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5,353자)

첫 서리까지

빙의한 엑스트라가 최종 보스의 누나였다 · 하진명

빗물이 목덜미로 들어갔다⁠. 차가웠는데 나는 이 차가움을 한참 뒤에야 알았다⁠. 오웬의 말이 귀에 먼저 들어와 다른 감각을 다 밀어냈다⁠.

“⁠첫 삶이라는 게 무슨 뜻이에요⁠?⁠”

오웬은 계단 밑 처마로 들어왔다⁠. 나와 한 걸음 떨어져 섰다⁠. 이 거리에서 오웬의 젖은 외투에서 올라오는 냄새가 났다⁠. 교단 숙소의 싸구려 비누⁠, 그리고 이 밑에 탄 냄새⁠. 비에 젖었는데도 이 사람에게서 불 냄새가 났다⁠.

“⁠나는 첫눈 사흘 전에 에이르에 왔다⁠. 아래 도시에서 웃는 얼굴로 죽은 시신들을 맡아서⁠.⁠” 오웬이 말을 고르듯 끊어 말했다⁠. “⁠도린의 조수를 잡았고⁠, 도린은 빠져나갔다⁠. 동짓날 밤 흰 탑 시험장이 터졌는데 그게 무슨 일인지 그때는 몰랐다⁠. 두 해 뒤에 알았다⁠. 흑마가 서른 도시를 태웠다⁠. 나는 마지막 도시에서 그를 벴다⁠. 성도 대성당 계단에서⁠.⁠”

빗소리가 처마를 두드렸다⁠. 이층 창에서 루벤의 그림자가 사라졌다⁠.

“⁠그는 죽기 전에 말을 했다⁠. 많이⁠. 평생 처음으로 말할 사람이 생긴 것처럼⁠.⁠” 오웬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누나 이야기를 했다⁠. 입학식 날 대련⁠, 비 오는 날 책 상자⁠, 첫 서리 날 하녀⁠. 계단 이야기도 했다⁠. 그리고 동짓날 밤⁠. 누나가 맨손으로 자기를 잡았고⁠, 자기가 누나를 먹었다고⁠. 그 말을 하고 웃었다⁠. 그다음에 대성당이 무너졌고⁠, 나도 그 밑에 깔렸다⁠.⁠”

오웬은 목깃을 내렸다⁠. 화상이 목에서 쇄골까지 이어져 있었다⁠. 빗물이 이 위를 미끄러졌다⁠.

“⁠눈을 떴더니 가을 첫 달 초하루였다⁠. 성도 교단 숙소 침대에서⁠. 이것만 남아 있었다⁠.⁠”

나는 이 화상을 봤다⁠. 회귀⁠. 웹소설에서 백 번은 본 낱말이었다⁠. 원작의 주인공이 자기 결말을 한 번 살고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이 결말에서 나는 동생에게 먹히는 한 줄이었다⁠.

“⁠다시 묻지⁠.⁠” 오웬이 목깃을 올렸다⁠. “⁠첫 삶의 아쉬포드 레나는 동짓날 죽었다⁠. 루벤 말로는 말수가 적고 셈이 빠르고 동생에게 다정하지 않았다⁠. 지팡이를 팔았고⁠. 넌 누구냐⁠?⁠”

“⁠레나예요⁠.⁠” 나는 상자를 들어 올렸다⁠. 무릎이 시큰거렸다⁠. “⁠동짓날 안 죽기로 한 레나라고요⁠.⁠”

오웬은 이 대답을 믿지 않았다⁠. 믿지 않는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다⁠. 네가 누구든⁠, 줄이 생기면 벤다⁠. 그 루벤은 서른 도시를 태웠다⁠.⁠”

“⁠그건 그 루벤이고요⁠.⁠” 나는 계단 첫 칸에 발을 올렸다⁠. “⁠이 루벤은 오늘 짐꾼들한테 국 간을 맞춰 줬어요⁠.⁠”

*

손목 검사는 이튿날 아침에도 세 번의 노크로 시작했다⁠. 사흘째 아침에는 노크 전에 첨벙 소리가 났다⁠.

베티가 창을 열고 내려다보더니 빨래를 걷다 말고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창가로 갔다⁠. 공방 쪽빛 통 하나에서 오웬이 허리까지 잠긴 채 일어서고 있었다⁠. 흰 외투가 하늘색이 되어 있었다⁠. 계단 일곱 번째 칸이 부러져 공방 지붕 위로 걸려 있었다⁠.

“⁠일곱째 칸은 밟지 말라고 공유드렸는데요⁠.⁠” 내가 창밖으로 말했다⁠.

“⁠여섯째 칸을 밟았다⁠.⁠” 오웬이 쪽빛 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여섯째가 내려앉았다⁠.⁠”

공방 여주인이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나왔다⁠. 여주인은 통 속의 성기사를 한참 보더니 말했다⁠. “⁠그 통은 사흘 담가야 빠지는 물이오⁠. 좋은 물이오⁠.⁠”

오웬은 사흘 동안 파랬다⁠. 목과 손목과 귀 뒤가⁠. 아침마다 식탁에 앉아 루벤의 손목을 볼 때⁠, 루벤은 성기사의 푸른 귓불을 보며 웃음을 참느라 소매 걷는 손이 떨렸다⁠. 오웬은 이걸 보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나흘째에 일곱 번째 칸과 여섯 번째 칸을 새 판자로 갈아 놓고 갔다⁠. 망치는 벨로가 들었다⁠.

우리는 한 식탁에서 밥을 먹었다⁠. 저택에서는 베티가 부엌에서 따로 먹었고⁠, 레나와 루벤은 긴 식탁 양 끝에 앉았다고 베티가 말했다⁠. 셋방의 식탁은 팔을 뻗으면 서로의 접시에 닿았다⁠. 루벤은 처음 며칠은 빵을 들고 창가로 갔다⁠. 이레째부터는 식탁에 앉았다⁠. 열흘째에는 내 접시의 생선 껍질을 말없이 가져가 먹었다⁠. 원작의 레나가 생선 껍질을 싫어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생선 껍질을 좋아했다⁠. 이 말을 하지 않았다⁠.

그사이 나는 루벤의 왼손 손바닥에 작은 덴 자국이 늘어 가는 것을 봤다⁠. 동전만 한 붉은 자국이 사흘에 하나씩⁠. 루벤은 저녁마다 난로 앞에서 손을 쬐었는데⁠, 불을 쬐는 게 아니라 손바닥을 난로 쇠판에 잠깐씩 대고 있었다⁠. 대고 나면 손이 붉어졌고⁠, 붉어진 손으로 꺼져 가는 불씨를 감싸면 불씨가 다시 일어났다⁠. 장작 없이⁠. 루벤은 내가 보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그거 그만해⁠.⁠”

“⁠내 손이야⁠. 내가 아픈 거고⁠.⁠” 루벤이 불씨를 감싼 채 말했다⁠. “⁠첫 계단에는 줄이 안 생긴다며⁠. 성기사가 그랬잖아⁠.⁠”

*

스무하루째에 아래 도시 강변에 흰 천막 세 동이 섰다⁠. 교단 치유단이었다⁠. 천막 앞에 줄이 길게 늘어섰는데⁠, 줄 선 사람들의 손에는 동전 대신 아무것도 없었다⁠. 이들은 천막 문간에서 사제가 부르는 값을 듣고 돌아섰다⁠. 석 달 품삯⁠.

원작에서 성녀 클라라가 에이르에 오는 것은 첫눈 뒤다⁠. 지금은 첫 서리도 오기 전이었다⁠. 누가 클라라를 불렀는지 나는 알 것 같았다⁠.

나는 학관 일을 일찍 끝내고 천막으로 갔다⁠. 첫 서리까지 열이레가 남아 있었다⁠. 원작에서 베티는 첫 서리 날 열병으로 쓰러져 이 밤을 못 넘긴다⁠. 열병은 사람이 원해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날씨처럼 원작의 날짜를 지킬 것이었다⁠. 이날 성녀의 손이 필요했다⁠.

가운데 천막 안에서 여자 하나가 짐꾼의 다리를 감싸 쥐고 눈을 감고 있었다⁠. 흰 사제복 소매를 걷어 올렸는데⁠, 드러난 두 팔에 오래된 멍과 새 멍이 얼룩덜룩했다⁠. 짐꾼이 숨을 내쉬자 여자가 이를 악물었다⁠. 여자의 무릎이 잠깐 꺾였다가 펴졌다⁠. 금빛 머리를 질끈 묶은⁠, 스무 살을 조금 넘긴 얼굴⁠. 원작의 여주인공⁠, 성녀 클라라였다⁠.

성녀의 치유는 남의 통증을 제 몸에 받아 기도로 삭이는 일이었다⁠. 원작에서 이 문장을 읽었을 때는 그냥 설정이었다⁠. 지금은 클라라의 팔뚝에 피어 있는 멍이 내 손가락 끝에 남은 멍과 같은 빛깔이었다⁠.

“⁠귀족 아가씨가 아래 도시 천막에는 무슨 일이세요⁠?⁠” 클라라가 손을 씻으며 물었다⁠.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는 목소리였다⁠.

“⁠사전 예약 하러 왔어요⁠. 첫 서리 날 저녁에 저희 셋방에 한 번 와 주실 수 있을까요⁠? 값은 나눠 낼게요⁠. 학관 일정 담당 월급이 주에 은화 넷이라서⁠, 석 달 품삯이면 열여섯 주 분할로요⁠.⁠”

“⁠분할⁠?⁠” 클라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런 건 처음 들어요⁠. 아픈 날을 미리 정해서 예약하는 사람도 처음이고요⁠. 첫 서리 날 누가 아플 줄 어떻게 아세요⁠?⁠”

대답하기 전에 천막 휘장이 젖혀졌다⁠. 치유단을 맡은 늙은 사제가 들어왔다⁠. 나를 아래위로 훑고 클라라 옆에 섰다⁠.

“⁠아쉬포드 맏따님이시지요⁠? 그 댁은 성기사단 감찰을 받고 있습니다⁠. 흑마 혐의가 있는 집안에는 교단의 손이 닿지 않습니다⁠. 성녀님⁠, 그 댁 일은 받지 마십시오⁠.⁠”

“⁠흑마 혐의요⁠?⁠” 클라라가 사제를 돌아봤다⁠. “⁠누가 그런 혐의를⁠…⁠…⁠.⁠”

“⁠오웬 경께서 올리셨습니다⁠.⁠”

클라라의 얼굴에서 무언가가 내려앉았다⁠. 클라라는 나를 봤고⁠, 사제를 봤고⁠, 젖은 손을 앞치마에 닦았다⁠. 오래 닦았다⁠.

“⁠죄송해요⁠.⁠” 클라라가 말했다⁠. 정말 죄송한 얼굴이었다⁠. “⁠오웬 경이 그렇게 정했다면⁠, 이유가 있을 거예요⁠.⁠”

*

서른엿새째 밤⁠, 나는 셋방 지붕으로 올라갔다⁠. 공방 굴뚝 옆에 흰 외투가 앉아 있었다⁠. 흰 외투는 밤마다 거기서 루벤의 창을 지켰다⁠. 귀 뒤에 쪽빛이 아직 조금 남아 있었다⁠.

“⁠치유단이 우리를 안 받는대요⁠. 당신이 막았죠⁠?⁠”

“⁠그렇다⁠.⁠”

“⁠베티가 첫 서리 날 열병에 걸리는 거 알죠⁠? 루벤이 말해 줬을 테니까⁠.⁠”

오웬이 강 쪽을 봤다⁠. 아래 도시의 마정석 등이 듬성듬성 켜져 있었고⁠, 이 너머 강 위쪽에 흰 탑이 혼자 하얬다⁠.

“⁠첫 삶에서 그 하녀는 첫 서리 날 쓰러졌다⁠. 루벤은 그 하녀의 통증을 끌어와 술식으로 바꿨고⁠, 손목에 첫 줄이 생겼다⁠. 하녀는 그래도 죽었다⁠.⁠” 오웬이 말했다⁠. 보고서를 읽는 목소리였다⁠. “⁠이번에도 똑같이 둔다⁠. 성녀가 오면 루벤이 손을 댈 이유가 없어진다⁠. 그러면 나는 그가 손을 대는 사람인지 아닌지 모른 채 동지까지 간다⁠.⁠”

“⁠그러니까 베티를 시험대로 쓰겠다는 거네요⁠.⁠”

“⁠루벤이 손을 대면⁠, 그날 벤다⁠. 서른 도시가 산다⁠. 손을 안 대면⁠, 하녀가 죽는다⁠. 둘 중 하나다⁠.⁠”

“⁠세 번째가 있어요⁠.⁠”

“⁠없었다⁠.⁠” 오웬이 나를 봤다⁠. “⁠첫 삶에는 없었다⁠.⁠”

나는 지붕 기와를 짚고 일어섰다⁠. 기와가 차가웠다⁠. 손가락 끝의 죽은 마디가 이 차가움을 한 박자 늦게 전했다⁠.

“⁠그럼 이번 삶에서 보세요⁠.⁠”

*

서른이레째 새벽⁠, 강변 우물가에 클라라가 혼자 나와 있었다⁠. 천막 사람들이 깨기 전에 물을 긷는 것은 성녀의 일이 아니었을 텐데⁠, 두레박줄을 손바닥에 감고 있었다⁠. 이 손바닥에도 멍이 있었다⁠.

“⁠어제 그 분할 아가씨⁠.⁠” 클라라가 나를 알아봤다⁠. 반가운 얼굴이었다가 곧 미안한 얼굴이 되었다⁠.

“⁠성녀님한테 하나만 여쭤보려고요⁠. 업무 외 질문이에요⁠.⁠” 나는 두레박줄을 같이 잡아 당겼다⁠. 물이 무거웠다⁠. “⁠오웬 경은 원래 그런 사람이에요⁠? 아픈 사람 앞에서 문을 닫는 사람⁠?⁠”

클라라는 한참 줄만 당겼다⁠. 두레박이 올라와 물이 출렁였다⁠.

“⁠아니에요⁠.⁠” 클라라가 작게 말했다⁠. “⁠작년까지는 빵 훔친 아이 손목을 잡고도 놓아주던 분이었어요⁠. 올가을 초하루에 숙소에서 쓰러졌다 일어난 뒤로 달라졌어요⁠. 밤마다 깨서 목을 만져요⁠. 거기 원래 아무것도 없었는데⁠.⁠” 클라라가 두레박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저한테 이번 가을엔 꼭 에이르에 와 달라고 했어요⁠. 왜냐고 물으니까⁠, 이번엔 늦지 않으려고 그런다고⁠.⁠”

“⁠이번엔요⁠?⁠”

“⁠저도 그게 이상했어요⁠.⁠” 클라라가 물동이를 들었다⁠. 팔의 멍이 소매 밑으로 숨었다⁠. “⁠아가씨 댁 첫 서리 날 일⁠, 저는 받을 수 없어요⁠. 교단 명이니까요⁠. 그런데 아가씨가 어떻게 그날을 아는지는 계속 궁금할 것 같아요⁠.⁠”

클라라는 물동이를 이고 천막 쪽으로 걸어갔다⁠. 세 걸음 가다 한 번 돌아봤다⁠. 돌아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걸었다⁠.

*

서른여드레째 아침⁠, 창틀에 서리가 내렸다⁠. 쪽빛 김이 올라와 맺혔던 물방울이 밤새 얼어 창틀에 푸른 서리꽃이 피어 있었다⁠. 원작의 날짜 그대로였다⁠.

물 긷는 소리가 안 났다⁠. 베티는 매일 아침 우리보다 먼저 일어나 계단 밑 우물에서 물을 길어 왔다⁠. 침대를 보니 베티가 떨어지는 쪽 가장자리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이불을 걷자 베티의 몸에서 열기가 훅 끼쳐 올라왔다⁠. 이마에 손을 대니 손바닥이 데일 것 같았다⁠. 베티의 입술이 바싹 말라 갈라졌고⁠, 이 사이로 잠꼬대 같은 잔소리가 새어 나왔다⁠. 도련님 장화 끈⁠, 아가씨 치마 단⁠, 장작 세 개⁠.

루벤이 벽 쪽에서 몸을 일으켰다⁠. 베티의 얼굴을 보고⁠, 나를 보고⁠, 자기 오른손을 봤다⁠. 비틀린 가운데 손가락이 있는 손⁠. 손바닥의 덴 자국들⁠.

루벤이 침대에서 내려와 베티 옆에 무릎을 꿇었다⁠. 손을 내밀었다⁠. 베티의 손목에서 한 뼘 떨어진 곳에서⁠.

“⁠누나⁠.⁠” 루벤이 말했다⁠. “⁠나 이거 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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