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328자)
첫눈
빙의한 엑스트라가 최종 보스의 누나였다 · 하진명
루벤은 이날 밤 셋방으로 돌아왔다. 흰 탑에서 셋방까지 걸어오는 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일곱 번째 계단을 밟지 않으려고 성큼 건너뛰었고, 방에 들어와서는 침대 벽 쪽에 등을 붙이고 앉았다. 베티가 이 앞에 국그릇을 놓았다. 루벤은 그릇을 봤다. 그리고 숟가락을 들었다.
이튿날 아침 일곱 시, 노크가 세 번 울렸다.
오웬은 성기사 외투를 입고 있었다. 회색 사무원 웃옷은 학관에 돌려줬다고 했다. 칼도 다시 차고 있었다. 문간에서 칼을 풀어 식탁 다리에 기대 세웠다. 루벤은 앉기도 전에 오른쪽 소매를 걷어 식탁 위에 팔을 올려놓았다. 이를 갈지 않았다.
검은 줄은 한 바퀴 그대로였다. 오웬이 이것을 봤다. 오래 보지 않았다.
“그대로다.”
“알아.” 루벤이 소매를 내렸다. 그리고 주전자를 들어 오웬의 잔에 보리차를 따랐다. 베티가 국자를 들다 말고 이 손을 봤다. 나도 봤다. 오웬도 봤다. 셋이 다 봤는데 아무도 이 얘기를 하지 않았다.
“첫눈 날 어떻게 돼?” 루벤이 물었다.
“교단은 줄을 보면 그 손을 거둔다. 대성당 제단에서.” 오웬이 보리차를 마셨다. “나는 그 자리에 칼을 들고 서 있을 거다. 주교의 명이 있으면.”
“당신 지금 주교한테 조사받는다며.”
“그래서 더 명을 따라야 한다.”
베티가 오웬의 그릇에 국을 한 국자 더 떠 넣었다. 오웬이 아직 다 먹지 않았는데도.
“성기사님, 조사받는 사람은 많이 먹어야 해요. 우리 나리도 마탑에서 쫓겨날 때 조사받느라 열흘에 살이 한 근 빠지셨어요.”
오웬은 이 국을 다 먹었다. 그리고 빈 그릇을 베티 쪽으로 조금 밀어 놓았다. 더 달라는 뜻인지 다 먹었다는 뜻인지 베티는 묻지 않고 한 국자 더 떠 줬다.
*
첫눈 사흘 전 새벽, 오웬과 나는 염색 공방 하수로 앞에 섰다. 공방 뒤편 돌담 밑으로 난 시커먼 구멍에서 쪽빛 물이 강으로 흘러 나갔다. 원작 1권, 오웬이 에이르에 온 첫날 아침이 이 장면이다. 하수로 쇠창살에 사람 손이 걸려 있다. 파란 손.
창살에는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았다. 쪽빛 물만 흘렀다. 오웬이 무릎을 꿇고 창살 안을 들여다봤다. 횃불을 넣어 비췄다. 물이끼와 쪽빛 찌꺼기뿐이었다.
“없다.” 오웬이 말했다. 목소리가 이상했다. 안도한 목소리도, 실망한 목소리도 아니었다. 처음 와 본 길에서 길을 잃은 사람의 목소리였다. “처음이다. 첫 삶과 다른 아침은.”
“다른 아침 많았잖아요. 쪽빛 통에 빠진 아침도 있었고.”
오웬이 일어서며 무릎의 물기를 털었다. 강 건너 대성당 첨탑을 봤다.
“주교가 나를 불러 물었다. 어떻게 두 달 먼저 에이르에 올 생각을 했느냐고. 꿈을 꿨다고 했다.” 오웬이 말했다. “주교는 웃었다. 그리고 그 꿈에 자기가 나오느냐고 물었다.”
“나와요?”
“안 나온다. 첫 삶의 심문 주교는 성도를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다.” 오웬이 첨탑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도린은 대성당 감옥에서 날마다 차를 받는다. 교단 사제가 직접 우려 준다고 한다. 죄인에게.”
강바람이 불어 하수로 물 냄새를 우리 쪽으로 밀었다. 나는 숄을 여몄다. 원작에는 없던 사람이 원작에는 없던 차를 마시고 있었다. 사건을 막았는데 이 사건을 원하던 사람이 차를 받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을 원하던 사람은 도린 하나가 아니었다.
*
첫눈 날의 손목 검사는 학관 일이 되었다. 대강당에 학생 이백과 교수 서른을 세워 성녀와 사제 넷이 손목을 본다. 누가 어느 줄에 서는지 정하는 것은 학관 일정 담당이었다. 나였다.
서기 노인과 나는 이틀 밤을 접수대에서 보냈다. 대강당 바닥에 분필로 다섯 줄을 그을 자리를 정하고, 신입생부터 교수까지 누가 몇 번째에 설지 짰다. 신입생 마흔은 입학 순번대로 성녀의 줄에 섰다. 아쉬포드 루벤은 서른한 번째였다. 입학 순번이 원래 그랬다. 나는 순번을 하나도 바꾸지 않았다. 바꾼 것은 줄이었다. 원래 신입생은 사제의 줄에 서기로 되어 있었다. 성녀는 교수들을 보기로 되어 있었다.
“교수님들을 성녀님 줄에 세우면 성녀님이 오후까지 서 계셔야 해요.” 내가 서기 노인에게 말했다. “교수님들 손목은 털이 많아서 오래 걸리거든요. 신입생 손목은 금방 보시고.”
“털이 많아서?”
“제가 교수님들 손목을 다 봤어요. 강의실 배정하면서.”
서기 노인은 깃펜을 귀에 꽂고 한참 나를 봤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묻지 않고 줄을 바꿨다.
*
첫눈 전날 밤, 루벤이 등잔 심지를 자르다 말고 물었다. 베티는 떨어지는 쪽 가장자리에서 코를 골았다.
“누나는 날짜를 어떻게 알아?”
“무슨 날짜.”
“첫 서리. 누나는 성녀한테 첫 서리 날 와 달라고 했어. 그 전에. 서리가 언제 올지 어떻게 알고.” 루벤이 심지 자른 가위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내일 첫눈 온다는 것도. 아까 베티한테 찐빵 내일 아침에 쪄 두라고 했잖아. 학생들 눈 맞으면서 줄 설 거라고.”
나는 바느질하던 손을 멈췄다. 쪽빛 통에 빠졌다 나온 루벤의 망토가 무릎에 있었다. 물이 덜 빠진 단을 뜯어 다시 꿰매는 중이었다.
“무릎이 시큰거려서.” 내가 말했다. “이 무릎이 날씨를 알아.”
루벤이 내 무릎을 봤다. 그리고 내 얼굴을 봤다. 믿지 않는 눈이었다. 그런데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자기 오른 손목을 등잔 불에 비춰 봤다. 줄이 불빛에 검게 떴다.
“내일 이거 잘리면.” 루벤이 말했다. “왼손으로 살지 뭐. 오른손은 원래 가운데 손가락이 비틀렸어. 그 손으로 지팡이 쥐어 봤자 모양도 안 나.”
“안 잘려.”
“누나가 또 아픈 방법으로?”
“이번엔 줄 세우는 방법으로.”
루벤이 처음으로 웃었다. 흰 탑에서 돌아온 뒤로 처음. 짧게 코로 새는 웃음이었다. 등잔을 끄고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어둠 속에서 말했다. 누나는 예전에 줄 세우는 거 싫어했다고. 줄 서는 것도.
나는 예전의 레나를 몰랐다. 이 사람이 무엇을 싫어했는지 하나도 몰랐다. 그래서 대답하지 않았다.
*
첫눈은 아침 아홉 시에 왔다. 원작의 날짜 그대로. 대강당 높은 창 너머로 굵은 눈송이가 비스듬히 내렸고, 창유리에 닿는 족족 녹아 물줄기가 되었다. 대강당 안은 사람 이백서른의 숨으로 축축했다.
다섯 줄이 섰다. 학생들은 소매를 걷은 채 팔을 들고 서 있었다. 팔이 저려 서로의 어깨에 기대는 학생도 있었다. 손목에 연인의 이름 첫 글자를 먹으로 새긴 학생 둘이 사제 앞에서 이 글자를 손바닥으로 문질러 지우려 했다. 지워지지 않았다. 사제가 먹 글씨와 흑선을 구분하는 데 한참 걸렸다. 공작가 펠릭스는 손목에 가문 문장을 물감으로 그려 놓았다가 사제에게 씻으라는 말을 들었다. 씻으러 간 사이 펠릭스의 순번이 지나갔다. 교수 줄에서는 늙은 술식학 교수 하나가 소매를 걷자 손목 안쪽에 하트 문신이 나왔다. 이 안에 다른 교수의 이름 첫 글자가 있었다. 사제는 이것이 흑선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줄 선 교수 서른 명이 이것을 다 보는 데는 충분히 오래 걸렸다. 이름 첫 글자의 주인인 교수는 줄 맨 끝에서 소매를 내리고 대강당을 나갔다.
대강당 문밖에서 베티가 찐빵을 팔았다. 손목 검사를 기다리다 배고픈 학생들에게 동화 한 닢에 하나. 셋방 화덕에서 새벽 내내 쪄 온 빵이었다. 벨로가 이 옆에 서서 빵 바구니를 지켰다. 지키면서 하나씩 먹었다.
단상 위에 심문 주교가 앉아 있었다. 자주색 사제복, 목의 은 사슬, 무릎에 얹은 지팡이. 다섯 줄을 내려다보다가 성녀의 줄에서 눈을 멈췄다. 신입생들이 서 있는 줄. 그리고 이 줄을 짠 사람을 찾았다. 나는 단상 아래 서기 노인 옆에 있었다.
“일정 담당.”
단상 위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내려왔다. 나는 단상 앞으로 갔다.
“성녀님이 신입생을 보시는군. 원래는 교수를 보시기로 하지 않았소?”
“교수님들 손목은 털이 많아서요. 성녀님이 오래 서 계시면 오후 일정이 다 밀립니다, 주교님.”
“털.” 주교가 이 말을 입 안에서 한 번 굴렸다. “아쉬포드 학생은 어느 줄이오?”
“입학 순번대로 성녀님 줄입니다. 서른한 번째요.”
“내 앞으로 옮기시오.”
대강당 앞쪽이 조용해졌다. 나는 숨을 한 번 쉬었다. 회의실에서 갑이 마지막 날 사양을 바꾸자고 할 때 쉬던 이 숨.
“주교님 앞은 교수님 서른 명의 줄로 잡혀 있습니다. 지금 학생 하나를 옮기면 그 뒤 교수님 순번이 하나씩 밀리고, 오후 실습 강의실 배정이 다 다시 짜여요. 옮기시려면 서면으로 요청해 주시면 검토 후 회신드리겠습니다. 다음 손목 검사 때 반영할게요.”
“다음 손목 검사.” 주교가 미소를 지었다. 미소가 오래 남았다. “그대는 교단의 일을 학관 강의실처럼 말하는군.”
“학관 일정 담당이라서요.”
주교는 더 말하지 않았다. 지팡이 끝으로 단상 바닥을 한 번 짚었을 뿐이다. 나는 이것이 허락인지 아닌지 몰랐다. 대신 성녀의 줄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는 것은 알았다.
*
서른 번째 신입생이 손목을 보이고 지나갔다. 루벤이 클라라 앞에 섰다.
클라라는 신입생 서른 명의 손목을 보는 동안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손을 잡고, 손목을 돌리고, 소매를 놓고, 다음. 이 손이 루벤 앞에서 처음으로 멈췄다. 루벤의 오른쪽 소매는 걷혀 있지 않았다. 다른 학생들은 다 걷고 섰는데.
“걷어 주시겠어요?”
루벤이 소매를 걷었다. 손목을 클라라 앞에 내밀었다. 대강당의 높은 창으로 들어온 눈빛이 이 손목 위에 하얗게 떨어졌다. 검은 줄 한 바퀴가 이 빛 속에서 선명했다.
클라라는 이 줄을 봤다. 아주 오래. 신입생 서른의 손목을 합친 것보다 오래. 클라라의 엄지가 이 줄 위를 한 번 지나갔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루벤의 얼굴을 봤다. 이 얼굴에서 무엇을 찾는지 나는 알 것 같았다. 따뜻한 방. 셋방에서 이날 밤 베티를 고치고 나가며, 계단에서 들었을 이 이야기.
“깨끗합니다.” 클라라가 말했다. 소매를 내려 줬다. “다음.”
루벤이 걸어 나갔다. 다리가 굳은 사람처럼 걸었다. 서른두 번째 신입생이 클라라 앞에 섰다.
단상에서 지팡이가 바닥을 짚는 소리가 났다. 대강당이 조용해졌다. 다섯 줄의 사제들이 손을 멈췄다.
“성녀님 눈이 피곤하신 듯하오.” 심문 주교가 말했다.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서른한 번째에서 오래 머무셨소. 무엇을 그리 오래 보셨는지.”
클라라가 단상을 올려다봤다. 클라라의 손이 서른두 번째 학생의 손목을 쥔 채 떨렸다. 대답하지 않았다.
주교의 눈이 대강당 벽 쪽으로 갔다. 벽 앞에 흰 외투 하나가 서 있었다. 칼을 차고, 첫눈 아침에 성도의 감찰을 받는 성기사.
“오웬 경.” 주교가 말했다. “경이 그 학생의 손목을 직접 보시오. 성녀님 대신. 지금, 여기서.”
오웬이 벽에서 등을 뗐다. 대강당 바닥에 분필로 그은 다섯 줄을 가로질러 걸어왔다. 쇠 장화가 돌바닥을 밟는 소리가 고르게 울렸다. 루벤이 멈춰 섰다. 오웬이 이 앞에 섰다. 그리고 루벤의 오른 손목을 잡았다. 맨손으로. 장갑을 벗은 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