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194자) · 하리 · 시월 초닷새

문계

문세를 못 내면 내 집 문이 벽이 된다 · 백해원

초닷새 파루가 울리기도 전에 보리 할아범 집 앞에 줄이 섰다. 선창에 짐 지러 가는 사내들, 빨래 광주리를 인 아낙들, 강에서 물고기 내장을 씻어 파는 소년 둘이었다. 물문으로 나가면 한 푼이고, 할아범 부엌을 지나 뒷문으로 나가면 공짜였다. 아랫말에서 공짜라는 말은 불보다 빨리 번진다.

할아범은 부엌 한가운데 걸상을 놓고 앉아 있었다. 서른 해 서문을 지킨 사람이 다시 문 옆에 앉으니 허리가 저절로 곧아진 모양이었다.

“다음. 광주리 낮춰, 들보에 걸린다. 다음. 거기 요강 밟지 말고.”

요강을 밟은 사람은 벌써 둘이었다. 두 번째는 선창 짐꾼 삼 형제의 맏이였는데, 맨발이 요강 뚜껑을 밟고 미끄러져 뒷문 밖 강둑까지 엉덩이로 미끄러져 나갔다. 줄 선 사람들이 웃었고, 맏이는 엉덩이를 털면서도 한 푼 아꼈다고 좋아했다. 하리는 부엌 문간에 서서 사람 수를 셌다. 파루 종이 다 울리기 전까지 마흔일곱이 지나갔다. 마흔일곱 푼이면 네 냥 일곱 푼이다. 물문 초소에서 곽 노인이 오늘 아침 받지 못한 돈이 그만큼이었다.

해가 성벽 위로 올라왔을 때 갑쇠가 왔다. 선창패 둘을 달고 보리 할아범 집 앞문을 막아섰다.

“남의 집 문으로 드나드는 건 도둑이오. 여기로 지나는 사람은 한 푼 내시오.”

할아범이 걸상에서 일어났다. 무릎이 두 번 뚝뚝 소리를 냈다.

“내 문이오. 내가 들이오. 서른 해를 서문에서 사람을 들이고 내보낸 늙은이한테 문 드나드는 법을 가르치려나?”

“그 문 달마다 아홉 냥이오. 권양 어른 말씀이오. 그믐 지나 닷새까지 누가 그 아홉 냥을 내오? 할아범이 내오?”

줄이 조용해지더니 광주리를 인 아낙 하나가 슬그머니 줄에서 빠졌다. 아홉 냥이라는 말은 아랫말에서 한 집 석 달 방세였다. 보리 할아범에게는 그만한 돈이 없었고, 줄 선 사람들도 그걸 알았다. 오늘 공짜로 나가도 그믐 지나 닷새면 이 문은 벽이 된다.

하리가 부엌에서 나와 갑쇠 앞에 섰다.

“물문이 하루 한 푼이면 한 달에 몇 푼이오?”

“서른 푼이지.”

“서른 푼이면 석 냥이고. 날마다 강에 나가는 사람이 이 골목에만 스물이 넘어요. 그 사람들이 달마다 물문에 예순 냥을 내요. 이 문 하나는 달에 아홉 냥이고. 열 집이 나누면 한 집에 아홉 푼이에요.”

갑쇠가 손가락을 꼽았다. 열 손가락을 다 접고 나서 선창패 하나의 손가락을 빌리려고 손을 내밀었다. 선창패가 손을 뒤로 감췄다.

“셈은 네가 잘하고. 나는 봉 붙이는 사람이오.”

갑쇠가 앞문 문설주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꼈다. 비키지도 들어오지도 않겠다는 몸짓이었다. 줄은 그대로 서 있었는데, 한 사람씩 앞으로 나올 때마다 갑쇠를 곁눈으로 보고 한 걸음씩 빨리 걸었다.

한낮 종이 울릴 무렵에는 물문지기 곽 노인이 빈 돈궤를 옆구리에 끼고 소금골목까지 걸어왔다. 뱃사람 시절 햇볕에 그을린 목덜미가 오늘은 더 붉었다.

“오늘 아침 물문을 지난 게 셋이야. 둘은 도급방 사람이고, 하나는 길 잃은 개였어. 개한테 한 푼을 받을 수도 없고.”

곽 노인은 보리 할아범 부엌을 들여다보고 혀를 찼다. 그러고는 갑쇠 옆에 나란히 서서 줄 선 사람들을 같이 노려보다가, 요강 밟는 소리가 나자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갑쇠가 팔꿈치로 옆구리를 찔렀다.

*

그날 저녁 보리 할아범 부엌에 아랫말 사람 열여섯이 모였다. 보리댁, 대장장이 쇠메, 선창 짐꾼 삼 형제, 소금골목 과부 둘, 강에서 내장 씻는 소년들의 어미, 그리고 현과 소을이었다. 동이는 하리 옆에 붙어 앉아 제 몫의 식은 보리떡을 뜯었다. 부엌 화로에 할아범이 모처럼 숯을 넣었는데 뒷문을 반쯤 열어 두어서 불이 바람을 먹고 붉게 살아났다. 강물 소리가 문 너머에서 가깝게 났고, 불빛이 사람들 얼굴을 아래에서 비추어 다들 조금씩 험상궂어 보였다.

하리가 문계 얘기를 꺼냈다. 난 문 하나에 아홉 냥, 열 집이면 아홉 푼, 물문에 내던 석 냥보다 싸다. 돈은 그믐 지나 닷새 안에 도급방 수문꾼에게 낸다. 안 내면 문이 벽이 된다.

“그 수문꾼이 누군데?”

쇠메가 풀무 같은 목소리로 묻자 화로 불이 흔들렸다.

“우리 구역은 무하 어른이요.”

그 이름이 나오자 앞문이 열렸다. 무하가 서 있었다. 쉰여덟, 도급방 수문 우두머리였다. 서른 해를 청에서 문을 두드리다가 도급이 넘어가자 권양 밑으로 옮겨 왔다. 손가락 마디가 전부 한쪽으로 굽어서, 쇠 패를 찬 오른손이 늘 반쯤 쥔 주먹 같았다. 하리에게 문을 두드리는 법을 가르친 손이었다.

“하리야, 너 지금 뭘 모으는 거냐?”

“문계요.”

“난 문을 지키는 계?”

“예.”

무하가 부엌에 들어와 뒷문 앞에 섰다. 굽은 손가락으로 문설주에 하리가 판 눈금 하나를 쓸었다.

“이 문은 성벽에 났다. 성벽 구멍은 누가 드나드는지 모른다. 오늘은 빨래꾼이 나가지만 내일은 누가 들어올지 아나? 스무 해 전에 서문 성벽에 이런 문이 하나 났다. 그 문으로 강 위 여숙 사람들이 들어왔고, 그해 겨울 아랫말 반이 앓았다.”

부엌이 조용해졌고, 그 겨울을 기억하는 나이의 사람이 부엌에 여섯은 있었다. 소금골목 과부 하나가 제 목을 손으로 감쌌다.

소을이 화로 너머에서 무하를 올려다보았다.

“그 겨울에 앓은 사람들은 문이 있어서 앓았고, 우리 할머니는 문이 없어서 죽었어요. 어느 쪽 셈이 더 커요?”

무하는 소을을 오래 보았다. 굽은 손가락이 쇠 패를 한 번 쥐었다 놓았다.

“그럼 곰례 할멈은요?”

하리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컸다.

“벽 안에서 밤마다 세 번씩 두드렸는데요. 문이 났는데, 바깥에서 덮었어요.”

“나는 바르라 한 적 없다.”

“누가 바르라 했어요?”

“스무 해 전에 청이 난 문은 벽으로 친다고 정했다. 그 말을 청에서 처음 꺼낸 사람이 나다.”

무하는 그 말을 숨기지 않았다. 굽은 손으로 뒷문을 한 번 쳤다. 패 찬 손이었는데 문은 울지 않고 맨 나무 소리만 났다. 아직 청 셈에 들지 않은 문이었다.

“우리가 두드려야 아랫말 값이 맞게 나온다. 네가 도급방을 거스르면 도급인은 수문꾼을 갈고, 그러면 아랫말 문은 탁 목수 같은 놈이 두드린다. 한 냥짜리가 아홉 냥으로 우는 걸 네가 제일 잘 알지 않냐?”

하리는 대답하지 못했다. 무하가 나가면서 앞문을 닫았는데, 그 문은 둥, 한 번 낮게 울었다. 한 냥짜리 문이었다.

하리는 제 오른손을 내려다봤다. 무하가 처음 문을 가르칠 때 하리의 손을 잡고 문설주에서 한 뼘 안쪽을 짚어 주었다. 여기가 문의 가슴이다, 여기를 치면 문이 제 값을 말한다. 그 손이 스무 해 전에 벽을 바르자고 했다. 하리의 손마디는 무하 손마디를 따라 이미 조금 굽기 시작했다. 삼 년 치만큼.

*

한참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화로에서 숯 하나가 쪼개지는 소리가 났다.

보리댁이 앞치마 주머니를 뒤졌다. 밀가루 묻은 한 푼짜리 쇠돈이 아홉 개 나왔다. 보리댁이 그것을 부엌 바닥에 하나씩 늘어놓았다.

“아홉 푼이면 빵 부스러기 세 봉지 값이야. 물문 한 달 치면 부스러기 열 봉지고. 나는 셈을 못 해도 봉지 셈은 해.”

소금골목 과부 둘이 서로 쳐다보다가 각자 아홉 푼씩 꺼냈다. 삼 형제의 맏이가 아까 요강에서 미끄러진 엉덩이를 문지르며 형제 셋 몫이라고 스물일곱 푼을 내놓았다. 한 집에 아홉 푼인데 셋이 한집 사니 아홉 푼만 내라고 하리가 말하자, 맏이가 요강 값은 따로 쳐야 한다고 우겼다. 부엌에 처음으로 웃음이 돌았다. 소년들의 어미가 떨리는 손으로 다섯 푼을 냈고, 나머지는 그믐에 채우겠다고 했다. 쇠메는 제 집 문이 이틀 전에 뒤집혀서 아홉 냥을 못 냈다며 머리를 긁었다.

그렇게 일곱 집이 모였다.

소을이 일어나 부엌 구석 삼태기에서 삼끈을 한 가닥 뽑았다. 바닥의 푼을 열 개씩 끈에 꿰었다. 꿸 때마다 쇠돈이 서로 부딪혀 작게 짤랑거렸다.

“돈은 내가 들어. 수문꾼 손에 두면 또 부르겠지.”

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을이 끈을 매듭짓다가 하리를 쳐다봤다.

“적지 마. 적으면 도급방이 가져가. 끈에 꿴 건 내 손이 세.”

*

인경이 울리고 한참 지났을 때, 모임이 끝나고 제 대장간에 돌아갔던 쇠메가 얼굴이 새하얘져서 보리 할아범 부엌으로 다시 뛰어 들어왔다.

“봉을 붙였소. 초닷새라고. 돌이가 안에 있소. 화덕에 불 넣어 둔 채로.”

하리가 뒷문을 열어젖혔다. 보리 할아범 문이 있어서 이제는 물문 곽 노인한테 술을 흥정할 필요가 없었다. 하리와 소을과 쇠메와 현이 강둑으로 쏟아져 나갔고, 동이가 등롱을 들고 맨 뒤에서 넘어졌다가 일어났다. 성벽을 따라 쇠메골목 뒤쯤 가자 쇳내와 숯 연기가 먼저 닿았다. 이끼 낀 성벽에 새 문이 서 있었다. 문틈으로 흔들리지 않는 빛과 함께 뜨거운 바람이 새어 나왔는데, 그 바람이 닿는 자리마다 밤이슬 앉은 이끼가 김을 올리며 오그라들었고, 문 가까이 댄 손바닥이 화덕 앞에 선 것처럼 따가웠다. 쇠메가 문짝을 맨손으로 치며 돌이 이름을 불렀다. 안에서 풀무 가죽이 한 번 푹 꺼지는 소리가 대답처럼 돌아왔다.

강 쪽에서 노 소리가 났다. 등롱 하나가 물 위에서 흔들렸다.

“소을아, 끈.”

소을이 품에서 꺼낸 삼끈에는 예순세 푼, 여섯 냥 세 푼이 꿰여 있었다. 두 냥 일곱 푼이 모자랐다. 쇠메가 가죽 앞치마 주머니를 뒤집어 한 냥 두 푼을 털었고, 현이 한 냥을 내놓았다. 동이가 등롱을 내려놓고 제 주머니에서 마지막 다섯 푼을 꺼내 들고는 한참 들여다봤다.

“형, 이것도 강에 빠지면 저 울어요.”

“안 빠져.”

하리가 문 앞에 쪼그려 앉아 값을 불렀다.

“아홉 냥.”

한 냥짜리는 한 개씩, 푼은 끈째로 문턱에 놓았다. 문틈이 삼끈까지 통째로 삼켰다. 소을이 작게 아, 하고 소리를 냈다. 마지막으로 동이의 다섯 푼이 들어가자 문이 바깥으로 열렸고, 뜨거운 공기가 한꺼번에 밀려 나왔다. 불빛 속에서 열세 살 돌이가 풀무를 끌어안고 기침하며 기어 나왔다. 쇠메가 아이를 번쩍 들어 강물에 발부터 담갔다. 돌이가 비명을 질렀고, 쇠메도 같이 소리를 질렀다.

배는 강둑에 닿지 않았다. 노 젓는 사람이 이쪽 등롱을 한참 보더니 뱃머리를 돌려 물문 쪽으로 멀어졌다.

하리는 새 문 설주에 눈금 하나를 팠다. 오늘 밤 삼문의 문은 사만 이천 둘이었다.

소을이 빈 손을 펴 보였다. 문이 끈까지 먹어서 손바닥에는 삼 올 자국만 남아 있었다.

“이제 문이 둘이야. 그믐에는 열여덟 냥.”

“그럼 문계가 스물은 돼야지.”

“네가 모아. 나는 세기만 할게.”

돌이가 강물에서 발을 빼고 풀무를 끌어안은 채 이를 딱딱 부딪쳤다. 쇠메가 가죽 앞치마를 벗어 아이를 둘둘 말았고, 동이는 빈 주머니를 뒤집어 털며 강물을 오래 노려보았다. 오늘은 한 푼도 강에 안 빠졌다.

3화는 어땠나요?

댓글 3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 달밤에책2026.06.07· 3화

    이 장면 묘사가 오래 남습니다. 특히 마지막 두 줄이요.

    • 백해원작가2026.06.08

      3화 마지막 두 줄은 몇 번을 고쳐 쓴 자리예요. 오래 남았다니 고맙습니다.

    • 종이배2026.06.08

      완전 공감합니다. 특히 마지막 대사요.

문계 · 문세를 못 내면 내 집 문이 벽이 된다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