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362자)

열흘째

빙의한 엑스트라가 최종 보스의 누나였다 · 하진명

가슴 한가운데에 꽃이 피어 있었다⁠. 검은 꽃이었다⁠. 잠옷 앞섶을 열자 명치 바로 위에 주먹만 한 멍이 꽃잎처럼 갈라져 번져 있었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이 꽃잎 끝이 바늘처럼 섰다⁠. 손가락 끝 마디도 열 개 다 검푸르게 죽어 있었다⁠. 늙은 염색공의 손가락 마디가 없던 바로 이 자리들이었다⁠.

창밖에서 물소리가 났다⁠. 처마 끝으로 떨어지는 빗소리였다⁠.

“⁠일어나셨어요⁠?⁠”

베티가 침대 옆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앞치마를 두른 채 거기서 잔 모양이었다⁠. 내 이마를 짚었고⁠, 이번에는 존댓말 얘기를 하지 않았다⁠.

“⁠이틀 주무셨어요⁠. 오늘이 열흘째예요⁠.⁠” 베티가 대야의 물수건을 짜며 말했다⁠. 말이 평소보다 느렸다⁠. “⁠도련님이 아가씨를 업고 왔어요⁠. 흰 탑에서 여기까지⁠. 다리 건너서⁠, 언덕 올라서⁠. 대문 앞에서 부관님이 대신 업겠다는데 안 놔주셨대요⁠.⁠”

“⁠루벤은⁠?⁠”

“⁠아래층에요⁠. 이틀 동안 그 의자에서 안 일어났어요⁠. 손목 검사도 두 번 다 그 의자에서 받았어요⁠.⁠” 베티가 물수건을 내 손가락에 감았다⁠. 차가운 물이 죽은 마디에 스며들자 손끝이 하나씩 저렸다⁠. “⁠성기사님이 소매 걷으라니까 아무 말 없이 걷더래요⁠. 이틀 다요⁠.⁠”

“⁠그 할머니는⁠.⁠”

베티의 손이 잠깐 멈췄다⁠.

“⁠그날 밤에 가셨대요⁠. 교수님이 그러시는데⁠, 웃으면서 가셨대요⁠.⁠”

나는 천장의 물자국을 봤다⁠. 가슴의 검은 꽃이 숨을 따라 오므라들었다 벌어졌다⁠. 웃으면서⁠. 이 웃음은 내가 산 것이었다⁠. 이틀 동안 내가 앓은 값으로⁠. 이 값이 아깝지 않았다⁠. 아깝지 않은 것이 무서웠다⁠. 이 몸은 남의 아픔을 받는 데 너무 익숙하게 맞춰져 있었다⁠.

열흘째⁠. 원작에서 이 저택이 넘어가는 날이었다⁠. 그리고 원작처럼 비가 오고 있었다⁠.

*

도린은 정오에 왔다⁠. 대부 상회의 콧수염이 우산을 받쳐 들고 뒤따랐다⁠. 응접실 난로에는 장작이 하나도 타지 않았다⁠. 마지막 세 개를 내가 앓는 이틀 동안 다 땠다고 베티가 말했다⁠.

루벤은 응접실 창가에 서 있었다⁠. 나를 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루벤의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은 여전히 비틀린 채 붙어 있었다⁠.

“⁠먼저 위로를 드립니다⁠.⁠” 도린이 모자를 벗으며 말했다⁠. “⁠그리고 감사를⁠. 그분은 마흔 해 만에 처음으로 손이 안 아프다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숨 쉬기 반 시간 전에⁠.⁠”

“⁠남은 절반⁠, 오늘이죠⁠.⁠”

“⁠오늘입니다⁠.⁠” 도린은 의자에 앉지 않았다⁠. 텅 빈 난로 옆에 서서 장갑 낀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쌌다⁠. “⁠누님께 그 돈이 없다는 건 압니다⁠. 학관 일정 담당은 주에 은화 넷이지요⁠. 그래서 다시 말씀드립니다⁠. 루벤 군이 연구실로 오면 남은 빚은 오늘로 없습니다⁠.⁠”

“⁠제가 갈게요⁠.⁠”

루벤이었다⁠. 창가에서 돌아선 루벤의 얼굴은 비 오는 창보다 어두웠다⁠.

“⁠루벤⁠.⁠”

“⁠누나는 가만있어⁠.⁠” 루벤이 내 앞으로 걸어왔다⁠. 걸음이 거칠었다⁠. “⁠누나가 그 할머니 손 잡고 쓰러지는 거 봤어⁠. 바닥에 머리 박는 소리 났어⁠. 숨을 안 쉬었어⁠, 한참⁠. 교수님이 누나 가슴을 눌러서 다시 쉬게 했어⁠.⁠” 루벤의 목소리가 떨렸다⁠. 루벤은 이 떨림을 이를 악물어 눌렀다⁠. “⁠나는 술식을 알아⁠. 술식으로 받으면 안 아파⁠. 뜨겁기만 해⁠. 누나처럼 맨몸으로 받다가 쓰러지는 짓 안 해도 돼⁠. 내가 제대로 배우면⁠, 누나가 다시는 그런 거 안 해도 돼⁠.⁠”

이 말을 듣는데 가슴의 검은 꽃이 바늘을 세웠다⁠. 원작의 루벤은 집이 없어서 연구실로 갔다⁠. 이번의 루벤은 나를 지키려고 가겠다고 했다⁠. 내가 이 할머니 손을 잡은 이 순간이 동생을 지하 세 번째 층으로 한 칸 더 밀었다⁠.

도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집 가져가세요⁠.⁠”

내 입에서 나온 말에 응접실이 조용해졌다⁠. 콧수염이 우산을 떨어뜨렸다⁠. 베티가 문간에서 숨을 들이켰다⁠.

“⁠남은 절반⁠, 이 저택으로 갚겠습니다⁠. 언덕 위 저택이니까 값은 넘칠 거예요⁠. 넘치는 건 안 받을게요⁠. 대신 루벤은 안 갑니다⁠.⁠”

“⁠누나⁠!⁠”

“⁠교수님⁠.⁠” 나는 루벤을 보지 않고 도린만 봤다⁠. “⁠교수님이 원하시는 게 저택이 아니라는 건 알아요⁠. 근데 지금 빚 대신 받을 수 있는 건 저택뿐이에요⁠. 거래하실 거예요⁠, 안 하실 거예요⁠?⁠”

도린이 나를 오래 봤다⁠. 이 눈은 화가 나 있지 않았다⁠. 오히려 무언가를 즐기고 있었다⁠. 내기판 맞은편에 생각보다 나은 상대가 앉았을 때의 눈이었다⁠.

“⁠거래하지요⁠.⁠” 도린이 모자를 썼다⁠. “⁠다만 루벤 군⁠, 연구실 문은 언제든 열려 있습니다⁠. 열쇠는 아직 가지고 계시지요⁠?⁠”

루벤이 망토 왼쪽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꺼내지 않았다⁠. 넣은 채로 주먹을 쥐었다⁠.

대문 열쇠는 베티가 넘겼다⁠. 손바닥만 한 무쇠 열쇠였고⁠, 스무 해 동안 베티의 앞치마 허리끈에 매달려 있던 것이었다⁠. 베티는 끈을 풀다가 매듭이 안 풀려서 이로 물어뜯었다⁠. 그리고 열쇠를 도린의 장갑 낀 손바닥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부엌 화덕 왼쪽 벽돌은 밟으면 들썩여요⁠. 굴뚝은 봄마다 쑤셔야 하고⁠, 지하실 벽은 아가씨가 깨 놨으니까 교수님이 막으세요⁠. 이 집은 겨울에 북쪽 방이 제일 추워요⁠. 거기서 주무시지 마세요⁠.⁠”

도린이 열쇠를 쥔 채 이 말을 끝까지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고맙다고 했다⁠. 베티는 대답하지 않고 부엌으로 들어가 냄비들을 쾅쾅 소리 나게 상자에 담았다⁠.

*

원작 막간 두 번째 편의 마지막 장면은 이렇다⁠. 비 오는 날⁠, 루벤이 책 상자 하나를 안고 언덕 위 저택 대문을 혼자 나선다⁠. 누나는 이 자리에 없다⁠. 막간은 누나가 어디 있었는지 말하지 않는다⁠. 루벤은 비에 젖은 책 상자를 안고 흰 탑 지하 세 번째 층으로 내려간다⁠.

이번에는 대문 앞에 짐수레가 멈췄다⁠. 아래 도시 짐꾼 둘이 끄는 수레였고⁠, 베티가 이 짐꾼들과 값을 다퉜다⁠.

“⁠언덕 내려가는 데 은화 하나요⁠? 내려가는 길은 수레가 저절로 굴러가요⁠. 굴러가는 걸 붙잡기만 하면 되잖아요⁠.⁠”

“⁠붙잡는 게 더 힘듭니다⁠, 아주머니⁠.⁠”

“⁠그럼 반만 붙잡으세요⁠. 동화 다섯⁠.⁠”

“⁠일곱⁠.⁠”

“⁠여섯하고 우리 아가씨가 끓인 국 한 그릇⁠.⁠” 베티가 나를 가리켰다⁠. “⁠우리 아가씨 국은 아무도 안 먹어 봤어요⁠. 오늘이 처음이에요⁠.⁠”

짐꾼들은 이게 손해인지 이득인지 몰라 서로를 봤고⁠, 결국 여섯에 국 한 그릇으로 합의했다⁠. 나는 국을 끓여 본 적이 없었다⁠. 이 몸도 없었을 것이다⁠.

루벤이 계단을 내려왔다⁠. 책 상자 하나를 안고 있었다⁠. 아버지가 쓰던 술식서와 입학 선물로 받은 사전이 든 나무 상자였다⁠. 원작 그대로였다⁠. 상자 모서리가 닳아 있는 것까지⁠.

나는 상자 반대쪽을 잡았다⁠.

“⁠혼자 들 수 있어⁠.⁠”

“⁠알아⁠.⁠”

루벤은 상자를 놓지 않았고 나도 놓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상자 양쪽을 들고 대문을 나섰다⁠. 빗물이 상자 뚜껑 위로 떨어져 나뭇결을 따라 흘렀다⁠. 루벤의 걸음이 빨라서 나는 반걸음씩 끌려갔고⁠, 무릎이 시큰거릴 때마다 상자가 기울었다⁠. 이때마다 루벤이 걸음을 늦췄다⁠. 아무 말 없이⁠. 막간에는 이 장면이 없었다⁠. 상자는 원작보다 두 배 가벼웠을 텐데⁠, 내 팔은 원작의 루벤보다 두 배 무거웠다⁠.

*

강을 건너자 냄새가 바뀌었다⁠. 위 도시의 젖은 돌 냄새가 아래 도시에서는 쇠 녹인 물과 쓴 풀 냄새가 되었다⁠. 세 번째 골목 염색 공방은 문짝이 없었고⁠, 이 안에서 커다란 쪽빛 통 여섯 개가 김을 올렸다⁠. 통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의 팔뚝이 팔꿈치까지 푸르렀다⁠. 셋방은 이 공방 이층이었다⁠. 바깥 나무 계단은 열네 칸이었고⁠, 일곱 번째 칸이 썩어 있었다⁠.

“⁠일곱째 칸은 밟지 마시오⁠.⁠” 공방 여주인이 말했다⁠. 쉰 넘은 여자였는데 두 손이 손목까지 쪽빛이었다⁠. “⁠밟으면 공방 통으로 떨어지오⁠. 작년에 하나 떨어져서 사흘 동안 파랬소⁠.⁠”

방은 하나였다⁠. 침대 둘⁠, 무쇠 난로 하나⁠, 창 하나⁠. 창을 열면 아래에서 쪽빛 김이 올라와 창틀에 푸른 물방울이 맺혔다⁠. 베티가 방 한가운데 서서 사방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앞치마를 풀었다가 다시 맸다⁠.

“⁠침대 둘에 사람 셋이요⁠.⁠”

“⁠베티가 하나 쓰고⁠, 루벤이 하나 쓰고⁠.⁠”

“⁠아가씨는요⁠?⁠”

“⁠나는 바닥이 편해⁠.⁠”

“⁠아가씨가 바닥에서 주무시면 베티가 잠을 못 자요⁠.⁠” 베티가 침대 하나를 벽에서 끌어냈다⁠. 루벤이 말없이 반대편을 잡았다⁠. 둘이 침대 둘을 붙여 놓았다⁠. 넓은 침대 하나가 되었다⁠. 베티가 손을 털었다⁠. “⁠셋이 자요⁠. 도련님은 벽 쪽⁠, 아가씨는 가운데⁠, 베티는 떨어지는 쪽⁠. 베티는 떨어지는 데 익숙해요⁠.⁠”

루벤이 귀까지 빨개져서 뭐라고 하려다 그만뒀다⁠. 스무 살에 누나와 하녀 사이에 끼어 자게 된 최종 보스가 거기 있었다⁠.

약속한 국은 내가 끓였다⁠. 무쇠 난로에 냄비를 올리고 베티가 얻어 온 무와 마른 생선 대가리를 넣었다⁠. 회사 다닐 때 나는 편의점 국을 데우는 것밖에 몰랐다⁠. 손가락 끝이 다 죽어 있어서 칼질도 느렸다⁠. 한 시간 뒤 짐꾼 둘이 한 숟갈씩 떠먹고 동시에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아가씨⁠, 이건 국이오⁠, 물이오⁠?⁠”

“⁠국이에요⁠.⁠”

“⁠물에 생선이 빠진 거 같은데⁠.⁠”

루벤이 다가와 한 숟갈 떠먹더니 말없이 소금 단지를 집었다⁠. 손가락 세 개로 소금을 집어 넣고⁠, 저었고⁠, 다시 맛봤고⁠, 한 번 더 넣었다⁠. 그리고 국자를 내게 내밀었다⁠. 다시 떠먹으니 국 맛이 났다⁠. 짐꾼들이 두 그릇씩 비웠다⁠. 루벤은 이걸 보며 웃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는데⁠, 결국 코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열흘 만에 처음 들은 동생의 웃음소리였다⁠.

*

짐꾼들이 빈 수레를 끌고 골목을 나간 뒤⁠, 나는 계단 밑에 내려놓은 상자를 가지러 내려갔다⁠. 골목 끝에 흰 외투가 서 있었다⁠. 비를 맞고 있었다⁠. 오웬은 우산을 쓰지 않았고⁠, 젖은 검은 머리가 이마에 붙어 있었다⁠.

“⁠여기서 사실 겁니까⁠?⁠”

“⁠염색 공방 위 셋방이요⁠. 손목 검사는 내일부터 여기서 받을게요⁠. 아침 일곱 시⁠. 일곱째 계단은 밟지 마시고요⁠.⁠”

오웬은 이 말을 받지 않았다⁠. 내가 아니라 계단 밑의 책 상자를 봤다⁠. 이 상자를 보는 얼굴이 이상했다⁠. 처음 보는 물건을 보는 얼굴이 아니었다⁠.

“⁠이 집은 열흘째에 넘어간다⁠.⁠” 오웬이 낮게 말했다⁠. 존대가 빠져 있었다⁠. “⁠루벤은 비 오는 날 책 상자 하나를 들고 혼자 나온다⁠. 누나는 그 자리에 없다⁠.⁠”

빗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나는 상자 모서리를 잡았다⁠. 그건 막간 두 번째 편의 문장이었다⁠. 거의 그대로⁠.

“⁠지금 그 말⁠.⁠” 내 목소리가 빗소리에 묻힐 뻔했다⁠. “⁠어디서 들었어요⁠? 계단도⁠, 그런 일은 없었다도⁠, 이 상자도⁠. 교단 금서에 남의 집 이삿날까지 적혀 있진 않잖아요⁠.⁠”

오웬이 나를 봤다⁠. 비가 오웬의 목깃 위 화상 자국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 반질반질한 살이 빗물에 젖어 더 반질거렸다⁠.

“⁠먼저 말해⁠. 넌 누구지⁠? 첫 삶에서 아쉬포드 레나는 회신이란 말을 쓰지 않았다⁠.⁠”

“⁠첫 삶이요⁠?⁠”

이층 창이 열렸다⁠. 쪽빛 김 사이로 루벤이 고개를 내밀고 우리 둘을 내려다봤다⁠. 베티가 뒤에서 아가씨 비 맞으신다고 소리쳤다⁠. 오웬은 창을 한 번 올려다보고⁠, 다시 나를 봤다⁠. 오웬의 입이 열렸다⁠.

“⁠나는 이 도시가 타는 걸 봤다⁠.⁠” 오웬이 말했다⁠. “⁠흰 탑이 무너지고 강이 끓었다⁠. 네 동생이 태웠다⁠.⁠”

5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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