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491자)

손목 검사

빙의한 엑스트라가 최종 보스의 누나였다 · 하진명

루벤의 왼손은 내 손등 위 한 뼘에서 멈춰 있었다⁠. 이 손이 내려오면 내 멍든 손등을 누를 것이고⁠, 나는 이걸 견디고 열쇠를 지킬 수 있을지 몰랐다⁠. 그래서 나는 루벤이 아니라 도린을 봤다⁠. 회의실에서 배운 것 하나는 결정권자를 보고 말하라는 것이었다⁠.

“⁠열흘 주세요⁠.⁠”

도린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사흘 안에 빚 절반을 드릴게요⁠. 절반이 들어오면 나머지 절반은 열흘째까지 기다려 주시고요⁠. 그때까지 이 열쇠는 교수님 주머니로 돌아갑니다⁠.⁠”

“⁠사흘 안에 절반을요⁠?⁠” 도린이 맹물 같은 찻잔을 한 번 내려다봤다⁠. 비웃는 얼굴이 아니었다⁠. 정말 궁금한 얼굴이었다⁠. “⁠누님⁠, 실례지만 이 댁 찻잎이 한 장이라는 걸 방금 들었습니다⁠.⁠”

“⁠찻잎은 한 장인데 벽은 많아요⁠.⁠”

무슨 말인지 아무도 몰랐다⁠. 나도 반쯤만 알았다⁠. 도린은 잠깐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사흘 안에 절반⁠, 열흘째에 나머지⁠. 받겠습니다⁠.⁠” 도린이 일어서며 모자를 집었다⁠. “⁠다만 열쇠는 두고 가겠습니다⁠. 이건 빚과 상관없이 루벤 군에게 드린 겁니다⁠. 쓰시든 안 쓰시든⁠.⁠”

내가 손을 들어 도린을 부르기도 전에 도린은 응접실을 나갔다⁠. 탁자 위에 내 손이 덮은 열쇠가 남았다⁠. 내가 손을 떼자 루벤이 이 열쇠를 집어 망토 주머니에 넣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단을 올라갔다⁠. 나는 열쇠를 넣은 주머니가 망토 왼쪽이라는 것만 기억해 두었다⁠.

*

원작 2권의 첫 막간은 이렇게 시작한다⁠. 누나가 죽고 석 달 뒤⁠, 루벤이 도린의 것이 된 빈 저택에 몰래 들어간다⁠. 지하실 포도주 선반 뒤 벽돌 세 번째 줄을 칼로 긁어내고⁠, 아버지가 숨겨 둔 마정석 상자를 꺼낸다⁠. 그리고 웃는다⁠. 아버지가 이걸 숨겨 둔 줄 알았다면 누나가 지팡이를 팔지 않아도 됐을 거라고⁠.

이 대목을 읽은 것은 내가 이 몸으로 깨어나기 사흘 전이었다⁠. 나는 출근 버스에서 이 장면에 침을 삼켰다⁠. 악역의 서사가 아프다고 댓글도 달았다⁠. 지금 이 벽 앞에 서니 이 대목이 슬픈 게 아니라 날짜 틀린 업무 메일처럼 보였다⁠. 석 달 뒤에 찾을 것을 지금 찾으면 된다⁠.

“⁠아가씨⁠, 벽에 대고 회의하세요⁠?⁠”

베티가 등잔을 들고 지하실 계단에 서 있었다⁠. 나는 부엌에서 들고 내려온 고기 다지는 망치를 들어 보였다⁠.

“⁠벽돌 셋째 줄⁠.⁠”

“⁠그거 들어내면 저택 무너져요⁠.⁠”

“⁠포도주 선반 뒤만⁠.⁠”

“⁠포도주는 작년에 다 팔았어요⁠. 선반은 장작으로 쓰려고 남겨 둔 거예요⁠. 장작이 세 개라서⁠.⁠” 베티가 등잔을 높이 들었다⁠. “⁠아가씨 진짜로 머리 부딪치셨죠⁠? 어제부터 이상해요⁠. 존댓말 하시고⁠, 성기사 손 치시고⁠, 교수님한테 열흘 달라고 하시고⁠.⁠”

나는 선반을 밀었다⁠. 오른손에 힘을 주자 손등 멍 밑에서 뼈마디가 하나씩 비명을 질렀다⁠. 왼손으로 바꿔 밀었다⁠. 선반이 끽 소리를 내며 비켜났고⁠, 뒤쪽 벽돌 세 번째 줄에서 줄눈 하나가 다른 줄눈보다 하얬다⁠. 회반죽을 나중에 바른 자리였다⁠.

망치로 쳤다⁠. 세 번째에 벽돌 하나가 안으로 쑥 들어갔다⁠. 베티가 등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벽 속에 기름 먹인 가죽 보따리가 있었다⁠. 끈을 풀자 낡은 사슴 가죽 장갑 한 켤레가 나왔고⁠, 장갑 손가락마다 손톱만 한 마정석이 하나씩 들어 있었다⁠. 일곱 개였다⁠. 등잔 불빛에 푸른 속이 출렁였다⁠. 장갑 안쪽에서 오래된 담배 냄새가 났다⁠.

베티가 장갑을 받아 들고 한참 냄새를 맡았다⁠. 아무 말도 안 했다⁠. 장갑의 엄지 쪽 실밥이 터진 자리를 손가락으로 쓸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앞치마로 눈가를 한 번 훔치고 말했다⁠.

“⁠나리가 이걸 왜 벽에 넣어 두셨대요⁠. 이 장갑 찾느라 내가 겨울 내내 옷장을 세 번 뒤집었는데⁠.⁠”

*

마정석은 흰 탑 매입소에서만 값을 제대로 쳐 줬다⁠. 매입소로 가려면 강 위로 놓인 마탑 정문 다리를 건너야 했다⁠. 돌다리 난간마다 학생들이 걸어 둔 소원 쪽지가 바람에 떨었고⁠, 다리 밑으로 강물이 아래 도시 염색 공방에서 흘러 내려온 쪽빛을 끌고 갔다⁠.

다리 한가운데에 흰 외투가 서 있었다⁠. 오웬은 난간에 등을 기대고 내가 오는 쪽을 보고 있었다⁠. 처음부터 거기서 나를 기다린 사람처럼⁠.

“⁠동생이 열쇠를 받았더군요⁠.⁠”

“⁠받기만 했어요⁠.⁠”

“⁠오늘 새벽 흰 탑 지하로 들어갔습니다⁠. 한 시간 있다 나왔고⁠.⁠” 오웬이 난간에서 등을 뗐다⁠. “⁠부관이 따라갔습니다⁠. 문 앞까지밖에 못 갔지만⁠.⁠”

나는 장갑 보따리를 안은 팔에 힘을 줬다⁠. 루벤의 망토 왼쪽 주머니⁠. 새벽에 계단이 한 칸 울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오늘 베시게요⁠?⁠”

“⁠아직 줄이 없습니다⁠.⁠” 오웬의 대답은 빨랐다⁠. 너무 빨라서 이미 몇 번 생각해 둔 말 같았다⁠. “⁠줄이 생기면 그때 벱니다⁠. 그 전에는⁠…⁠…⁠.⁠”

오웬이 말하는 줄이 무엇인지 나는 알았다⁠. 남의 통증을 끌어와 마력으로 바꾼 손목에는 지워지지 않는 검은 줄이 생긴다⁠. 원작은 이 줄을 흑선이라고 불렀다⁠. 막간 세 번째 편에서 루벤은 이 줄을 처음 보고 소매를 내렸다⁠.

“⁠그 전에는 안 베시는 거죠⁠? 그 말씀⁠, 제가 확정으로 받아도 될까요⁠?⁠”

오웬이 눈살을 찌푸렸다⁠. “⁠확정⁠?⁠”

“⁠구두로 합의하신 걸로 하겠다는 거예요⁠. 흑선이 생기기 전에는 루벤한테 칼 안 대신다⁠. 이 다리 위에서⁠. 저 학생들이 증인이고요⁠.⁠” 나는 소원 쪽지 앞에서 우리를 힐끔거리는 신입생 둘을 가리켰다⁠. 둘은 고개를 홱 돌렸다⁠.

오웬은 한동안 강물만 봤다⁠. 쪽빛 물줄기가 다리 기둥에 부딪혀 하얗게 갈라졌다⁠. 입을 열었을 때 목소리는 대문 앞에서보다 낮았다⁠.

“⁠조건이 있습니다⁠. 그 손목을 내가 매일 직접 봅니다⁠.⁠”

“⁠매일요⁠?⁠”

“⁠매일⁠. 하루라도 빠지면 그날로 약속은 없습니다⁠.⁠”

“⁠아침 일곱 시 어떠세요⁠? 루벤이 학관 가기 전이에요⁠. 아침밥 시간이랑 겹치는데⁠, 그건 양해 부탁드려요⁠.⁠”

“⁠밥은 안 먹습니다⁠.⁠”

“⁠베티한테 그렇게 말씀해 보세요⁠.⁠”

오웬이 처음으로 웃을 뻔했다⁠. 입꼬리가 올라가다 말고 멈췄다⁠.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다리를 건너갔다⁠. 흰 외투 자락이 바람에 날리다가 소원 쪽지 하나를 걸어 떼어 냈다⁠. 쪽지는 강물로 떨어져 쪽빛을 따라 떠내려갔다⁠. 거기에 무슨 소원이 적혀 있었는지는 끝내 몰랐다⁠.

*

매입소의 감정사는 장갑에서 마정석을 하나씩 꺼내 눈알만 한 확대경으로 들여다봤다⁠. 일곱 개를 다 보는 데 반 시간이 걸렸다⁠. 오웬이 말한 값은 빚 절반에서 금화 넷이 모자랐다⁠.

“⁠단가 다시 한 번 검토 부탁드려요⁠.⁠” 내가 말했다⁠. “⁠일곱 개 묶음으로 넘기는 거니까 수량 할인 말고 수량 할증으로요⁠. 묶음이 흩어지면 이 크기 일곱 개 다시 못 모으시잖아요⁠.⁠”

“⁠아가씨⁠, 그런 말은 처음 듣소⁠.⁠”

“⁠지금 들으셨어요⁠.⁠”

감정사는 나를 세 번 쳐다봤다⁠. 금화 셋을 더 얹었다⁠. 하나 모자란 것은 베티가 앞치마 속주머니에서 꺼냈다⁠. 석 달째 품삯을 못 받은 하녀가 어디서 금화를 모았는지 나는 묻지 못했다⁠. 베티는 금화를 내 손바닥에 놓으며 말했다⁠.

“⁠이건 빌려드리는 거예요⁠. 아가씨 시집갈 때 받을 거예요⁠.⁠”

사흘째 아침 일곱 시⁠,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세 번 났다⁠. 고르게⁠, 쉬지 않고⁠.

오웬은 식당 문턱에서 멈춰 섰다⁠. 식탁에는 귀리죽 세 그릇이 김을 올리고 있었고⁠, 네 번째 그릇이 빈자리 앞에 놓여 있었다⁠. 베티가 국자를 든 채 이 의자를 턱으로 가리켰다⁠.

“⁠앉으세요⁠.⁠”

“⁠손목만 보고 가겠습니다⁠.⁠”

“⁠우리 집에서는 서서 남의 손목 보는 법이 없어요⁠. 앉아서 보세요⁠. 앉으면 죽이 앞에 있으니까 먹고요⁠.⁠”

오웬이 나를 봤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앉았다⁠. 칼을 찬 채로 앉으니 칼집 끝이 바닥에 닿아 의자가 기울었고⁠, 칼을 풀어 식탁 다리에 기대 세웠다⁠. 원작 표지에서 단 한 번도 손에서 놓지 않던 칼이었다⁠.

루벤은 계단을 내려오다 이 광경을 보고 멈췄다⁠. 성기사가 자기 집 식탁에 앉아 있었다⁠. 이 앞에 귀리죽이 있었다⁠.

“⁠이게 뭐야⁠?⁠”

“⁠손목 검사⁠.⁠” 내가 말했다⁠. “⁠매일 아침⁠. 오늘부터⁠.⁠”

“⁠누나가 정한 거야⁠?⁠”

“⁠내가 받아 낸 거야⁠.⁠”

루벤이 의자를 거칠게 끌어 앉았다⁠. 왼쪽 소매를 걷어 식탁 위에 팔을 쭉 뻗었다⁠. 부목 감은 오른손은 무릎에 둔 채였다⁠. 오웬이 몸을 기울여 이 손목을 봤다⁠. 안쪽 핏줄이 지나가는 자리⁠, 손바닥 아래 두 마디⁠.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오래 봤다⁠.

“⁠오른쪽도⁠.⁠”

루벤이 이를 갈며 부목 감은 손을 내밀었다⁠. 오웬은 부목 끝으로 드러난 손목을 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몸을 뒤로 물렸다⁠.

“⁠됐습니다⁠.⁠”

“⁠그럼 가⁠.⁠” 루벤이 말했다⁠.

“⁠죽이 식어요⁠.⁠” 베티가 말했다⁠.

오웬은 숟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귀리죽을 한 숟갈 떠먹고⁠, 또 한 숟갈 떠먹었다⁠. 그사이 대문 앞에서 벨로가 창문에 이마를 붙이고 식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베티가 창을 열고 그에게도 한 그릇을 내밀었다⁠. 이날 아침 우리 집 귀리 자루가 반으로 줄었다⁠.

*

사흘째 저녁⁠, 나는 도린의 연구실이 아니라 학관 교수실로 금화 자루를 들고 갔다⁠. 도린은 자루를 열어 보지도 않고 받았다⁠.

“⁠정말 하셨군요⁠.⁠” 도린이 말했다⁠. 이 목소리에는 감탄이 있었다⁠. 그리고 감탄 밑에 무언가 더 있었다⁠. “⁠열흘째에 뵙지요⁠.⁠”

*

나흘째 저녁 루벤이 늦게 들어왔다⁠. 벨로가 대문을 열어 주자 망토를 벗지도 않고 부엌으로 들어가 식은 빵을 뜯었다⁠. 부목이 없었다⁠. 오른손에 아무것도 감겨 있지 않았다⁠.

“⁠손⁠.⁠” 내가 말했다⁠.

“⁠다 나았어⁠.⁠”

“⁠나흘 만에⁠?⁠”

“⁠도린 교수님이 붙여 주셨어⁠. 마탑 의원보다 낫더라⁠.⁠” 루벤이 오른손으로 빵을 쥐고 뜯어 보였다⁠. 손가락 셋이 빵을 쥐었는데⁠, 가운데 손가락 마디가 살짝 옆으로 비틀려 있었다⁠. 뼈가 붙은 손가락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손가락이 빵을 꽉 쥐었다⁠.

나는 이 손을 맨손으로 잡았다⁠.

대련장에서는 불이 들어왔었다⁠. 이번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부러진 뼈가 이 안에 있는데⁠, 통증은 한 방울도 건너오지 않았다⁠. 대신 손바닥에 미지근한 것이 닿았다⁠. 난로 옆에 놔둔 돌처럼 안에서부터 데워진 온기였다⁠. 아픔이 있어야 할 자리를 무언가가 다 마셔 버리고 이 열만 남아 있었다⁠.

“⁠안 아파⁠.⁠” 루벤이 내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제 안 아파⁠, 누나⁠. 교수님이 가르쳐 주셨어⁠. 아픈 걸 버리지 말고 쓰래⁠. 그러면 뼈도 빨리 붙는대⁠.⁠”

나는 비틀린 가운데 손가락 마디를 엄지로 꾹 눌렀다⁠. 대련장에서 장화 굽이 내리찍은 바로 이 자리였다⁠. 루벤은 얼굴 하나 찡그리지 않았다⁠. 오히려 이 손가락을 내 엄지 밑에서 까딱여 보였다⁠. 개수대 앞에서 접시를 닦던 베티가 이걸 보고 접시를 놓쳤다⁠. 접시는 깨지지 않고 물통 속으로 가라앉았는데⁠, 베티는 접시를 건지지도 않고 젖은 손가락으로 가슴께에 교단의 둥근 원을 그렸다⁠.

부엌 문간에서 장화 소리가 났다⁠. 아침 일곱 시가 아니었다⁠. 오웬이 문틀에 한 손을 짚고 서 있었고⁠, 오웬의 눈은 내가 잡은 루벤의 손에 가 있었다⁠. 비틀린 가운데 손가락⁠, 이 손가락이 빵을 쥔 힘⁠.

“⁠첫 계단이군⁠.⁠” 오웬이 말했다⁠.

나는 루벤의 손을 놓지 못했다⁠. 계단이라는 말은 『⁠재의 대륙⁠』에서 막간의 지문에만 나온다⁠. 누구의 대사로도 나오지 않는다⁠. 내가 읽은 1권과 2권 앞부분 어디에서도 오웬은 루벤이라는 이름조차 모른다⁠. 그런 남자가 내 동생의 손을 보고⁠, 소설의 지문에만 있는 이 말을 했다⁠.

“⁠그 말⁠.⁠” 내 목소리가 갈라졌다⁠. “⁠어디서 배웠어요⁠?⁠”

3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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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밤산책2026.10.27· 3화

    손목 검사를 하는 게 최종 보스 표식을 찾으려는 거예요?

    • 하진명작가2026.10.27

      짐작하신 쪽으로 읽으셔도 돼요. 다만 검사하는 쪽이 누구인지가 더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