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572자)

빨간 내복 길드장이 국회에서 꺼낸 무전 한마디

던전 안전 감독관 · 피오담

12월 16일 목요일 아침 여덟 시 사십오 분⁠, 9층⁠. 물보라가 승재의 운동화 밑창을 적셨다⁠. 태경은 바위턱 끝에 맨발로 엎드려 위쪽 밧줄을 두 손에 감았다⁠. 뒤에서 대원들이 태경의 허리를 잡았고⁠, 대원들 허리를 짐꾼들이 잡았다⁠. 무열은 망치를 내던지고 맨 앞 대원의 벨트를 움켜쥐었다⁠. 빨간 내복 소매가 팔꿈치까지 걷혔다⁠.

“⁠당겨⁠!⁠”

줄째 끌어당겼다⁠. 고리 둘을 매단 밧줄이 바위턱으로 끌려왔다⁠. 차오르는 물 위로 승재의 다리가 먼저 올라왔고⁠, 갑수의 다리는 뒤늦게 올라왔다⁠. 떠밀려 온 바위 조각이 갑수의 발목을 쳤다⁠. 갑수가 짧게 신음했다⁠. 태경이 갑수의 조끼 깃을 잡아 바위턱 위로 끌어올렸고⁠, 승재는 혼자 기어 올라왔다⁠. 둘의 등 뒤에서 푸른 물이 바위턱 가장자리를 핥고 내려갔다⁠.

물은 한 번 더 솟았다가 바위턱 한 뼘 아래에서 멈추었다⁠. 갈라진 핵은 빛을 잃고 회색 돌덩이가 되어 있었다⁠. 바위 종 안이 처음으로 조용했다⁠.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만 들렸다⁠.

갑수가 바위턱에 누워 발목을 쥐고 웃었다⁠.

“⁠일당에 수영은 없었는데⁠.⁠”

“⁠발목은요⁠?⁠”

“⁠나갔어⁠. 나간 거 알아⁠. 강화 때는 손등이었는데 이번엔 발목이네⁠. 다음엔 어디 줄까⁠?⁠”

“⁠다음은 없어요⁠, 반장님⁠.⁠” 승재가 갑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다 형을 보았다⁠. 태경은 양말 바람이었고⁠, 양말 바닥이 바위에 쓸려 구멍이 나 있었다⁠. 승재가 웃음을 터뜨렸다⁠. “⁠형 신발 어디 갔어⁠?⁠”

“⁠핵이 먹었어⁠.⁠”

“⁠안전화를⁠? 형이 안전화를 벗었다고⁠?⁠” 승재가 짐꾼들을 돌아보았다⁠. “⁠여러분⁠, 감독관이 안전화를 벗었대요⁠. 이거 위반 아니에요⁠?⁠”

“⁠짐꾼 41번이야⁠.⁠”

바위턱의 짐꾼들과 대원들이 한꺼번에 웃었다⁠. 무열은 웃지 않았다⁠. 무열은 무릎을 꿇고 앉아 숫자를 셌다⁠.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짐꾼 열둘⁠, 대원 스물다섯⁠, 짐꾼 41번⁠, 그리고 자기⁠. 손가락을 다 접고 나서야 무열이 바위턱에 등을 대고 누웠다⁠.

*

열한 시⁠, 일행은 줄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층마다 무전을 받아 넘기던 짐꾼들이 한 사람씩 합류했다⁠. 갑수는 대원 둘에게 업혔고⁠, 업힌 채로 고리 교체 시간을 불렀다⁠. 태경은 짐꾼 하나가 벗어 준 고무 슬리퍼를 신고 올라갔다⁠. 슬리퍼 한 짝이 6층 줄길에서 벗겨져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아래 물은 더 이상 하늘처럼 보이지 않았다⁠. 핵이 깨진 던전의 물은 그냥 어두운 바닷물이었다⁠.

오후 세 시⁠, 일행이 부교를 건넜다⁠. 부두 철망 앞에 오리 호루라기를 문 짐꾼 사백이 줄지어 있었다⁠. 맨 앞의 오씨가 먼저 불었다⁠. 꽥⁠. 사백이 따라 불었다⁠. 꽥⁠, 꽥⁠, 꽥⁠. 겨울 바다 위로 오리 사백 마리 소리가 퍼졌다⁠. 해안 단지에서 대피했다 돌아온 주민들이 오리 소리에 놀라 창문을 열었다⁠.

하늬가 철망 문을 열고 뛰어왔다⁠. 손에 고무장화 한 켤레를 들고 있었다⁠.

“⁠선배⁠, 무전으로 안전화 먹였다는 말 들었어요⁠. 이거 신으세요⁠. 제 거라 작아요⁠.⁠”

태경은 장화에 발을 밀어 넣었다⁠. 발가락이 앞코에 닿았다⁠. 하늬가 드론을 띄우려다 말고 내렸다⁠.

“⁠오늘은 안 찍을게요⁠. 공익광고가 너무 처참해서⁠.⁠”

무열은 맨 나중에 부교를 건넜다⁠. 빨간 내복 위에 대원의 패딩 조끼⁠, 조끼 위에 검붉은 망토⁠. 갑옷은 한 장도 없었다⁠. 맨발에 대원 하나의 운동화를 꿰어 신었다⁠. 망토 자락이 내복 무릎에 감겼다⁠. 부두의 짐꾼 사백이 숨을 죽였다가 갑수가 들것 위에서 외쳤다⁠.

“⁠빨간 내복 길드다⁠!⁠”

웃음이 부두를 뒤집었다⁠. 무열은 이번에는 웃었다⁠. 소리가 나는 웃음이었다⁠.

구급차에 실려 가는 갑수를 배웅하고 나서 태경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공씨네⁠」였다⁠.

「⁠엄마 : 뉴스에 빨간내복 아저씨 나온다 너네 회장님이니⁠」

「⁠엄마 : 둘다 살앗니 대답해 김치 가지러 와라⁠」

「⁠승재 : 살았어요 형은 신발 잃어버림⁠」

「⁠엄마 : 신발은 사주마⁠」

승재가 형 어깨 너머로 화면을 보며 킥킥거렸다⁠. 태경은 「⁠둘 다 살았어요⁠」라고 쳤다가 「⁠셋 다 살았어요⁠, 반장님 발목만 나갔어요⁠」로 고쳐 보냈다⁠. 어머니가 놀란 얼굴 그림을 열 개쯤 보냈다⁠.

해 질 무렵⁠, 태경은 부두 끝 방파제의 테트라포드에 걸터앉았다⁠. 무열이 망토를 여미며 옆으로 와서 앉았다⁠. 내복 무릎이 바닷바람에 펄럭였다⁠. 둘은 한동안 바위 절벽만 보았다⁠.

“⁠계산이 틀렸습니다⁠.⁠” 무열이 먼저 말했다⁠. “⁠사십 가구와 열둘이라고 했죠⁠. 오늘 보니 둘 중 하나를 고르는 계산이 아니었습니다⁠. 쇠가 얼마나 있느냐의 계산이었습니다⁠.⁠”

“⁠쇠는 길드장님이 아셨습니다⁠.⁠”

“⁠줄은 감독관님이 거셨고요⁠.⁠” 무열이 목에서 빨간 오리 호루라기를 풀어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20일에 소위가 열린다고 들었습니다⁠. 저도 나가겠습니다⁠.⁠”

“⁠무엇을 말씀하시려고요⁠?⁠”

“⁠갑옷이 없으니 숨길 데가 없습니다⁠.⁠” 무열이 호루라기를 다시 목에 걸었다⁠. “⁠그날 들으십시오⁠.⁠”

바다 위 바위 절벽이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푸른빛이 꺼진 동굴 입구가 수면에 닿았고⁠, 바닷물이 동굴 안으로 조용히 들어갔다⁠. 다음 날 아침까지 바위는 갯벌 아래로 다 들어갔다⁠. 송도 해안 단지 지하 주차장은 마른 채였다⁠.

*

12월 20일 월요일 오전 열 시⁠,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 회의실⁠. 「⁠던전 중대재해법⁠」이 안건에 올랐다⁠. 참고인석에 왕정만과 차무열이 앉았고⁠, 진술인석 끝에 태경이 앉았다⁠. 태경은 감찰 중이라 노동부 이름으로 나올 수 없었다⁠. 짐꾼 조합 준비위원회의 진술인으로 왔다⁠. 조끼 대신 남색 작업 셔츠에 넥타이를 맸다⁠. 발에는 새로 산 갈색 안전화를 신었다⁠.

무열은 회색 정장 차림이었다⁠. 왼손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석윤희가 무열을 보며 물었다⁠.

“⁠참고인⁠, 오늘은 갑옷 안 입으셨네요⁠.⁠”

“⁠녹았습니다⁠.⁠”

회의실에 웃음이 났다⁠. 왕정만이 웃음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먼저 마이크를 켰다⁠.

“⁠송도는 막았습니다⁠. 원청 길드장이 갑옷까지 바쳐서 막았어요⁠. 길드가 스스로 책임지는 걸 보셨으면⁠, 이제 처벌이 아니라 지원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업계의 현실은⁠…⁠…⁠”

“⁠위원장님⁠.⁠” 무열이 마이크를 켰다⁠. “⁠참고인 차무열입니다⁠. 정정할 것이 있습니다⁠.⁠”

왕정만이 무열을 돌아보았다⁠. 무열은 왕정만을 보지 않았다⁠. 앞의 의원석을 보았다⁠.

“⁠지난주 저는 이 자리에서 지난해 강화 공략 중지 해제 의견서를 내놓았습니다⁠. 그 서명이 공태경 감독관의 것이라는 건 사실입니다⁠. 다만 그날 6층 고리 교체를 건너뛰라고 무전으로 지시한 사람은 저입니다⁠. 감독관 점검은 부두에서만 하게 하라고 구매팀장에게 말한 사람도 저입니다⁠. 부두에 새 상자를 가져다 놓은 것은 감독관에게 보여 주려고 한 일이었습니다⁠.⁠”

회의실이 얼어붙었다⁠. 방청석 맨 앞줄에서 황옥분이 고개를 들었다⁠. 갑수가 목발을 짚고 옥분 옆에 있었다⁠.

“⁠무전은 녹음이 없습니다⁠. 증거는 제 입 하나입니다⁠. 그래서 지난주에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증거가 있는 쪽이 먼저 무너진다고 감독관님한테 말했죠⁠.⁠” 무열이 붕대 감은 왼손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9층에서 갑옷을 다 먹이고 나니 증거가 없어도 말해야 하는 것이 남았습니다⁠. 강화 사고는 원청 길드장인 제 지시로 났습니다⁠. 이 법이 통과되면 저부터 넣어 주십시오⁠. 오늘 오후에 경찰에 나가겠습니다⁠. 길드장 자리는 오늘 아침에 내놓았습니다⁠.⁠”

“⁠차 길드장⁠!⁠” 왕정만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갈라졌다⁠.

“⁠이제 길드장 아닙니다⁠.⁠”

석윤희가 볼펜을 내려놓았다⁠. “⁠진술인 공태경 님⁠, 하실 말씀 있습니까⁠?⁠”

태경은 마이크를 켰다⁠.

“⁠해제 의견서에 서명한 사람은 저입니다⁠. 지시가 있었어도 서명은 제 손으로 했습니다⁠. 감찰 결과는 받겠습니다⁠.⁠” 태경이 잠깐 말을 멈췄다⁠. “⁠짐꾼 조합 준비위원회에서 하나만 부탁드리라고 했습니다⁠. 원청 길드장을 넣는 법에 하청 짐꾼 고리 검사를 짐꾼이 같이 하는 조항을 넣어 주십시오⁠. 부두에서만 보지 말고 아래에서요⁠.⁠”

오후 다섯 시⁠, 「⁠던전 중대재해법⁠」이 소위를 넘었다⁠. 원청 길드의 경영책임자가 짐꾼의 죽음까지 책임지게 하는 조항⁠, 짐꾼 대표가 고리 검사에 들어가는 조항이 함께 붙었다⁠. 왕정만은 표결 전에 회의실을 나갔다⁠.

*

12월 20일 저녁⁠, 강화 바닷가⁠. 지난해 던전이 가라앉은 자리는 이제 갯벌이었다⁠. 썰물에 드러난 갯벌 위로 노을이 길게 깔렸다⁠. 둑 위에 황옥분이 서 있었다⁠. 무열과 태경이 둑길을 걸어 올라왔다⁠. 무열은 경찰서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옥분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무열이 먼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오래 숙였다⁠. 옥분은 숙인 등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용서 안 해요⁠.⁠” 옥분이 말했다⁠. “⁠둘 다⁠.⁠”

“⁠압니다⁠.⁠”

“⁠대신 들었어요⁠. 국회에서⁠.⁠” 옥분이 갯벌을 보았다⁠. “⁠일 년 동안 아무도 사람 이름을 안 댔어요⁠. 하청이 그랬다⁠, 고리가 그랬다⁠, 바다가 그랬다⁠. 오늘 처음으로 사람이 자기 이름을 댔어요⁠.⁠”

태경은 목에 건 진구의 쇠 호루라기를 풀어 옥분에게 내밀었다⁠. 옥분은 받지 않았다⁠.

“⁠그거 들고 다녀요⁠. 다음에도 내려가요⁠. 소리 안 나는 호루라기 보면 생각나게⁠.⁠”

옥분은 둑길을 걸어 내려갔다⁠. 털모자 위로 노을빛이 번졌다⁠. 무열이 허리를 펴고 옥분의 등을 오래 보았다⁠. 망토 대신 검은 패딩을 입고 있었다⁠. 썰물 갯벌에서 짠 바람이 올라와 둑길의 마른 갈대를 쓸었다⁠. 갯벌 저 안쪽⁠, 지난해 바위가 가라앉은 자리에 작은 물웅덩이 하나가 노을을 받아 붉게 빛났다⁠. 웅덩이 가장자리에 누가 꽂아 두었는지 모를 대나무 막대 하나가 기울어 있었고⁠, 막대 끝에 하얀 천 조각이 묶여 바람에 떨었다⁠.

“⁠저기 6층이 있었습니다⁠.⁠” 무열이 웅덩이를 가리켰다⁠. “⁠바위가 다 들어가고 나서 한 번도 와 보지 않았습니다⁠.⁠”

태경도 와 보지 않았다⁠. 수사 기록에는 위치가 좌표로만 남아 있었다⁠.

“⁠감독관님⁠, 동생 계약 위반 건은 제가 길드 나오기 전에 정리했습니다⁠. 위치 이탈이 아니라 작업중지로 적었습니다⁠.⁠” 무열이 말했다⁠. “⁠계약금은 그대로 두라고 했습니다⁠. 갚는 건 동생이 알아서 하겠죠⁠.⁠”

“⁠동생은 짐꾼으로 돌아간답니다⁠.⁠”

“⁠압니다⁠. 제일 잘하는 일이니까요⁠.⁠”

*

2028년 1월 17일 월요일 아침⁠, 시흥 던전 부두⁠. 바다 위로 회색 바위 하나가 솟아 있었고 가운데 동굴에서 옅은 푸른빛이 흘렀다⁠. 부교 앞에 짐꾼 서른이 줄지어 있었다⁠. 저마다 목에 빨간 오리 호루라기를 걸었고⁠, 조끼 등판에는 「⁠던전짐꾼조합⁠」⁠.

줄 맨 앞에 마르고 키 큰 남자가 있었다⁠. 노란 안전모⁠, 각진 안경⁠, 형광 주황 조끼⁠. 조끼 가슴께에 「⁠명예산업안전감독관⁠」 완장이 감겨 있었다⁠. 감찰은 파면으로 끝났고⁠, 짐꾼 조합이 추천하자 노동부는 법대로 위촉했다⁠. 명예감독관은 일당도 월급도 없었다⁠. 목에는 오리 호루라기와 소리 나지 않는 쇠 호루라기가 나란히 매달려 있었다⁠.

태경은 짐꾼에게서 고리를 하나씩 받아 엄지와 검지로 잠금쇠를 비틀었다⁠. 옆에서 승재가 같은 손짓으로 비틀었다⁠. 승재 조끼 등판의 번호는 「⁠1⁠」이었다⁠. 조합원 번호 1번을 누가 가져가느냐로 단톡방이 사흘 동안 시끄러웠고⁠, 결국 반장님 목발 판정으로 승재가 가져갔다⁠.

갑수가 부교 입구 의자에 목발을 세워 두고 앉아 있었다⁠. 의자 옆에는 송도 부두 철망에서 건져 온 「⁠작업 중지⁠」 빨간 팻말이 기대어 있었다⁠. 페인트가 바닷물에 바래 분홍빛이었다⁠.

열네 번째 고리에서 태경의 손이 멈췄다⁠. 잠금쇠가 손가락 밑에서 단단했다⁠. 조금 더 비틀었다⁠. 쇠가 버텼다⁠. 태경은 고리를 짐꾼의 손에 돌려주었다⁠. 짐꾼이 고리를 받아 허리 벨트에 걸었다⁠. 찰칵⁠, 잠금쇠가 닫히는 소리가 언 부두 위에 또렷하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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