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5,451자)
육십 분
진짜 던전 방탈출 카페 · 류시안
「59:31」
숫자는 벽의 푸른 돌 위에만 뜬 것이 아니었다. 도연이 문지기의 등에서 뛰어내려 계단으로 달려가는 동안, 계단 입구의 소용돌이 무늬 위에도 같은 숫자가 떠 있었다. 아홉 번째 층으로 올라가는 문에도, 더 위의 문에도 떠 있을 것이었다.
문지기가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굳은 채였다. 하담의 손전등 빛을 받은 등껍질이 바닥 층의 돌바닥 속으로 천천히 빨려 들어갔다. 꽂힌 놋쇠 열쇠와 누런 꼬리표가 등껍질과 함께 내려갔다. 도연은 계단 첫 칸에서 한 번 돌아보았다. 꼬리표가 마지막으로 바닥 위에 남아 흔들리다가, 돌이 닫히며 사라졌다.
“사장님!”
하담이 도연의 팔을 끌었다. 경탁은 이미 계단 열 칸 위에 있었다. 등에 밧줄로 묶은 은박 담요가 손전등 빛에 번쩍였다. 한 칸 오를 때마다 경탁의 숨이 길게 새어 나왔다.
계단 위에서 소리가 내려왔다. 수백, 수천 개의 작은 발이 돌을 긁는 소리였다.
*
이끼쥐였다. 형광 초록이 계단 벽을 타고 쏟아져 내려왔다. 위로 오르던 날과 똑같은 강물이었다. 방향만 반대였다. 쥐들은 사람을 보지도 않고 다리 사이로, 어깨 위로, 담요 위로 흘러내려 바닥 층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어서 흰 것이 내려왔다. 나방이었다. 손전등에 붙지 않았다. 빛을 먹지도 않았다. 흰 날개들이 눈보라처럼 계단을 쓸고 내려갔다.
“붙잡혀서 내려가는 거예요.” 하담이 벽에 등을 붙이고 말했다. “다 바닥으로 가요.”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경탁이 계단에서 소리쳤다. “올라오십시오. 쓸려 내려가는 데 같이 휩쓸리지 마십시오.”
셋은 벽에 어깨를 붙이고 한 칸씩 올랐다. 아홉 번째 층의 작은 방을 지날 때 하담이 벽의 분필 소용돌이에 손바닥을 한 번 댔다. 멈추지 않았다. 손바닥을 떼고 계속 올랐다. 팔 층에서는 두 손바닥 판의 둘레가 푸르게 차 있었다. 판 사이의 문 위에 숫자가 떠 있었다. 「51:12」
칠 층으로 들어서자 바닥이 움직이고 있었다.
돌게였다. 부서진 벽돌 벽 너머 선로에서 돌게들이 기어 들어와 방을 가로질러 아래 계단으로 몰려갔다. 멈춘 열차가 아직 선로에 있었다. 창문마다 승객들이 휴대전화 손전등을 켜고 선로를 비추고 있었다. 빛이 닿는 자리마다 돌게가 굳었다. 굳은 돌게들이 칠 층의 바닥에 쌓였다. 아래 계단의 입구가, 그리고 위로 가는 계단의 입구가 굳은 보도블록 더미에 막혀 갔다.
“불빛 때문이에요!” 도연이 소리쳤다. “빛 닿으면 굳어요! 끄라고요!”
부서진 벽 너머 열차 안의 승객들은 듣지 못했다. 열차 창문 너머에서 사람들이 신기한 얼굴로 손전등을 흔들었다. 빛이 흔들릴 때마다 돌게 몇이 굳었다 풀렸다 했다.
“우리 불도 꺼야 해요.” 하담이 말했다. 하담은 머리 전등을 껐다. 손전등도 껐다. “우리 빛이 앞을 굳혀요. 굳은 게 길을 막아요.”
“꺼지면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보여요.” 도연이 말했다. 도연은 손전등을 껐다. 열차의 불빛이 벽돌 틈으로 드문드문 들어왔고, 나머지는 캄캄했다. 도연은 어둠 속에서 경탁을 보았다. 경탁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숨소리만 들렸다. “조사관님, 계단 세셨잖아요. 다 세셨잖아요.”
경탁이 숨을 멈췄다. 이윽고 경탁의 손전등도 꺼졌다.
칠 층은 어둠이 되었다. 어둠 속에서 돌게들이 다시 움직였다. 굳어 있던 더미가 풀려 아래 계단으로 흘러내렸다. 위로 가는 계단의 입구가 열렸다. 발밑으로 보도블록들이 쓸려 지나갔다. 다리를 스치는 등껍질이 차가웠다.
“위로 가는 계단, 열 칸입니다.” 경탁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났다. “제가 셉니다. 따라오십시오. 하나.”
*
경탁은 셌다. 칠 층에서 육 층까지 열 칸. 육 층의 호수는 어둠 속에서 물소리로만 있었다. 물가의 돌길을 따라 걸으며 경탁이 걸음을 셌다. 마흔셋에 호수가 끝났다. 거기서 경탁이 멈췄다.
“여기서부터는 모릅니다. 연남동 계단은 안 내려와 봤습니다.”
“줄이요.” 하담이 말했다.
도연은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었다. 호수 옆 벽을 따라 검은 전선이 지나갔다. 경탁이 열쇠공에서부터 끌고 내려온 줄이었다. 손으로 줄을 따라가자 이음매가 만져졌다. 끈적한 테이프가 둘둘 감겨 있었다. 편의점 전선 테이프였다. 이음매에서 줄 하나가 갈라져 다른 계단으로 올라갔다. 세찬이 끌고 내려온 줄이었다.
줄은 팽팽했다. 위에서 누군가 잡고 있었다.
“재이 씨가 잡고 있어요.” 도연이 줄을 손에 감았다. “이거 따라가요.”
셋은 줄을 손에 쥐고 연남동 계단을 올랐다. 경탁이 가운데였다. 등의 담요가 벽에 스칠 때마다 은박이 바스락거렸다. 경탁은 이제 칸을 세지 않았다. 대신 숨을 셌다. 숨 하나에 한 칸. 계단이 꺾일 때마다 하담이 앞에서 줄을 당겨 방향을 알려 주었다.
도연은 맨 뒤였다. 맨 뒤에서 줄을 쥐고 하담의 발소리와 경탁의 숨소리를 들었다. 휴대전화를 켜면 시각을 알 수 있었다. 켜면 빛이 났다. 켜지 않았다. 대신 계단 꺾인 데의 소용돌이 무늬 위에 떠 있는 푸른 숫자를 보았다. 무늬 위의 숫자는 돌게를 굳히지 않았다.
「12:40」
「07:15」
경탁의 무릎이 꺾였다. 담요째 계단에 주저앉았다. 하담이 돌아와 경탁의 겨드랑이를 잡았다. 도연이 뒤에서 담요를 받쳤다. 담요 안의 것은 가벼웠다. 생각보다 훨씬 가벼웠다. 가벼워서 도연은 손이 떨렸다.
“제가 업을게요.” 하담이 말했다.
“안 됩니다.” 경탁이 일어났다. “제가 업겠다고 했습니다.”
*
연남동 숲길, 맨홀 턱. 차장은 회색 양복 무릎을 흙에 댄 채 맨홀 아래를 보고 있었다. 맨홀 뚜껑 자리의 소용돌이 위에 푸른 숫자가 떠 있었다. 「05:00」
울타리 안의 플라스틱 상자들이 덜컹거렸다. 상자 안의 보도블록들이 다리를 내밀고 상자 벽을 긁었다. 상자 하나가 넘어졌다. 돌게들이 쏟아져 나와 숲길을 가로질렀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돌게들은 사람에게 오지 않았다. 맨홀로 갔다. 맨홀 턱을 넘어 계단 아래로 떨어지듯 미끄러져 내려갔다. 망원동 골목에서도, 편의점 모퉁이에서도 돌게가 기어 와 맨홀로 들어갔다. 흰 나방들이 숲길 조명에서 날개를 떼고 맨홀로 날아 들어갔다.
“내려간다.” 차장이 말했다. 혼잣말이었다.
펌프차 기사가 운전석 창문을 내렸다. 차장이 손을 들었다. 기다리라는 손짓이었다.
「04:00」
재이가 전선을 감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 줄이 손바닥 안에서 당겨졌다. 한 번, 두 번, 세 번. 재이가 숨을 들이쉬었다.
“당겨요. 세 번요. 아래서요.”
세찬이 맨홀 턱에서 몸을 내밀었다. 계단 아래는 캄캄했다. 빨간 불이 깜빡이는 가슴 카메라가 어둠을 찍었다. 화면 귀퉁이의 숫자는 이백만을 넘어 있었다. 댓글이 멈춰 있었다. 아무도 치지 않았다.
「02:00」
「01:00」
차장이 일어났다. 펌프차를 돌아보았다. 손을 들지도 내리지도 않았다. 차장은 맨홀 턱에 다시 쪼그려 앉았다.
「00:40」
계단 아래에서 숨소리가 올라왔다. 이어서 하얀 손 하나가 맨홀 턱을 짚었다. 손바닥에 붉은 무늬가 박힌 손이었다. 하담이 머리를 내밀었다. 세찬이 하담의 손목을 잡아 끌어올렸다. 하담은 잔디밭에 굴러 나와 등을 대고 누웠다. 햇빛이 열이틀 만에 하담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하담은 눈을 감았다.
「00:25」
은박 담요가 올라왔다. 경탁이 계단에서 담요를 등에 진 채 무릎으로 기어 올라왔다. 재이가 전선을 놓고 달려와 담요를 받쳤다. 세찬이 경탁의 팔을 잡았다. 셋이 담요를 맨홀 밖 잔디밭에 내려놓았다. 세찬이 담요 앞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은박 위에 손바닥을 얹은 채 떨었다.
「00:12」
차장이 맨홀 아래를 보았다. 아무도 올라오지 않았다.
「00:08」
“금 사장.”
「00:05」
노란 앞치마가 맨홀 턱에 걸쳐졌다. 도연이 마지막 칸을 딛고 몸을 끌어올렸다. 앞치마 끈이 턱에 걸려 당겨졌다. 차장이 손을 뻗어 도연의 팔을 잡았다. 회색 양복 소매가 흙투성이였다. 도연의 운동화가 맨홀 밖 흙을 밟았다.
「00:00」
맨홀 아래의 푸른빛이 꺼졌다.
빛이 꺼진 자리에 돌계단은 없었다. 녹슨 쇠 사다리가 어둠 속으로 내려가 있었고, 아래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났다. 하수구 냄새가 올라왔다. 맨홀 둘레의 소용돌이 무늬가 희미해지더니 격자무늬만 남았다. 숲길 바닥을 짚은 도연의 손바닥 아래, 맨홀 뚜껑 테두리의 숫자 고리도 그냥 녹슨 쇠테가 되었다.
차장이 도연의 팔을 놓았다. 휴대전화를 꺼내 시각을 보았다. 열 시 오십이 분이었다. 차장은 펌프차를 향해 손을 저었다. 기사가 시동을 껐다.
*
잔디밭에 사람들이 둘러앉았다. 울타리 밖의 사람들이 울타리를 넘어오려다 관리국 직원들에게 막혔다. 재이의 어머니가 직원들 사이로 은박 접시를 들고 들어왔다. 새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접시에 김밥이 담겨 있었다. 참치마요였다.
“비닐째 들고 왔어요.” 재이가 말했다. “쥐가 비닐째 가져가니까요.”
잔디밭 끝에서 초록색이 움직였다. 이끼쥐 한 마리였다. 맨홀로 미처 내려가지 못한 한 마리였다. 쥐는 김밥 냄새를 맡고 코를 벌름거리며 잔디를 건너왔다. 햇빛 아래로 나왔다. 형광 이끼 끝의 빛이 한낮의 햇빛에 지워졌다. 쥐가 도연의 운동화 앞에서 멈췄다. 몸이 줄어들었다. 다리가 이끼 속으로 들어가고, 꼬리가 이끼 속으로 들어갔다. 도연은 쪼그려 앉아 손바닥을 내밀었다. 쥐는 손바닥 위로 올라오지 않았다. 손바닥 앞에서 한 줌 이끼가 되었다.
도연은 이끼를 손바닥에 담았다. 마른 이끼였다. 비 온 뒤의 공원 냄새가 아주 조금 났다.
경탁이 담요 옆에 앉아 있었다. 회색 티셔츠가 땀에 젖어 등에 붙어 있었다. 차장이 경탁 앞으로 와서 양복 주머니에서 은색 배지를 꺼냈다. 손바닥에 올려 내밀었다. 경탁은 배지를 보았다. 손을 뻗지 않았다.
“칠월마다 하담 씨 전화를 받을 사람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경탁이 말했다. “이제 제가 하담 씨한테 전화하겠습니다.”
차장은 배지를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말없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펌프차로 걸어갔다. 걸어가면서 휴대전화를 귀에 댔다. 마흔한 곳, 하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전부 다시 확인해.
세찬이 가슴 카메라의 단추를 눌렀다. 빨간 불이 꺼졌다. 세찬은 꺼진 카메라를 떼어 잔디밭에 내려놓고, 담요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형, 하고 한 번 불렀다. 이후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재이가 세찬 옆에 앉아 큐브를 돌렸다. 섞지 않고 한 면씩 맞췄다.
하담이 일어나 앉았다. 하운의 가방을 열어 맨 위의 빨간 봉지를 꺼냈다. 노란 곰 셋이 굳어 있었다. 하담은 하나를 꺼내 경탁의 손바닥에 놓았다. 경탁이 곰을 내려다보았다. 하나를 꺼내 도연에게 내밀었다. 남은 하나는 봉지째 하운의 가방에 도로 넣었다.
도연은 허리춤을 내려다보았다. 가게 열쇠 여덟 개가 꾸러미에 매달려 있었다. 열 문이 이제 없는 열쇠들이었다. 놋쇠 열쇠가 끼워져 있던 고리 하나가 비어 있었다. 빈 고리가 햇빛에 흔들렸다.
도연은 한 손에 마른 이끼를, 다른 손에 노란 곰을 쥐고 잔디밭에 앉아 있었다. 숲길 위로 기차가 다니던 자리를 따라 바람이 지나갔다. 맨홀 아래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났다. 하수구의 물이었다. 위로 흐르지 않고, 아래로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