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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블린은 정각에 내려온다

헌터 전용 택배 기사 · 윤바로

2027년 9월 6일 월요일 아침 일곱 시 반⁠, 인천 송도 던전 물류센터의 기사 대기실에서는 박하 냄새와 쇠 냄새가 같이 났다⁠. 벽 하나 너머 탕제실에서 밤새 물약을 끓였고⁠, 은박 파우치에 담긴 물약이 대기실 냉장고 안에 생선처럼 나란히 누워 있었다⁠. 냉장고 유리문에 내 얼굴이 비쳤다⁠. 짧게 친 탈색 금발은 뿌리가 까맣게 올라와 있었고⁠, 왼쪽 볼에는 어제 붙인 반창고가 그대로였다⁠. 지상 마지막 배송지였던 아파트 현관에서 상자 모서리에 긁힌 자리였다⁠.

주황 배송 조끼 안에 검은 반팔⁠, 회색 바지⁠, 양 무릎에 새로 산 검은 보호대⁠. 주황 배낭을 메고 유리를 보며 활짝 웃어 보았다⁠. 첫 출근에는 웃는 얼굴이 이긴다는 것을 지상 택배 사 년 동안 배웠다⁠. 문 앞에서 웃으면 고객은 상자가 찌그러진 것을 반쯤 용서했다⁠.

“⁠보호대 새거네⁠.⁠”

옆 의자에서 무릎에 파스를 붙이던 아저씨가 말했다⁠. 조끼 등판에 매직으로 「⁠엄길수⁠」라고 크게 써 놓은 사람이었다⁠. 파스 냄새가 박하 냄새를 이겼다⁠.

“⁠어제 샀어요⁠. 계단이 많다고 해서요⁠.⁠”

“⁠많지⁠. 입구에서 1층까지 백열두 칸⁠, 1층에서 2층까지 아흔여섯 칸⁠. 10층까지 다 더하면⁠…⁠…⁠.⁠”

“⁠더하면요⁠?⁠”

“⁠더하다가 무릎이 먼저 나가서 끝까지 못 해 봤어⁠.⁠” 길수 형님이 파스 껍질을 구겨 휴지통에 던졌다⁠. 들어가지 않았다⁠. “⁠내가 지상 택배 십오 년이야⁠. 여기 내려온 지는 육 년⁠. 신입은 몇 년 했어⁠?⁠”

“⁠지상 사 년이요⁠.⁠”

“⁠지상에서 하나 놓으면 얼마 받았어⁠?⁠”

“⁠칠백팔십 원이요⁠.⁠”

길수 형님이 손가락 넷을 펴 보였다⁠. 던전 구역은 상자 하나에 사천이백 원이었다⁠. 옥련동 원룸 월세가 두 달 밀린 나에게 다섯 배가 넘는 숫자는 계단 몇 칸쯤 우습게 만들었다⁠.

*

여덟 시⁠, 교육장 앞 화면에 커다란 글자가 떴다⁠.

「⁠던집 — 지하 10층⁠, 삼십 분⁠」

화면 앞에 선 남자가 목에 건 은색 초시계를 눌렀다⁠. 딸깍⁠. 키가 크고 마른 몸에 짧게 깎은 머리⁠, 남색 바람막이 가슴에 던집 로고가 박혀 있었다⁠.

“⁠던집 송도 던전 운영팀장 차정우입니다⁠. 지금부터 십이 분 동안 설명하겠습니다⁠.⁠”

신입 여섯 명이 동시에 손목을 보았다⁠. 차정우 팀장은 화면을 넘겼다⁠. 물약 파우치 사진 아래 「⁠사십 분⁠」이라는 글자가 빨갛게 떴다⁠.

“⁠던전 공기에 닿은 물약은 사십 분이 지나면 묽어집니다⁠. 묽어진 물약은 상처를 못 닫습니다⁠. 그래서 삼십 분입니다⁠. 주문이 들어오면 탕제실에서 갓 끓인 물약을 받고⁠, 게이트를 지나는 순간 기사님 손목 단말기의 시계가 돌기 시작합니다⁠. 늦으면 건당 벌금 오천 원입니다⁠. 배차를 세 번 거절하시면 하루 배차가 멈춥니다⁠.⁠”

나는 손을 들었다⁠. “⁠벌금이 수수료보다 많은데요⁠?⁠”

“⁠그래서 안 늦으시면 됩니다⁠.⁠”

“⁠다리 아프면요⁠?⁠”

“⁠아프기 전에 도착하세요⁠.⁠” 차정우 팀장이 초시계를 다시 눌렀다⁠. “⁠질문 이십 초⁠. 다음⁠.⁠”

다음 화면은 「⁠기사님은 던집의 파트너입니다⁠」였다⁠. 기사는 던집 직원이 아니고⁠, 던집과 위탁계약을 맺은 개인사업자라고 차정우 팀장이 말했다⁠. 출근 시간도 쉬는 날도 기사님이 정한다고 했다⁠.

“⁠그럼 저 사장님이에요⁠?⁠”

“⁠네⁠.⁠”

“⁠사장님이 배차는 못 고르고요⁠?⁠”

“⁠배차는 앱이 고릅니다⁠.⁠”

교육장 뒤에서 누가 킥킥 웃었다⁠. 차정우 팀장은 웃지 않고 마지막 화면을 띄웠다⁠. 층마다 시간이 적힌 표였다⁠. 「⁠4층 — 매시 정각부터 오 분⁠, 고블린 출몰⁠」 「⁠6층 — 십오 분마다 박쥐 떼⁠」 「⁠9층 — 송도 앞바다 물때를 따름⁠」 「⁠10층 — 보스방 문은 닫히면 세 시간⁠, 배송은 문 옆 돌 틈으로⁠」⁠. 나는 4층 줄만 읽었다⁠. 정각만 피하면 되는 일이었다⁠.

*

아홉 시 사십팔 분⁠, 손목 단말기가 띵동 울었다⁠.

「⁠마루 기사님⁠, 첫 배차예요⁠! 같은 길 묶음 배송 다섯 건⁠, 오늘도 효율 만점⁠!⁠」

다섯 건 모두 4층 쉼터였다⁠. 맨 위 상자는 「⁠삼각김밥 파티 — 물약 두 병⁠, 삼각김밥 열 개⁠, 보조배터리 하나⁠」⁠. 탕제실 창구에서 갓 끓인 물약이 뜨끈한 파우치로 나왔다⁠. 상자 다섯 개를 쌓아 안자 턱 밑까지 올라왔고⁠, 상자 옆면마다 「⁠던집 당일 배송⁠」이 찍혀 있었다⁠. 게이트를 지나는 순간 단말기 화면이 바뀌었다⁠.

「⁠남은 시간 30⁠:00⁠」

입구 돌계단에 발을 디디자 공기가 한 겹 서늘해졌다⁠. 1층부터 3층까지는 길었지만 조용했다⁠. 벽에 붙은 이끼가 손전등 빛을 받아 연두색으로 번들거렸고⁠, 운동화 밑창이 돌을 칠 때마다 소리가 천장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3층 계단참에서 단말기를 보니 열 시 이 분 전이었다⁠. 4층 계단만 내려가면 쉼터였다⁠.

4층 계단은 밝았다⁠. 던전 천장에 길게 뚫린 구멍으로 바깥 햇빛이 비스듬히 쏟아져 돌계단을 하얗게 데우고 있었다⁠. 사람들은 빛 우물이라고 불렀다⁠. 계단 벽에 누가 형광 분홍 스프레이로 왕관을 그려 놓았고⁠, 덩굴이 계단 끝까지 늘어져 있었다⁠. 나는 계단 위에서 단말기를 다시 보았다⁠. 열 시 정각이었다⁠.

바위 틈에서 초록 머리가 하나 쑥 나왔다⁠. 빨간 두건을 쓰고⁠, 노란 눈을 끔뻑이고⁠, 손에는 못이 박힌 나무 몽둥이를 쥔 고블린이었다⁠. 고블린은 햇빛에 얼굴을 대고 눈을 감았다⁠. 볕을 쬐러 나온 얼굴이었다⁠. 그다음 노란 눈이 내 주황 조끼에 멈췄다⁠.

“⁠끼익⁠?⁠”

“⁠아니⁠, 저는 그냥 지나가는⁠…⁠…⁠.⁠”

몽둥이가 올라갔다⁠. 나는 상자 다섯 개를 안은 채 계단을 한 발로 뛰어내렸다⁠. 두 칸⁠, 세 칸⁠, 무릎 보호대가 돌에 쿵 하고 박혔다⁠. 뒤에서 몽둥이가 계단을 때리는 소리가 따라왔다⁠. 바위 틈마다 초록 머리가 하나씩 더 나왔다⁠. 정각이 오 분 동안이라는 것을 나는 그제야 몸으로 읽었다⁠.

계단 아래 쉼터에는 천막 두 동과 나무 궤짝 더미⁠, 칼 두 자루가 엇갈린 빨간 깃발이 있었다⁠. 깃발 밑에서 갑옷 입은 남자가 팔을 크게 흔들었다⁠.

“⁠택배 형님⁠! 여기요⁠, 여기⁠!⁠”

나는 마지막 다섯 칸을 한 번에 뛰어내리고 상자를 궤짝 위에 내려놓았다⁠. 단말기에는 「⁠남은 시간 17⁠:20⁠」이 떠 있었다⁠. 고블린은 계단 중간에서 멈추더니 햇빛 쪽으로 돌아가 다시 눈을 감았다⁠. 쉼터까지는 내려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배송 완료⁠!⁠”

내가 외치자 갑옷 남자가 박수를 쳤다⁠. 덩치가 냉장고만 했고⁠, 방패는 자기 몸의 반만 했다⁠. 뒤에서 여자 하나가 휴대전화를 들고 나를 찍고 있었고⁠, 다른 남자 하나는 천막 그늘에 쪼그려 앉아 삼각김밥 포장을 뜯는 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저희 파티 이름이 삼각김밥이에요⁠.⁠” 갑옷 남자가 말했다⁠. “⁠맹태산이고요⁠, 방패 들어요⁠. 저쪽은 마법사 어진솔⁠, 이쪽은 힐러 변고을⁠. 셋 다 편의점 야간 알바 하다가 각성했어요⁠.⁠”

“⁠그래서 삼각김밥이에요⁠?⁠”

“⁠폐기 삼각김밥으로 버틴 날들을 잊지 말자고요⁠.⁠” 태산 씨가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갑옷이 쾅 울렸다⁠. “⁠근데 형님⁠, 6층 가는 계단 어딨어요⁠? 저희 아침부터 6층 갔다가 길 잃어서 4층으로 도로 올라왔거든요⁠.⁠”

진솔 씨가 휴대전화를 내리지 않고 말했다⁠. “⁠택배 기사님이 우리보다 빨리 오는 거 ㄹㅇ 킹받네⁠.⁠”

*

열 시 오십이 분⁠, 두 번째 배차가 울렸다⁠. 7층⁠, 물약 세 병⁠. 받는 사람은 「⁠칠층 베테랑⁠」이라는 이름을 쓰는 헌터였다⁠. 이번에는 4층을 정각 전에 지나야 한다고 머리로는 알았다⁠. 3층에서 6층 박쥐 줄을 떠올리며 숫자를 따지는 동안 발이 늦었다⁠. 4층 빛 우물에 들어섰을 때 단말기 시계는 열한 시를 막 넘기고 있었다⁠.

빨간 두건이 다시 나왔다⁠. 아까 나를 쫓던 고블린이었다⁠. 이번에는 몽둥이를 휘두르지 않고⁠, 내 품에서 맨 위 상자를 쏙 빼 가더니 옆 굴로 뛰었다⁠.

“⁠야⁠! 그거 물약이야⁠! 너 먹으면 배탈 나⁠!⁠”

옆 굴은 천장이 낮았다⁠. 허리를 숙이고 따라가는데 고블린이 자기 두건 끝을 밟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상자가 바닥을 굴렀다⁠. 나는 상자를 주워 들고 뒤도 안 보고 계단으로 돌아왔다⁠. 고블린은 바닥에 엎드린 채 두건을 고쳐 매며 끼익끼익 화를 냈다⁠. 이름을 붙여 준다면 두건이였다⁠.

7층 계단참에서 물약을 건넸을 때 화면은 「⁠남은 시간 -00⁠:40⁠」이었다⁠. 칠층 베테랑은 흰 수염이 반쯤 난 헌터였고⁠, 팔뚝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괜찮아⁠, 아직 안 묽어졌어⁠.⁠” 베테랑이 파우치를 흔들어 보며 말했다⁠. “⁠4층 정각에 걸렸지⁠? 다들 첫날 한 번은 털려⁠.⁠”

단말기가 띵동 울었다⁠.

「⁠지연 1건이 확인되었어요⁠. 정산 시 5⁠,000원이 차감됩니다⁠. 다음엔 더 빨리 만나요⁠!⁠」

*

게이트를 나오자 차정우 팀장이 태블릿을 들고 서 있었다⁠. 게이트 기계가 내 출입 시각을 띵 하고 찍었다⁠. 운영실 유리벽 너머 큰 화면에는 「⁠전국 던전 배송 평균 도착 시간 — 송도 27분 12초⁠, 전국 열한 곳 중 1위⁠」가 떠 있었다⁠.

“⁠도마루 기사님⁠. 7층 사십 초 지연입니다⁠.⁠”

“⁠고블린이 상자를 훔쳐 갔어요⁠. 쫓아가서 찾아왔고요⁠.⁠”

“⁠4층 정각 고블린은 교육 자료 마지막 화면에 있었습니다⁠.⁠”

“⁠배차가 열 시 오십이 분에 왔어요⁠. 정각에 4층을 지날 수밖에 없는 배차였다고요⁠.⁠”

“⁠배차는 앱이 정합니다⁠. 길은 기사님이 정합니다⁠.⁠” 차정우 팀장이 태블릿을 내렸다⁠. “⁠3층에서 이 분을 쓰셨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박쥐요⁠.⁠”

“⁠박쥐는 6층입니다⁠.⁠”

뒤에서 기사 둘이 지나가며 웃음을 참았다⁠. 나는 볼의 반창고를 손끝으로 눌렀다⁠. 얼굴이 뜨거웠다⁠.

“⁠사십 초예요⁠. 물약도 멀쩡했고⁠, 받는 분도 괜찮다고 했어요⁠.⁠”

차정우 팀장이 목에 건 초시계를 엄지로 눌렀다⁠. 딸깍⁠. 잠깐 아무 말이 없었다⁠.

“⁠사십 초 늦어서 죽은 사람도 있습니다⁠.⁠”

차정우 팀장은 한마디만 남기고 운영실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기 전에 왼쪽 다리를 아주 조금 끌었다⁠. 운영실 안 작은 텔레비전에서 뉴스 자막이 흘렀다⁠. 「⁠국회⁠, ‘⁠던전 노동법⁠’ 공청회 일정 논의⁠」⁠. 아무도 화면을 보지 않았다⁠.

*

저녁 여덟 시⁠, 대기실 의자에 앉아 정산 화면을 열었다⁠. 열세 건⁠, 오만사천육백 원에서 벌금 오천 원과 던집 운영비가 빠져 있었다⁠. 운영비가 무엇인지는 화면 어디에도 없었다⁠. 길수 형님은 맞은편에서 무릎에 새 파스를 붙이며 말했다⁠.

“⁠첫날 오만 원 넘었으면 잘했네⁠. 나 첫날은 벌금이 수수료보다 많았어⁠.⁠”

“⁠형님⁠, 저 팀장님 원래 저래요⁠?⁠”

“⁠저래⁠.⁠” 길수 형님이 파스를 문질렀다⁠. “⁠초시계는 자는 데도 차고 잘 거다⁠.⁠”

휴대전화가 떨었다⁠. 원룸 집주인 할머니였다⁠.

「⁠총각 이번 달은 꼭 부탁해요⁠. 두 달이에요⁠. 할머니도 관리비 내야 해요⁠」

할머니 문자 끝에는 늘 웃는 얼굴 그림이 붙어 있었다⁠. 웃는 얼굴이 더 무서웠다⁠. 답장을 쓰다 지우는 사이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받자마자 우렁찬 목소리가 대기실을 울렸다⁠.

“⁠형님⁠! 저 태산이요⁠! 삼각김밥⁠!⁠”

“⁠번호는 어떻게⁠…⁠…⁠”

“⁠배송 완료 문자에 기사님 연락처 있던데요⁠. 형님⁠, 내일 저희 6층 다시 가요⁠. 형님 배송 가는 길로 뒤따라가면 안 돼요⁠? 저희 아무것도 안 건드리고 형님 엉덩이만 보고 갈게요⁠.⁠”

“⁠기사는 헌터 길 안내 못 해요⁠. 교육 때 들었어요⁠.⁠”

“⁠안내 말고요⁠, 그냥 같은 길로 걷는 거요⁠. 길은 누구 거 아니잖아요⁠.⁠”

단말기 위로 운영팀 공지가 떴다⁠. 「⁠신규 기사님께 — 배송 중 헌터 동행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운영팀장 차정우⁠」⁠. 무릎이 쿡쿡 쑤셨다⁠. 월세 문자 속 웃는 얼굴이 아직 화면에 남아 있었다⁠.

“⁠태산 씨⁠.⁠”

“⁠네⁠, 형님⁠.⁠”

“⁠내일 아침 아홉 시 사십오 분⁠, 4층 계단 밑이요⁠. 정각 전에 지나가야 돼요⁠. 늦으면 두고 가요⁠.⁠”

수화기 너머에서 갑옷이 쾅 울렸다⁠. 가슴을 친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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