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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플부터 빼라

8조 해킹한 정찰총국 막내 해커 · 금나율

2026년 10월 30일 금요일 새벽 네 시⁠, 중국 선양⁠. 리명길은 해림무역유한공사 탕비실에서 컵라면 네 개에 물을 붓고 있었다⁠. 큰일이 있는 날에도 막내는 라면 당번이었다⁠. 정수기 물이 덜 뜨거워 면이 잘 풀리지 않았고⁠, 명길은 뚜껑마다 젓가락을 하나씩 올려 눌러 두었다⁠.

사무실 벽에는 둥근 시계 두 개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왼쪽이 베이징 시간⁠, 오른쪽이 평양 시간이었고 오른쪽이 한 시간 빨랐다⁠. 황금철 상좌는 사무실 안의 모든 시각을 오른쪽 시계로 말했다⁠. 중국 거래처와 점심 약속을 잡을 때도 그렇게 말해서⁠, 서탑 냉면집 주인이 두 번이나 한 시간 일찍 나와 기다렸다⁠.

“⁠막내⁠, 라면 어찌 됐니⁠?⁠”

염상혁이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고 손만 뒤로 내밀었다⁠. 낮에는 중국 식당 주인들에게 송이버섯을 팔고⁠, 영업 전화를 걸 때만 목소리가 반 옥타브 올라가는 선배였다⁠. 명길은 컵라면을 상혁의 손바닥에 올려 주었다⁠. 상혁은 뚜껑을 반만 열어 김을 맡더니 도로 덮었다⁠.

“⁠삼 분 덜 됐다⁠. 큰일 앞두고 덜 익은 라면 먹으면 손가락이 굳는다⁠.⁠”

“⁠처음 듣는 말입니다⁠.⁠”

“⁠방금 내가 만들었다⁠.⁠”

창가 자리의 조장은 말없이 키보드 위에 손을 얹고 있었다⁠. 조장 앞의 모니터 세 대가 청록빛으로 떴다⁠. 가운데 모니터에는 상혁이 밤새 만든 숫자판이 떠 있었다⁠. 빠져나간 돈을 원화로 바꿔 보여 주는 판이었다⁠. 달러로 하자는 조장 말을 상혁이 끝까지 듣지 않았다⁠.

“⁠남조선 돈으로 보면 숫자가 길어서 기분이 좋습니다⁠.⁠”

명길의 자리는 문 옆이었다⁠. 명길의 모니터에는 돈 대신 바깥이 떠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가상자산 거래소 바이낸스의 공지 화면과 이용자들이 몰려와 글을 쓰는 게시판이었다⁠. 막내는 바깥을 본다⁠. 바이낸스가 알아차리는 순간을 가장 먼저 외치는 것이 오늘 명길이 맡은 일이었다⁠.

문이 열리고 황금철이 들어왔다⁠. 군복이었다⁠. 사무실 사람들은 금철을 늘 감색 양복에 「⁠해림무역 대표 황금철⁠」 명찰을 단 모습으로 보았다⁠. 평양에 직접 보고하는 날만 금철은 옷장 맨 안쪽의 군복을 꺼내 입었다⁠. 금철이 조장 뒤에 서서 팔짱을 꼈다⁠.

“⁠평양 시간 다섯 시 오 분에 시작한다⁠. 리플부터 빼라⁠.⁠”

리플은 나라와 나라 사이 송금에 쓰려고 만든 가상화폐였다⁠. 조장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명길은 컵라면 하나를 금철의 책상에 가져다 놓았다⁠. 금철은 라면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

다섯 시 오 분⁠, 오른쪽 시계의 초바늘이 열두 시를 지났다⁠.

조장의 손이 움직였다⁠. 소리는 작았다⁠. 명길이 상상한 큰일은 사이렌이나 고함이었는데⁠, 실제로 들리는 것은 키보드 몇 번과 정수기에서 물이 끓는 소리뿐이었다⁠. 가운데 모니터의 숫자가 움직였다⁠. 처음 사 분 동안은 리플만 빠져나갔다⁠. 맨 앞자리 숫자가 바뀔 때마다 상혁이 의자 위에서 엉덩이를 들썩였다⁠.

새벽까지 다섯 달이 걸렸다⁠. 명길이 맡은 몫은 사람 하나였다⁠. 9월부터 여섯 주 동안 명길은 저녁마다 싱가포르 핀테크 회사의 채용 담당 다니엘 추가 되어 바이낸스 엔지니어 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눴다⁠. 다니엘은 골든레트리버를 길렀고 주말마다 저수지 둘레길을 걸었으며⁠, 딸의 피아노 발표회 사진도 올렸다⁠. 다니엘이라는 사람을 통째로 지어낸 손이 명길이었다⁠.

엔지니어는 야근이 많다고 했고⁠, 이직하면 딸이 잠들기 전에 집에 들어가고 싶다고 했다⁠. 명길의 몫은 거기까지였다⁠. 엔지니어가 최종 면접에서 무엇을 받았는지⁠, 10월에 회사 안에서 무슨 일이 이어졌는지 막내는 묻지 않았고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다⁠. 창가 자리의 일이었다⁠.

“⁠솔라나⁠.⁠”

조장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리플이 끝나자 솔라나가 빠져나갔고⁠, 옵티미즘과 비트코인과 이더리움이 줄줄이 뒤를 따랐다⁠. 명길은 자기 모니터를 보았다⁠. 바이낸스 공지 화면은 조용했다⁠. 게시판에 한 사람이 글을 올렸다⁠. 「⁠출금 지연 나만 그래⁠?⁠」 밑으로 댓글이 붙었다⁠. 「⁠나도⁠」 「⁠점검인가⁠」⁠.

“⁠아직 모릅니다⁠.⁠”

“⁠계속 봐라⁠.⁠”

십 분이 지나자 비트코인이 굵게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숫자판의 숫자가 길어졌다⁠. 상혁이 손가락으로 자릿수를 짚다가 틀려서 처음부터 다시 짚었다⁠.

“⁠조⁠, 조 단위다⁠. 막내⁠, 조가 몇 개냐⁠?⁠”

“⁠일곱입니다⁠. 방금 여덟입니다⁠.⁠”

“⁠여덟⁠!⁠”

“⁠선배님⁠, 소리⁠.⁠”

금철이 팔짱을 낀 채 상혁의 뒤통수를 내려다보았다⁠. 상혁이 입을 다물고 라면 뚜껑을 괜히 다시 눌렀다⁠.

십오 분째⁠, 게시판의 글이 백 개를 넘었다⁠. 이용자들이 출금이 안 된다고 썼고⁠, 누군가 바이낸스 지갑에서 돈이 줄줄이 나가는 화면을 찍어 올렸다⁠. 명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았습니다⁠. 바깥이 알았습니다⁠.⁠”

조장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이더리움이 마지막으로 빠져나갔다⁠. 이십 분이 지나 조장이 키보드에서 손을 내렸을 때⁠, 상혁의 숫자판은 「⁠₩8⁠,000⁠,000⁠,000⁠,000⁠」에서 멈춰 있었다⁠. 상혁이 조 아래 자리를 귀찮다고 잘라 놓은 판이라⁠, 실제로 나간 돈은 8조 4천억 원이 넘었다⁠.

조장이 식은 컵라면 뚜껑을 열었다⁠. 면이 국물을 다 먹고 퉁퉁 불어 있었다⁠.

“⁠불었다⁠.⁠”

이 새벽 조장이 한 말은 솔라나와 불었다⁠, 두 마디였다⁠.

*

여섯 시⁠, 금철은 칸막이 안쪽 방에서 평양에 보고했다⁠. 문은 닫혀 있었지만 목소리가 조금씩 새어 나왔다⁠. 숫자를 말하는 목소리는 높지 않았다⁠. 마지막에 금철이 “⁠알겠습니다⁠”를 세 번 했고⁠, 세 번째가 가장 낮았다⁠.

명길은 창가로 갔다⁠. 블라인드 사이로 해가 들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선양 시내의 유리 건물들과 하늘을 찌르는 방송탑이 보였다⁠. 길 건너 빌딩 옥상에는 붉은 「⁠沈阳⁠」 두 글자가 박혀 있었다⁠. 아래 도로로 공안 순찰차 한 대가 천천히 지나갔고⁠, 상혁이 다가와 블라인드 날개를 한 칸 더 닫았다⁠.

검게 꺼진 옆 모니터에 명길의 얼굴이 비쳤다⁠. 마른 몸에 짧게 깎은 검은 머리⁠, 앳된 얼굴에 날카로운 눈이었다⁠. 회색 점퍼 안에 흰 셔츠를 입었고⁠, 점퍼 왼쪽 가슴에 붉은 배지가 달려 있었다⁠. 평양의 공과대학 김책공업종합대학을 나온 지 두 해가 지났는데도⁠, 실습실에서 밤새우던 얼굴이 아직 그대로라고 상혁은 놀렸다⁠.

명길은 휴대전화를 열었다⁠. 다니엘 추의 계정에 엔지니어와 나눈 대화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마지막 메시지는 열흘 전이었다⁠.

「⁠과제 깔았습니다⁠. 결과는 언제쯤 나올까요⁠? 딸이 아빠 새 회사 이름을 물어봐요⁠.⁠」

다니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계정을 지우는 일도 막내 몫이었다⁠. 명길은 지우기 전에 엔지니어가 보낸 사진을 한 번 더 열었다⁠. 앞니 빠진 아이가 케이크 앞에서 두 손으로 브이를 그리고 있었다⁠. 명길은 계정 지우기 단추 위에 엄지를 올렸다가⁠, 화면을 끄고 휴대전화를 점퍼 안주머니에 넣었다⁠.

여섯 시 반⁠, 상혁의 책상 전화가 울렸다⁠. 상혁이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목소리를 반 옥타브 올렸다⁠.

“⁠네⁠, 해림무역입니다⁠! 아⁠, 서탑 류 사장님⁠!⁠”

명길은 귀를 기울였다⁠. 서탑에서 조선 식당을 하는 중국 사장이 송이를 찾는 전화였다⁠. 진짜 송이였다⁠. 상혁의 입에서 진짜와 가짜가 섞여 나왔다⁠.

“⁠네⁠, 송이 들어왔습니다⁠. 오늘 새벽에 아주 많이 들어왔습니다⁠. 몇 상자냐고요⁠? 그건 좀⁠…⁠…⁠. 아니요⁠, 사장님 드릴 건 따로 있습니다⁠. 냉장으로 열 상자⁠. 예⁠, 예⁠, 평양 시간 열한 시까지 갖다 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상혁이 명길을 돌아보았다⁠.

“⁠막내⁠, 송이 열 상자⁠. 냉장고에 있는 진짜 송이다⁠. 헷갈리지 마라⁠.⁠”

“⁠선배님이 헷갈리셨습니다⁠.⁠”

“⁠내가 언제⁠?⁠”

“⁠오늘 새벽에 아주 많이 들어왔다고 하셨습니다⁠.⁠”

상혁이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조장이 퉁퉁 분 라면을 먹다가 처음으로 웃었다⁠. 소리 없이 어깨만 두 번 들썩였다⁠. 탕비실 텔레비전에서 중국어 아침 뉴스가 나왔고⁠, 화면 아래로 영어 자막이 지나갔다⁠. 「⁠바이낸스⁠, 대규모 해킹 피해 확인 중⁠」⁠. 사무실 안 아무도 텔레비전을 보지 않았다⁠.

*

일곱 시⁠, 금철이 명길을 불렀다⁠. 군복 윗단추를 푼 채였다⁠. 책상 위에 붉은 서류철 하나와 한 젓가락도 대지 않은 라면이 놓여 있었다⁠.

“⁠막내⁠, 앉아라⁠.⁠”

“⁠예⁠, 상좌 동지⁠.⁠”

“⁠사무실 안에서는 사장님이다⁠.⁠”

“⁠예⁠, 사장님 동지⁠.⁠”

금철이 눈을 감았다가 떴다⁠. “⁠사장님⁠.⁠”

“⁠사장님⁠.⁠”

금철이 서류철을 밀었다⁠. 표지에 「⁠송이 납품 계획 — 서울⁠」이라고 쓰여 있었다⁠. 사무실에서는 가상화폐를 송이라고 불렀고⁠, 송이 한 상자는 백만 달러였다⁠. 명길은 서류철을 열었다⁠.

「⁠가람엑스 —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19층⁠. 국내 가상자산 거래소 이용자 수 4위⁠」

“⁠첫 단독 임무다⁠. 네가 한다⁠.⁠”

“⁠저 혼자 말입니까⁠?⁠”

“⁠다니엘을 네가 했다⁠. 다니엘이 없었으면 오늘 새벽도 없었다⁠. 이번에도 다니엘 같은 사람을 하나 만들어라⁠. 기한은 연말 총화 전이다⁠.⁠”

“⁠얼마입니까⁠?⁠”

“⁠송이 서른 상자⁠.⁠”

명길은 서른 상자를 머릿속에서 원화로 바꿔 보았다⁠. 사백억 원에서 조금 모자랐다⁠.

“⁠평양에서는 미사일 한 발 값이라고 하더라⁠.⁠”

금철은 날씨 이야기하듯 말했다⁠. 명길은 서류철 위에 손을 얹었다⁠. 손바닥 밑에서 종이가 미지근했다⁠. 금철이 밤새 품에 넣고 다닌 서류였다⁠.

“⁠사장님⁠,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바이낸스 엔지니어는 어떻게 됩니까⁠?⁠”

“⁠무슨 엔지니어⁠?⁠”

“⁠다니엘이 여섯 주 동안 말을 건 사람입니다⁠. 회사가 알아내면 그 사람이 잘립니다⁠. 감옥에 갈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 걱정은 바이낸스가 한다⁠.⁠”

“⁠딸이 있습니다⁠.⁠”

금철이 팔짱을 꼈다⁠. 새벽에 조장 뒤에 서 있던 자세 그대로였다⁠.

“⁠막내⁠, 네 걱정은 평양에 있다⁠. 어머니하고 동생⁠. 동생 이름이 뭐냐⁠?⁠”

“⁠은정입니다⁠.⁠”

“⁠은정이가 올해 대학에 갔지⁠.⁠”

“⁠예⁠.⁠”

“⁠서른 상자를 못 채우면 은정이는 대학을 그만두고 지방으로 간다⁠. 너희 어머니도 같이⁠. 우리 집사람과 딸도 간다⁠. 나도 방금 평양에서 그 말을 들었다⁠.⁠”

명길은 금철의 얼굴을 보았다⁠. 화가 난 얼굴이 아니었다⁠. 아침 보고를 마친 사람의 눈가가 붉었고⁠, 입가에 군복 깃이 쓸린 자국이 나 있었다⁠.

“⁠이번에는 사람 고르는 일을 다른 동무가 하면 안 되겠습니까⁠? 저는 송이 옮기는 일을 하겠습니다⁠.⁠”

“⁠사람 고르는 일은 네가 제일 잘한다⁠.⁠” 금철이 서류철을 한 장 넘겼다⁠. “⁠그래서 너다⁠.⁠”

다음 장에 남자 사진이 있었다⁠. 동그란 얼굴에 곱슬머리⁠, 후드티를 입은 스물아홉 살 개발자였다⁠. 「⁠윤재하 — 지갑팀⁠. 구직 사이트 이력서 공개 중⁠. 반려견 사진 자주 올림⁠」⁠. 명길은 반려견이라는 글자를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금철이 마지막 장을 넘겼다⁠.

「⁠보안팀장 김옥화(⁠44⁠) — 김책공업종합대학 졸업 · 2011년 남조선으로 감⁠」

“⁠이 여자가 너희 학교를 먼저 다녔다⁠. 우리 말도 알고 우리 버릇도 안다⁠. 조심해라⁠.⁠”

사진 속 여자는 턱선에서 자른 단발에 흰머리가 몇 가닥 섞여 있었고⁠, 검은 뿔테 안경 너머로 웃지 않았다⁠. 사진 아래에 누가 볼펜으로 한 줄을 덧붙여 놓았다⁠. 「⁠함흥 출신⁠」⁠.

“⁠사장님⁠, 이 사람이 저를 알아보면 어떻게 합니까⁠?⁠”

“⁠너를 어떻게 알아보니⁠? 저 사람이 떠날 때 너는 여덟 살이었다⁠.⁠”

금철이 불어 터진 라면을 쓰레기통에 쏟았다⁠. “⁠새로 끓여 와라⁠. 이번에는 물 끓은 다음에 부어라⁠.⁠”

명길은 서류철을 안고 탕비실로 갔다⁠. 정수기 앞에서 물이 데워지기를 기다리며 휴대전화를 꺼내 새 계정을 만들었다⁠. 이름 칸에 「⁠에릭 림⁠」⁠, 소개 칸에 「⁠싱가포르 핀테크 라운드레이크 채용 담당⁠」⁠. 다음은 사진이었다⁠. 다니엘의 골든레트리버와 겹치지 않게⁠, 이번에는 털이 짧은 개를 찾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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