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334자)

제단의 기름

저주받은 공녀의 전속 요리사 · 소예담

첫 양동이가 정수리에 쏟아졌을 때 루치오는 숨이 어디로 갔는지 몰랐다⁠. 얼음물은 차갑다기보다 뜨거웠다⁠. 살갗 전체에 바늘이 한꺼번에 박히는 것 같았고⁠, 이 바늘이 뼈까지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다⁠. 신전 마당 돌바닥에 맨발로 선 채 입을 벌렸다⁠. 소리가 안 나왔다⁠.

“⁠둘⁠.⁠” 사제가 셌다⁠.

두 번째 양동이⁠. 이번엔 소리가 나왔다⁠. 항구 뒷골목에서 술 취한 선원이 내는 소리였다⁠. 마당 가장자리에 서 있던 젊은 사제 둘이 눈을 마주쳤다⁠.

“⁠셋⁠.⁠”

세 번째 양동이가 쏟아지자 루치오의 다리가 저절로 펴졌다⁠. 머리카락 끝에서 물이 떨어지다가 떨어지는 도중에 얼었다⁠. 대사제가 마당 위쪽 계단에서 루치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신전 문지방을 넘을 수 있습니다⁠, 남쪽 사람⁠.⁠”

“⁠가⁠, 감사합니다⁠.⁠”

“⁠다음⁠.⁠”

루치오 뒤에 서 있던 오렌이 갑옷을 벗은 셔츠 차림으로 앞으로 나왔다⁠. 공녀의 호위 기사는 공녀가 먹는 것을 먼저 먹어야 했고⁠, 공녀가 신전에 머무는 사흘 동안 이 일을 신전 안에서 해야 했다⁠. 오렌은 턱을 들고 섰다⁠. 북부 사내다운 얼굴이었다⁠.

첫 양동이가 쏟아졌다⁠. 오렌이 비명을 질렀다⁠. 루치오의 비명보다 한 옥타브 높았다⁠.

“⁠둘⁠.⁠”

“⁠잠깐⁠, 잠깐만⁠—⁠”

“⁠셋⁠.⁠”

오렌은 세 번째 양동이를 맞고 이 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허리에 매단 소금 단지를 두 손으로 끌어안고 있었다⁠. 사제들이 이번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대사제가 헛기침을 한 번 하자 웃음이 멎었는데⁠, 대사제의 수염 끝도 조금 떨리고 있었다⁠.

“⁠북부 기사가⁠.⁠” 루치오가 이를 딱딱 부딪치며 말했다⁠. “⁠남쪽 놈보다 더 크게 지르시네요⁠.⁠”

“⁠북부 기사는⁠.⁠” 오렌이 이를 딱딱 부딪치며 대답했다⁠. “⁠얼음물에 들어갈 일이 없다⁠. 그래서 북부 기사다⁠.⁠”

*

신전 부엌은 작았다⁠. 흰 돌로 벽을 쌓았고 화덕은 하나뿐이었다⁠. 창문은 언덕 아래 대공성 쪽으로 하나 나 있었는데⁠, 거기로 들어온 빛이 바닥 돌 위에 네모나게 누웠다⁠. 사제 셋이 벽에 붙어 서서 루치오의 손을 지켜봤다⁠. 대사제는 화덕 맞은편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정화 죽은 셋으로 끓였다⁠. 신전 창고의 보리⁠, 신전 우물의 눈 녹인 물⁠, 신전 소금⁠. 루치오는 신전 소금을 손바닥에 덜어 혀로 찍었다⁠. 짰고⁠, 바위 냄새가 났고⁠, 혀뿌리는 따뜻했다⁠. 보리도 물도 같았다⁠.

“⁠기름은요⁠?⁠”

“⁠정화 죽에는 기름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대사제가 말했다⁠. “⁠짐승의 기름은 몸을 무겁게 한다고 해서 옛날부터 그랬습니다⁠.⁠”

루치오는 손을 멈췄다⁠. 기름이 안 들어가는 음식⁠. 지켜야 할 끼니 중에 이렇게 쉬운 것은 처음이었다⁠. 보리를 씻으며 생각했다⁠. 독이 붙을 데가 없는 죽이었다⁠. 그렇다면 재상은 이 죽을 노리지 않는다⁠. 다른 데를 노린다⁠.

보리가 퍼지기 시작하자 루치오는 나무 주걱으로 바닥을 쉬지 않고 저었다⁠. 기름 없는 죽은 금방 눌어붙었다⁠. 사제 하나가 이 손놀림을 따라 고개를 움직였다⁠.

“⁠공녀께서 저주가 아니라고 하시더군요⁠.⁠” 대사제가 말했다⁠. “⁠독이라고⁠.⁠”

“⁠네⁠.⁠”

“⁠마마께서도 같은 검은 서리를 토하셨습니다⁠. 저는 그 겨울 마마 곁에서 노래를 불렀지요⁠. 서른 날을 불렀습니다⁠.⁠” 대사제가 무릎 위에서 손을 맞잡았다⁠. “⁠독이라면 왜 서리 신의 피를 받은 분들께만 내립니까⁠? 시녀도 기사도 같은 음식을 먹었는데⁠.⁠”

“⁠마력 있는 몸에만 붙는 독이니까요⁠.⁠”

“⁠그런 독을 나는 예순 해 동안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저도 열 해 전에 처음 맛봤어요⁠.⁠” 루치오가 주걱을 멈추지 않고 말했다⁠. “⁠대사제님⁠, 저주라면 신께서 내리시는 거잖아요⁠. 신께서 왜 버터에만 내리시겠어요⁠? 왜 꿀에만⁠, 골수에만요⁠? 공녀님이 이레 동안 제 국만 드시니까 서리가 희어졌어요⁠. 신께서 생선뼈 국을 그렇게 좋아하시나요⁠?⁠”

벽에 붙은 젊은 사제 하나가 기침으로 웃음을 덮었다⁠. 대사제는 웃지 않았다⁠. 루치오를 오래 봤다⁠.

“⁠사흘 뒤 제단이 답할 겁니다⁠.⁠”

“⁠제단이 맞게 답하면요⁠.⁠”

대사제가 일어섰다⁠. 의자가 돌바닥을 긁었다⁠.

“⁠서리 신의 제단은 틀리지 않습니다⁠, 남쪽 사람⁠.⁠”

죽이 다 퍼졌다⁠. 루치오는 소금 한 알을 넣고 불에서 내렸다⁠. 오렌이 신전의 나무 그릇에 죽을 덜어 먼저 먹었다⁠. 아무 맛도 없는 죽이었는데 오렌은 얼음물을 맞은 뒤라 그런지 두 그릇을 먹었다⁠. 이후에야 사제가 쟁반을 들고 공녀가 머무는 정화 방으로 올라갔다⁠. 정화 방은 신전 맨 위층에 있었고⁠, 판정 전 사흘 동안 공녀는 거기서 나오지 않았다⁠. 루치오는 쟁반이 계단 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지켜봤다⁠.

*

판정 전날 오후 재상이 신전에 올라왔다⁠. 흰 옷의 사제 둘이 참나무 상자를 들고 뒤따랐다⁠. 상자 뚜껑에 왕도 대신전의 해 문장이 금박으로 새겨져 있었다⁠.

신전 한가운데 둥근 방에 얼음 제단이 있었다⁠. 사람 키만 한 얼음 덩어리를 깎아 만든 것으로⁠, 위쪽이 평평했다⁠. 해마다 판정이 끝나면 녹여 강에 흘려보내고 겨울이 오면 새로 깎는다고 했다⁠. 제단 앞면에는 서리 신의 상징인 여섯 갈래 눈꽃이 새겨져 있었다⁠. 방 안은 숨이 얼 만큼 추웠다⁠.

재상이 상자를 열었다⁠. 안에 유리병 하나가 비단에 싸여 있었다⁠. 병 속에서 맑은 금빛 기름이 흔들렸다⁠.

“⁠왕도 대신전에서 해마다 왕의 대관식에 쓰는 축성 기름입니다⁠.⁠” 재상이 대사제에게 병을 건넸다⁠. “⁠대신전장께서 북부 판정이 공정하도록 제단에 바르시라고 보내셨습니다⁠. 서리 신의 제단이 해의 신의 축복을 받으면 더 맑게 답한다고요⁠.⁠”

대사제가 병을 받아 들었다⁠. 망설이는 얼굴이었다⁠. 북부 신전은 대신전의 딸 신전이었다⁠. 어미 신전이 보낸 기름을 딸 신전이 거절하는 법은 없었다⁠.

“⁠북부 판정에는 순록 기름 등잔만 켜 왔습니다만⁠.⁠”

“⁠그러니 올해는 더 귀하겠지요⁠.⁠”

대사제가 병마개를 열었다⁠. 기름을 손바닥에 붓고⁠, 낮게 기도를 읊으며 제단 윗면과 앞면에 고루 펴 발랐다⁠. 얼음 위에 기름이 얇게 덮이자 제단이 촛불 빛을 받아 금빛으로 번들거렸다⁠. 꽃 냄새와 송진 냄새가 섞인 향이 방 안에 퍼졌다⁠.

루치오는 문간에서 이것을 봤다⁠. 사제들 틈에 서서 죽 냄비를 씻다 말고 따라 올라온 참이었다⁠. 기름⁠. 정화 죽에 한 방울도 안 들어가는 것이⁠, 공녀가 손을 얹을 자리에 발리고 있었다⁠.

공녀가 먹지 않아도 되었다⁠. 두 번째 날 아침 엘리시아가 걷어 낸 버터에 손끝만 댔는데도 검은 가지가 접시 끝까지 뻗었다⁠. 판정 날 엘리시아는 이레 넘게 깨끗한 것만 먹은 몸으로⁠, 온 힘을 손끝에 모아 저 제단에 얹을 것이다⁠. 서리가 힘차게 필수록 더 검게 필 것이다⁠. 가신들 앞에서⁠, 대사제 앞에서⁠.

재상이 돌아섰다⁠. 문간의 루치오를 보고 걸어왔다⁠. 재상은 루치오의 머리카락을 봤다⁠. 아직 다 마르지 않아 끝이 뻣뻣하게 얼어 있었다⁠.

“⁠얼음물을 맞았다던데⁠. 생선 냄새가 좀 빠졌군⁠.⁠”

“⁠각하⁠.⁠” 루치오가 말했다⁠. “⁠그 기름⁠, 맛 좀 봐도 될까요⁠?⁠”

재상이 웃음을 터뜨렸다⁠. 둥근 방 천장이 이 웃음을 되울렸다⁠.

“⁠대관식 기름을 요리사가 맛보겠다고⁠? 대사제께 여쭤 보게⁠. 서리 신의 제단에 남쪽 혀를 대도 되느냐고⁠.⁠” 재상이 루치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자네는 판정 날 저녁에 내 마차에 타네⁠. 그때까지 죽이나 잘 끓이게⁠. 공녀가 마지막으로 먹을 자네 음식이니⁠.⁠”

*

자정이 넘어 루치오는 오렌을 깨웠다⁠. 오렌은 정화 방 문 앞 돌바닥에서 털망토를 덮고 자고 있었다⁠.

“⁠제단 방에 가야 해요⁠.⁠”

“⁠미쳤냐⁠?⁠”

“⁠그 기름이요⁠. 맛을 봐야 해요⁠.⁠”

“⁠제단에 혀를 대면 사제들이 너를 제단 대신 녹여서 강에 흘려보낸다⁠.⁠”

“⁠그러니까 기사님이 망을 봐 주세요⁠.⁠”

오렌은 한참 루치오를 노려보다 일어섰다⁠. 허리의 소금 단지가 딸깍거렸다⁠. 오렌이 단지를 손으로 눌렀다⁠.

제단 방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판정 전 사흘 동안 제단 방은 서리 신의 방이라 사람이 잠그지 않는다고 사제들이 말했었다⁠. 대신 문밖 복도 끝에 늙은 사제 하나가 앉아 졸고 있었다⁠. 오렌이 이 앞에 쭈그려 앉아 사제의 숨소리를 셌다⁠. 루치오는 맨발로 방에 들어갔다⁠.

달빛이 천장의 둥근 창으로 떨어져 제단을 비췄다⁠. 얼음 덩어리가 안에서부터 푸르게 빛났고⁠, 이 위에 발린 기름이 얇은 막처럼 반들거렸다⁠. 루치오는 제단 앞에 섰다⁠. 숨이 하얗게 나와 제단 위에 닿았다가 사라졌다⁠.

손가락으로 찍을까 하다가 그만뒀다⁠. 손가락에 묻은 걸 핥으면 손의 냄새가 섞였다⁠. 루치오는 허리를 숙여 제단 윗면 가장자리에 혀를 댔다⁠.

차가웠다⁠. 얼음이 혀를 물었다⁠. 기름이 혀 위에서 아주 천천히 녹았다⁠. 꽃⁠, 송진⁠, 그리고 이 밑에서⁠.

혀 안쪽 끝이 먼저 식었다⁠. 얼음에 댄 혀끝보다 더 깊은 데였다⁠. 식은 쇠 위에 꿀⁠. 버터보다 진하고 골수보다 맑았다⁠. 기름 한 겹에 독이 그대로 녹아 있었다⁠.

루치오는 혀를 떼려 했다⁠. 떨어지지 않았다⁠.

혀가 얼음에 붙어 있었다⁠. 고개를 당기자 혀끝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루치오는 소리도 못 내고 제단에 매달린 채 손을 허우적거렸다⁠. 문간에서 오렌이 이 모습을 보고 입을 틀어막았다⁠. 웃음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가 오렌의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왔다⁠.

“⁠기사니⁠, 물⁠.⁠” 루치오가 혀를 문 채 말했다⁠. “⁠따뜨한 물⁠.⁠”

오렌이 허둥지둥 사방을 둘러보다 자기 손바닥에 입김을 불어 루치오의 혀 옆 얼음에 갖다 댔다⁠. 한 번⁠, 두 번⁠. 북부 사내의 입김은 생각보다 뜨거웠다⁠. 얼음이 아주 조금 녹았다⁠. 루치오가 고개를 젖히자 혀가 떨어졌다⁠. 혀끝 살갗이 조금 벗겨져 피 맛이 났다⁠. 피 맛 밑에서 식은 쇠가 아직 남아 있었다⁠.

복도에 불빛이 들어왔다⁠. 늙은 사제가 깨어 있었다⁠. 횃불 셋⁠, 넷⁠. 발소리가 몰려왔다⁠. 맨 앞에 대사제가 잠옷 위에 흰 망토를 걸치고 섰고⁠, 뒤에 재상이 털망토를 단정히 여민 채 서 있었다⁠. 재상은 자지 않은 얼굴이었다⁠.

대사제가 제단을 봤다⁠. 제단 윗면 가장자리에 혀 모양의 자국이 나 있었다⁠. 기름이 이 자리만 벗겨져 있었고⁠, 얼음에 붉은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이방인이⁠.⁠” 대사제의 목소리가 떨렸다⁠. “⁠서리 신의 제단을 더럽혔다⁠.⁠”

“⁠기름에 독이 있습니다⁠.⁠” 루치오가 피 맛 나는 혀로 말했다⁠. 발음이 뭉개졌다⁠. “⁠대사제님⁠, 공녀님이 저 기름에 손을 얹으면 검은 서리가 핍니다⁠. 저주가 아니라 기름 때문에요⁠.⁠”

“⁠독이 있다는 건⁠.⁠” 재상이 대사제 뒤에서 말했다⁠.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늘 이 사람 혀뿐이군요⁠.⁠”

대사제가 사제들에게 손짓했다⁠. 사제 둘이 루치오의 팔을 잡았다⁠. 루치오는 저항하지 않고 오렌을 봤다⁠. 오렌은 문간 그림자 속에 서 있었다⁠. 사제들은 아직 오렌을 보지 못했다⁠. 루치오가 고개를 아주 조금 위로 들었다⁠. 정화 방이 있는 맨 위층 쪽이었다⁠. 오렌의 눈이 이 방향을 따라갔다가 돌아왔다⁠. 오렌이 고개를 끄덕이고 그림자 속으로 물러났다⁠.

“⁠묶어 두십시오⁠.⁠” 대사제가 말했다⁠. “⁠판정이 끝날 때까지 신전 지하에⁠.⁠”

“⁠판정이 끝나면⁠.⁠” 재상이 루치오 앞으로 걸어 나왔다⁠. 횃불이 재상의 얼굴 반쪽을 비췄다⁠. “⁠바로 왕도로 보내지요⁠. 대공께서도 그러기로 하셨으니⁠.⁠”

9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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