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5,342자)

동지 전날

빙의한 엑스트라가 최종 보스의 누나였다 · 하진명

도린의 발소리가 계단을 내려가 골목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셋방 안에서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열어 둔 문으로 찬 바람이 들어와 등잔불을 눕혔다⁠. 베티가 문을 닫았다⁠. 빗장을 지르는 소리가 났다⁠.

“⁠할게⁠.⁠” 루벤이 말했다⁠.

“⁠안 돼⁠.⁠”

“⁠거부하면 낙제야⁠. 낙제하면 마탑 밖이고⁠, 마탑 밖에서 이 손목은 교단 거야⁠. 대성당 제단에 손 올리는 거⁠.⁠” 루벤이 소매를 걷어 줄을 등잔불에 들이댔다⁠. “⁠받으면 마탑에 남아⁠. 흑마가 되든 말든⁠.⁠”

“⁠흑마가 되면 오웬이 그 자리에서 베⁠. 주교가 그러라고 했대⁠.⁠”

“⁠그럼 둘 중 하나네⁠. 손이 잘리든가⁠, 목이 잘리든가⁠.⁠” 루벤이 웃었다⁠. 웃는데 입꼬리만 올라갔다⁠. “⁠누나가 정해 줄 거야⁠?⁠”

“⁠응⁠. 내가 정해⁠.⁠”

루벤이 소매를 내렸다⁠. 이 손이 떨렸다⁠. 화가 나서 떨리는 손이었다⁠.

“⁠왜⁠?⁠” 루벤이 물었다⁠.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졌다⁠. “⁠누나는 왜 갑자기 나를 이렇게 붙잡아⁠? 입학식 전까지 누나는 나랑 밥도 같이 안 먹었어⁠. 지팡이 팔고 생색냈어⁠. 근데 그날 아침부터 달라졌어⁠. 베티한테 존댓말 하고⁠, 성기사 손 치고⁠, 날짜를 알고⁠. 무릎이 날씨를 안다고⁠? 그날부터 누나는 내가 아는 누나가 아니야⁠.⁠”

방 안이 조용했다⁠. 베티가 빗장 앞에서 돌아서지 않았다⁠.

“⁠누나 누구야⁠?⁠”

나는 대답할 말을 골랐다⁠. 고를 수 있는 말이 하나도 없었다⁠. 새벽 두 시의 사무실⁠, 꺼진 모니터⁠, 휴대전화 화면의 한 줄⁠. 이걸 말하면 이 아이는 자기가 소설 속 악역이라는 걸 알게 된다⁠. 서른 도시를 태우고 원작 주인공에게 죽는 악역⁠.

“⁠네 누나야⁠.⁠” 내가 말했다⁠. “⁠이번 동지엔 안 죽는 누나⁠.⁠”

루벤의 얼굴이 하얗게 굳었다⁠.

“⁠죽어⁠? 누가 죽는다고 했는데⁠?⁠”

말이 새어 나간 뒤였다⁠. 루벤은 나를 오래 봤다⁠. 그리고 문을 열고 나갔다⁠.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났다⁠. 아래가 아니라 위로⁠. 지붕이었다⁠.

*

베티가 화덕 앞에 앉아 불씨를 뒤적였다⁠. 장작은 오웬이 사흘 전에 한 짐 지고 와서 계단 밑에 쌓아 두고 간 것이었다⁠. 나를 보지 않고 말했다⁠.

“⁠첫날 아침에 알았어요⁠.⁠”

“⁠뭘⁠?⁠”

“⁠아가씨가 아닌 거요⁠.⁠” 베티가 부지깽이를 내려놓았다⁠. “⁠베티가 이마 짚을 때 안 피하셨어요⁠. 원래 아가씨는 베티 손을 피해요⁠. 열 살 때부터⁠. 나리가 마탑에서 쫓겨난 해부터요⁠. 누가 만지면 몸을 빼셨어요⁠.⁠”

나는 화덕 앞에 앉았다⁠. 무릎이 시큰거렸다⁠. 이 무릎의 주인은 누가 만지면 몸을 빼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상관없어요⁠.⁠” 베티가 말했다⁠. 목소리가 평소처럼 컸다⁠. 크게 말하지 않으면 떨릴 것 같은 목소리였다⁠. “⁠지금 아가씨가 도련님을 붙잡잖아요⁠. 원래 아가씨도 붙잡고 싶어 했어요⁠. 지팡이 판 돈으로 입학금 낸 날 밤에⁠, 부엌에서 혼자 울었어요⁠. 생색은 도련님 앞에서만 냈고요⁠. 붙잡는 법을 몰랐어요⁠. 몸을 빼는 사람은 붙잡는 법을 몰라요⁠.⁠”

화덕 불이 탁 튀었다⁠. 베티가 앞치마로 눈가를 한 번 훔쳤다⁠. 그리고 일어섰다⁠.

“⁠도련님 지붕에서 얼어 죽기 전에 담요 갖다주세요⁠. 베티는 무릎이 아파서 지붕 못 올라가요⁠.⁠”

“⁠베티도 무릎 아파⁠?⁠”

“⁠이 집 사람들은 다 무릎이 아파요⁠. 그래서 날씨를 알아요⁠.⁠”

나는 담요를 들고 지붕으로 올라갔다⁠. 루벤은 공방 굴뚝 옆에 웅크리고 있었다⁠. 오웬이 밤마다 앉던 자리였다⁠. 나는 담요를 루벤의 어깨에 덮었다⁠. 뿌리치지 않았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강 건너 흰 탑을 봤다⁠. 동지까지 열여드레가 남아 있었다⁠.

*

동지 나흘 전 밤⁠, 나는 강변 창고로 갔다⁠. 오웬은 거기 묵었다⁠. 교단 성기사들이 에이르에서 쓰는 낡은 곡물 창고였다⁠. 다른 기사들은 대성당 숙소로 옮겼는데 그만 남았다고 했다⁠. 주교의 칼은 주교 옆에서 자지 않아도 되었다⁠.

창고 안은 곡물 먼지 냄새와 쇠 냄새가 났다⁠. 짚단 위에 담요 한 장⁠, 이 옆에 칼과 숫돌⁠. 등잔 하나가 켜져 있었다⁠. 판자벽에 숯으로 그린 그림이 하나 있었다⁠. 동그란 찐빵 다섯 개였고⁠, 이 밑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베티 아주머니⁠」라고 적혀 있었다⁠. 벨로가 대성당 숙소로 옮기기 전에 남긴 것이라고 오웬이 말했다⁠. 지우지 않았다고⁠.

“⁠사형수는 누구예요⁠?⁠”

“⁠아래 도시 짐꾼이다⁠. 술집에서 사람을 쳐 죽였다⁠. 교단 재판에서 사형이 났다⁠.⁠” 오웬이 숫돌에서 칼을 들었다⁠. “⁠동짓날 밤 시험장에 독을 먹고 실려 온다⁠. 숨이 끊어질 때쯤 루벤의 손에 그 손이 쥐여진다⁠.⁠”

나는 계획을 말했다⁠. 클라라가 시험장에 와야 한다⁠. 주교가 성녀를 증인으로 앉히려 할 테니 그건 될 것이다⁠. 사형수의 숨이 끊어질 때 클라라가 먼저 이 손을 잡아 통증을 받는다⁠. 성녀의 방식으로⁠. 바꾸지 않고 기도로 삭이는 방식으로⁠. 남는 것이 루벤에게 가면⁠, 이때 내가 루벤의 손목을 잡아 끊는다⁠. 지하 세 번째 층에서 한 것처럼⁠.

“⁠그때 네 심장이 세 박자 멎었다⁠.⁠” 오웬이 말했다⁠.

“⁠이번엔 성녀님이 반을 받아요⁠.⁠”

“⁠그리고 첫 삶에서 너는 그 손을 잡다 죽었다⁠.⁠”

“⁠그건 첫 삶의 레나고요⁠.⁠”

오웬이 칼을 내려놓았다⁠. 오웬의 손이 목깃으로 갔다⁠. 늘 하던 손짓이었다⁠. 클라라가 말한⁠, 밤마다 깨어 목을 만지는 손⁠.

“⁠아파요⁠?⁠”

“⁠늘⁠.⁠” 오웬이 말했다⁠. “⁠아물었는데 안에서 탄다⁠. 성도 대성당이 무너지던 날 그대로⁠.⁠”

나는 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오웬의 손을 목깃에서 내렸다⁠. 그리고 내 맨손을 이 화상 위에 얹었다⁠. 반질반질한 살이 손바닥 아래에서 뜨거웠다⁠. 숨을 오웬의 숨에 맞췄다⁠.

불이 왔다⁠. 대련장의 불도⁠, 열병의 불도 아니었다⁠. 돌이 무너지며 내는 굉음이 귓속에서 났다⁠. 등 위로 대들보가 떨어졌다⁠. 목에서 쇄골까지 살갗이 녹아내렸고⁠, 이 위로 연기가 폐를 채웠다⁠. 이 모든 것이 한 사람의 목 위에서 몇 달 동안 꺼지지 않고 타고 있었다⁠.

나는 손을 떼지 않았다⁠. 오웬의 숨이 길어졌다⁠. 오웬의 어깨가 처음으로 내려갔다⁠. 이 어깨가 그렇게 낮아질 수 있는 줄 몰랐다⁠. 오웬이 눈을 감았다⁠. 감은 눈꺼풀이 떨렸다⁠.

내 목에 열이 올랐다⁠. 오웬의 화상과 같은 자리에 붉은 멍이 피는 것이 느껴졌다⁠. 오웬이 눈을 떴다⁠. 내 목을 봤다⁠. 오웬의 손이 올라와 내 목에 핀 멍 위에 닿았다⁠. 장갑 없는 손이었다⁠. 손끝이 차가웠다⁠. 이 차가움이 멍 위에서 오래 머물렀다⁠.

누가 먼저였는지는 모른다⁠. 오웬의 숨과 내 숨이 너무 가까워서 어느 쪽 숨인지 가를 수 없었다⁠. 입술이 닿았을 때 그에게서 탄 냄새가 났다⁠. 비에 젖어도 빠지지 않던 이 냄새⁠. 오웬의 손이 내 허리를 감았다⁠. 칼을 쥐던 손이 그렇게 조심스러울 줄 몰랐다⁠. 등잔불이 짚단 위에 우리 그림자를 하나로 눕혔다⁠. 창고 판자벽 틈으로 강바람이 들어와 내 목의 멍을 식혔고⁠, 오웬의 손바닥이 이 자리를 다시 데웠다⁠.

한참 뒤 오웬이 이마를 내 이마에 댄 채 물었다⁠.

“⁠넌 누구냐⁠?⁠”

이번에는 대답했다⁠.

“⁠윤한별이요⁠. 다른 세상에서 회사를 다녔어요⁠. 새벽 두 시에 이 세상을 소설로 읽다가 여기서 깼어요⁠. 제목은 『⁠재의 대륙⁠』이고⁠, 주인공은 당신이에요⁠.⁠”

오웬은 웃지 않았다⁠. 내 이마에서 이마를 떼지 않았다⁠.

“⁠그 책에서 나는 이겼나⁠?⁠”

“⁠몰라요⁠. 2권 앞부분까지만 읽었어요⁠. 1권 끝에서 레나가 죽고⁠, 2권 첫 장에 마탑이 타요⁠.⁠”

“⁠결말은 내가 안다⁠.⁠” 오웬이 말했다⁠. “⁠다 탄다⁠. 나도⁠.⁠”

“⁠그럼 이번 결말은 둘 다 모르는 거네요⁠.⁠”

이 사람이 숨을 내쉬었다⁠. 이 숨이 내 목의 멍 위로 지나갔다⁠. 탄 냄새가 조금 옅어져 있었다⁠.

*

동짓날 낮⁠, 오웬은 주교의 칼로서 대성당 기도실 문 앞까지 갈 수 있었다⁠. 나는 이 칼의 그림자로 따라갔다⁠. 찐빵 바구니를 든 학관 일정 담당⁠. 기도실 문지기 사제는 오웬의 외투와 내 바구니를 번갈아 보다가 길을 비켰다⁠.

기도실 문은 참나무였고⁠, 아래쪽에 밥그릇이 드나드는 작은 구멍이 있었다⁠. 나는 이 구멍 앞에 쪼그려 앉아 찐빵 하나를 밀어 넣었다⁠. 안에서 손이 나와 이걸 받았다⁠. 멍든 손이었다⁠.

“⁠베티 아주머니 빵이죠⁠?⁠” 문 너머에서 클라라의 목소리가 났다⁠. 입에 무언가가 든 목소리였다⁠. “⁠교단 기도실 빵은 사흘 묵은 거예요⁠. 이건 오늘 거네요⁠.⁠”

“⁠오늘 밤 시험장에 증인으로 불려 가시죠⁠?⁠”

“⁠주교님이 그러셨어요⁠. 성녀가 셋째 계단이 열리는 걸 직접 보아야 한다고⁠.⁠” 빵 씹는 소리가 멈췄다⁠. “⁠아가씨⁠, 그 계단 정말 열려요⁠?⁠”

나는 계획을 말했다⁠. 문 구멍에 입을 대고 짧게⁠. 사형수의 마지막 숨⁠, 먼저 잡는 성녀의 손⁠, 남는 것을 끊는 내 손⁠. 문 너머가 한참 조용했다⁠. 다음에 들린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제가 먼저 잡을게요⁠.⁠” 클라라가 말했다⁠. “⁠천막에서 아가씨가 먼저 해 버린 그 말 있잖아요⁠. 이제는 제 입으로 해도 되겠죠⁠. 오늘 밤에⁠.⁠”

구멍으로 빈 손이 나왔다⁠. 나는 찐빵 하나를 더 쥐여 줬다⁠. 오웬이 문 옆 벽에 기대 선 채 이 손을 내려다봤다⁠. 첫 삶에서 이 손을 마지막으로 잡았던 사람의 얼굴이었다⁠.

*

동짓날 밤⁠, 흰 탑 뒤 대련장에 횃불 일곱 개가 꽂혔다⁠. 입학식 날 저녁 이 모래 마당이었다⁠. 모래 위에 눈이 얇게 덮여 있었고⁠, 이 눈을 쓸어 낸 자리만 모래가 드러나 둥글었다⁠.

관람석에 마탑 교수들과 신입생들이 앉았다⁠. 심판석에는 심문 주교가 앉았고⁠, 이 옆에 클라라가 흰 두건을 쓰고 앉았다⁠. 얼굴이 기도실 벽처럼 하얬다⁠. 대련장 출입구에 흰 외투가 서 있었다⁠. 칼을 찬 채⁠. 오웬은 모래 마당 하나만 보고 있었다⁠. 입학식 날 맞은편 관람석 꼭대기에서 그랬던 것처럼⁠.

나는 관람석 맨 아래 돌계단에 자리를 잡았다⁠. 입학식 날과 같은 자리였다⁠. 무릎 위에 아무것도 없었다⁠. 이날은 루벤이 벗어 던진 아버지의 망토가 있었다⁠.

루벤이 모래 마당으로 들어왔다⁠. 아버지의 망토를 입은 채였다⁠. 쪽빛이 덜 빠진 단이 횃불에 검게 보였다⁠.

도린이 모래 마당 한가운데 서 있었다⁠. 감독의 자리였다⁠. 자주색 장갑을 끼고⁠. 출입구 쪽을 향해 손을 들었다⁠. 교단 사제 둘이 들것 하나를 들고 들어오다가 이 손짓을 보고 멈췄다⁠. 들것 위에 쇠사슬에 묶인 사내가 누워 있었다⁠.

“⁠사형수는 돌려보내십시오⁠.⁠” 도린이 말했다⁠. 관람석 꼭대기까지 들리게⁠. “⁠필요 없습니다⁠.⁠”

관람석이 술렁였다⁠. 심판석의 주교가 지팡이에 두 손을 얹었다⁠. 말리지 않았다⁠. 미소를 지었다⁠.

도린이 자주색 장갑을 벗었다⁠. 넷째 손가락 없는 왼손이 횃불 아래 드러났다⁠. 손목의 두 바퀴 줄도⁠. 교수복 안주머니에서 엄지만 한 유리병을 꺼냈다⁠. 마개를 이로 뽑았다⁠. 그리고 마셨다⁠. 한 모금에⁠.

“⁠도린⁠!⁠” 내가 일어섰다⁠.

도린은 빈 병을 모래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루벤에게 걸어갔다⁠. 세 걸음⁠. 도린의 걸음이 벌써 흔들렸다⁠. 왼손을 내밀었다⁠. 손가락 넷이 루벤의 가슴 앞에서 떨렸다⁠.

“⁠사형수의 통증은 남의 것입니다⁠, 루벤 군⁠.⁠” 도린이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남의 통증을 말할 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자기 통증을 말하는 목소리였다⁠. “⁠제 것은 십 년이 들어 있습니다⁠. 어머니의 열병도⁠, 썩은 손가락도⁠, 냉실의 일곱도⁠. 가져가십시오⁠. 셋째 계단입니다⁠.⁠”

13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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