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5,365자)

소환장

빙의한 엑스트라가 최종 보스의 누나였다 · 하진명

칼끝이 루벤의 목울대 앞에서 멈춰 있었다⁠. 내 오른쪽 어깨를 스칠 듯이⁠. 입학식 날 저녁과 같은 자리였다⁠. 다른 것이 하나 있었다⁠. 칼끝이 떨렸다⁠. 이날은 떨리지 않았다⁠.

“⁠베시오⁠.⁠” 심문 주교가 다시 말했다⁠.

오웬은 칼을 든 채 루벤을 봤다⁠. 팔꿈치 밑에서 걸음을 멈춘 검은 줄⁠. 그리고 칼끝 너머의 나를 봤다⁠. 오웬의 목깃 위 화상이 횃불에 반질거렸다⁠. 나흘 전 밤 내가 손을 얹었던 자리였다⁠. 거기서 탄 냄새가 조금 옅어졌었다⁠.

“⁠주교님⁠.⁠” 오웬이 말했다⁠. 목소리가 고르고 낮았다⁠. “⁠주교님은 흑마가 태어나는 자리에서 베라 하셨습니다⁠. 그 전에는 손끝도 대지 말라 하셨고요⁠.⁠”

주교의 미소가 멈췄다⁠.

“⁠줄은 팔꿈치 아래입니다⁠. 흑마는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오웬이 칼을 거뒀다⁠. 칼집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길었다⁠. 대련장 끝까지⁠. “⁠그 전에는 손끝도 대지 말라 하셨지요⁠. 명대로 하겠습니다⁠.⁠”

남의 말을 그대로 돌려주는 것⁠. 그건 내 버릇이었다⁠. 오웬이 이 버릇을 주교 앞에서 썼다⁠.

주교는 오웬을 오래 봤다⁠. 그리고 다시 웃었다⁠. 이번에는 미소가 아니라 웃음이었다⁠. 짧고 마른⁠.

“⁠좋소⁠. 경은 명을 잘 따르는군⁠.⁠” 주교가 지팡이를 돌려 클라라를 가리켰다⁠. “⁠그럼 성녀님을 성도로 모시겠소⁠. 더럽혀진 손은 성도에서 정화해야 하오⁠.⁠”

성기사 넷이 클라라를 둘러쌌다⁠. 클라라는 저항하지 않았다⁠. 찢어진 소매를 손목까지 끌어내려 줄을 덮었다⁠. 그리고 성기사들 사이로 나를 봤다⁠.

“⁠아가씨⁠.⁠” 클라라가 말했다⁠. “⁠베티 아주머니 빵⁠, 성도까지 가져가도 돼요⁠? 성도 빵은 닷새 묵은 거라서⁠.⁠”

베티가 내 뒤에서 빈 바구니를 들어 보였다⁠. 빈 바구니였다⁠. 베티는 바구니를 내려다보더니 앞치마 주머니에서 찐빵 하나를 꺼냈다⁠. 마지막 하나⁠. 이걸 성기사 어깨 너머로 던졌다⁠. 클라라가 두 손으로 받았다⁠.

“⁠성녀님은 제가 호위하겠습니다⁠.⁠” 오웬이 앞으로 나섰다⁠.

“⁠경은 에이르에 남으시오⁠.⁠” 주교가 말했다⁠. “⁠마탑이 씨앗을 내놓을 때까지⁠.⁠” 주교가 관람석 꼭대기를 올려다봤다⁠. “⁠학장⁠. 아쉬포드 루벤을 교단에 넘기시오⁠.⁠”

마탑 학장은 서 있었다⁠. 클라라가 모래를 밟을 때부터 앉지 않고 서 있었다⁠. 관람석 계단을 한 칸씩 내려왔다⁠. 은빛 수염이 횃불에 떨렸다⁠. 모래 마당 가장자리에서 멈췄다⁠.

“⁠수험생 아쉬포드 루벤은 시험을 마쳤소⁠.⁠” 학장이 말했다⁠. 마흔 해를 마탑에서 산 늙은이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대련장 끝까지 갔다⁠. “⁠감독이 정한 통증을 받았고⁠, 받고서 살아남았소⁠. 셋째 계단에 오르지 않고⁠. 마탑의 시험은 그것으로 끝이오⁠. 합격이오⁠.⁠” 학장이 지팡이 없는 손을 들어 루벤을 가리켰다⁠. “⁠저 아이는 마탑 학생이오⁠. 마탑은 학생을 내주지 않소⁠.⁠”

주교가 학장을 봤다⁠. 둘 사이에 모래 마당이 있었다⁠. 도린이 누워 있는 모래 마당⁠.

“⁠그럼 성도에서 부르겠소⁠.⁠” 주교가 말했다⁠. 주교는 돌아섰다⁠. 클라라를 둘러싼 성기사들이 뒤를 따랐다⁠. 출입구에서 클라라가 한 번 돌아봤다⁠. 찐빵을 두 손에 쥔 채⁠.

대련장이 비어 갔다⁠. 교수들이 학생들을 몰고 관람석을 내려갔고⁠, 학장은 모래 마당 가장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오웬은 모래 위에 떨어진 자주색 장갑 한 짝을 주웠다⁠. 도린이 독을 마시기 전에 벗어 던진 것이었다⁠. 이 장갑을 도린의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넷째 손가락 자리가 접힌 채로⁠. 그리고 내 쪽을 한 번 봤다⁠. 아무 말도 없이⁠. 출입구로 걸어 나가는 도린의 걸음은 고르지 않았다⁠. 쇠 장화가 모래에 두 번 미끄러졌다⁠.

*

원작 2권은 이 문장으로 시작한다⁠. 동지 사흘 뒤 새벽⁠, 흰 탑이 불탔다⁠.

나는 이 새벽 셋방 창가에 앉아 있었다⁠. 사흘을 누워 있다 처음 일어난 날이었다⁠. 명치 위에 피었던 검은 꽃은 도린의 것까지 받아 두 송이가 되었다가⁠, 사흘 동안 한 송이로 줄었다⁠. 숨을 쉬면 아직 꽃잎 끝이 섰다⁠. 이 아픔이 반가웠다⁠. 남의 것이 아니라 내 몸이 버틴 자국이었다⁠.

창밖으로 쪽빛 김이 올라왔다⁠. 이 김 너머⁠, 강 위쪽에 흰 탑이 서 있었다⁠. 새벽빛을 받아 하얬다⁠. 연기 한 줄 없었다⁠.

해가 다 떠오를 때까지 나는 창가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흰 탑은 계속 서 있었다⁠. 원작의 다음 문장은 「⁠루벤은 불타는 탑 꼭대기에서 웃었다⁠」였다⁠. 루벤은 벽 쪽에서 코를 골고 있었다⁠. 오른팔을 이불 밖으로 내놓은 채⁠. 긴 소매가 팔꿈치까지 내려와 있었다⁠.

내가 읽은 2권은 첫 장과 뒤의 첫 막간까지였다⁠. 두 번째 장을 열기 전에 퇴근 버스가 왔다⁠. 다음 문장은 모른다⁠. 다음 날도 모른다⁠. 오늘부터 나는 이 세상을 읽은 사람이 아니었다⁠.

*

해가 다 오른 아침⁠, 도린을 묻었다⁠. 교단은 흑선 있는 자를 성당 묘지에 들이지 않았다⁠. 마탑은 묻을 자리를 내놓지 않았다⁠. 아래 도시 강변 버드나무 밑에 구덩이를 판 것은 흰 탑 지하 병자 방에서 살아 나온 열다섯 가운데 걸을 수 있는 여섯이었다⁠. 허리에 판자를 댄 짐꾼 하나⁠, 손가락이 쪽빛인 염색공 셋⁠, 열이 내린 여자 둘⁠.

나는 이 옆에 서 있었다⁠. 이들은 나를 알아봤다⁠. 지하 세 번째 층에서 쪽지 묶음을 흩뜨리고 늙은 염색공의 손을 잡았던 귀족 아가씨⁠. 쪽빛 손의 염색공 하나가 삽을 내려놓고 말했다⁠. 교수는 사람을 죽였고⁠, 자기네 허리와 손을 덜 아프게 했다고⁠. 둘 다라고⁠. 그리고 다시 삽을 들었다⁠.

루벤이 구덩이 앞에 섰다⁠. 망토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손가락 두 마디만 한 쇠 열쇠⁠. 손잡이에 흰 탑 문양⁠. 입학 이튿날 아침 저택 응접실 탁자에 놓였던 이 열쇠였다⁠. 루벤은 이것을 관 뚜껑 위에 올려놓았다⁠. 흙이 이 위로 덮였다⁠. 열쇠는 첫 삽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이제 그 문은 없어⁠.⁠” 루벤이 말했다⁠. 구덩이에 대고⁠.

학장은 남매에게 학관 서쪽 끝 방 둘을 내줬다⁠. 마탑 담장 안이었다⁠. 교단의 칼은 이 담장을 넘지 못한다⁠. 셋방 앞 골목에는 동지 이튿날부터 흰 외투 둘이 번갈아 섰다⁠. 주교가 남긴 성기사들이었다⁠. 그중 하나가 벨로였다⁠.

“⁠근무 중에 받으면⁠…⁠…⁠.⁠” 벨로가 베티가 내민 찐빵을 보며 말했다⁠.

“⁠식어요⁠.⁠”

“⁠주교님이 아쉬포드가 사람에게서 아무것도 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건 아쉬포드가 사람이 준 게 아니에요⁠. 베티가 준 거예요⁠. 베티는 이제 품삯을 받으니까 아쉬포드가 사람이 아니고 학관 사람이에요⁠.⁠” 베티가 찐빵을 벨로의 손에 쥐여 줬다⁠. 학장은 베티를 학관 부엌 일꾼으로 들이고 주에 은화 둘을 주기로 했다⁠. 석 달 만의 품삯이었다⁠. “⁠그리고 짐 좀 들어 줘요⁠. 무쇠 프라이팬이 셋이에요⁠.⁠”

벨로는 주교의 명과 찐빵 사이에서 잠깐 서 있다가 찐빵을 입에 넣고 프라이팬 셋을 들었다⁠.

강변에서 돌아온 뒤 베티는 점심때까지 짐을 쌌다⁠. 쌌다가 풀었다가 다시 쌌다⁠. 무쇠 냄비는 학관 부엌에 있다며 빼고⁠, 그래도 손에 익은 게 낫다며 다시 넣었다⁠. 셋방 공방 여주인이 계단 밑에서 올려다보며 말했다⁠. 일곱 번째 계단은 성기사가 갈아 놓은 새 판자니까 떼어 가지 말라고⁠. 베티는 진지하게 이 판자를 내려다봤다⁠.

루벤은 난로 앞에 있었다⁠. 무쇠 냄비에 물을 올리고 무를 썰었다⁠. 마른 생선 대가리 두 개를 넣었다⁠. 거품을 걷었다⁠. 걷는 손이 서툴렀다⁠. 나를 부르지 않고 혼자 간을 봤고⁠, 소금을 넣고⁠, 다시 봤다⁠. 한 시간이 지나 그릇 하나를 내 앞에 놓았다⁠.

“⁠누나 국은 물이었어⁠.⁠” 루벤이 말했다⁠. “⁠이게 국이야⁠.⁠”

나는 한 숟갈 떠먹었다⁠. 짰다⁠. 아주 짰다⁠. 짜서 목이 따끔거렸다⁠. 무는 반쯤 설익었고 생선 대가리에서 비늘이 하나 나왔다⁠. 국물 위에 기름 한 점 없었는데 이상하게 뜨거웠다⁠. 그릇을 쥔 손바닥이 데일 만큼⁠. 루벤이 그릇을 손으로 감싸 들고 왔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술식 없이⁠, 그냥 뜨거운 그릇을 맨손으로⁠.

“⁠짜⁠.⁠”

“⁠그래도 국이잖아⁠.⁠”

“⁠응⁠. 국이야⁠.⁠”

나는 비늘을 골라내고 그릇을 다 비웠다⁠. 마지막 한 숟갈까지 짰다⁠. 루벤이 내 앞에 서서 이걸 끝까지 봤다⁠. 무언가 말하려다 그만두고⁠, 냄비를 들고 돌아섰다⁠. 돌아선 채 말했다⁠. 냄비에 대고⁠.

“⁠고마워⁠. 누나⁠.⁠”

이 말이 셋방 안에서 오래 울렸다⁠. 베티가 짐을 싸던 손을 멈췄다가⁠, 아무것도 못 들은 척 다시 냄비를 상자에 넣었다⁠. 넣으면서 코를 훌쩍였다⁠. 감기라고 했다⁠.

*

노크는 오후에 왔다⁠. 세 번⁠. 오웬의 노크였다⁠. 일곱 시는 한참 지나 있었다⁠.

나는 문을 열었다⁠. 오웬이 서 있었다⁠. 계단 일곱 번째 칸 위에⁠. 자기가 갈아 끼운 판자 위에⁠. 흰 외투 어깨에 눈이 쌓여 있었다⁠. 털지 않은 눈이었다⁠. 강변에서부터 걸어오는 동안 한 번도 털지 않은 모양이었다⁠.

오웬의 손에 두루마리 하나가 들려 있었다⁠. 자주색 끈에 교단의 둥근 인장이 찍혀 있었다⁠.

“⁠성도에서 왔다⁠. 오늘 아침 배로⁠.⁠” 오웬이 말했다⁠. 존대가 없었다⁠. 처음 우리 집 대문 앞에 섰을 때의 딱딱한 존대도 없었다⁠. “⁠교단 수장의 소환이다⁠. 흑마의 씨앗 아쉬포드 루벤은 성도 대성당 재판에 선다⁠.⁠”

“⁠흑마의 씨앗이요⁠?⁠”

“⁠성녀의 손을 더럽힌 씨앗⁠.⁠” 오웬이 두루마리를 펴지 않았다⁠. 내용을 이미 아는 사람이었다⁠. “⁠성녀님의 줄은 그 줄을 낸 씨앗을 제단에 올려야 지워진다고 한다⁠. 교단 금서 어디에도 없는 말이다⁠. 나는 셋째 권까지 다 읽었다⁠.⁠”

방 안에서 루벤이 일어섰다⁠. 베티가 프라이팬 하나를 쥐었다⁠. 벨로는 골목 아래에서 짐 상자를 든 채 우리를 올려다봤다⁠.

“⁠성녀님은요⁠?⁠”

“⁠성도 대성당 지하 기도실⁠. 정화를 기다린다⁠. 씨앗이 올 때까지⁠.⁠” 오웬이 말했다⁠. 오웬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갈라졌다⁠. “⁠첫 삶에서 성녀님은 마지막 도시가 탈 때 내 품에서 죽었다⁠. 이번엔 손목에 줄을 달고 지하에 갇혔다⁠. 네 동생 때문에⁠. 그리고 네 손을 잡느라⁠.⁠”

“⁠그건 원작에 없어요⁠.⁠”

“⁠내 첫 삶에도 없다⁠.⁠” 오웬이 한 걸음 다가섰다⁠. 문턱 바로 앞⁠. 이 거리에서 탄 냄새가 났다⁠. 사흘 전보다 더 옅게⁠. “⁠내일 새벽 첫 배가 성도로 떠난다⁠. 나는 루벤을 데려가야 한다⁠. 주교의 칼로서가 아니라⁠, 성녀님을 아는 사람으로서⁠.⁠”

“⁠루벤이 재판에 서면 손이 잘려요⁠. 아니면 제단에서 더한 일이 나고요⁠.⁠”

“⁠안다⁠.⁠”

“⁠그런데도 데려가요⁠?⁠”

오웬이 두루마리를 쥔 손을 내렸다⁠. 장갑을 끼지 않은 손이었다⁠. 손등이 눈에 젖어 붉었다⁠. 나를 봤다⁠. 처음 대문 앞에서 본 이 셈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셈을 다 끝낸 사람의 얼굴이었다⁠. 이 셈의 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의 얼굴⁠.

내 등 뒤에서 루벤이 걸어 나왔다⁠. 내 옆에 섰다⁠. 긴 소매 밑으로 팔꿈치까지 올라온 줄이 있었다⁠. 오웬을 봤고⁠, 오웬의 손에 들린 두루마리를 봤다⁠.

“⁠갈게⁠.⁠” 루벤이 말했다⁠.

나는 루벤의 손목을 쥐었다⁠. 맨손으로⁠. 이번에는 아무것도 건너오지 않았다⁠. 이 손목에는 아픈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더 세게 잡았다⁠.

오웬이 내가 잡은 이 손목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다시 나를 봤다⁠. 문턱 하나를 사이에 두고⁠, 원작의 주인공과 원작에 한 줄 나오는 누나가 마주 서 있었다⁠. 이 문턱 위로 눈이 들이쳤다⁠.

“⁠성녀님이냐⁠, 네 동생이냐⁠?⁠” 오웬이 말했다⁠. “⁠이번엔 네가 골라라⁠.⁠”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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