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582자)
리플부터 빼라
8조 해킹한 정찰총국 막내 해커 · 금나율
2026년 10월 30일 금요일 새벽 네 시, 중국 선양. 리명길은 해림무역유한공사 탕비실에서 컵라면 네 개에 물을 붓고 있었다. 큰일이 있는 날에도 막내는 라면 당번이었다. 정수기 물이 덜 뜨거워 면이 잘 풀리지 않았고, 명길은 뚜껑마다 젓가락을 하나씩 올려 눌러 두었다.
사무실 벽에는 둥근 시계 두 개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왼쪽이 베이징 시간, 오른쪽이 평양 시간이었고 오른쪽이 한 시간 빨랐다. 황금철 상좌는 사무실 안의 모든 시각을 오른쪽 시계로 말했다. 중국 거래처와 점심 약속을 잡을 때도 그렇게 말해서, 서탑 냉면집 주인이 두 번이나 한 시간 일찍 나와 기다렸다.
“막내, 라면 어찌 됐니?”
염상혁이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고 손만 뒤로 내밀었다. 낮에는 중국 식당 주인들에게 송이버섯을 팔고, 영업 전화를 걸 때만 목소리가 반 옥타브 올라가는 선배였다. 명길은 컵라면을 상혁의 손바닥에 올려 주었다. 상혁은 뚜껑을 반만 열어 김을 맡더니 도로 덮었다.
“삼 분 덜 됐다. 큰일 앞두고 덜 익은 라면 먹으면 손가락이 굳는다.”
“처음 듣는 말입니다.”
“방금 내가 만들었다.”
창가 자리의 조장은 말없이 키보드 위에 손을 얹고 있었다. 조장 앞의 모니터 세 대가 청록빛으로 떴다. 가운데 모니터에는 상혁이 밤새 만든 숫자판이 떠 있었다. 빠져나간 돈을 원화로 바꿔 보여 주는 판이었다. 달러로 하자는 조장 말을 상혁이 끝까지 듣지 않았다.
“남조선 돈으로 보면 숫자가 길어서 기분이 좋습니다.”
명길의 자리는 문 옆이었다. 명길의 모니터에는 돈 대신 바깥이 떠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가상자산 거래소 바이낸스의 공지 화면과 이용자들이 몰려와 글을 쓰는 게시판이었다. 막내는 바깥을 본다. 바이낸스가 알아차리는 순간을 가장 먼저 외치는 것이 오늘 명길이 맡은 일이었다.
문이 열리고 황금철이 들어왔다. 군복이었다. 사무실 사람들은 금철을 늘 감색 양복에 「해림무역 대표 황금철」 명찰을 단 모습으로 보았다. 평양에 직접 보고하는 날만 금철은 옷장 맨 안쪽의 군복을 꺼내 입었다. 금철이 조장 뒤에 서서 팔짱을 꼈다.
“평양 시간 다섯 시 오 분에 시작한다. 리플부터 빼라.”
리플은 나라와 나라 사이 송금에 쓰려고 만든 가상화폐였다. 조장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명길은 컵라면 하나를 금철의 책상에 가져다 놓았다. 금철은 라면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
다섯 시 오 분, 오른쪽 시계의 초바늘이 열두 시를 지났다.
조장의 손이 움직였다. 소리는 작았다. 명길이 상상한 큰일은 사이렌이나 고함이었는데, 실제로 들리는 것은 키보드 몇 번과 정수기에서 물이 끓는 소리뿐이었다. 가운데 모니터의 숫자가 움직였다. 처음 사 분 동안은 리플만 빠져나갔다. 맨 앞자리 숫자가 바뀔 때마다 상혁이 의자 위에서 엉덩이를 들썩였다.
새벽까지 다섯 달이 걸렸다. 명길이 맡은 몫은 사람 하나였다. 9월부터 여섯 주 동안 명길은 저녁마다 싱가포르 핀테크 회사의 채용 담당 다니엘 추가 되어 바이낸스 엔지니어 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눴다. 다니엘은 골든레트리버를 길렀고 주말마다 저수지 둘레길을 걸었으며, 딸의 피아노 발표회 사진도 올렸다. 다니엘이라는 사람을 통째로 지어낸 손이 명길이었다.
엔지니어는 야근이 많다고 했고, 이직하면 딸이 잠들기 전에 집에 들어가고 싶다고 했다. 명길의 몫은 거기까지였다. 엔지니어가 최종 면접에서 무엇을 받았는지, 10월에 회사 안에서 무슨 일이 이어졌는지 막내는 묻지 않았고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다. 창가 자리의 일이었다.
“솔라나.”
조장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리플이 끝나자 솔라나가 빠져나갔고, 옵티미즘과 비트코인과 이더리움이 줄줄이 뒤를 따랐다. 명길은 자기 모니터를 보았다. 바이낸스 공지 화면은 조용했다. 게시판에 한 사람이 글을 올렸다. 「출금 지연 나만 그래?」 밑으로 댓글이 붙었다. 「나도」 「점검인가」.
“아직 모릅니다.”
“계속 봐라.”
십 분이 지나자 비트코인이 굵게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숫자판의 숫자가 길어졌다. 상혁이 손가락으로 자릿수를 짚다가 틀려서 처음부터 다시 짚었다.
“조, 조 단위다. 막내, 조가 몇 개냐?”
“일곱입니다. 방금 여덟입니다.”
“여덟!”
“선배님, 소리.”
금철이 팔짱을 낀 채 상혁의 뒤통수를 내려다보았다. 상혁이 입을 다물고 라면 뚜껑을 괜히 다시 눌렀다.
십오 분째, 게시판의 글이 백 개를 넘었다. 이용자들이 출금이 안 된다고 썼고, 누군가 바이낸스 지갑에서 돈이 줄줄이 나가는 화면을 찍어 올렸다. 명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았습니다. 바깥이 알았습니다.”
조장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이더리움이 마지막으로 빠져나갔다. 이십 분이 지나 조장이 키보드에서 손을 내렸을 때, 상혁의 숫자판은 「₩8,000,000,000,000」에서 멈춰 있었다. 상혁이 조 아래 자리를 귀찮다고 잘라 놓은 판이라, 실제로 나간 돈은 8조 4천억 원이 넘었다.
조장이 식은 컵라면 뚜껑을 열었다. 면이 국물을 다 먹고 퉁퉁 불어 있었다.
“불었다.”
이 새벽 조장이 한 말은 솔라나와 불었다, 두 마디였다.
*
여섯 시, 금철은 칸막이 안쪽 방에서 평양에 보고했다. 문은 닫혀 있었지만 목소리가 조금씩 새어 나왔다. 숫자를 말하는 목소리는 높지 않았다. 마지막에 금철이 “알겠습니다”를 세 번 했고, 세 번째가 가장 낮았다.
명길은 창가로 갔다. 블라인드 사이로 해가 들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선양 시내의 유리 건물들과 하늘을 찌르는 방송탑이 보였다. 길 건너 빌딩 옥상에는 붉은 「沈阳」 두 글자가 박혀 있었다. 아래 도로로 공안 순찰차 한 대가 천천히 지나갔고, 상혁이 다가와 블라인드 날개를 한 칸 더 닫았다.
검게 꺼진 옆 모니터에 명길의 얼굴이 비쳤다. 마른 몸에 짧게 깎은 검은 머리, 앳된 얼굴에 날카로운 눈이었다. 회색 점퍼 안에 흰 셔츠를 입었고, 점퍼 왼쪽 가슴에 붉은 배지가 달려 있었다. 평양의 공과대학 김책공업종합대학을 나온 지 두 해가 지났는데도, 실습실에서 밤새우던 얼굴이 아직 그대로라고 상혁은 놀렸다.
명길은 휴대전화를 열었다. 다니엘 추의 계정에 엔지니어와 나눈 대화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마지막 메시지는 열흘 전이었다.
「과제 깔았습니다. 결과는 언제쯤 나올까요? 딸이 아빠 새 회사 이름을 물어봐요.」
다니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계정을 지우는 일도 막내 몫이었다. 명길은 지우기 전에 엔지니어가 보낸 사진을 한 번 더 열었다. 앞니 빠진 아이가 케이크 앞에서 두 손으로 브이를 그리고 있었다. 명길은 계정 지우기 단추 위에 엄지를 올렸다가, 화면을 끄고 휴대전화를 점퍼 안주머니에 넣었다.
여섯 시 반, 상혁의 책상 전화가 울렸다. 상혁이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목소리를 반 옥타브 올렸다.
“네, 해림무역입니다! 아, 서탑 류 사장님!”
명길은 귀를 기울였다. 서탑에서 조선 식당을 하는 중국 사장이 송이를 찾는 전화였다. 진짜 송이였다. 상혁의 입에서 진짜와 가짜가 섞여 나왔다.
“네, 송이 들어왔습니다. 오늘 새벽에 아주 많이 들어왔습니다. 몇 상자냐고요? 그건 좀……. 아니요, 사장님 드릴 건 따로 있습니다. 냉장으로 열 상자. 예, 예, 평양 시간 열한 시까지 갖다 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상혁이 명길을 돌아보았다.
“막내, 송이 열 상자. 냉장고에 있는 진짜 송이다. 헷갈리지 마라.”
“선배님이 헷갈리셨습니다.”
“내가 언제?”
“오늘 새벽에 아주 많이 들어왔다고 하셨습니다.”
상혁이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조장이 퉁퉁 분 라면을 먹다가 처음으로 웃었다. 소리 없이 어깨만 두 번 들썩였다. 탕비실 텔레비전에서 중국어 아침 뉴스가 나왔고, 화면 아래로 영어 자막이 지나갔다. 「바이낸스, 대규모 해킹 피해 확인 중」. 사무실 안 아무도 텔레비전을 보지 않았다.
*
일곱 시, 금철이 명길을 불렀다. 군복 윗단추를 푼 채였다. 책상 위에 붉은 서류철 하나와 한 젓가락도 대지 않은 라면이 놓여 있었다.
“막내, 앉아라.”
“예, 상좌 동지.”
“사무실 안에서는 사장님이다.”
“예, 사장님 동지.”
금철이 눈을 감았다가 떴다. “사장님.”
“사장님.”
금철이 서류철을 밀었다. 표지에 「송이 납품 계획 — 서울」이라고 쓰여 있었다. 사무실에서는 가상화폐를 송이라고 불렀고, 송이 한 상자는 백만 달러였다. 명길은 서류철을 열었다.
「가람엑스 —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19층. 국내 가상자산 거래소 이용자 수 4위」
“첫 단독 임무다. 네가 한다.”
“저 혼자 말입니까?”
“다니엘을 네가 했다. 다니엘이 없었으면 오늘 새벽도 없었다. 이번에도 다니엘 같은 사람을 하나 만들어라. 기한은 연말 총화 전이다.”
“얼마입니까?”
“송이 서른 상자.”
명길은 서른 상자를 머릿속에서 원화로 바꿔 보았다. 사백억 원에서 조금 모자랐다.
“평양에서는 미사일 한 발 값이라고 하더라.”
금철은 날씨 이야기하듯 말했다. 명길은 서류철 위에 손을 얹었다. 손바닥 밑에서 종이가 미지근했다. 금철이 밤새 품에 넣고 다닌 서류였다.
“사장님,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바이낸스 엔지니어는 어떻게 됩니까?”
“무슨 엔지니어?”
“다니엘이 여섯 주 동안 말을 건 사람입니다. 회사가 알아내면 그 사람이 잘립니다. 감옥에 갈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 걱정은 바이낸스가 한다.”
“딸이 있습니다.”
금철이 팔짱을 꼈다. 새벽에 조장 뒤에 서 있던 자세 그대로였다.
“막내, 네 걱정은 평양에 있다. 어머니하고 동생. 동생 이름이 뭐냐?”
“은정입니다.”
“은정이가 올해 대학에 갔지.”
“예.”
“서른 상자를 못 채우면 은정이는 대학을 그만두고 지방으로 간다. 너희 어머니도 같이. 우리 집사람과 딸도 간다. 나도 방금 평양에서 그 말을 들었다.”
명길은 금철의 얼굴을 보았다. 화가 난 얼굴이 아니었다. 아침 보고를 마친 사람의 눈가가 붉었고, 입가에 군복 깃이 쓸린 자국이 나 있었다.
“이번에는 사람 고르는 일을 다른 동무가 하면 안 되겠습니까? 저는 송이 옮기는 일을 하겠습니다.”
“사람 고르는 일은 네가 제일 잘한다.” 금철이 서류철을 한 장 넘겼다. “그래서 너다.”
다음 장에 남자 사진이 있었다. 동그란 얼굴에 곱슬머리, 후드티를 입은 스물아홉 살 개발자였다. 「윤재하 — 지갑팀. 구직 사이트 이력서 공개 중. 반려견 사진 자주 올림」. 명길은 반려견이라는 글자를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금철이 마지막 장을 넘겼다.
「보안팀장 김옥화(44) — 김책공업종합대학 졸업 · 2011년 남조선으로 감」
“이 여자가 너희 학교를 먼저 다녔다. 우리 말도 알고 우리 버릇도 안다. 조심해라.”
사진 속 여자는 턱선에서 자른 단발에 흰머리가 몇 가닥 섞여 있었고, 검은 뿔테 안경 너머로 웃지 않았다. 사진 아래에 누가 볼펜으로 한 줄을 덧붙여 놓았다. 「함흥 출신」.
“사장님, 이 사람이 저를 알아보면 어떻게 합니까?”
“너를 어떻게 알아보니? 저 사람이 떠날 때 너는 여덟 살이었다.”
금철이 불어 터진 라면을 쓰레기통에 쏟았다. “새로 끓여 와라. 이번에는 물 끓은 다음에 부어라.”
명길은 서류철을 안고 탕비실로 갔다. 정수기 앞에서 물이 데워지기를 기다리며 휴대전화를 꺼내 새 계정을 만들었다. 이름 칸에 「에릭 림」, 소개 칸에 「싱가포르 핀테크 라운드레이크 채용 담당」. 다음은 사진이었다. 다니엘의 골든레트리버와 겹치지 않게, 이번에는 털이 짧은 개를 찾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