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409자)

남의 대사

빙의한 엑스트라가 최종 보스의 누나였다 · 하진명

칼날은 차가웠는데 이 칼날에 비친 횃불은 뜨거웠다⁠. 나는 루벤의 손목을 쥔 손을 풀지 않았다⁠. 풀면 이 검보랏빛이 다시 일어날 것 같았고⁠, 풀지 않으면 오웬의 칼이 내 어깨를 타고 동생의 목으로 들어갈 것 같았다⁠. 오른손은 여전히 남의 뼈가 부러지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1권 네 번째 장에서 오웬 라이언은 아래 도시 골목에서 빵을 훔친 소년의 손목을 잡는다⁠. 따라온 사제가 교단 법대로 이 손을 자르라고 하자⁠, 오웬은 칼을 칼집에 넣으며 말한다⁠. 독자 댓글이 천 개 달린 대사였다⁠. 나도 이 밑에 하나 달았다⁠.

“⁠성기사의 칼은 아직 죄짓지 않은 손을 베지 않는다⁠.⁠”

내가 이 말을 했다⁠. 오웬의 목소리를 흉내 내지도 않았는데⁠, 모래 마당이 조용해서 이 말이 관람석 꼭대기까지 갔다⁠.

칼끝이 흔들렸다⁠. 아주 조금⁠, 손톱 두께만큼⁠. 오웬의 눈이 루벤에게서 떨어져 내게 왔다⁠. 아까 대문 앞에서 본 이 셈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무언가 잃어버린 물건을 남의 주머니에서 본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 말을 어디서 들었지⁠?⁠”

“⁠방금 제가 했잖아요⁠.⁠”

“⁠아니⁠.⁠” 루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건 내가 할 말이다⁠.⁠”

이때 모래를 밟는 다른 발소리가 났다⁠. 회색 교수복 자락이 횃불 빛 안으로 들어왔다⁠. 도린은 심판석에서 내려와 우리 셋 사이에 섰고⁠, 장갑 낀 왼손으로 오웬의 칼등을 가볍게 짚었다⁠. 손가락 넷이 칼등에 얹혔다⁠.

“⁠성기사님⁠. 여기는 마탑 대련장입니다⁠.⁠” 도린의 목소리는 강의실에서 출석을 부르는 것처럼 부드러웠다⁠. “⁠마탑 안에서는 학장의 허락 없이 교단의 칼을 뽑지 못합니다⁠. 교단과 마탑이 백 년 전에 맺은 약조지요⁠. 성기사님도 아실 텐데요⁠.⁠”

“⁠지금 본 걸 못 봤다고 하실 겁니까⁠?⁠”

“⁠제가 본 것은 신입생 하나가 손가락이 부러져서 마력이 새어 나온 장면입니다⁠. 신입생 대련에서 한 해에 서너 번은 봅니다⁠.⁠” 도린이 미소를 지었다⁠. “⁠술식인지 아닌지는 마탑이 정합니다⁠.⁠”

오웬은 한참 서 있었다⁠. 관람석에서 누군가 헛기침을 했고⁠, 펠릭스는 벽에 등을 붙인 채 반지 낀 손을 떨고 있었다⁠. 오웬이 칼을 거두었다⁠. 칼이 칼집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길었다⁠.

“⁠그럼 마탑 문 밖에서 뵙겠습니다⁠.⁠” 오웬이 루벤을 내려다봤다⁠. “⁠손목에 줄이 생기는 날⁠.⁠”

오웬은 관람석 계단을 올라가 사라졌다⁠. 도린이 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허락도 없이 내 오른손을 들어 횃불에 비췄다⁠. 손등의 멍은 손가락 마디마다 정확히 다섯 개가 피어 있었다⁠.

“⁠누님 쪽에도 흐르는군요⁠.⁠” 도린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아쉬포드의 피가⁠.⁠”

나는 손을 뺐다⁠. 이 손이 너무 아파서 빼는 데 숨을 두 번 쉬어야 했다⁠.

*

루벤의 손은 학관 의원이 부목을 대 감았다⁠. 손가락 셋이 부러졌고⁠, 한 달은 지팡이도 못 쥔다고 했다⁠. 의원은 내 손도 봤는데 뼈는 멀쩡하다고 했다⁠. 멀쩡한 뼈가 밤새 부러진 뼈처럼 쑤셨다⁠.

저택에 돌아오니 대문 앞에 사람이 서 있었다⁠. 흰 외투에 장검⁠, 키가 대문 기둥만 한 성기사였다⁠. 볼이 둥글고 눈이 순했다⁠. 성기사는 우리를 보더니 차렷 자세로 섰다⁠.

“⁠성기사단 부관 벨로입니다⁠. 오웬 경의 명으로 오늘부터 이 집 대문을 지킵니다⁠.⁠”

“⁠지키는 거예요⁠, 가두는 거예요⁠?⁠” 내가 물었다⁠.

벨로가 잠깐 생각했다⁠. “⁠둘 다라고 들었습니다⁠.⁠”

부엌에서 베티가 이 말을 들었다⁠. 국자를 든 채 대문까지 나와 벨로를 아래위로 훑었다⁠. 그리고 집으로 들어가 국 한 사발을 떠 들고 다시 나왔다⁠.

“⁠우리 집 앞에 서 있으려면 먹고 서 있어요⁠. 굶은 사람이 대문에 붙어 있으면 동네에서 흉봐요⁠.⁠”

“⁠근무 중에는⁠…⁠…⁠.⁠”

“⁠식어요⁠.⁠”

벨로는 국을 받았다⁠. 받아서 세 숟갈 만에 비웠다⁠. 베티가 사발을 도로 받아 들고 나를 돌아봤다⁠.

“⁠아가씨⁠, 저 사람 국 세 그릇은 먹을 상이에요⁠. 우리 장작이 세 개예요⁠.⁠”

응접실 난로에는 장작 하나가 탔다⁠. 루벤은 부목 감은 손을 무릎에 얹고 앉아 불만 봤다⁠. 나는 루벤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른손을 탁자에 올려놓으니 손등의 멍이 불빛에 보랏빛으로 떴다⁠. 루벤이 이 멍을 봤다⁠. 자기 손가락이 부러진 자리와 같은 자리였다⁠.

“⁠그건 왜 생겼어⁠.⁠”

“⁠너 잡아서⁠.⁠”

“⁠그러니까 왜 잡았냐고⁠.⁠” 루벤이 목소리를 높였다⁠. “⁠다들 웃었어⁠. 누나가 그 말 하고 나서⁠. 펠릭스가 그래서 그렇게 밟은 거야⁠. 장난으로 끝날 대련이었어⁠.⁠”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 말이 맞았다⁠. 원작의 펠릭스는 루벤을 놀리다가 손을 밟는다⁠. 웃음거리가 된 펠릭스는 놀리지 않고 처음부터 밟았다⁠. 내가 바꾼 대사 한 줄이 장화 굽을 두 번 더 내리찍게 했다⁠.

“⁠그리고 그때⁠.⁠” 루벤이 부목 감은 손을 내려다봤다⁠. 목소리가 작아졌다⁠. “⁠안 아팠어⁠. 손이 부러졌는데⁠, 아픈 게 다 어디로 빨려 들어가서 손이 뜨거워지기만 했어⁠. 펠릭스가 벽까지 날아가는 걸 봤어⁠. 내가 그랬어⁠. 누나가 그걸 끊었어⁠.⁠”

“⁠그거 하면 안 돼⁠.⁠”

“⁠왜⁠?⁠”

이유를 말할 수 없었다⁠. 그건 흑마법의 첫 계단이고⁠, 이 계단을 다 오르면 네가 대륙을 태우고 원작 주인공의 칼에 죽는다고⁠. 이 소설을 내가 새벽 두 시에 읽었다고⁠.

“⁠교단이 금하는 거니까⁠.⁠”

“⁠누나가 언제부터 교단 말을 들었어⁠.⁠” 루벤이 일어섰다⁠. “⁠아버지 지팡이 팔 땐 교단이 금하는 마도구라고 값을 더 받았잖아⁠.⁠”

루벤은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이 낡아서 루벤이 밟을 때마다 한 칸씩 울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고⁠, 이후로 집 안에서 들리는 것은 난로의 장작 하나가 갈라지는 소리뿐이었다⁠.

*

자정 무렵 대문 밖에서 말소리가 났다⁠. 나는 숄을 두르고 나갔다⁠. 벨로가 졸린 눈으로 경례를 하고 물러났고⁠, 이 자리에 오웬이 서 있었다⁠. 근무를 바꾸러 온 모양이었다⁠. 골목 모퉁이에 박힌 마정석 등⁠, 마력을 머금어 저 혼자 빛나는 돌을 넣은 등 하나가 푸르스름한 빛을 오웬의 화상 자국 위에 얹어 놓았다⁠.

“⁠주무시지 않습니까⁠?⁠”

“⁠손이 아파서요⁠.⁠” 나는 멍든 손을 숄 밖으로 내밀었다⁠. “⁠부러진 데가 없는데 부러진 데처럼 아프네요⁠. 성기사님은 이런 거 처음 보세요⁠?⁠”

“⁠처음은 아닙니다⁠.⁠” 오웬이 내 손등을 봤다⁠. 아주 짧게⁠. “⁠아쉬포드 레나가 남의 통증을 받는다는 얘기는 못 들었습니다⁠. 회신이니 공유니 하는 말을 쓴다는 얘기도⁠.⁠”

“⁠누구한테서요⁠?⁠”

오웬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골목 끝 어둠을 봤다⁠. 강 쪽에서 염색 공방 물 냄새가 올라왔다⁠. 쇠붙이 녹인 물에 쓴 풀을 섞은 냄새였다⁠.

“⁠대련을 어떻게 아셨어요⁠?⁠” 내가 물었다⁠. “⁠아침에 저녁 대련에서 보자고 하셨잖아요⁠. 신입생 대련 대진은 점심때 뽑았어요⁠.⁠”

“⁠그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 먼저 말씀하시면 답하지요⁠.⁠”

우리는 한동안 서로를 봤다⁠. 둘 다 입을 열지 않았다⁠. 회의에서 먼저 숫자를 말하는 사람이 지는 자리 같았다⁠.

“⁠동생 손목을 잘 보십시오⁠.⁠” 결국 오웬이 먼저 말했다⁠. 숫자가 아니라 경고였다⁠. “⁠줄이 생기는 날이 그날입니다⁠.⁠”

나는 대문을 닫았다⁠. 빗장을 지르는데 손이 미끄러져 두 번 만에 걸었다⁠.

*

이튿날 아침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세 번이 아니라 열 번이었다⁠. 고르지도 않았다⁠. 베티가 부엌에서 나오며 앞치마로 손을 닦았다⁠.

“⁠이건 빚쟁이예요⁠. 성기사는 저렇게 안 두드려요⁠.⁠”

문밖에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는 모자를 벗지도 않고 대문 안으로 한 발을 디밀었다⁠. 대문 옆에서 벨로가 이 발을 내려다봤지만⁠, 성기사의 일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돌렸다⁠.

“⁠아쉬포드가 맏따님 되십니까⁠? 강변 대부 상회에서 왔습니다⁠. 아니⁠, 왔었습니다⁠.⁠” 남자가 헛기침을 했다⁠. “⁠상회는 어젯밤에 이 댁 빚을 통째로 넘겼습니다⁠. 새 주인께서 오늘 아침 직접 오시겠다고 해서 길을 안내해 드렸지요⁠.⁠”

나는 날짜를 셌다⁠. 원작에서 저택 압류는 입학 열흘째에 온다⁠. 막간 두 번째 편⁠, 루벤이 책 상자 하나를 안고 비 오는 거리로 쫓겨나는 장면이다⁠. 오늘은 입학 이튿날이었다⁠. 여드레가 당겨져 있었다⁠.

콧수염 뒤에서 회색 교수복이 걸어 들어왔다⁠. 도린은 대문 문턱에서 모자를 벗었고⁠, 마당의 낙엽을 밟지 않으려고 돌길로만 걸었다⁠.

“⁠이른 아침에 실례합니다⁠, 누님⁠. 손은 좀 어떠십니까⁠?⁠”

이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딸깍 맞물렸다⁠. 어제 나는 대련 하나를 바꿨다⁠. 루벤의 첫 술식은 반쯤 끊겼고⁠, 도린은 이 손을 가까이서 볼 기회를 놓쳤다⁠. 그런데 도린은 그대로 있었다⁠. 원작의 도린은 열흘째 압류로 갈 곳 없어진 루벤에게 지하 연구실 조수 자리를 준다⁠. 내가 대련을 막자 열흘을 기다리지 않고⁠, 하룻밤 사이에 빚을 사서 대문 앞까지 왔다⁠. 사건을 막아도 이 사건을 원한 사람은 남는다⁠. 이 사람은 다른 길로⁠, 더 일찍 온다⁠.

응접실에 셋이 앉았다⁠. 도린⁠, 나⁠, 그리고 계단을 내려오다 목소리를 듣고 멈춘 루벤⁠. 베티가 찻잔 세 개를 들고 왔다⁠. 찻물은 연한 금빛도 아니고 거의 맹물이었다⁠.

“⁠찻잎이 한 장밖에 없어서 세 잔에 나눴어요⁠.⁠” 베티가 말했다⁠. “⁠교수님 잔에 잎을 넣었으니까 교수님이 제일 진해요⁠.⁠”

“⁠고맙습니다⁠.⁠” 도린은 정말로 고맙다는 얼굴로 맹물을 마셨다⁠. 그리고 잔을 내려놓았다⁠. “⁠본론을 말씀드리지요⁠. 아쉬포드가의 빚은 이제 제게 있습니다⁠. 저는 이 저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제게 필요한 건 루벤 군의 손입니다⁠.⁠”

“⁠조건부터 하나씩 확인할게요⁠.⁠” 내가 말했다⁠. 오른손이 탁자 밑에서 떨렸는데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회의실에서 갑이 무리한 조건을 내밀 때마다 나는 이 목소리를 썼다⁠. “⁠루벤의 손이 왜 필요하신지⁠, 연구실에서 무슨 일을 시키실 건지⁠, 기간은 언제까지인지요⁠.⁠”

도린이 눈썹을 올렸다⁠. 그러더니 정말 하나씩 답했다⁠.

“⁠통증 술식을 연구합니다⁠. 교단이 흑마법이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강 아래 염색공들은 독한 물감에 손이 문드러져도 교단의 치유를 못 받습니다⁠. 성녀의 손 한 번이 그 사람들 석 달 품삯이니까요⁠.⁠” 도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통증을 다룰 줄 알면 그 사람들의 아픔을 덜어 줄 수 있습니다⁠. 루벤 군은 어제 대련장에서 그걸 몸으로 해냈습니다⁠. 마탑에 그런 손은 백 년에 하나 나옵니다⁠. 기간은 루벤 군이 원할 때까지⁠. 그리고 부러진 손가락은 제가 이레 안에 붙여 드리지요⁠.⁠”

옳은 말이었다⁠. 원작에서도 도린은 옳은 말만 했다⁠. 이 옳은 말을 따라 지하 세 번째 층으로 내려간 루벤이 막간 두 번째 편 끝에서 처음으로 자기 손을 들여다보며 웃는다⁠. 이 웃음이 무서워서 나는 이 대목에서 휴대전화를 내려놨었다⁠.

도린이 외투 안주머니에서 열쇠 하나를 꺼내 탁자 한가운데 놓았다⁠. 손가락 두 마디만 한 쇠 열쇠였다⁠. 손잡이에 흰 탑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지하 셋째 층 연구실 열쇠입니다⁠. 받으시면 빚은 오늘로 덮겠습니다⁠.⁠”

루벤이 계단에서 내려왔다⁠. 부목 감은 오른손을 가슴에 붙인 채 탁자 앞에 섰다⁠. 열쇠를 내려다봤고⁠, 다음 나를 봤고⁠, 다시 열쇠를 봤다⁠. 왼손이 올라갔다⁠.

내 손이 먼저 닿았다⁠. 멍든 오른손이 열쇠를 덮었고⁠, 쇠의 찬 기운이 멍 든 손등의 뼈마디까지 파고들었다⁠.

“⁠이 건은 제가 결정합니다⁠.⁠”

루벤의 왼손이 내 손등 바로 위에서 멈췄다⁠. 루벤의 목소리가 아주 낮았다⁠.

“⁠누나가 뭔데⁠. 손 치워⁠.⁠”

2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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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벽세시2026.10.26· 2화

    남의 대사라는 건 원작에서 다른 인물이 하던 말을 주인공이 하게 된 거예요?

    • 하진명작가2026.10.27

      네, 원래 다른 사람 입에서 나와야 할 말이었어요. 그 한 줄이 바뀌면서 이야기가 원작에서 벗어납니다.

남의 대사 · 빙의한 엑스트라가 최종 보스의 누나였다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