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671자)
일정 공유드려요
빙의한 엑스트라가 최종 보스의 누나였다 · 하진명
오른쪽 무릎이 먼저 깼다. 뼈와 뼈 사이에 모래가 낀 것처럼 시큰거렸고, 다리를 펴자 이 모래가 한 번 더 갈렸다. 나는 서른두 해 동안 무릎이 아파 본 적이 없었다. 눈을 뜨기 전에 이걸 먼저 알았다. 이건 내 무릎이 아니었다.
천장에 금이 가 있었다. 금 간 자리를 따라 누런 물자국이 지도처럼 번졌고, 창틀 틈으로 들어온 바람에서 젖은 돌 냄새가 났다. 이불은 무거웠는데 따뜻하지 않았다. 손을 들어 보니 손가락이 길고 손톱 끝이 갈라져 있었다. 내 손은 사무실 키보드 위에서 굳은살 하나 없이 하얬다.
문이 벌컥 열렸다.
“아가씨! 도련님 입학식이 오늘인데 아직도 누워 계세요? 해가 탑 꼭대기에 걸렸어요. 물은 데워 놨는데 장작이 세 개밖에 없으니까 세수는 한 번에 끝내시고, 어제 꿰맨 치마 단 또 밟으시면 이번엔 안 꿰매 드려요.”
마흔쯤 된 여자가 대야를 들고 들어왔다. 앞치마는 빨아서 하얗게 바랬는데 군데군데 다시 꿰맨 자리가 누렇게 떠 있었다. 이 사람은 대야를 탁자에 쾅 내려놓고 창을 열어젖혔다. 차가운 공기가 방 안으로 굴러 들어왔다.
나는 상체를 일으키다가 무릎 때문에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몸에 밴 말이 먼저 나갔다.
“네, 확인했습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여자가 창틀을 잡은 채 굳었다. 천천히 돌아보더니 성큼성큼 다가와 손바닥을 내 이마에 댔다. 손바닥이 거칠고 차가웠다.
“열은 없는데.” 여자가 내 눈을 들여다봤다. “아가씨가 왜 저한테 존댓말을 하세요? 어디 머리 부딪치셨어요? 의원 부를까요? 의원 부를 돈은 없는데, 그래도 부를까요?”
“아니요, 괜찮…….” 나는 말을 고쳤다. “괜찮아.”
“그것도 이상한데.” 여자가 이마에서 손을 떼고 앞치마에 문질렀다. “베티는 이 집에서 스무 해를 살았어요. 아가씨가 괜찮다고 할 때가 제일 안 괜찮을 때예요.”
베티. 이 이름이 머리 안쪽 어딘가에 걸렸다. 아쉬포드가의 마지막 하녀 베티. 도련님 루벤. 입학식. 이 낱말들이 하나씩 제자리에 끼워질 때마다 무릎보다 깊은 곳이 시렸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것은 새벽 두 시의 사무실이었다. 물류 회사 일정관리팀 내 자리, 꺼진 모니터, 퇴근 버스를 놓치고 휴대전화로 읽던 연재 판타지 『재의 대륙』. 나는 이 소설의 악역 루벤을 좋아했다. 1권 중간중간 루벤의 지난 일을 보여 주는 막간을 세 번씩 다시 읽었고, 이 막간 세 번째 편에 루벤의 누나가 딱 한 줄 나온다.
「누나 레나는 동짓날 밤, 동생의 폭주를 맨손으로 붙잡다 죽었다.」
나는 베티의 어깨 너머 거울을 봤다. 스물대여섯 된 여자가 잿빛 머리를 산발한 채 앉아 있었다. 턱이 좁았고 눈밑이 푸르렀다. 처음 보는 얼굴이 내 입술로 숨을 쉬고 있었다.
“베티. 오늘이 며칠이지?”
“가을 첫 달 엿새요. 도련님 입학식 날이라니까요. 어제 아가씨가 세 번이나 말씀하셨잖아요.”
가을 첫 달 엿새. 원작 1권 첫 장의 날짜였다. 동지까지 손가락으로 세어 보니 여든 날이 남았다.
*
루벤은 현관에서 아버지의 망토를 여미고 있었다. 키가 문틀에 닿을 듯했고 어깨가 아직 덜 찬 스무 살의 몸이었다. 망토 단은 베티가 줄여 꿰맨 자국이 두 줄로 지나갔고, 목깃의 털은 한쪽만 빠져 있었다. 소설 삽화의 루벤은 불타는 성벽 위에 서 있었다. 내 앞의 루벤은 장화 끈을 다시 묶다가 손가락을 끈에 쓸려 혀를 찼다.
“뭘 봐.” 루벤이 고개도 안 들고 말했다.
“입학 축하해.”
루벤이 끈을 묶던 손을 멈췄다. 올려다보는 눈이 나와 같은 잿빛이었다.
“누나가 웬일이야. 어제는 아버지 지팡이 판 돈으로 입학금 냈다고 생색냈잖아.”
원작의 레나는 그런 사람이었구나. 나는 대답할 말을 고르다가 대문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세 번, 고르게, 쉬지 않고. 베티가 부엌에서 국자를 든 채 뛰어나왔다.
“빚쟁이면 아가씨가 나가세요. 저는 지난번에 울어서 이번엔 안 먹혀요.”
대문을 연 것은 나였다. 문밖에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흰 외투 자락에 은실로 교단의 둥근 문장이 수놓여 있었고, 허리에 찬 장검은 칼집이 닳아 손때가 검게 올라 있었다. 검은 머리를 짧게 쳤다. 목깃 위로 화상 자국이 손바닥만큼 비죽 나와 있었는데, 오래된 상처처럼 반질반질했다.
“교단 성기사 오웬 라이언입니다. 아쉬포드 루벤 군을 뵈러 왔습니다.”
나는 문고리를 쥔 채 이 이름을 들었다. 원작의 주인공이었다. 『재의 대륙』 1권에서 오웬 라이언은 첫눈 사흘 전에야 에이르에 온다. 아래 도시의 시신 사건을 맡아서. 지금은 가을 첫 달 엿새였다. 오웬은 두 달 일찍 와 있었다.
“무슨 일로요?”
“루벤 군의 오른손을 좀 보고 싶습니다.”
내 뒤에서 루벤이 걸어 나왔다. 오웬의 눈이 내 어깨를 넘어 루벤에게 가 닿았다. 이 눈이 루벤의 얼굴이 아니라 오른손에서 멈췄다. 사냥꾼이 덫에 걸린 짐승의 발목을 보는 눈이었다.
“내 손을 왜.” 루벤이 말했다.
“보면 압니다.”
오웬이 한 걸음 들어왔다. 오웬의 장갑 낀 손이 루벤의 손목을 향해 올라왔고, 나는 이 손을 손등으로 쳐 냈다. 생각보다 소리가 컸다. 베티가 국자를 떨어뜨렸다.
“죄송한데요.” 내 입에서 나온 것은 회의실 말투였다. “사전에 일정 조율이 안 된 방문이라서요. 용건을 정리해서 다시 공유해 주시면 저희가 검토하고 회신드리겠습니다.”
오웬이 쳐 낸 손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나를 봤다. 이 얼굴에 처음으로 무언가가 스쳤는데, 화가 아니라 무언가를 셈하는 표정이었다.
“누님이 계신 줄은 몰랐군.”
“이 집에 십 년 넘게 살았는데요.”
“그렇군요.” 오웬이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럼 저녁 신입생 대련에서 뵙겠습니다.”
오웬은 돌아서 갔다. 젖은 돌길에 박힌 오웬의 발소리가 모퉁이를 돌 때까지 고르게 났다. 루벤이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누나 방금 뭐라고 한 거야? 회신?”
“그런 말이 있어.”
“아가씨가 미쳤어요.” 베티가 국자를 주우며 중얼거렸다. “성기사 손을 쳤어요. 성기사 손을.”
나는 대문을 닫고 등을 기댔다. 무릎이 다시 시큰거렸다. 오웬은 대련을 알고 있었다. 원작 1권에서 루벤의 대련을 본 적이 없다. 이 대련은 막간 첫째 편에만 나오고, 이걸 읽은 사람은 나 같은 독자뿐이었다.
*
막간 첫째 편은 이렇게 간다. 입학식 날 저녁 신입생 대련, 공작가 막내 펠릭스가 몰락한 집 아들의 오른손을 짓밟는다. 손가락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관람석까지 들리고, 이 통증 속에서 루벤의 손에 처음으로 검보랏빛 마력이 일어난다. 제 통증을 마력으로 바꾸는 술식, 교단이 흑마법이라 부르는 것의 첫 계단이다. 펠릭스는 대련장 벽까지 날아가 처박히고, 심판석에 앉은 교수 하나가 이 손을 오래 본다. 이 교수의 이름이 도린이다.
이 장면을 세 번 읽는 동안 나는 루벤 편이었다. 이제 와서 보니 이 장면은 첫 계단이었다.
“대련 대진을 바꿀 수 있을까요?”
마탑 학관의 접수대는 흰 탑 아래 둥근 회랑에 있었다. 창구의 서기는 깃펜을 귀에 꽂은 노인이었다. 나는 창구에 두 손을 얹고 최대한 공손하게 웃었다.
“아쉬포드 루벤 군의 상대를 공작가 쪽이 아닌 다른 학생으로 조정해 주실 수 있을지 문의드리려고요. 사유는 안전 문제고요, 필요하시면 요청 사유 정리해서 드릴게요.”
“대진은 제비로 뽑았소.”
“그 제비 다시 뽑는 건 어려울까요?”
“아가씨.” 서기가 깃펜을 귀에서 빼 창구를 톡톡 쳤다. “여기는 마탑이오. 제비는 한 번 뽑소.”
나는 회랑 기둥 옆에서 저녁을 기다렸다. 무릎이 아프면 오른발에 체중을 덜 싣는 법을 이 몸이 알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것을 이 몸은 알았다. 그리고 내가 아는 것을 이 몸은 몰랐다. 이 둘이 한 몸으로 서 있으니 다리가 자꾸 꼬였다.
*
대련장은 흰 탑 뒤뜰에 둥글게 판 모래 마당이었다. 관람석 돌계단에 신입생들의 가족과 하인이 빼곡했고, 기름 먹인 횃불이 둘레를 따라 일곱 개 꽂혀 있었다. 모래에서 마른 피 냄새가 올라왔다. 나는 맨 아래 계단에 앉았다. 심판석에 앉은 남자가 보였다. 서른 중반, 회색 교수복, 왼손에만 검은 장갑을 꼈다. 이 장갑의 넷째 손가락이 비어서 접혀 있었다. 도린이었다.
맞은편 관람석 맨 위에 흰 외투가 있었다. 오웬은 팔짱을 끼고 서서 모래 마당 하나만 보고 있었다.
“아쉬포드 루벤. 공작가 막내 펠릭스.”
펠릭스는 은빛 머리를 뒤로 넘긴 키 작은 청년이었다. 모래 마당에 들어서며 관람석을 향해 손을 흔들었고, 이 손에 반지가 넷 끼워져 있었다. 루벤은 아버지의 망토를 벗어 내 무릎에 던지고 들어갔다. 둘이 마주 섰다. 펠릭스가 웃으며 입을 여는 순간 나는 일어섰다.
“몰락한 집 개는 앞발부터 부러뜨려야지!”
관람석이 조용해졌다. 펠릭스의 입이 반쯤 벌어진 채 멈췄다.
“지금 그 말 하시려던 거 맞죠? 미리 공유드렸어요.” 나는 손나발을 만든 채 덧붙였다. “다들 들으셨으니까 이제 하시면 좀 민망하실 거예요.”
관람석 어디선가 웃음이 터졌다. 한 사람이 웃자 열 사람이 따라 웃었다. 펠릭스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루벤이 모래 마당 한가운데서 나를 돌아봤는데, 이 얼굴은 고마워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창피해서 죽고 싶은 얼굴이었다.
“시작!” 도린이 말했다.
나는 이 웃음이 무엇을 낳았는지 곧 봤다. 원작의 펠릭스는 루벤을 갖고 놀다가 마지막에 손을 밟는다. 웃음거리가 된 펠릭스는 갖고 놀지 않았다. 첫 합에 반지 낀 주먹으로 바람을 일으켜 루벤의 무릎을 꺾었고, 루벤이 모래에 짚은 오른손을 장화 굽으로 내리찍었다. 한 번이 아니라 세 번.
뼈 부러지는 소리가 관람석 맨 아래까지 들렸다. 젖은 나뭇가지를 무릎에 대고 꺾는 소리였다.
루벤은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입을 꽉 다문 채 모래에 이마를 박았다. 그리고 횃불 일곱 개가 한꺼번에 낮게 누웠다. 바람 한 점 없었는데. 루벤의 짓밟힌 손등 위로 검보랏빛이 피어올랐다. 연기 같기도 하고 멍 같기도 한 빛이 부러진 손가락 사이에서 새어 나와 루벤의 팔뚝을 타고 기어올랐다. 펠릭스가 장화를 떼며 뒷걸음질 쳤다.
막간 첫째 편의 이 문장이 내 머리에 그대로 떠올랐다. 아쉬포드의 피는 남의 아픔을 받아 마시는 피다. 루벤의 지난 일을 들려주는 대목에 지나가듯 적힌 한 줄이었다.
나는 망토를 버리고 모래 마당으로 뛰어내렸다. 무릎이 꺾였지만 넘어지지 않았다. 루벤의 손목을 맨손으로 움켜쥐었다.
불이 들어왔다.
손바닥으로 들어온 것이 팔꿈치를 지나 어깨를 지나 어금니까지 한 번에 올라왔다. 내 오른손 손가락 다섯 개가 한꺼번에 장화 굽 밑에 깔렸다. 부러지지 않은 뼈가 부러지는 소리를 내 귀가 들었다. 이 위로 차가운 것이 쏟아졌다. 루벤의 팔을 타고 오르던 검보랏빛이 방향을 틀어 내 손바닥으로 빨려 들어왔고, 들어오는 족족 얼음물을 혈관에 부은 것처럼 팔이 저렸다. 숨이 거꾸로 쉬어졌다.
검보랏빛이 꺼졌다. 횃불 일곱 개가 다시 일어섰다.
나는 루벤의 손목을 놓지 못한 채 모래에 무릎을 꿇었다. 내 오른손 손등에 검푸른 멍이 번지고 있었다. 손가락 마디마다, 루벤의 손가락이 부러진 바로 이 자리마다.
“누나.” 루벤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뭘 한 거야?”
대답할 수가 없었다. 이가 맞부딪혀 딱딱 소리가 났다. 심판석에서 도린이 일어서 있었다. 루벤이 아니라 내 손을 보고 있었다.
모래를 밟는 소리가 내 등 뒤에서 났다. 차갑고 곧은 것이 내 오른쪽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 루벤의 목울대 아래에서 멈췄다. 칼끝이었다. 횃불 빛이 칼날을 타고 내 뺨까지 미끄러져 왔다.
“비키십시오.” 오웬 라이언이 말했다. “방금 그건 통증 술식입니다. 교단 법으로, 이 자리에서 벱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