⁠. 학생들이 비켜섰다⁠. 다리 끝 흰 탑 정문은 쇠창살 문이었는데⁠, 이 문이 열려 있었다⁠. 문 안쪽에 회색 교수복이 서 있었다⁠. 도린이 장갑 낀 손으로 문창살을 잡고⁠, 파랗게 젖은 루벤을 안으로 들이고 있었다⁠.

“⁠닫아⁠!⁠” 오웬이 외쳤다⁠. “⁠교단의 재판을 받을 자다⁠!⁠”

“⁠여기는 마탑입니다⁠, 성기사님⁠.⁠” 도린은 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다리 위까지 들릴 만큼만 냈다⁠. “⁠학장의 허락 없이는 이 문 안에 교단의 칼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루벤 군은 마탑 학생이고요⁠.⁠”

쇠창살 문이 닫혔다⁠. 문 안쪽에 마탑 경비 마법사 넷이 섰다⁠. 이들의 손끝에서 푸른 마력이 실처럼 일어 문창살 사이를 엮었다⁠. 오웬이 문 앞 세 걸음에서 멈췄다⁠. 칼을 뽑지 않았다⁠. 뽑을 수 없었다⁠. 흰 탑 세 번째 층 창에 은빛 수염을 기른 노인이 서서 다리 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탑 학장이었다⁠. 오웬이 고개를 들어 이 창을 보자⁠, 노인은 아무 표정 없이 창 덧문을 닫았다⁠. 덧문 닫히는 소리가 다리 위까지 내려왔다⁠.

나는 문창살을 잡았다⁠. 마력 실이 손바닥을 찌르르 긁었다⁠.

“⁠루벤⁠. 나와⁠.⁠”

루벤이 문 안쪽에서 돌아섰다⁠. 쪽빛 물이 루벤의 턱에서 뚝뚝 떨어졌다⁠. 젖은 머리가 파랗게 이마에 붙었고 눈썹까지 파랬다⁠. 우스운 꼴이었는데 아무도 웃지 않았다⁠.

“⁠같이 방법 찾자⁠. 재판 말고 다른 길이 있을 거야⁠.⁠”

“⁠누나 방법은 누나가 아픈 거잖아⁠.⁠” 루벤이 말했다⁠. “⁠입학식 날도⁠, 그 할머니도⁠, 베티도⁠. 누나가 아프고 쓰러지고 이틀 자고⁠. 그게 누나 방법이야⁠.⁠” 루벤이 줄 생긴 손목을 들어 보였다⁠. 파랗게 물든 살갗 위에서도 검은 줄은 검었다⁠. “⁠이제 내 방법으로 할게⁠.⁠”

“⁠도린은 너를 쓰려는 거야⁠.⁠”

“⁠알아⁠.⁠” 루벤이 도린을 힐끗 봤다⁠. 도린은 이 눈길을 받고도 웃기만 했다⁠. “⁠나도 교수님 써⁠. 교단한테 손 안 뺏기려면 여기밖에 없어⁠.⁠”

문창살의 마력 실이 내 손바닥을 더 세게 긁었다⁠. 피가 한 방울 맺혔다⁠. 나는 손을 떼지 않았다⁠.

루벤이 한 걸음 물러서다 멈췄다⁠. 나를 보지 않고 말했다⁠.

“⁠방 따뜻했지⁠?⁠”

대답하려는데 목이 막혔다⁠. 루벤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도린이 루벤의 어깨에 장갑 낀 손을 얹었고⁠, 둘은 흰 탑 동쪽 계단으로 내려갔다⁠. 파란 발자국이 계단 첫 칸까지 찍혀 있었다⁠. 다음 칸부터는 안 보였다⁠.

“⁠누님⁠.⁠” 도린이 계단 위에서 한 번 돌아봤다⁠. “⁠연구실 문은 누님에게도 열려 있습니다⁠. 언제든⁠.⁠”

*

쇠창살 문 앞에 셋이 남았다⁠. 나⁠, 오웬⁠, 빵 부스러기를 수염에 묻힌 벨로⁠. 다리 위 학생들이 수군거리며 흩어졌다⁠.

오웬이 문창살에 엮인 마력 실을 봤다⁠. 칼자루를 쥐었다 놓았다 했다⁠. 원작의 오웬은 이 문 앞에 선 적이 없다⁠. 첫 삶의 첫눈 사흘 전에 왔고⁠, 이때 루벤은 이미 흰 탑 지하에 살고 있었다⁠. 이번엔 자기가 쫓아 넣었다⁠.

“⁠정오 재판은 없다⁠.⁠” 오웬이 말했다⁠. “⁠마탑이 내놓지 않는 한⁠.⁠”

“⁠마탑은 안 내놔요⁠. 도린이 학장을 쥐고 있을 테니까⁠.⁠” 나는 피 맺힌 손바닥을 치마에 닦았다⁠. 쪽빛 물이 묻어 치마에 푸른 손자국이 났다⁠. “⁠그리고 루벤은 저 안에서 셋째 계단까지 갈 거예요⁠. 도린이 원하는 건 그거니까⁠. 당신 첫 삶에서도 그랬죠⁠?⁠”

오웬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것이 대답이었다⁠. 칼자루를 쥔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가 다시 쥐었다⁠. 그러더니 낮게 말했다⁠. 첫 삶에서 잡은 조수는 열아홉 살이었고⁠, 교단 재판에서 손을 잃었고⁠, 도린은 이 재판에 증인으로 나와 조수를 꾸짖었다고⁠.

“⁠첫눈 사흘 전에 아래 도시에서 웃는 시신 사건이 터져요⁠. 당신이 첫 삶에서 맡았던 거⁠. 범인은 도린 조수였고⁠, 도린은 빠져나갔다고 했죠⁠.⁠” 나는 오웬 앞에 섰다⁠. 키 차이 때문에 고개를 한참 들어야 했다⁠. “⁠이번엔 도린 본인을 잡아요⁠. 도린이 잡히면 마탑은 루벤을 감쌀 이유가 없어지고⁠, 루벤은 셋째 계단 앞에서 내려와요⁠. 당신은 동생을 원하고⁠, 나도 동생을 원해요⁠. 방향만 반대고요⁠.⁠”

“⁠나는 그를 베려고 한다⁠.⁠”

“⁠알아요⁠. 그건 나중에 협의해요⁠. 지금은 같은 문 앞에 서 있잖아요⁠.⁠”

나는 손을 내밀었다⁠. 쪽빛과 피가 섞인 손바닥이었다⁠. 회사에서 협력사 담당자에게 손을 내밀 때처럼⁠, 팔을 끝까지 뻗고 손바닥을 옆으로 세웠다⁠.

오웬이 이 손을 내려다봤다⁠. 장갑 낀 오웬의 오른손이 칼자루에서 떨어졌다⁠.

8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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