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332자)

아침 식탁의 성기사

빙의한 엑스트라가 최종 보스의 누나였다 · 하진명

오웬은 내 질문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 부엌 문틀을 짚은 손을 내려 장갑을 고쳐 꼈고⁠, 그동안 루벤의 비틀린 손가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교단 금서에 있는 말입니다⁠. 흑마법의 세 계단⁠.⁠”

“⁠교단 금서를 성기사가 읽어요⁠?⁠”

“⁠성기사니까 읽습니다⁠. 베야 할 것을 알아야 하니까⁠.⁠” 오웬이 문틀에서 손을 뗐다⁠. “⁠첫 계단에는 줄이 생기지 않습니다⁠. 약속은 그대로입니다⁠. 내일 아침 일곱 시에 뵙지요⁠.⁠”

오웬은 갔다⁠. 루벤이 빵을 쥔 채 나를 봤다⁠.

“⁠계단이 뭔데⁠?⁠”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있는 말이 하나도 없었다⁠. 교단 금서라는 말은 그럴듯했다⁠. 『⁠재의 대륙⁠』에 교단 금서가 나오기는 한다⁠. 그런데 이 금서에 세 계단이 적혀 있었다는 문장은 내가 읽은 어디에도 없었다⁠. 없는 문장을 반박할 방법도 없었다⁠.

*

닷새째 아침부터 손목 검사는 일과가 되었다⁠. 일곱 시에 대문이 세 번 울리고⁠, 오웬이 칼을 풀어 식탁 다리에 기대 세우고⁠, 루벤이 이를 갈며 소매를 걷고⁠, 베티가 죽을 퍼 준다⁠. 이레째에 귀리가 떨어졌다⁠. 여드레째 아침 오웬은 교단 숙소에서 검은 호밀빵 한 덩이를 들고 왔다⁠.

베티가 빵을 받아 들고 손가락으로 눌러 봤다⁠.

“⁠이틀 묵었네요⁠.⁠”

“⁠교단 빵은 원래 그렇습니다⁠.⁠”

“⁠교단은 빵도 값을 받고 팔면서 묵은 걸 줘요⁠?⁠” 베티가 빵을 썰었다⁠. 썰면서 계속 말했다⁠. “⁠내일은 이틀 묵은 거 말고 그날 구운 거 가져오세요⁠. 그리고 버터는 못 드려요⁠. 버터는 도련님 거예요⁠. 부관님은 버터 쳐다보지 마세요⁠.⁠”

창밖에서 벨로가 버터를 쳐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나는 아흐레째 아침에 시험을 하나 했다⁠. 오웬이 루벤의 왼쪽 손목을 들여다보는 동안⁠, 버터 바른 빵을 베어 물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다음 주에 성도에서 전서구가 온다면서요⁠. 성녀님이 에이르 성당으로 옮겨 오신다고⁠.⁠”

지어낸 말이었다⁠. 원작 1권에 그런 장면은 없다⁠. 오웬은 루벤의 손목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빵 씹던 입이 멈췄다⁠. 오웬도 멈췄다⁠. 오웬의 고개가 아주 천천히 올라왔다⁠. 오웬은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없었다고요⁠?⁠” 내가 말했다⁠. “⁠아직 다음 주가 안 왔는데요⁠.⁠”

루벤이 소매를 내리며 우리 둘을 번갈아 봤다⁠. 베티는 빵칼을 든 채 굳었다⁠. 오웬은 칼을 집어 허리에 차고 일어섰다⁠.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었다⁠.

“⁠손목은 깨끗합니다⁠. 내일 뵙지요⁠.⁠”

오웬은 빵 값도⁠, 대답도 남기지 않고 갔다⁠. 나는 오웬이 앉았던 의자를 봤다⁠. 오웬은 일어서기 전에 접시를 깨끗이 비워 놓았다⁠. 버터 한 점 남기지 않았다⁠.

*

손목 검사가 아침의 일이라면 나머지 하루는 비어 있었다⁠. 루벤은 아침을 먹고 학관으로 가서 해가 지면 돌아왔다⁠. 이 사이에 어디를 가는지 나는 몰랐다⁠. 모르면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일정을 쥐는 자리에 앉기로 했다⁠.

학관 접수대의 서기 노인은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대진표 제비를 다시 뽑아 달라던 아가씨⁠. 깃펜을 귀에서 빼며 한숨부터 쉬었다⁠.

“⁠또 무슨 제비요⁠?⁠”

“⁠일하러 왔어요⁠. 일정 담당 구하신다고 회랑에 붙어 있던데요⁠.⁠”

노인이 뒤를 돌아봤다⁠. 노인의 등 뒤 벽에 강의실 서른두 개의 쓰임새가 분필로 적혀 있었다⁠. 지웠다가 다시 쓴 자국이 겹겹이라 벽이 회색이었다⁠. 이 앞에서 교수 둘이 서로 같은 강의실을 오늘 오후에 잡았다며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아가씨가 귀족이라는 건 알지요⁠? 귀족 아가씨가 하는 일이 아니오⁠.⁠”

“⁠몰락한 귀족이에요⁠. 그리고 이건 제가 제일 잘하는 일이에요⁠.⁠”

나는 언성 높이는 교수 둘에게 갔다⁠. 한 사람은 실습이 필요해서 큰 방을 원했고⁠, 한 사람은 이 방 창이 남향이라 원했다⁠. 남향을 원하는 교수는 오전 수업을 오후로 미룰 수 있었고⁠, 실습 교수는 다음 주 같은 시간에 시약이 들어온다고 했다⁠. 둘에게 각각 하나씩 양보를 받아 내고⁠, 대신 비어 있던 북쪽 방 하나를 다음 주 실습 예비실로 붙여 줬다⁠. 반 시간 만에 두 교수는 서로 고맙다고 하며 회랑을 나갔다⁠.

서기 노인이 깃펜을 내려놓았다⁠.

“⁠주에 은화 셋⁠.⁠”

“⁠다섯요⁠.⁠”

“⁠넷⁠.⁠”

“⁠넷하고⁠, 신입생 강의 일정 다 보여 주시는 걸로요⁠.⁠” 나는 손을 내밀었다⁠. “⁠계약 확정입니다⁠.⁠”

노인은 내 손을 오래 봤다⁠. 몰락한 귀족 아가씨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것이 처음인 듯했다⁠. 결국 이 손을 잡았다⁠. 손바닥이 마른 종이처럼 버석거렸다⁠.

*

루벤의 일정은 이틀 만에 손에 들어왔다⁠. 오전 기초 술식론⁠, 점심⁠, 오후 마력 순환 실습⁠. 실습 출석 담당 조교에게 물으니 아쉬포드 루벤은 입학 사흘째부터 오후 실습에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어디로 가는지는 엉뚱한 입에서 나왔다⁠.

“⁠몰락한 집 딸이 서기 노릇을 하네⁠.⁠”

펠릭스였다⁠. 오른팔을 삼각건에 매단 채 접수대 앞에 섰고⁠, 뒤에 반지 낀 친구 둘이 따라와 있었다⁠. 대련장 벽에 처박힌 어깨가 아직 덜 붙은 모양이었다⁠. 펠릭스는 접수대 위에 강의실 변경 신청서를 던졌다⁠. 남향 큰 방으로 옮겨 달라는 신청이었다⁠.

“⁠접수했습니다⁠.⁠” 나는 신청서를 집어 들고 읽었다⁠. “⁠공작가 펠릭스 님⁠, 마력 순환 실습⁠. 남향 큰 방은 이번 주 다 찼고요⁠, 북쪽 끝 방이 비어 있네요⁠. 창이 없어서 집중이 잘된대요⁠.⁠”

“⁠북쪽 끝은 창고잖아⁠.⁠”

“⁠창고였죠⁠. 지금은 강의실이에요⁠. 제가 방금 바꿨어요⁠.⁠” 나는 분필을 들어 벽에 적힌 펠릭스의 실습을 북쪽 끝 방으로 옮겼다⁠. “⁠다른 문의 있으세요⁠?⁠”

펠릭스의 친구 하나가 웃음을 참다 기침을 했다⁠. 펠릭스의 귀가 대련장에서처럼 빨개졌다⁠. 펠릭스는 접수대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네 동생이나 챙겨⁠. 점심만 먹으면 흰 탑 동쪽 계단으로 기어 내려가더라⁠. 도린 교수 개가 됐다고 신입생들이 다 알아⁠.⁠”

펠릭스는 친구들을 끌고 회랑을 나갔다⁠. 서기 노인이 깃펜을 귀에 꽂으며 중얼거렸다⁠. 공작가 막내를 창고에 넣은 서기는 마탑 백 년에 처음일 거라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흰 탑 동쪽 계단이라는 말이 귀에서 떠나지 않았다⁠.

동쪽 계단은 지하 세 번째 층까지 이어졌다⁠. 나는 일정 담당이 들고 다니는 강의 변경 쪽지 한 묶음을 품에 안고 내려갔다⁠. 지하로 내려갈수록 공기가 축축해졌고⁠, 두 번째 층을 지나자 냄새가 바뀌었다⁠. 쓴 풀과 쇠를 녹인 물의 냄새⁠. 아래 도시 염색 공방에서 올라오던 이 냄새가 흰 탑 지하에 고여 있었다⁠. 이 밑에 다른 냄새가 깔려 있었다⁠. 오래 씻지 못한 몸과 고름의 냄새⁠.

세 번째 층 복도 끝에 문이 열려 있었다⁠. 안은 길쭉한 방이었다⁠. 천장에 매달린 마정석 등 여섯 개가 푸른빛을 흘렸고⁠, 이 밑에 간이침대가 두 줄로 스무 개 놓여 있었다⁠. 침대마다 사람이 누워 있었다⁠. 손가락이 쪽빛으로 물들어 마디가 문드러진 염색공들⁠, 허리에 판자를 대 묶은 짐꾼들⁠, 열에 들뜬 얼굴로 천장을 보는 여자들⁠. 누구도 신음하지 않았다⁠. 스무 명이 누워 있는데 방 안이 조용했다⁠.

도린은 세 번째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 오른손 장갑을 벗은 채 짐꾼의 손목을 쥐고 있었다⁠. 짐꾼이 길게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도린이 손을 떼자 짐꾼의 손목에 검은 손가락 자국 다섯 개가 남아 있었다⁠. 도린은 숨을 몰아쉬며 장갑을 다시 꼈다⁠. 왼손 장갑은 한 번도 벗지 않았다⁠.

루벤은 이 옆에 서 있었다⁠. 손에 아무것도 쥐지 않고⁠, 도린의 손이 하는 일만 보고 있었다⁠. 아주 열심히⁠. 기초 술식론 강의실에서는 한 번도 그런 얼굴을 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

“⁠일정 담당이 지하 셋째 층까지 쪽지를 돌리나요⁠?⁠” 도린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오후 실습 결석 통보 드리러 왔어요⁠. 아쉬포드 루벤 군⁠, 엿새째요⁠.⁠”

루벤이 홱 돌아봤다⁠. 이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가 금세 붉어졌다⁠.

“⁠누나가 왜 여기 있어⁠?⁠”

“⁠학관에서 일해⁠. 오늘부터⁠.⁠” 나는 쪽지 묶음을 품에 안은 채 방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사이를 걸으며 누운 사람들의 손목을 봤다⁠. 검은 손자국이 손목마다 있었다⁠. 어떤 것은 진했고 어떤 것은 거의 지워졌다⁠. “⁠교수님⁠, 이 사람들 동의는 받으셨어요⁠?⁠”

“⁠동의라⁠.⁠” 도린이 일어섰다⁠. 장갑 낀 손을 털며 내 앞으로 왔다⁠. “⁠그 말을 아시는 분은 아래 도시에 안 사십니다⁠, 누님⁠. 여기 누운 사람들은 모두 교단 치유단 천막 앞에서 돌아선 사람들입니다⁠. 석 달 품삯이 없어서⁠. 저는 그 사람들을 데려와 침대에 눕히고⁠, 아픈 것을 걷어 줍니다⁠. 저 짐꾼은 허리뼈가 으스러졌는데 오늘 밤엔 잠을 잘 겁니다⁠.⁠”

“⁠그 아픈 걸 걷어서 어디다 쓰시는데요⁠?⁠”

도린이 웃었다⁠. 대답 대신 웃었다⁠.

“⁠교수님이 이 사람들 안 아프게 해 주잖아⁠.⁠” 루벤이 말했다⁠.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누나는 교단 치유 값이 얼만지 알아⁠? 아버지 지팡이 판 돈이 딱 그 값이었어⁠.⁠”

“⁠그럼 너는 여기서 뭘 하는데⁠?⁠”

“⁠아직 아무것도 안 합니다⁠.⁠” 도린이 대신 답했다⁠. “⁠루벤 군은 보기만 합니다⁠. 보는 것도 공부지요⁠.⁠” 도린이 몸을 돌려 방 맨 끝 침대를 가리켰다⁠. 마정석 등 빛이 거기까지는 덜 닿았다⁠. “⁠그리고 누님⁠, 마침 잘 오셨습니다⁠.⁠”

맨 끝 침대에 늙은 여자가 누워 있었다⁠. 두 손이 손목까지 쪽빛이었고⁠, 손가락 끝 마디가 몇 개 없었다⁠. 숨이 짧고 거칠었다⁠. 이 사람은 이 방에서 유일하게 신음하고 있었다⁠. 이를 악물고 소리를 삼키는데 삼킨 소리가 목에서 끓었다⁠.

“⁠염색 공방에서 마흔 해를 일한 분입니다⁠. 오늘 밤을 못 넘깁니다⁠.⁠” 도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저는 이분 통증을 더 걷지 못합니다⁠. 제 몸이 버티지 못해요⁠. 죽어 가는 사람의 통증은 보통 몸으로는 받지 못합니다⁠.⁠”

나는 도린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았다⁠. 세 번째 계단⁠. 죽어 가는 사람의 마지막 통증⁠.

“⁠누님은 대련장에서 술식의 반동을 맨손으로 받고도 서 계셨지요⁠. 술식 없이⁠, 아쉬포드의 피만으로⁠.⁠” 도린이 한 걸음 물러섰다⁠. “⁠술식 없이 받으면 손목에 줄도 생기지 않습니다⁠. 받은 것을 마력으로 바꾸지 않으니까요⁠. 그냥 아프기만 하지요⁠. 이분은 편하게 가실 테고요⁠.⁠”

“⁠제가 안 하면요⁠?⁠”

도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루벤을 봤다⁠. 루벤은 맨 끝 침대의 늙은 여자를 보고 있었다⁠. 이 손이⁠, 아직 비틀린 가운데 손가락을 가진 오른손이⁠,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폈다⁠.

“⁠루벤 군은 술식을 압니다⁠.⁠” 도린이 말했다⁠. “⁠술식으로 받으면 아픈 대신 뜨겁기만 하지요⁠.⁠”

늙은 여자가 또 소리를 삼켰다⁠. 끓는 소리가 방 안을 한 바퀴 돌았다⁠. 루벤이 한 발을 내디뎠다⁠.

나는 쪽지 묶음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종이가 흩어졌다⁠. 루벤보다 먼저 맨 끝 침대에 닿아 늙은 여자의 쪽빛 손을 맨손으로 잡았다⁠. 이 손은 얼음처럼 찼고⁠, 껍질처럼 말라 있었다⁠. 나는 숨을 이 사람의 숨에 맞췄다⁠.

강물이 쏟아졌다⁠. 마흔 해 동안 쪽빛 물에 담근 손가락 마디마디가 한꺼번에 녹아내렸고⁠, 이 아래 뼈가 하나씩 썩어 들어갔다⁠. 가슴 한가운데에서 무언가가 터졌다⁠. 무릎이 꺾였다⁠. 바닥이 나를 향해 올라왔는데⁠, 나는 늙은 여자의 손을 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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