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469자)

잠깐만요

이혼식 플래너 · 석다감

2027년 9월 1일 수요일 오후 세 시⁠, 청담동 드레스 숍 「⁠마리솔⁠」 위 사층⁠. 연주희는 칸막이 뒤 접이식 침대를 반으로 접어 벽에 기대 놓고⁠, 흰 식탁보를 덮었다⁠. 식탁보 밑으로 침대 다리 하나가 삐져나와 구두 앞코로 밀어 넣었다⁠. 지난봄 전세 보증금을 빼서 사업에 넣은 뒤로 이 방은 낮에는 상담실이고 밤에는 침실이었다⁠. 창문을 열자 아래층 스팀다리미 김이 올라왔고⁠, 쇼윈도의 마네킹 신부들은 오늘도 같은 각도로 웃고 있었다⁠.

“⁠실장님⁠, 좋아요 세 개 됐어요⁠.⁠”

표솔지가 노트북을 돌려 보였다⁠. 어제 사무실 SNS에 올린 글이었다⁠. 「⁠끝도 시작처럼⁠. 이혼식을 기획합니다⁠. 연플래닝⁠」⁠. 하트가 세 개 붙어 있었다⁠.

“⁠누구누구야⁠?⁠”

“⁠저⁠, 실장님 어머님⁠, 그리고 모르는 분 한 명이요⁠. 댓글도 하나 달렸어요⁠.⁠” 솔지가 화면을 내렸다⁠. 「⁠이혼을 축하하는 게 말이 됨⁠?⁠」

“⁠축하라는 말은 안 썼는데⁠.⁠”

“⁠그러니까요⁠. 안 쓴 말로도 욕먹는 데가 SNS예요⁠.⁠”

주희는 헤드셋을 귀에 걸었다⁠. 사무실은 열두 평이었고 솔지 책상까지 세 걸음이었지만⁠, 결혼식장에서 10년 동안 붙은 버릇이 떨어지지 않았다⁠. 헤드셋을 끼면 머리가 진행표 순서로 돌았다⁠. 솔지도 따라서 자기 헤드셋을 꼈다⁠. 세 걸음 떨어진 두 사람이 무전으로 말하는 모습을 처음 본 날⁠, 아래층 드레스 숍 사장은 계단에 주저앉아 웃었다⁠.

유리문에 몸을 비춰 보았다⁠. 높게 틀어 올린 검은 머리에 만년필 하나가 비녀처럼 꽂혀 있었다⁠. 처음 맡은 결혼식이 끝난 날 신부 어머니가 쥐여 준 만년필이었는데⁠, 머리를 올릴 때마다 꽂다 보니 이제는 펜이 없으면 머리가 자꾸 흘러내렸다⁠. 진주 귀걸이⁠, 왼손목의 금 손목시계⁠, 쑥잎처럼 회색이 도는 연초록 투피스⁠. 가게 점원은 이 색을 세이지 그린이라고 불렀고⁠, 주희는 늘씬한 몸에 맞춰 치마 단을 두 번 줄였다⁠. 클립보드에는 밤새 고친 식순 초안이 끼워져 있었다⁠.

길 건너 빌딩 벽에는 주희가 10년을 다닌 웨딩 회사의 광고판이 붙어 있었다⁠. 「⁠당신의 시작을 가장 빛나게⁠」⁠. 주희는 블라인드를 반쯤 내렸다⁠.

*

세 시 반⁠, 남보란이 먼저 왔다⁠. 하얀 상자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있었고⁠, 뚜껑에는 노란 반달 그림과 「⁠밀과달⁠」 글씨가 찍혀 있었다⁠.

“⁠저희 가게 거예요⁠. 반달 카스텔라⁠. 남편은 오는 중이에요⁠.⁠”

웃는 얼굴로 또박또박 말하는 사람이었다⁠. 의자에 앉기 전에 상자 리본부터 풀어 탁자 가운데로 밀어 놓았다⁠. 달걀과 꿀 냄새가 퍼졌다⁠. 솔지가 헤드셋에 대고 속삭였다⁠. “⁠실장님⁠, 이거 성수동에서 줄 서서 사는 거예요⁠.⁠”

“⁠들려⁠, 솔지 씨⁠. 세 걸음이야⁠.⁠”

사 분 뒤 서규환이 들어왔다⁠. 버터 냄새가 사람보다 먼저 들어왔다⁠. 손등에 밀가루가 하얗게 묻어 있었고⁠, 앞치마를 벗고 오느라 셔츠 단추 하나를 잘못 끼웠다⁠. “⁠오븐이 좀⁠…⁠.⁠” 말끝을 흐리며 보란 옆자리에서 한 칸 떨어진 의자를 골랐다⁠.

규환 뒤로 한 사람이 더 들어왔다⁠. 키가 컸다⁠. 단정히 넘긴 검은 머리⁠, 검은 뿔테 안경⁠, 짙은 회색 정장에 검은 서류 가방⁠. 주희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변호사 차건우 · 가사 사건 전담⁠」⁠.

“⁠서규환 씨 대리인입니다⁠. 오늘 상담에 같이 앉겠습니다⁠.⁠”

“⁠이혼식 상담에 변호사님이 오신 건 처음이에요⁠.⁠”

“⁠이혼식 상담 자체가 처음이시죠⁠. 게시물에 좋아요가 세 개던데요⁠.⁠”

솔지가 헤드셋 너머로 작게 숨을 들이켰다⁠. 주희는 클립보드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결혼식 10년 동안 신랑 아버지⁠, 신부 이모⁠, 축가 부르다 음 이탈한 대학 동기를 다 받아 냈다⁠. 변호사 하나쯤은 받아 낼 수 있었다⁠.

*

“⁠결혼식은 시작을 사람들 앞에서 약속하는 자리예요⁠. 이혼식은 끝을 사람들 앞에서 인정하는 자리고요⁠.⁠” 주희는 식순 초안을 세 사람 앞에 돌렸다⁠. “⁠누구 탓도 하지 않고⁠, 두 분이 같은 문으로 같이 들어와서 같이 나가세요⁠. 한 분이라도 빠지면 제 식은 열리지 않아요⁠.⁠”

종이에는 여섯 줄이 있었다⁠. 함께 입장⁠, 하객께 드리는 인사⁠, 서로에게 드리는 감사 인사⁠, 반지⁠, 케이크⁠, 함께 퇴장⁠.

건우가 종이를 끝까지 읽었다⁠. 그리고 오른손을 들었다⁠. 손바닥이 주희를 향했다⁠.

“⁠잠깐만요⁠. 세 번째 줄입니다⁠.⁠”

“⁠감사 인사요⁠?⁠”

“⁠제 의뢰인이 하객 이백 명 앞에서 가게를 같이 일궈 줘서 고맙다고 말하면⁠, 다음 달 아내분 서면에 그 말이 그대로 인용됩니다⁠. 재산분할에서 누가 얼마나 보탰는지 다툴 때 그보다 좋은 증거는 없어요⁠.⁠”

보란이 웃었다⁠. “⁠변호사님 눈에는 다 증거로 보이시나 봐요⁠.⁠”

“⁠네⁠. 그게 제 일입니다⁠.⁠” 건우는 종이의 다음 줄을 볼펜 끝으로 짚었다⁠. “⁠네 번째 줄⁠, 반지⁠. 혼인 중에 산 금입니다⁠. 녹이면 나눌 재산이 줄어듭니다⁠. 그리고 하객⁠.⁠” 건우가 서류 가방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부부가 미리 보낸 하객 목록이었다⁠. “⁠제과점 직원이 열두 명이네요⁠. 법정에 불려 나올 수 있는 증인이 열두 명이라는 말씀입니다⁠.⁠”

규환이 손등의 밀가루를 문질렀다⁠. 문지를수록 하얀 자국이 넓어졌다⁠.

주희는 헤드셋 마이크를 입가에서 밀어냈다⁠. “⁠변호사님⁠, 이렇게 다 지우시면 입장하고 퇴장만 남아요⁠.⁠”

“⁠입장도 같이 하시면 혼인 생활이 원만했다는 그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 따로 들어오시라고요⁠?⁠”

“⁠그건 제가 정할 일이 아닙니다⁠. 저는 말씀만 드립니다⁠.⁠”

보란이 카스텔라 한 조각을 떼어 건우 앞에 놓았다⁠. 건우는 조각을 보고⁠, 손을 대지 않았다⁠. 주희는 클립보드 뒷면에 적어 둔 숫자를 떠올렸다⁠. 계약금 삼백만 원⁠, 잔금 구백만 원⁠. 이 식이 잘 끝나면 영상 한 편이 남고⁠, 영상 한 편이면 하트 세 개짜리 계정에도 문의가 들어올 것이었다⁠. 접이식 침대를 접는 날도 그만큼 당겨졌다⁠.

“⁠법원 일정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건우가 볼펜을 내려놓았다⁠. “⁠두 분은 8월 23일에 가정법원에 협의이혼을 신청하셨습니다⁠. 양육할 아이가 있으면 법원이 석 달 동안 다시 생각할 시간을 줍니다⁠. 숙려 기간이 끝나고 법원이 두 분의 뜻을 마지막으로 묻는 확인기일이 11월 25일 목요일입니다⁠. 이혼식은 이틀 뒤 토요일로 원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네⁠, 27일이요⁠.⁠” 보란이 말했다⁠.

“⁠재산은 아직 합의 중입니다⁠. 식이 끝나고 29일 월요일까지 합의가 안 되면⁠, 아내분이 가정법원에 재산을 나눠 달라는 재산분할 심판을 청구합니다⁠. 그러니까 이 식의 진짜 다음 순서는 법원입니다⁠.⁠”

주희는 진행표를 한 번 내려다보았다⁠. “⁠제 진행표에는 퇴장까지만 있어요⁠.⁠”

“⁠그 뒤는 제 진행표에 있습니다⁠.⁠”

*

“⁠그게⁠…⁠.⁠” 처음으로 규환이 입을 열었다⁠. 모두 규환을 보았다⁠. 규환은 보란을 보지 않고 탁자 모서리를 보았다⁠. “⁠하늬가 좋아할 만한 거면 다 괜찮아요⁠. 돈 얘기만 안 나오면⁠.⁠”

“⁠돈 얘기는 안 나와요⁠.⁠” 보란이 말했다⁠. “⁠나는 돈 얘기 하려고 식 올리는 거 아니야⁠.⁠”

“⁠그럼 왜 하는데⁠.⁠”

“⁠당신이 사람들 앞에서 한 번이라도 나랑 같은 문으로 들어오는 거 보려고⁠.⁠”

규환이 대답하지 않았다⁠. 건우는 볼펜 뚜껑을 닫았다가 다시 열었다⁠. 주희는 두 사람 사이 탁자에 놓인 카스텔라 상자를 보았다⁠. 반달 열두 개가 두 줄로 누워 있었고⁠, 하나가 비어 있었다⁠.

*

규환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에 「⁠본점 오븐 2번⁠」이라고 떴다⁠. 규환은 고개를 숙이고 계단으로 나갔고⁠, 보란은 아래층에 맡긴 딸을 보고 오겠다며 따라 나갔다⁠. 문이 닫히자 사무실에는 주희와 건우⁠, 그리고 칸막이 너머에서 숨을 죽인 솔지가 남았다⁠.

건우는 창가로 가서 블라인드 틈으로 길 건너 광고판을 보았다⁠. “⁠저 회사에서 10년 계셨죠⁠. 결혼식을 사백 번 넘게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변호사님은 상담 오기 전에 뒷조사부터 하세요⁠?⁠”

“⁠상대방 대리인이 누군지는 늘 봅니다⁠.⁠”

“⁠저는 상대방 대리인이 아니에요⁠. 두 분 다 제 의뢰인이에요⁠.⁠”

“⁠그래서 더 봤습니다⁠.⁠” 건우가 블라인드에서 손을 뗐다⁠. “⁠결혼식 사백 번을 하신 분이 왜 끝을 차리시는지 궁금했습니다⁠.⁠”

주희는 대답하지 않고 탁자 위 카스텔라 상자를 닫았다⁠. 리본을 다시 묶는 손이 한 번 엇나갔다⁠. 청담동 웨딩 거리에서 올봄에만 홀 두 곳이 문을 닫았다⁠. 결혼하는 사람은 줄었고⁠, 결혼하는 사람들은 작은 식을 원했다⁠. 문 닫은 홀 이야기까지 건우에게 할 까닭은 없었다⁠.

“⁠변호사님은 결혼식 가시면 어디 앉으세요⁠?⁠”

“⁠출구 옆에 앉습니다⁠.⁠”

“⁠왜요⁠?⁠”

“⁠먼저 나오려고요⁠.⁠” 건우는 자기 앞에 놓인 카스텔라 조각을 보았다⁠. “⁠연 실장님은 이 식 하나 잘 되면 예약이 들어올 거라고 생각하시죠⁠. 이 부부를 광고판으로 쓰시는 겁니다⁠.⁠”

“⁠변호사님은 이 부부를 소송 기록으로 쓰시잖아요⁠.⁠”

건우가 잠깐 주희를 보았다⁠. 뿔테 안경 너머 눈이 한 번 깜박였다⁠. 그러고는 카스텔라 조각을 집어 냅킨에 싸서 서류 가방 안주머니에 넣었다⁠. 먹지도⁠, 버리지도 않았다⁠. 칸막이 너머에서 솔지가 헤드셋에 대고 아주 작게 말했다⁠. “⁠실장님⁠, 방금 저거 무슨 뜻이에요⁠?⁠”

주희도 몰랐다⁠.

다섯 시 십 분⁠, 부부는 계약서에 서명했다⁠. 잔금은 반씩 내기로 했다⁠. 반씩은 건우가 정했다⁠. 서명이 끝나자 건우가 일어나 서류 가방을 닫았다⁠.

“⁠식순은 회의 때마다 제가 보겠습니다⁠. 다음 회의는 언제입니까⁠?⁠”

“⁠월요일 오후 네 시요⁠. 두 분 같이 오세요⁠. 문 앞에서 기다렸다가 같이 들어오시면 돼요⁠.⁠”

“⁠회의까지 같이 들어와야 합니까⁠?⁠”

“⁠제 식이 그래요⁠. 리허설은 첫 회의부터 시작이에요⁠.⁠”

건우가 처음으로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 웃음인지 계산인지 주희는 알 수 없었다⁠.

*

문을 열자 계단참에 아이 하나가 앉아 있었다⁠. 분홍 책가방을 무릎에 올리고 접은 도화지를 두 손으로 쥔 채였다⁠. 솔지가 드레스 숍 사장에게 부탁해 아래층 소파에 앉혀 두었는데⁠, 어느새 올라와 있었다⁠.

“⁠하늬야⁠.⁠” 보란이 불렀다⁠.

서하늬는 열 살이었고⁠, 4학년이었다⁠. 엄마를 한 번⁠, 아빠를 한 번 보고⁠, 마지막으로 주희를 보았다⁠. 일어나서 도화지를 내밀었다⁠.

“⁠선생님이 이혼식 하는 분이죠⁠? 이거 식순에 넣어 주세요⁠.⁠”

주희는 도화지를 폈다⁠. 크레파스로 그린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있었다⁠. 한 사람은 흰 드레스⁠, 한 사람은 검은 양복이었고⁠, 발밑에 음표가 세 개 떠 있었다⁠. 위에 연필로 꾹꾹 눌러쓴 글씨가 있었다⁠. 「⁠엄마 아빠 마지막 춤⁠」⁠.

“⁠결혼식 영상에 있어요⁠. 엄마 아빠가 춤추는 거⁠.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보고 싶어요⁠.⁠”

뒤에서 건우의 오른손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손바닥이 반쯤 펴진 채 공중에 멈췄다⁠. 하늬가 고개를 돌려 건우의 손을 보았다⁠. 건우는 손바닥을 천천히 내려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하늬야⁠, 아빠 춤 못 춰⁠.⁠” 규환이 말했다⁠.

“⁠알아⁠. 영상에서도 엄마 발 세 번 밟았어⁠.⁠”

보란이 고개를 돌렸다⁠. 웃음을 참는 건지 다른 것을 참는 건지⁠, 어깨가 한 번 들썩였다⁠. 주희는 도화지를 반으로 접지 않고⁠, 클립보드 맨 위 식순 초안 위에 그대로 끼웠다⁠. 크레파스 두 사람이 여섯 줄을 덮었다⁠. 헤드셋에서 솔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실장님⁠, 식순 일곱 줄 되는 거예요⁠?⁠”

주희는 대답 대신 계단 아래로 내려가는 세 어른의 등을 보았다⁠. 셋은 한 줄로 내려갔고⁠, 맨 뒤의 건우만 계단참에서 한 번 돌아보았다⁠. 주희가 들고 있는 클립보드를⁠, 정확히는 크레파스로 그린 음표 세 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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