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346자) · 하리 · 구월 그믐

사만 이천 하나

문세를 못 내면 내 집 문이 벽이 된다 · 백해원

삼문의 문은 사만 이천 개고, 그믐날 해가 지기 전까지 하리는 그중 백열두 개를 두드려야 했다. 아랫말 소금골목에서 시작해 빨래골목을 지나 골목 끝 보리 할아범 집에서 끝나는 길이었다. 오른 손목에 찬 쇠 패가 걸음마다 손목뼈에 닿아 차가웠고, 허리춤 돈주머니는 한낮 종이 울린 뒤로 한쪽으로 처져 겉옷 끈을 자꾸 끌어내렸다.

문은 세 번 두드린다. 가운데 손마디로, 문설주에서 한 뼘 안쪽을 친다. 그러면 문이 운다. 안쪽으로 여는 문은 낮게 한 번 둥, 바깥쪽으로 여는 문은 높게 한 번 텅, 양쪽으로 여는 문은 둥 텅 두 번 운다. 그 울림이 값이다. 한 냥, 세 냥, 아홉 냥. 청에서 내준 쇠 패를 찬 손으로 두드려야 문이 울고, 맨손으로 치면 그냥 나무 소리가 난다. 하리는 삼 년 동안 그 울림을 손마디로 받았다. 울림이 뼈를 타고 팔꿈치까지 올라오는 동안 값이 정해지고, 돈은 그다음에 나온다.

보리댁 빵집 문은 둥, 한 번 울었다.

“한 냥이요.”

“빵 부스러기 한 봉지 얹을 테니 아홉 푼만 받아.”

“문이 한 냥이라고 울었어요.”

“문이 빵을 먹나?”

보리댁이 밀가루 묻은 손으로 쇠돈 한 냥을 내밀면서 부스러기 봉지도 같이 쥐여 주었다. 하리는 돈만 받고 봉지는 문고리에 도로 걸었다. 받으면 다음 달에 여덟 푼을 부를 사람이었다. 허리에서 끌을 뽑아 문설주에 눈금 하나를 팠다. 스물두 해 묵은 빵집 문설주는 눈금이 이백예순 개가 넘어서 나무가 빨래판처럼 골이 졌고, 골마다 밀가루가 하얗게 끼어 있었다. 새 눈금 자리에서 마른 참나무 냄새가 올라왔다.

보리댁이 목소리를 낮췄다.

“들었어? 빨래골목 곰례 할멈. 오늘 새벽에 봉이 떨어져서 소을이가 들어갔는데, 벌써 식어 있더래.”

하리의 손이 끌을 쥔 채 멈췄다.

구월 스무사흘 저녁이었다. 곰례네 문을 두드렸을 때 문은 둥 텅, 두 번 울었다. 지난달에는 둥, 한 번이었다. 하리는 그 차이를 손마디로 분명히 들었다. 할멈은 한 냥을 쥐고 서 있었고, 하리는 그 한 냥을 받지 않았다. 아홉 냥짜리 문에 한 냥을 받으면 수문꾼 몫이 깎인다. 그날 밤 도급방 마당에서 봉꾼 우두머리 갑쇠가 못 낸 집을 부르라고 했을 때, 하리는 제 입으로 말했다. 빨래골목 곰례네, 아홉 냥 못 냈소.

손마디가 안으로 말려 들어갔다. 하리는 끌을 허리에 꽂고 다음 문으로 걸었다.

*

보리 할아범 집은 소금골목 맨 끝, 성벽에 등을 붙이고 선 이 층 돌집이다. 아랫말 집들은 다 뒷벽이 성벽이다. 벽 너머가 강이라 밤이면 물 흐르는 소리가 벽을 타고 방 안까지 들어온다고, 할아범은 늘 그게 자장가라고 했다. 일흔 먹은 옛 서문 문지기였다. 하리가 처음 아랫말을 돌던 겨울에 군밤을 한 줌씩 주머니에 넣어 주던 사람이기도 했다.

하리는 문을 세 번 쳤다.

둥 텅.

두 번째 울림이 팔꿈치까지 올라오는 동안 하리는 다시 쳤다. 또 둥 텅이었다. 지난달 이 문은 둥, 한 번 울었다. 문턱 아래를 보니 대팻밥이 말려 있었다. 경첩 못대가리가 새 쇠처럼 번쩍였고, 문짝 아래 모서리에는 칼로 깎아 낸 흰 자리가 있었다. 누가 어젯밤에 이 문을 떼어서 양쪽으로 열리게 다시 단 것이다.

문이 안에서 열렸다. 보리 할아범이 기침을 두 번 하고 손바닥을 폈다. 쇠돈 한 냥이 손 온기로 따뜻했다.

“어젯밤에 누가 문을 만지더군. 난 잠귀가 어두워서 목수가 왔다 간 줄 알았지.”

“할아범, 이 문이 지금 두 번 울어요.”

“두 번이면 얼만가?”

하리가 대답하기 전에 골목 어귀에서 풀통 흔드는 소리가 났다. 갑쇠였다. 어깨가 문짝만 하고 목이 없는 사내가, 누런 봉 한 묶음을 옆구리에 끼고 걸어왔다.

“그믐이오. 이 집은 여덟 냥이 밀렸소.”

“밀리긴 뭐가 밀려요. 지난달에 한 냥 받았어요. 내가 받았어요.”

“문이 양쪽이면 지난달 치도 아홉 냥이지. 한 냥 냈으니 여덟 냥 밀렸고, 밀린 집은 그믐에 봉이오. 셈 잘하는 수문꾼이 그것도 모르나?”

“지난달엔 한 번 울었소. 내 손으로 두드렸소.”

“지난달 소리를 어디 가서 들어 보라고?”

갑쇠가 풀통 뚜껑을 열었다. 쌀풀 쉰 냄새가 확 끼쳤다. 하리가 문 앞을 막아섰다. 갑쇠가 하리보다 머리 하나가 컸다. 그 머리 위에서 누가 웃었다.

“문은 거짓말을 안 하지.”

도급인 권양이었다. 털 깃 달린 겉옷을 입고 등롱 든 아이를 앞세운 채, 허리춤 쇠돈 꿰미를 짤랑이며 느리게 걸어왔다. 쉰하나라고 들었는데 얼굴에 주름이 적었고,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워서 멀리서 들으면 좋은 사람 목소리 같았다. 아랫말 문세는 다섯 해 전부터 이 사람 것이다. 청에 한 해 팔천 냥을 먼저 내고, 그 돈을 아랫말 문에서 다시 걷는다.

“하리, 자네 손이 두드렸잖나. 몇 번 울었나?”

“두 번이오. 그런데 어젯밤에 누가 경첩을…”

“두 번이면 됐네. 경첩은 문 주인 일이고, 울림은 청 일이야. 우리는 들은 대로 받는 사람들이지.”

권양이 등롱 쪽으로 턱을 들었다. 불빛이 보리 할아범 얼굴에 닿았다가 하리에게 옮겨 왔다.

“자, 수문꾼이 말하게. 이 집, 냈나 못 냈나?”

수문꾼이 말해야 봉이 붙는다. 규정이 그렇다. 봉꾼은 수문꾼 입만 본다. 하리는 권양을 보고, 갑쇠의 풀통을 보고, 할아범 손바닥의 한 냥을 봤다.

“못 냈소.”

보리 할아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손바닥의 한 냥을 하리 손에 쥐여 주었다.

“이건 자네가 받게. 한 냥짜리 문이었으니까.”

갑쇠가 봉을 문짝 한가운데에 붙이고 손바닥으로 세 번 두드려 폈다. 봉이 닿는 순간 문이 문이 아니게 되었다. 하리가 손을 대 보니 나무결이 그대로 보이는데 손바닥에 닿는 것은 돌의 찬 기운이었다. 이 층 창의 좁은 틈이 안쪽부터 메워졌고, 지붕의 연기 구멍도 같이 막혔다. 할아범이 안에서 한 번 기침했고, 그 소리는 벽에 갇혀 둔하게 끊겼다.

*

도급방 뒤채 방에서 견습 동이가 코를 골았다. 하리는 등잔 없이 앉아 돈주머니 속 셈을 손가락으로 했다. 한 냥짜리 쇠돈 아홉 개였다. 강 아래 천막 마을에 있는 어머니를 서문으로 들일 성문세였고, 다섯 해를 모은 돈이었다. 한 개씩 쥘 때마다 네모난 모서리가 손바닥에 박혔다. 거기에 오늘 받은 한 냥이 하나 더 섞여 있었다. 할아범의 손 온기는 벌써 식어 있었다.

파루까지는 한참 남았는데 추웠다. 그믐 밤이라 달이 없었다. 할아범 방에는 숯 화로가 있다. 늦가을부터 할아범은 화로를 끼고 잤다. 연기 구멍이 막힌 방에서 숯을 피우면 어떻게 되는지, 하리는 천막 마을에서 자랄 때 봤다. 한 집 식구가 아침에 안 일어났다.

하리는 겉옷을 걸치고 나갔다. 동이가 코를 멈추고 뒤따라 나왔다.

“형, 어디 가요?”

“너는 들어가서 자.”

“형이 안 자는데 어떻게 자요?”

소금골목 끝에서 하리는 봉 붙은 벽에 귀를 댔다. 돌처럼 차가운 나무 너머로 아주 작게, 기침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벽을 긁는 소리가 들렸다. 하리는 벽을 맨손으로 세 번 쳤다. 한참 있다가 안에서 두 번, 힘없이 두드리는 소리가 돌아왔다.

뒷벽은 성벽이다. 하리는 돌아서서 뛰었다.

물문은 인경이 울리면 닫힌다. 쪽문 옆 초소에서 물문지기 곽 노인이 술병을 끼고 졸고 있었다. 하리가 쇠 패를 들어 보였다.

“도급방 일이에요. 열어 주세요.”

“도급방 일이면 도급인 어른이 오셔야지.”

“내일 술 한 병 가져올게요.”

“두 병.”

“한 병 반이요.”

“반 병은 어떻게 사 오나?”

곽 노인이 투덜거리며 빗장을 뽑았다. 쪽문을 나서자 강 냄새가 얼굴에 덮쳤다. 비린 물비린내 사이로 강둑의 젖은 흙과 삭은 갈대 냄새가 올라왔고, 성벽 바깥 면에는 이끼가 두껍게 앉아 밤인데도 검푸르게 번들거렸다. 동이가 등롱을 들고 하리 뒤에서 미끄러졌다. 둘은 성벽을 왼손으로 짚으며 빨래터 쪽으로 걸었다. 소금골목 끝집 뒤쯤 되는 자리에서 하리는 숯 냄새를 맡았다.

성벽에 문이 있었다.

사람 키만 한 널판 나무문이었다. 손잡이도 경첩도 없었다. 결이 세로로 서 있었고, 이끼 낀 돌 사이에 박혀 있는데 문짝에는 이끼가 한 올도 없었다. 문 아래 틈으로 빛이 나왔다. 등잔 불빛처럼 흔들리지 않고 물처럼 고여 있는 빛이었다. 그 빛을 따라 가늘게 연기가 새어 나왔다.

“형, 저거 문이에요?”

“몰라.”

강 쪽에서 노 젓는 소리가 났다. 나룻배 하나가 등롱을 달고 강둑에 코를 댔다. 사내 셋이 석회 통과 흙손을 들고 내렸다. 맨 앞 사람은 권양 밑에서 일하는 미장이 양씨였다. 하리도 얼굴을 알았다. 도급방 마당에서 딸 봄이를 어깨에 태우고 다니던 사람이었다.

“수문꾼이 여기서 뭐 하시오? 비키시오. 우리는 벽을 바르러 왔소.”

“안에 사람이 있어요.”

양씨의 흙손이 멈췄다. 뒤에 선 사내가 코웃음을 쳤다.

“벽 안에 사람이 있는 게 우리 일이오?”

하리는 쇠 패 찬 손으로 문을 세 번 쳤다. 문은 울지 않았다. 울지 않는 문은 값이 없는 문이다. 값이 없으면 받을 수가 없고, 받을 수 없으면 열 수가 없다. 동이가 제 주머니에서 한 냥을 꺼내 문턱에 탁 놓았다. 문틈에서 바람 같은 것이 한 번 불더니 쇠돈이 튕겨 나와 강물로 굴러 들어갔다.

“제 한 냥!”

“조용히 해.”

어느 쪽으로도 열리는 손잡이가 없다. 그러면 어느 쪽으로도 열릴 수 있다. 어느 쪽으로도 열리는 문은 양쪽 문이고, 양쪽 문은 아홉 냥이다. 하리는 돈주머니를 열었다. 사내들이 석회를 개기 시작했다. 흙손이 통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

“아홉 냥.”

하리가 문턱에 쇠돈을 하나씩 놓았다. 한 개를 놓을 때마다 문틈이 그것을 삼켰다. 물 마시는 목구멍 소리가 났다. 다섯 개째에서 하리의 손이 한 번 떨렸고, 그 손을 동이가 등롱 든 손으로 받쳐 주었다. 아홉 개째가 들어가자 문이 바깥으로 활짝 열렸다.

연기가 굴러 나왔다. 그 안쪽이 할아범의 방이었다. 화로 곁에 할아범이 모로 누워 있었다. 하리와 동이가 겨드랑이를 끼어 강둑으로 끌어냈다. 강바람이 얼굴에 닿자 할아범이 몸을 접고 오래 기침했다. 등 뒤에서 양씨가 문짝에 석회를 한 흙손 발랐다. 하얀 석회가 나무에 붙지 못하고 주르륵 흘러 강둑 흙에 떨어졌다. 양씨는 흙손을 든 채 한참 서 있다가, 배로 돌아갔다.

할아범이 숨을 고르고 웃었다. 웃는 것이 기침인지 웃음인지 알 수 없었다.

“자네가 내 문을 샀나?”

“아홉 냥이요.”

“비싸게 샀군. 한 냥짜리 집에 아홉 냥짜리 뒷문이라니.”

하리는 허리에서 끌을 뽑아 새 문의 설주에 눈금 하나를 팠다. 결이 곱고 단단해서 끌이 미끄러졌다. 나무에서는 강물 냄새도 숯 냄새도 아닌, 처음 맡는 냄새가 났다. 삼문의 문은 오늘 밤 사만 이천 하나가 되었다.

할아범이 강둑에 앉아 성벽을 따라 빨래터 쪽을 올려다보았다.

“곰례네 벽에도 문이 났을 걸세. 봉 붙은 집이면 나지. 누가 먼저 발랐겠지.”

동이가 등롱을 그쪽으로 들었다. 성벽을 따라 한참 내려간 자리에, 이끼 낀 돌 사이로 사람 키만 한 하얀 자국이 문 모양으로 서 있었다.

1화는 어땠나요?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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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해원작가2026.10.09· 1화

    작가 백해원입니다. 문을 열 때마다 값을 내는 성곽 도시의 이야기입니다. 1화의 사만 이천 하나째 문 앞에서, 여러분이라면 아홉 냥을 내고 문을 여시겠어요?

  • 겨울차2026.06.05· 1화

    첫 문단에서 이미 분위기가 잡히네요. 다음 화 기다립니다.

    • 백해원작가2026.06.06

      끊어서 죄송합니다. 다음 주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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