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194자) · 하리 · 시월 초하루

석회

문세를 못 내면 내 집 문이 벽이 된다 · 백해원

시월 초하루 아침, 보리 할아범 방의 뒷벽에는 문이 그대로 있었다. 밤에 본 대로 손잡이도 경첩도 없는 널판 문이었는데, 해가 떠도 벽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문틈으로 강바람이 들어와 화로의 식은 재를 한 겹씩 날렸고, 할아범은 그 바람이 좋다며 이불을 턱까지 끌어 올린 채 문 쪽으로 돌아누웠다.

“밤새 강물 소리가 벽 너머가 아니라 문 너머에서 나더군. 가깝더라고.”

“기침은요?”

“기침은 원래 하던 거고.”

하리가 문을 밀자 문짝이 바깥으로 소리 없이 열렸다. 강둑의 젖은 흙이 바로 발밑이었고, 빨래터 돌판에 벌써 아낙 둘이 나와 방망이질을 하고 있었다. 한 사람이 이쪽을 보더니 방망이를 든 채 입을 벌렸다. 물문을 안 거치고 강둑에 나선 사람을 아랫말에서 처음 본 얼굴이었다.

그 얼굴 너머로 권양이 왔다. 갑쇠가 석회 통을 들고 뒤따랐다. 권양은 강둑에 서서 문을 아래위로 훑었다. 갑쇠가 흙손으로 석회를 한 번 떠서 문짝에 척 발랐다. 석회는 붙지 않고 어젯밤처럼 주르륵 흘러내렸다. 갑쇠가 한 번 더 발랐다. 또 흘렀다. 세 번째에는 제 신발에 떨어졌다.

“그만하게. 신발 버리겠네.”

권양이 웃었다. 성낸 기색이 한 점도 없었다.

“값을 받은 문이로군. 청 장부에는 없지만 값을 받았으면 문이지. 그리고 아랫말에 선 문이면 내 구역 문이야. 달마다 아홉 냥이네. 그믐 지나 닷새까지 못 내면, 봉이 아니라 도로 벽이 되겠지.”

“그 아홉 냥은 제가 냈어요.”

“알지. 문이 삼킨 돈은 청으로 가고, 청은 아랫말 몫을 도급방으로 내리네. 자네 돈은 지금 내 금고에 있어. 고맙네, 하리.”

권양이 몸을 돌리다가 한마디를 얹었다.

“허락 없이 남의 구역 문에 눈금을 팠으니 이달 급료 넉 냥은 깎네. 그리고 어젯밤 견습이 강에 빠뜨린 한 냥은 청에서도 못 찾아 주네.”

동이가 문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

빨래골목 곰례네 집 앞에는 사람이 스물쯤 서 있었다. 문짝에 봉이 떨어져 나간 자리가 누렇게 남아 있었고, 문턱에는 누군가 가져다 놓은 보리떡 두 개가 식어 가고 있었다. 하리가 골목에 들어서자 사람들이 한 걸음씩 옆으로 비켰다. 수문꾼이 누구 집을 부르는지는 아랫말 사람이면 다 안다. 비키는 발소리가 하나도 안 났다.

문턱에 열네 살 소을이 앉아 있었다. 무릎에 빨래 방망이를 올려놓고 있었다. 할멈이 강둑에서 쓰던, 손잡이가 까맣게 닳은 참나무 방망이였다. 소을이 하리를 보고 일어섰다.

“우리 집 이름 부른 게 너지.”

하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방망이가 하리의 왼쪽 어깨를 쳤다. 뼈에 닿는 소리가 골목에 울렸다. 하리는 피하지 않았고, 두 번째가 팔뚝에 떨어졌다. 세 번째를 치려고 든 소을의 팔이 떨려서 방망이 끝이 허공에서 흔들렸다. 소을이 그 팔을 제 손으로 붙잡고 내렸다.

골목 뒤에서 목수 현이 대팻밥 묻은 앞치마를 두른 채 걸어 나왔다. 보리 할아범이 새벽에 사람을 보내 불렀다고 했다. 현은 하리의 어깨를 한 번 보고 소을의 방망이를 한 번 봤다.

“방망이는 빨래 칠 때 쓰는 거다. 사람은 옷 입은 채로 쳐도 안 빨린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현도 웃자고 한 말이 아닌 얼굴이었다.

옆집 대장장이 쇠메가 팔짱을 풀고 문턱의 보리떡을 내려다봤다. 쇠메는 목소리가 풀무 같은 사람이라, 작게 말한다는 것이 골목 끝까지 들렸다.

“할멈이 마흔 해를 윗말 빨래를 했소. 판관 댁 버선이며 도급인 댁 속곳까지 다 저 방망이를 거쳤지. 아침마다 강둑에서 탁탁 소리가 나면 우리는 그걸로 파루를 셌소. 종보다 할멈이 먼저였으니까.”

보리댁이 거들었다.

“욕을 해도 존댓말로 했어. 이 썩을 놈의 물문지기 양반아, 오늘도 한 푼 드시옵니까, 하고.”

그 말에 골목 몇 사람이 코로 웃었다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소을은 웃지도 울지도 않고 방망이 손잡이의 까만 데를 엄지로 문질렀다. 할멈의 손바닥이 마흔 해 동안 거기를 쥐었다. 하리는 그 방망이 소리를 알았다. 삼 년 동안 빨래골목을 돌면서 그 소리가 들리면 할멈 집은 빈 줄 알고 다음 문으로 넘어갔다.

“소을아, 할멈 방 뒷벽을 좀 보자.”

*

곰례네 방은 한 칸이었다. 뒷벽이 성벽이라 벽돌이 아니라 큰 돌이 박혀 있었고, 돌 사이 틈마다 할멈이 넝마를 쑤셔 넣어 바람을 막아 두었다. 방 안에는 아직 오래 갇힌 공기가 남아 있었다. 식은 숯 냄새와 오줌 지린내, 그 아래로 빨랫비누 냄새가 희미하게 깔려 있었다. 창틈으로 들어온 아침 빛이 벽에 비스듬히 닿았다.

그 빛 속에서 하리는 돌 위에 문 모양의 테두리를 봤다. 사람 키만 한 네모였다. 돌에 나뭇결 같은 줄이 그림자처럼 세로로 스며 있었고, 테두리 안만 돌이 조금 더 밝았다. 테두리 아래쪽 한 뼘 높이까지 가느다란 긁힌 자국이 수없이 나 있었다. 손톱 자국이었다. 몇 군데는 끝이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벽 아래에 물그릇이 하나 놓여 있었다. 바닥에 물때가 둥글게 말라붙어 있었다.

소을이 문간에 서서 말했다.

“옆집 대장간 아저씨가 들었대. 첫날부터 사흘은 밤마다 벽을 세 번씩 두드렸대. 할머니가 강에서 나 부를 때 그렇게 해. 빨래터 쪽 벽을 세 번 치면 내가 들어와. 넷째 날 밤에는 두 번. 다섯째 날은 한 번.”

소을이 거기서 말을 끊었다. 여섯째 날은 말하지 않았다.

“너는 그때 어디 있었냐?”

현이 물었다. 소을이 방망이를 고쳐 쥐었다.

“나는 없었어. 물문이 닫혀서.”

하리는 테두리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손톱 자국이 낮은 데 있었다. 서서 긁은 사람이 아니었다. 앉아서, 나중에는 누워서 긁은 높이였다. 하리의 손마디가 안으로 말려 들어갔고 이번에는 펴지지 않았다.

현이 하리 어깨를 두드려 일으켰다.

“바깥으로 가자. 이쪽은 돌이고, 바른 건 저쪽이다.”

*

물문 쪽문으로 나가 강둑을 걸었다. 곰례네 뒤쯤 성벽에 어젯밤 등롱 불에 비친 하얀 자국이 있었다. 문 모양대로 석회가 발려 있었고, 가장자리를 흙손으로 매끈하게 다듬어 놓았다. 급하게 한 일이 아니었다. 현이 앞치마 주머니에서 끌을 꺼내 석회를 긁었다. 하얀 가루가 현의 신발 위로 떨어졌다. 석회 아래에서 나무가 나왔다. 회색으로 죽은 나무였다. 결이 세로로 서 있었다.

현이 코를 가져다 대고 냄새를 맡았다. 한참 맡았다.

“삼문 나무가 아니오. 삼십 년 만졌는데 이런 결은 여기 없어.”

“보리 할아범 문이랑 같은 나무예요?”

“같은 나무였겠지. 이건 죽었고, 그건 살았어.”

현이 긁어낸 석회 가루를 손가락으로 비볐다. 겉은 말랐는데 안쪽은 아직 축축해서 손끝에 뭉쳤다.

“석회는 한 달이면 속까지 굳어. 이건 속이 아직 젖었다. 스무 날 안쪽에 바른 거다. 할멈 봉이 스무사흘에 붙었지?”

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스무사흘에 붙고 셋째 밤이면 스무엿새다. 오늘이 초하루니까 엿새 전이다.

현이 끌을 거꾸로 쥐고 자루 끝으로 죽은 문을 두드렸다. 소리가 나지 않았다. 나무를 치는데 흙벽 치는 소리가 났다.

“누가 봉 붙은 집 벽에 문이 난 걸 알고 밤에 와서 발랐다. 안에서 벽을 세 번씩 두드리는데 말이다.”

*

빨래골목에 돌아오니 갑쇠가 청 사령 하나를 데리고 곰례네 문 앞에 서 있었다. 사령은 붉은 두건에 청 도장 찍힌 나무패를 목에 걸었고, 갑쇠는 종이 한 장을 손가락으로 튕기고 있었다.

“이 집은 권양 어른 댁으로 넘어갔소. 할멈이 이레 동안 품을 못 팔아서 방세가 밀렸고, 방세 빚은 도급방이 사들였으니까. 초열흘까지 비우시오.”

사령이 문 안을 들여다보고 말했다.

“병사로 친다. 늙은이가 이레 갇혀 앓다가 죽었다.”

하리가 사령 앞으로 나섰다.

“벽을 바른 사람이 있어요. 봉 붙은 셋째 밤에 할멈 방에 문이 났는데, 그 문을 바깥에서 덮었어요. 안에서 두드리는데 덮었어요.”

갑쇠가 턱을 긁었다.

“벽에 회 바르는 게 죄요? 청이 스무 해 전부터 난 문은 벽으로 친다고 정했소. 벽에 금 간 데 바르는 거랑 뭐가 다르오?”

사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 방침이 그렇다는 얼굴이었다. 사령은 그 방침을 외워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그 이상은 들을 생각이 없는 사람이었다.

현이 문 앞으로 걸어가 문짝 앞에 등을 붙이고 섰다. 앞치마 대팻밥이 문턱에 우수수 떨어졌다.

“이 집 문짝은 내가 달았소. 스무 해 전에. 내 문 넘어가려면 내 허락부터 받으시오.”

“목수 허락은 규정에 없소.”

“그럼 오늘 넣으면 되겠네. 청 사령이 여기 계시니.”

갑쇠가 현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밀었다. 현이 문짝에 부딪혀 쿵 소리가 났고, 하리가 갑쇠 손목을 잡았다. 쇠 패가 갑쇠 손등에 닿았다. 갑쇠가 하리를 내려다보며 이를 드러냈다.

“수문꾼, 네 입으로 부른 집이다.”

하리의 손이 풀렸다. 갑쇠가 침을 뱉고 사령과 함께 골목을 나갔다. 초열흘은 아흐레 남아 있었다.

현이 가슴을 문지르며 문짝에서 등을 뗐다. 문짝에 부딪힌 자리에 대팻밥이 눌려 납작하게 붙어 있었다.

“저놈 손바닥이 내가 단 문짝보다 두껍구먼. 문짝은 스무 해를 버텼는데 내 갈비는 한 번에 울리네.”

그러고는 소을을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내 공방 다락이 비었다. 대팻밥 냄새만 참으면 초열흘 넘어서도 잘 만하다.”

소을은 대답 대신 할멈의 방망이를 들어 문짝에 붙은 대팻밥을 톡톡 털어 냈다.

*

해가 기울 무렵 소을이 강둑으로 하리를 찾아왔다. 방망이는 두고 빈손이었다.

“셈 잘하는 수문꾼이라며. 그럼 세어 봐. 아랫말에 봉 붙은 집이 몇이었고, 성벽에 새 회 바른 데가 몇인지.”

하리는 등롱을 들고 물문에서 빨래터 끝까지 성벽을 따라 걸었다. 초저녁 종이 울리자 강 건너 천막 마을에서 저녁 연기가 올라왔고, 그 연기가 강물에 낮게 깔려 이쪽까지 밀려왔다. 성벽 이끼 사이로 문 모양 하얀 자국이 나타날 때마다 하리는 발을 멈추고 손으로 짚었다. 석회는 차가웠고 어떤 것은 아직 덜 말라 손바닥에 묻어 나왔다.

열하나였다.

하리는 그 열하나 뒤에 있는 집을 다 알았다. 쇠메골목 통장수네, 소금골목 과부 둘, 선창 짐꾼 삼 형제네, 그리고 곰례네. 그 가운데 여덟 집은 하리가 그믐 밤 도급방 마당에서 제 입으로 부른 집이었다. 여덟 집 다 그달에 문이 한 번 울다가 두 번 울었다. 하리는 그때마다 들었고, 그때마다 들은 대로 받는 사람이라고 제게 말했다.

뒤따라온 소을이 등롱 불빛 밖에 서 있었다. 하리가 돌아서서 말했다.

“열하나.”

“네가 부른 건?”

하리는 거짓말을 하려다 손마디가 먼저 움츠러드는 걸 느꼈다. 소을이 그 손을 봤다.

“여덟.”

소을이 강물 쪽으로 침을 뱉었다. 그리고 가지 않고, 하리가 짚었던 첫 번째 하얀 자국 앞으로 가서 제 손바닥을 거기에 댔다.

2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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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화만더2026.06.06· 2화

    인물이 설명 없이 행동으로 드러나서 좋았어요.

    • 백해원작가2026.06.07

      설명 대신 인물이 무엇을 하는지로 보여 주려고 했어요.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