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5,362자)

따뜻한 방

빙의한 엑스트라가 최종 보스의 누나였다 · 하진명

루벤의 손이 베티의 손목에 닿기 전에 내가 이 손목을 잡았다⁠. 루벤의 손목을⁠. 맨손으로⁠.

뜨거운 것이 건너왔다⁠. 대련장의 이 불길은 아니었다⁠. 손바닥 덴 자국 열몇 개가 한꺼번에 화끈거렸다⁠. 루벤이 저녁마다 난로 쇠판에 손을 대며 모아 둔 작은 통증들이었다⁠. 이것들이 아직 루벤의 손 안에 고여 있었다⁠. 다 마력으로 바꾸지 못한 것들이⁠.

“⁠안 돼⁠.⁠”

“⁠베티 죽어⁠!⁠” 루벤이 내 손을 뿌리치려 했다⁠. “⁠누나도 봤잖아⁠, 숨을 저렇게 쉬는데⁠…⁠…⁠”

“⁠내가 할게⁠.⁠”

나는 루벤을 밀어내고 베티의 두 손을 잡았다⁠. 숨을 베티의 숨에 맞췄다⁠. 짧고 얕고 뜨거운 숨이었다⁠.

열이 왔다⁠. 머리 한가운데에 쇠못이 박혔고 누가 이 못을 망치로 천천히 두드렸다⁠. 두드릴 때마다 눈알 뒤가 울렸다⁠. 관절이란 관절이 모두 안에서부터 부풀어 올라 뼈를 밀었다⁠. 살갗은 불덩이인데 뼛속은 얼음물에 담근 것처럼 시렸다⁠. 이가 딱딱 부딪쳤다⁠.

베티의 신음이 잦아들었다⁠. 찡그렸던 미간이 펴졌다⁠. 그런데 이마에 손을 대 보니 열은 그대로였다⁠. 아니⁠, 더 올라 있었다⁠.

통증은 내게로 왔는데 병은 베티에게 남았다⁠. 아쉬포드의 피가 받아 오는 것은 아픔이지 병이 아니었다⁠.

“⁠물수건⁠.⁠” 내가 말했다⁠. 목소리가 남의 목소리처럼 갈라졌다⁠. “⁠우물물 길어 와서⁠, 수건 적셔서⁠, 이마에⁠. 계속⁠. 그리고 베티 손은 잡지 마⁠.⁠”

루벤이 나를 봤다⁠. 무언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고 물동이를 들고 나갔다⁠. 계단 판자가 하나씩 울었다⁠. 새로 간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판자는 소리가 달랐다⁠.

*

일곱 시에 노크가 세 번 울렸다⁠. 오웬은 문간에서 방 안을 한 번 훑었다⁠. 침대에 누운 베티⁠, 이 손을 잡고 바닥에 주저앉은 나⁠, 물수건을 짜는 루벤⁠. 오웬의 눈이 루벤의 손으로 갔다⁠.

“⁠소매⁠.⁠”

루벤이 물수건을 내던지고 두 소매를 한꺼번에 걷어 올렸다⁠. 팔뚝까지⁠. 왼쪽⁠, 오른쪽⁠. 깨끗했다⁠. 루벤이 이를 갈며 말했다⁠.

“⁠보고 가⁠. 그리고 성녀 좀 보내 줘⁠. 당신이 막았다며⁠.⁠”

오웬은 루벤의 말에 아무것도 돌려주지 않았다⁠. 문간에서 한 걸음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문을 닫지도 않았다⁠. 계단 아래로 내려가 공방 처마 밑에 섰다⁠. 거기서 창을 올려다봤다⁠. 동생이 손을 대는지 이 자리에서 볼 셈이었다⁠.

정오가 되자 베티의 입술이 갈라져 피가 났다⁠. 열은 내려가지 않았다⁠. 나는 내 이마에 손을 대 봤다⁠. 내 이마는 차가웠다⁠. 열은 베티의 것이었고 이 열이 만드는 통증만 내 것이었다⁠. 이 통증만으로도 손이 떨려 컵을 들지 못했다⁠.

이대로면 원작처럼 간다⁠. 통증을 다 받아 줘도 베티는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한다⁠. 그리고 이 밤의 어느 때⁠, 내가 앓다 쓰러지면 루벤이 손을 댄다⁠. 오웬은 이걸 처마 밑에서 본다⁠.

“⁠루벤⁠.⁠” 나는 베티의 손을 놓았다⁠. 손을 떼는 순간 베티가 끙 소리를 냈고⁠, 이 소리가 내 가슴을 긁었다⁠. “⁠나 성녀 데려올게⁠. 그동안 손 대지 마⁠. 약속해⁠.⁠”

“⁠누나 지금 서지도 못하잖아⁠.⁠”

“⁠약속해⁠.⁠”

루벤은 한참 나를 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끄덕임이 원작의 어느 문장보다 무거웠다⁠.

*

강변까지 가는 길에 두 번 넘어졌다⁠. 베티의 손을 놓았는데도 열의 통증이 내 몸에 남아 반나절은 앓을 것이었다⁠. 무릎이 시큰거리고 머리에 박힌 못이 그대로였다⁠. 아래 도시 사람들이 비틀거리는 귀족 아가씨를 피해 걸었다⁠.

치유단 천막 앞 줄은 오늘도 길었다⁠. 나는 줄을 무시하고 가운데 천막 휘장을 젖혔다⁠. 클라라가 염색공 아이의 데인 팔을 감싸 쥐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늙은 사제가 내 앞을 막아섰다⁠.

“⁠아쉬포드 맏따님⁠,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 댁 일은 받지 않습니다⁠.⁠”

“⁠성녀님한테 할 말이 있어요⁠. 한 문장이요⁠.⁠”

“⁠성녀님은 바쁘십니다⁠.⁠”

나는 사제 어깨 너머로 클라라를 봤다⁠. 원작 1권 일곱 번째 장⁠. 성도 대성당에서 교단 수장이 치유 값을 올리던 날⁠, 클라라는 회랑 기둥 뒤에서 혼자 이 말을 중얼거린다⁠. 아무도 듣지 않는 자리에서⁠. 오웬도 이 자리에 없다⁠. 이 장면을 아는 것은 클라라 자신과⁠, 이 장을 읽은 독자뿐이다⁠.

“⁠성녀의 손은 값을 묻기 전에 아픈 곳을 묻는다⁠.⁠”

천막 안이 조용해졌다⁠. 클라라가 염색공 아이의 팔을 감싼 채 굳었다⁠. 클라라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그거⁠.⁠” 클라라가 천천히 말했다⁠. “⁠제가 속으로만 하던 말이에요⁠. 한 번도 소리 내서 한 적 없는데⁠.⁠”

“⁠우리 하녀가 오늘 밤을 못 넘겨요⁠. 하녀 이름은 베티고⁠, 마흔 살이고⁠, 석 달째 품삯을 못 받았는데 아무 데도 안 갔어요⁠. 아픈 곳은 머리하고 관절 전부고요⁠.⁠” 나는 사제를 보지 않고 클라라만 봤다⁠. “⁠값은 안 물으셔도 돼요⁠. 열여섯 주 분할로 드릴 거니까⁠.⁠”

늙은 사제가 클라라를 돌아봤다⁠. “⁠성녀님⁠, 교단의 명입니다⁠.⁠”

클라라는 염색공 아이의 팔을 다 낫게 한 뒤에야 손을 뗐다⁠. 아이가 팔을 흔들어 보고 뛰어나갔다⁠. 클라라는 손을 씻었고⁠, 씻으며 사제에게 말했다⁠.

“⁠알아요⁠. 교단의 명이죠⁠.⁠” 그리고 나를 봤다⁠. 사제가 볼 수 없는 각도에서⁠, 아주 짧게⁠. “⁠해가 지면요⁠.⁠”

*

셋방 계단을 오르는데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처마 밑에 있어야 할 사람의 목소리였다⁠.

“⁠손을 대 보지 그러나⁠.⁠”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오웬이 방 한가운데 서 있었고⁠, 루벤은 침대 옆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물수건을 쥐고 있었다⁠. 물수건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오웬의 목소리는 낮고 고르고⁠, 아무 감정이 없었다⁠.

“⁠술식을 안다면서⁠. 그 손이면 하녀가 지금 당장 편해진다⁠. 네 누나는 반나절을 걸어 나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올 거다⁠. 교단은 이 집을 안 받는다⁠. 그건 내가 정했다⁠.⁠”

루벤의 어깨가 떨렸다⁠. 물수건을 쥔 손등에 핏줄이 섰다⁠.

“⁠누나랑 약속했어⁠.⁠”

“⁠약속은 하녀가 죽은 뒤에도 남는다⁠. 하녀는 안 남는다⁠.⁠”

나는 문을 다 열었다⁠. 문짝이 벽에 부딪혀 쾅 소리가 났다⁠. 오웬이 돌아봤다⁠. 나는 문틀을 잡고 섰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문틀을 안 잡으면 설 수가 없었다⁠.

“⁠업무 방해예요⁠. 나가 주세요⁠.⁠”

“⁠시험이다⁠.⁠”

“⁠시험 감독이 옆에서 답을 불러 주면 그건 시험이 아니라 부정행위예요⁠.⁠” 내 목소리가 갈라졌는데⁠, 갈라진 채로 끝까지 나왔다⁠. “⁠손목 검사는 아침 일곱 시라고 합의했죠⁠. 지금 몇 시예요⁠? 합의 위반이에요⁠. 한 번 더 이러면 내일 아침 검사는 문밖에서 하세요⁠.⁠”

오웬의 눈이 내 떨리는 무릎으로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오웬은 아무 말 없이 내 옆을 지나 계단을 내려갔다⁠. 일곱 번째 판자가 오웬의 무게에 길게 울었다⁠.

루벤이 물수건을 대야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손바닥이 우물물에 불어 하얬다⁠.

“⁠성녀는⁠?⁠”

“⁠해가 지면 와⁠.⁠”

해가 지기 전에 나는 다시 베티의 손을 잡았다⁠. 루벤은 약속을 지켰다⁠. 물수건이 스무 장쯤 바닥에 널려 있었다⁠. 손목은 깨끗했다⁠. 나는 숨을 맞췄다⁠. 열이 다시 왔다⁠. 반나절을 앓은 몸에 다시 오는 열은 처음보다 더 깊이 들어왔다⁠.

해가 지고 한 시간쯤 뒤 계단이 울었다⁠. 일곱 번째 판자⁠, 새 판자의 소리⁠. 문이 열리고 두건 쓴 여자가 들어왔다⁠. 두건을 벗자 금빛 머리가 흘러내렸다⁠. 클라라는 방 안을 둘러보지도 않고 침대로 가서 베티의 이마에 두 손을 얹었다⁠.

“⁠아가씨는 손 놓으세요⁠. 둘이 받으면 제가 어디서 오는지 헷갈려요⁠.⁠”

나는 손을 놓았다⁠. 클라라가 눈을 감았다⁠. 클라라의 입술이 움직였는데 소리는 나지 않았다⁠. 베티의 숨이 길어졌다⁠. 클라라의 숨이 짧아졌다⁠. 성녀의 이마에 땀이 맺혔고⁠, 클라라의 무릎이 한 번 꺾였다가 펴졌다⁠. 천막에서 본 이 꺾임이었다⁠. 클라라의 팔뚝에 새 멍이 피어오르는 것이 소매 밑으로 비쳤다⁠.

베티가 눈을 떴다⁠.

“⁠아가씨⁠.⁠” 베티의 첫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그리고 다음 말은 잔소리였다⁠. “⁠성녀님 오셨으면 차라도 내셔야지⁠, 바닥에 그러고 앉아 계시면 어떡해요⁠. 찻잎이⁠…⁠… 없지⁠. 그럼 물이라도⁠.⁠”

클라라가 웃음을 터뜨렸다⁠. 웃다가 휘청였다⁠. 루벤이 의자를 밀어 줬다⁠. 베티는 누운 채 클라라의 얼굴을 한참 올려다보더니 진지하게 물었다⁠.

“⁠성녀님⁠, 혹시 시집가실 생각 있으세요⁠? 제 조카가 강 건너에서 짐꾼을 하는데 허리가 튼튼하고 말이 없어요⁠. 말 없는 남자가 최고예요⁠.⁠”

“⁠성녀는 시집을 안 가요⁠.⁠”

“⁠그럼 조카 허리라도 한번 봐 주세요⁠. 허리가 재산이에요⁠.⁠”

나는 바닥에 앉은 채 웃었다⁠. 웃는데 머리의 못이 다시 울렸다⁠. 반나절과 저녁 내내 받은 열의 통증이 그제야 한꺼번에 무게를 얹었다⁠. 침대 모서리를 잡고 일어나려 했다⁠. 방이 기울었다⁠. 루벤의 팔이 나를 받았고⁠, 이 팔 안에서 잠이 왔다⁠. 무거운 잠이었다⁠. 쇠못이 박힌 채로 자는 잠⁠.

*

잠결에 계단 밑 목소리를 들었다⁠.

“⁠성녀님⁠. 교단의 명을 어기셨습니다⁠.⁠”

오웬의 목소리였다⁠. 처마 밑에서 하루 종일 기다린 사람의 목소리⁠. 클라라가 대답했다⁠. 클라라의 목소리는 지쳐 있었는데 물러서지 않았다⁠.

“⁠오웬 경⁠, 당신 손이 떨려요⁠.⁠”

오래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강물 소리와 공방 쪽빛 통에서 김 빠지는 소리만 났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가는 가벼운 발소리가 골목 끝으로 멀어졌다⁠. 무거운 발소리는 따라가지 않았다⁠.

*

눈을 떴을 때 방이 따뜻했다⁠.

나는 이게 이상하다는 것을 한참 뒤에야 알았다⁠. 무쇠 난로는 식어 있었다⁠. 장작은 어제 아침에 떨어졌다⁠. 창틀에는 이틀째 서리가 하얗게 앉아 있었다⁠. 그런데 방 안 공기가 봄날 오후처럼 미지근했다⁠. 난로 쇠판에 손을 대 보니 쇠판이 따뜻했다⁠. 불기 하나 없는 난로가 안에서부터 데워져 있었다⁠.

내 몸이 가벼웠다⁠. 머리의 못이 빠져 있었다⁠. 어젯밤 그만큼 받은 열의 통증이라면 오늘 하루는 일어나지 못해야 했다⁠. 손가락 끝 죽은 마디까지 피가 돌았다⁠.

루벤은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잠들어 있었다⁠. 고개가 가슴까지 꺾였고⁠, 루벤의 오른손이 내 왼쪽 손목 위에 얹혀 있었다⁠. 맨손으로⁠.

이 손을 들어 손바닥을 펴 봤다⁠. 저녁마다 난로 쇠판에 대며 모은 동전만 한 덴 자국들이 하나도 없었다⁠. 살갗이 새로 돋은 것처럼 매끄러웠다⁠. 손바닥 한가운데만 뜨거웠다⁠. 난로 쇠판과 같은 온도였다⁠. 베티는 떨어지는 쪽 가장자리에서 코를 골고 있었다⁠. 이마가 서늘했다⁠.

노크가 세 번 울렸다⁠. 일곱 시였다⁠.

오웬은 이번엔 문간에서 멈추지 않았다⁠. 방 안으로 들어와 루벤 앞에 섰다⁠. 루벤이 깨어나 눈을 비볐다⁠. 오웬은 소매를 걷으라고 말하지 않았다⁠. 직접 루벤의 오른쪽 소매를 걷어 올렸다⁠.

손바닥 아래 두 마디⁠, 핏줄이 지나가는 자리에 검은 줄이 하나 그어져 있었다⁠. 머리카락만큼 가늘었다⁠. 먹을 묻힌 실을 살갗 안쪽에 한 바퀴 감아 놓은 것 같았다⁠.

“⁠누나가 밤새 앓았어⁠.⁠” 루벤이 자기 손목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목소리가 덤덤했다⁠. 너무 덤덤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같았다⁠. “⁠이를 갈고 헛소리를 했어⁠. 그래서 내가 받았어⁠. 교수님이 가르쳐 준 대로⁠. 받아서 버리지 않고 썼어⁠.⁠” 루벤이 식은 난로를 턱으로 가리켰다⁠. “⁠방이 너무 추웠거든⁠.⁠”

오웬의 손이 칼자루를 쥐었다⁠.

7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

따뜻한 방 · 빙의한 엑스트라가 최종 보스의 누나였다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