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지운 자리
문세(門稅)를 받는 사람 · 백해원
장부는 문세청 삼 층에 있다.
사만 이천 개의 문이 번호순으로 적혀 있다. 한 권에 이천 개씩, 스물한 권. 책장 하나를 다 채운다.
견습은 열람만 할 수 있다. 고치려면 상급 셈꾼의 도장이 있어야 한다.
***
서17골목의 문은 번호가 이렇게 매겨져 있다.
17-4201 부터 17-4214 까지
열넷이다.
내가 본 열다섯 번째 문은 번호가 없다. 없는 것에 번호를 붙이려면 다음 번호를 쓴다.
17-4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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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번호를 찾아봤다.
책장 세 번째 칸, 열한 번째 권. 손가락으로 번호를 짚어 내려갔다.
4213. 4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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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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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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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혀 있는데 글자가 지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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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것은 오래됐다.
종이가 그 자리만 얇아져 있었고, 색이 주변보다 밝았다. 여러 번 문지른 자국이었다. 급하게 지운 것이 아니라, 지우고 또 지운 자국.
나는 종이를 들어 창 쪽으로 기울였다.
빛이 종이를 통과했다.
눌린 자국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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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수 있는 것은 두 글자였다.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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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부에는 정해진 문구가 몇 개 있다.
개폐 불가 · 값 없음 철거됨 · 값 없음 소실됨 · 값 없음
세 가지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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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앞 글자를 읽으려고 종이를 더 기울였다.
손이 떨려서 종이가 흔들렸다. 나는 팔꿈치를 책상에 붙였다.
그때 뒤에서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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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리.”
무하 선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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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이를 놓았다. 놓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
“무엇을 보나?”
“…열람 중입니다.”
“무슨 번호?”
***
나는 거짓말을 못 한다.
정확히는, 거짓말을 하면 얼굴에 다 나온다. 그래서 하지 않기로 오래전에 정했다.
“17-4215입니다.”
***
선배는 장부 앞으로 왔다.
천천히 왔다. 서른 해를 일한 사람의 걸음이었다. 급할 일이 없는 걸음.
내가 편 장을 봤다.
오래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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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은 이십 년 전 것이다.”
“예.”
“이십 년 전에 나는 견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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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럼 이 장을 아십니까?”
“안다.”
“지운 것도 아십니까?”
***
선배는 장부를 덮었다.
먼지가 조금 일었다. 햇빛 속에서 그 먼지가 천천히 내려앉았다.
“내가 지웠다.”
***
방이 조용해졌다.
삼 층에는 사람이 우리 둘뿐이었다. 아래층에서 누가 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한 냥짜리 문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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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요?”
“값을 매길 수 없었으니까.”
“열리지 않아서요.”
“아니.”
선배는 창 쪽을 봤다.
“열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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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리면 값을 매길 수 있지 않습니까?”
“그 문은 어느 쪽으로도 열리지 않고, 동시에 양쪽으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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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문은 없습니다.”
“그래서 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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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는 장부를 제자리에 꽂았다.
꽂고 나서 손으로 책등을 한 번 쓸었다. 오래 만진 물건을 대하는 손짓이었다.
“하리야.”
“예.”
“장부는 도시를 적는 게 아니다.”
“그럼 무엇을 적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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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가 나를 봤다.
“도시가 감당할 수 있는 것만 적는다.”
***
그날 밤 나는 다시 서17골목에 갔다.
문이 있었다.
문틈으로 빛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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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번에는 문 앞에 앉았다.
앉아서 아침까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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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추워서 무릎을 끌어안았다. 골목에는 바람이 돌아 들어와서 등이 시렸다. 나는 등을 문에 붙였다.
문이 따뜻했다.
나무가 따뜻할 리 없다. 겨울 새벽의 나무는 돌보다 차다.
***
해가 뜨자 문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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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것을 나는 보았다.
한꺼번에 없어진 것이 아니었다. 회칠이 서서히 덮이듯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흰 것이 내려왔다. 나뭇결이 그 아래로 잠겼다.
내가 등을 붙이고 있던 자리도 잠겼다.
나는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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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에 손을 댔다.
따뜻했다.
***
나는 그 온기가 식을 때까지 손을 대고 있었다.
식는 데 한 식경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