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5,376자)

동짓날 밤

빙의한 엑스트라가 최종 보스의 누나였다 · 하진명

루벤은 이 손을 잡지 않았다⁠.

넷째 손가락 없는 왼손이 루벤의 가슴 앞에서 떨렸다⁠. 루벤은 이 손을 내려다봤고⁠, 관람석 맨 아래 계단에 선 나를 봤다⁠. 그리고 두 손을 등 뒤로 감췄다⁠. 아이처럼⁠. 아버지의 망토 자락이 이 손을 덮었다⁠.

“⁠안 가져가요⁠.⁠” 루벤이 말했다⁠. 목소리가 대련장 끝까지 갔다⁠. “⁠누나랑 약속했어요⁠.⁠”

도린의 얼굴에 무언가가 지나갔다⁠. 실망이 아니었다⁠. 감탄에 가까웠다⁠. 도린은 웃으며 무릎을 꺾었다⁠. 독이 다리로 내려온 모양이었다⁠. 무릎이 모래에 닿는 소리가 났다⁠. 도린은 무릎을 꿇은 채 손을 뻗어 망토 자락 밑으로 숨긴 루벤의 오른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럼 제가 드리지요⁠.⁠”

도린의 왼 손목⁠, 두 바퀴 감긴 줄이 횃불 아래에서 꿈틀거렸다⁠. 도린은 술식을 거꾸로 돌렸다⁠. 통증을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밀어 넣는 쪽으로⁠. 자기 손목의 줄이 길이었다⁠. 이 길로 십 년이 쏟아졌다⁠.

루벤이 비명을 질렀다⁠. 입학식 날 손뼈가 부러지고도 지르지 않던 비명이었다⁠.

횃불 일곱 개가 한꺼번에 누웠다⁠. 이번엔 다시 일어서지 않았다⁠. 여섯이 꺼지고 하나만 바닥에 붙어 파르르 떨었다⁠. 루벤의 손목에서 검보랏빛이 터져 나왔다⁠. 빛이 아니었다⁠. 물이었다⁠. 무겁고 검은 물이 거꾸로 솟아 루벤의 팔을 감고 올라갔다⁠. 손목의 줄이 이 물을 따라 팔뚝 안쪽으로 기어올랐다⁠. 한 뼘⁠. 두 뼘⁠. 모래 마당의 눈이 한꺼번에 들려 회오리를 쳤다⁠. 관람석의 신입생들이 비명을 지르며 계단을 기어올랐다⁠.

원작 1권의 마지막 장⁠. 동짓날 밤 흰 탑 시험장⁠, 루벤의 폭주⁠.

*

출입구에서 칼 뽑히는 소리가 났다⁠. 오웬이 모래 마당으로 걸어 들어왔다⁠. 회오리 치는 눈 속을 똑바로⁠. 칼끝을 낮게⁠. 주교가 내린 명대로였다⁠. 흑마가 태어나는 이 밤⁠, 이 자리에서 칼을 쓰라는 명⁠.

“⁠비켜라⁠.⁠”

오웬이 그렇게 말한 상대는 나였다⁠. 나는 이미 모래 위에 있었다⁠. 관람석에서 뛰어내릴 때 무릎이 꺾였고⁠, 꺾인 무릎으로 열 걸음을 달렸다⁠. 입학식 날처럼⁠. 이날보다 한 걸음 더 빨리⁠.

“⁠아직 안 태어났어요⁠.⁠” 내가 말했다⁠. “⁠줄 보세요⁠. 팔꿈치 아래예요⁠.⁠”

오웬의 칼끝이 멈췄다⁠. 오웬의 눈이 루벤의 팔로 갔다⁠. 검은 줄이 팔꿈치 안쪽을 향해 기어가고 있었다⁠. 아직 닿지 않았다⁠. 팔꿈치를 넘으면 어깨⁠, 어깨를 넘으면 심장⁠.

나는 원작의 이 문장을 알았다⁠. 누나 레나는 동짓날 밤⁠, 동생의 폭주를 맨손으로 붙잡다 죽었다⁠. 이 문장 다음 줄도 알았다⁠. 루벤은 이 마지막 통증을 삼키고 세 번째 계단을 올랐다⁠.

원작에서 죽는 것은 이 손을 내민 레나였다⁠. 동생은 이 손으로 건너간 누나의 마지막 통증을 딛고 세 번째 계단을 올랐다⁠. 이 몸의 주인이 붙잡는 법을 몰라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붙잡았던 자리가 바로 여기였다⁠.

나는 오른손을 뻗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 왼손을 뻗었다⁠. 심판석을 향해⁠.

“⁠성녀님⁠!⁠”

심판석에서 흰 두건이 일어섰다⁠. 주교가 클라라의 소매를 잡았다⁠. 클라라가 이 소매를 뿌리쳤다⁠. 사제복 소매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주교 곁의 성기사 하나가 클라라를 막으려 계단을 뛰어내렸다⁠. 관람석 중간쯤에서 벨로가 일어서다 이 성기사의 망토 자락을 밟았다⁠. 성기사가 계단에 엎어졌다⁠. 벨로가 두 손을 들고 크게 말했다⁠. 실수였다고⁠. 이 옆에서 베티가 빈 찐빵 바구니를 든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실수였다고⁠.

클라라가 모래 마당으로 뛰어내렸다⁠. 관람석 꼭대기에서 마탑 학장이 일어나 외쳤다⁠. 여기는 마탑 시험장이라고⁠, 교단의 성녀라도 수험생의 시험에 손댈 수 없다고⁠. 이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성녀의 신발이 모래를 밟았다⁠. 학장은 입을 다물었다⁠. 다물고 앉지 않았다⁠.

나는 동생의 손목을 붙잡았다⁠.

*

죽음이 왔다⁠.

도린의 십 년이 왔다⁠. 아래 도시 단칸방에서 열병으로 죽어 가는 여자의 마지막 밤⁠. 이 여자의 손을 잡았다가 검게 썩어 들어가는 넷째 손가락⁠. 이 손가락을 제 손으로 자르던 새벽⁠. 냉실 돌판 일곱의 마지막 숨이 하나씩⁠. 그리고 이 위로 독이 장기를 하나씩 녹이는 지금의 통증⁠. 이 모든 것이 루벤의 팔을 타고 오르다 내 손바닥으로 방향을 틀었다⁠. 루벤의 술식이 끊기는 반동이 얼음물이 되어 혈관을 거슬러 심장으로 갔다⁠.

“⁠누나⁠, 놔⁠!⁠” 루벤이 소리쳤다⁠. 루벤은 내 손을 떼어 내려고 왼손으로 내 손가락을 하나씩 잡아 폈다⁠. 폈는데 다시 감겼다⁠. 내 손이 아니라 이 몸의 손이 이 손목을 놓지 않았다⁠. “⁠놔⁠! 누나가 죽는다며⁠! 동지에 죽는다며⁠!⁠”

나는 놓지 않았다⁠. 대답할 숨도 없었다⁠.

심장이 멎었다⁠. 한 박자⁠. 두 박자⁠.

지하 세 번째 층에서는 세 박자째에 다시 뛰었다⁠. 이번엔 세 박자째에도 뛰지 않았다⁠. 네 박자⁠. 귀에서 북소리가 사라지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횃불 하나가 멀어졌다⁠. 모래 마당이 기울었다⁠. 나는 루벤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 놓으면 이 물이 다시 팔꿈치를 넘는다⁠.

다섯 박자째에⁠, 누군가 내 왼손을 잡았다⁠.

맨손이었다⁠. 작고⁠, 멍투성이고⁠, 뜨거운 손⁠. 이 손으로 내 안에 고인 것이 흘러 나갔다⁠. 물이 둑을 터 반대쪽으로 빠지듯⁠. 클라라가 내 왼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있었다⁠. 성녀의 방식으로⁠. 받아서 바꾸지 않고⁠, 기도로 삭이는 방식으로⁠.

여섯 박자째에 심장이 뛰었다⁠.

한 번 뛰자 두 번 뛰었다⁠. 숨이 들어왔다⁠. 거꾸로 쉬던 숨이 바로 쉬어졌다⁠. 루벤의 팔을 감던 검은 물이 내 오른손으로⁠, 내 몸을 지나 내 왼손으로⁠, 왼손에서 클라라에게로 흘렀다⁠. 셋이 한 줄로 이어졌다⁠. 통증이 셋으로 나뉘었다⁠.

그런데 물은 멈추지 않았다⁠. 루벤의 술식은 이미 돌아 버린 물레방아였다⁠. 끊었는데도 돌던 힘으로 계속 돌았다⁠. 모래 회오리가 우리 넷을 감싸고 점점 좁혀 들어왔다⁠. 루벤의 망토가 찢어져 날아갔다⁠. 클라라의 무릎이 꺾였다⁠. 기도로 삭이는 속도보다 들어오는 속도가 빨랐다⁠.

“⁠안 돼요⁠.⁠” 클라라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클라라의 입술에서 피가 났다⁠. “⁠삭이다가는 다 같이 죽어요⁠.⁠”

“⁠그럼⁠…⁠…⁠”

“⁠깨야 해요⁠.⁠”

클라라가 눈을 떴다⁠. 이 눈에서 무언가가 결정되는 것을 나는 봤다⁠. 기도를 멈췄다⁠. 받은 통증을 삭이지 않고 쥐었다⁠. 쥐어서 바꿨다⁠. 마력으로⁠. 술식을 배운 적 없는 성녀의 손이⁠, 본능처럼⁠, 통증을 힘으로 바꿔 회오리 한가운데로 내리쳤다⁠.

흰빛이 났다⁠. 흰빛과 검보랏빛이 부딪쳐 한순간 대련장이 대낮처럼 밝았다⁠. 그리고 소리 없이 깨졌다⁠. 회오리가 무너지고⁠, 공중에 들렸던 눈이 한꺼번에 내려와 우리 넷의 어깨에 쌓였다⁠. 바닥에 붙어 떨던 횃불 하나가 일어섰다⁠. 꺼졌던 여섯 개가 차례로 다시 붙었다⁠. 하나⁠, 둘⁠, 셋⁠.

대련장이 조용해졌다⁠. 너무 조용해서 눈이 모래에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사각⁠, 사각⁠. 내 어깨에도⁠, 루벤의 머리에도⁠, 클라라의 두건에도 눈이 쌓였다⁠. 루벤의 손목을 쥔 내 손가락이 그제야 풀렸다⁠. 한 마디씩⁠, 아주 천천히⁠. 손가락 마디마다 루벤의 손목 모양이 붉게 남아 있었다⁠.

*

나는 모래 위에 주저앉아 있었다⁠. 숨을 쉬고 있었다⁠.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렸다⁠. 너무 세게 두드려서 아팠다⁠. 이 아픔이 내 것이었다⁠. 처음으로 남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었다⁠.

루벤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내 얼굴을 두 손으로 잡았다⁠. 줄 생긴 손으로⁠. 루벤의 오른팔 줄은 손목에서 팔꿈치 바로 아래까지 올라와 있었다⁠. 거기서 멈춰 있었다⁠. 팔꿈치를 넘지 않았다⁠.

“⁠누나⁠.⁠” 루벤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누나⁠, 살았어⁠?⁠”

“⁠응⁠.⁠”

“⁠동지 지났어⁠?⁠”

“⁠아직⁠.⁠” 나는 웃었다⁠. 웃으니 갈비뼈가 울렸다⁠. “⁠근데 안 죽었어⁠.⁠”

관람석에서 누가 굴러 내려왔다⁠. 계단을 반쯤 미끄러지고 반쯤 뛰어서⁠. 베티였다⁠. 베티는 모래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내 등 뒤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앞치마에서 찐빵 냄새가 났다⁠. 베티의 팔이 떨렸는데 목소리는 하나도 떨리지 않았다⁠.

“⁠아가씨⁠! 동짓날에 죽는다고 도련님한테 말해 놓고 왜 안 죽어요⁠! 아니⁠, 죽으시라는 게 아니라⁠, 죽는다는 말을 왜 해요⁠! 도련님이 그날부터 열여드레 동안 밥을 반 그릇씩 먹었어요⁠!⁠”

“⁠미안해⁠.⁠”

“⁠존댓말 쓰실 때가 차라리 나았어요⁠.⁠” 베티가 내 정수리에 이마를 박았다⁠. 그리고 거기서 한참 숨을 몰아쉬었다⁠.

모래 위에 도린이 누워 있었다⁠. 도린의 눈은 떠 있었다⁠. 루벤의 팔을 보고 있었다⁠. 팔꿈치 바로 아래에서 멈춘 줄⁠. 웃지 않았다⁠. 찡그리지도 않았다⁠. 도린의 통증은 우리 셋이 나눠 가졌다⁠.

“⁠팔꿈치⁠.⁠” 도린이 말했다⁠. 숨이 거의 없는 목소리였다⁠. “⁠거기서⁠…⁠… 멈추는군요⁠. 셋이 나누면⁠.⁠”

다음 말은 없었다⁠. 도린의 넷째 손가락 없는 손이 모래 위에서 펴졌다⁠. 십 년 동안 장갑 속에 있던 손이 처음으로 아무것도 쥐지 않았다⁠.

오웬이 우리 앞에 서 있었다⁠. 칼은 뽑혀 있었는데 칼끝이 모래를 향했다⁠. 루벤의 팔꿈치 아래 멈춘 줄을 오래 봤다⁠.

“⁠첫 삶에서는 이 밤에 줄이 심장까지 갔다⁠.⁠” 오웬이 낮게 말했다⁠. 나한테만 들리게⁠. “⁠루벤이 그렇게 말했다⁠. 누나 손이 식어 가는 동안 줄이 가슴으로 올라왔다고⁠. 뜨거웠다고⁠.⁠”

칼끝이 모래에 닿았다⁠. 오웬은 칼을 짚고 섰다⁠. 지팡이처럼⁠. 그리고 나를 보고⁠, 도린을 봤다⁠. 다음 내 왼쪽을 봤다⁠.

클라라가 모래에 손을 짚고 일어나고 있었다⁠. 찢어진 사제복 소매가 팔꿈치까지 흘러내렸다⁠. 횃불 일곱이 다 살아난 빛 속에서⁠, 클라라의 왼쪽 손목 안쪽에 검은 줄이 하나 피어 있었다⁠. 머리카락만큼 가늘게⁠, 한 바퀴⁠.

클라라가 이것을 내려다봤다⁠.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엄지로 이 줄을 한 번 쓸어 봤을 뿐이었다⁠. 루벤이 첫날 아침 그랬던 것처럼⁠.

원작에 없던 일이었다⁠. 내가 읽은 『⁠재의 대륙⁠』 어디에서도 성녀의 손목은 깨끗했다⁠. 오웬의 첫 삶에서도 마지막 날까지 그랬을 것이다⁠.

“⁠아가씨⁠.⁠” 클라라가 나를 봤다⁠. 클라라의 목소리는 이상하게 차분했다⁠.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는 이 목소리 그대로였다⁠. “⁠이게 그 줄이에요⁠? 루벤 씨 손목에 있던 거⁠. 생각보다 안 아프네요⁠. 하나도 안 아파요⁠.⁠”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 줄이 아프지 않다는 것이 이 줄의 가장 무서운 점이었다⁠.

심판석에서 지팡이가 계단을 짚는 소리가 났다⁠. 한 칸씩⁠. 심문 주교가 모래 마당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클라라의 찢어진 소매 조각을 손에 쥔 채⁠. 클라라 앞에 섰다⁠. 클라라의 손목을 내려다봤다⁠. 이 얼굴에 놀람은 없었다⁠. 오래 기다리던 편지를 받은 사람 같은 얼굴이었다⁠.

주교가 몸을 돌려 관람석을 올려다봤다⁠. 다시 자리로 돌아와 계단에 매달린 교수들과 학생들을⁠. 그리고 지팡이 끝으로 루벤을 가리켰다⁠.

“⁠보시오⁠. 성녀가 더럽혀졌소⁠.⁠” 주교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부드러워서 대련장 끝까지 갔다⁠. “⁠흑마의 씨앗이 성녀의 손을 더럽혔소⁠.⁠”

지팡이 끝이 오웬에게로 갔다⁠.

“⁠오웬 경⁠. 저 씨앗을 베시오⁠. 지금⁠, 여기서⁠.⁠”

오웬의 칼끝이 모래에서 올라왔다⁠. 천천히⁠. 루벤의 목 높이까지⁠. 나는 루벤 앞으로 몸을 옮겼다⁠. 일어설 힘이 없어서 무릎으로 기었다⁠. 칼끝이 내 어깨 위로⁠, 입학식 날 저녁처럼 내 오른쪽 어깨를 스칠 듯 지나 루벤의 목 앞에서 멈췄다⁠.

14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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