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492자)

열 해 전의 접시

저주받은 공녀의 전속 요리사 · 소예담

“⁠네⁠.⁠”

엘리시아는 이 대답이 너무 짧다고 생각했다⁠. 요리사는 국그릇을 든 채 침대 발치에 서 있었고⁠, 이 한 마디 뒤에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았다⁠. 변명도 사연도 없었다⁠. 아버지의 눈이 요리사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소스 냄비 앞에 섰고⁠, 제가 저었고⁠, 제 손으로 접시에 부었습니다⁠. 그 접시가 북부에서 오신 손님 자리로 나갔습니다⁠. 그날 밤 주방장이 제 냄비를 엎었고⁠, 저는 매를 맞고 쫓겨났습니다⁠.⁠”

아버지가 고개를 돌렸다⁠. 엘리시아 쪽이었다⁠.

“⁠너는⁠.⁠”

“⁠알았어요⁠.⁠” 엘리시아가 말했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단단하게 나왔다⁠. “⁠재상이 떠나기 전날 밤에요⁠. 재상이 내 방에 와서 말했어요⁠. 이 사람이 부정하지 않았고⁠, 나는 아버지한테 말하지 않기로 했어요⁠.⁠”

아버지가 이불 위의 국그릇을 집어 던졌다⁠. 그릇이 벽에 부딪쳐 깨졌고 국물이 벽을 타고 흘러내렸다⁠. 대구 살 한 점이 벽에 붙었다가 떨어졌다⁠. 아버지는 침대 옆에 세워 둔 칼을 잡았다⁠. 앓고 난 팔이 떨려 칼끝이 흔들렸는데⁠, 이 칼끝은 요리사의 목을 정확히 가리켰다⁠.

엘리시아가 이 사이로 들어섰다⁠. 칼끝이 엘리시아의 쇄골 앞에서 멈췄다⁠.

“⁠비켜라⁠.⁠”

“⁠그 접시에 독이 있었어요⁠.⁠” 엘리시아가 말했다⁠. “⁠상한 소스가 아니었어요⁠. 이 사람이 냄비 바닥을 찍어 먹었대요⁠. 식은 쇠에 꿀 맛이었대요⁠. 내 버터에서⁠, 왕비 꿀에서⁠, 아버지 골수에서 난 그 맛이요⁠. 어머니는 저주로 돌아가신 게 아니에요⁠.⁠”

“⁠그건⁠.⁠” 아버지의 칼끝이 내려가지 않았다⁠. “⁠내가 안다⁠.⁠”

엘리시아는 숨을 멈췄다⁠. 아버지가 칼을 쥔 채 말을 이었다⁠.

“⁠네 어미가 왕도에서 돌아와 한 달 동안 토했다⁠. 사제들이 저주라 했다⁠. 나는 그 말을 믿는 척했다⁠. 믿지 않으면 왕도에 칼을 들고 내려가야 했으니까⁠. 그해 겨울 북부는 왕도 곡식으로 났다⁠.⁠” 아버지의 숨이 거칠어졌다⁠. “⁠열 해를 그렇게 살았다⁠. 저주라고 하면서⁠.⁠”

“⁠그럼 왜 저한테는⁠.⁠”

“⁠너도 저주라고 믿으면 덜 아플 줄 알았다⁠.⁠”

침실에 국 냄새가 퍼져 있었다⁠. 깨진 그릇 조각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요리사가 엘리시아의 등 뒤에서 처음으로 먼저 입을 열었다⁠.

“⁠그날 소스 냄비 옆에 저 혼자 있지 않았습니다⁠. 연회 주방에는 마흔 명이 있었고⁠, 접시는 연회를 연 집 시종들이 날랐습니다⁠. 소스를 담은 접시도 그 시종이 들고 나갔고요⁠.⁠”

“⁠그 연회⁠.⁠” 아버지가 말했다⁠. “⁠누가 열었는지 아느냐⁠?⁠”

“⁠모릅니다⁠. 막내는 그런 걸 몰라요⁠.⁠”

아버지가 칼을 내렸다⁠. 칼끝이 바닥 돌을 긁었다⁠.

“⁠재상의 집이었다⁠. 그때는 재무대신이었지⁠.⁠” 아버지가 칼을 침대에 던졌다⁠. “⁠열 해 전에 그놈이 네 어미에게 자리를 권했다⁠. 북부 손님이니 남쪽 소스를 맛보시라고⁠.⁠”

*

해가 중천에 왔을 때 아버지는 결정을 말했다⁠.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털옷을 어깨에 걸치고 있었고⁠, 엘리시아와 요리사와 오렌이 이 앞에 섰다⁠. 집사장은 불려 오지 않았다⁠.

“⁠판정까지 여드레다⁠.⁠” 아버지가 말했다⁠. “⁠그동안 네 혀를 쓴다⁠. 공녀가 흰 서리를 내야 한다⁠. 그다음⁠.⁠”

아버지가 요리사를 봤다⁠.

“⁠판정이 끝나는 날 너를 재상에게 넘긴다⁠.⁠”

엘리시아는 자기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엘리시아의 얼굴을 보고도 말을 고치지 않았다⁠.

“⁠재상은 이놈을 원한다⁠. 상한 소스를 낸 놈이 하사품까지 더럽혔다고 왕도에 떠들면 재상은 체면을 산다⁠. 북부는 소금을 산다⁠. 상단은 판정 날 저녁에 들어온다⁠.⁠” 아버지가 털옷 깃을 여몄다⁠. “⁠아침에 기사 하나를 고개 아래 마을로 보냈다⁠. 상단 행수 편에 재상에게 그렇게 전하라고⁠.⁠”

“⁠아버지는⁠.⁠” 엘리시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어머니를 죽인 사람한테⁠, 그 접시를 낸 사람을 넘기고 소금을 사요⁠?⁠”

“⁠그래⁠.⁠”

“⁠이 사람은 몰랐어요⁠!⁠”

“⁠알았든 몰랐든 그 접시는 그놈 손에서 나갔다⁠. 그리고 북부에는 열두만이 산다⁠.⁠” 아버지가 요리사를 다시 봤다⁠. “⁠도망칠 테냐⁠?⁠”

요리사가 고개를 저었다⁠.

“⁠판정까지 공녀님 죽을 끓이겠습니다⁠.⁠”

“⁠그 뒤엔⁠.⁠”

“⁠그 뒤는 그때 정하죠⁠.⁠”

아버지가 콧김을 내쉬었다⁠. 웃음 같기도 했다⁠. 엘리시아는 이 소리가 싫었다⁠.

“⁠집사장은요⁠.⁠” 엘리시아가 말했다⁠. “⁠골수 뼈를 싼 천에서 독이 나왔어요⁠. 핀이 그 사람 열쇠를 받았어요⁠. 왜 아직 그 사람이 열쇠를 차고 다녀요⁠?⁠”

“⁠쥐는 살려 둬야 굴을 찾는다⁠.⁠” 아버지가 오렌을 봤다⁠. “⁠기사 둘을 붙여라⁠. 그놈이 고개 쪽으로 사람을 보내면 그 사람을 따라가라⁠. 막지 말고⁠.⁠”

오렌이 고개를 숙였다⁠. 오렌의 허리띠에 금 간 소금 단지가 끈으로 매달려 덜렁거렸다⁠. 오렌이 몸을 굽히자 단지가 칼집에 부딪쳐 딸깍 소리를 냈다⁠. 아버지가 이 단지를 이상하다는 듯 내려다봤다⁠. 아무도 설명하지 않았다⁠.

*

소문은 점심 전에 주방까지 내려왔다⁠. 루치오가 주방 문을 열고 들어서자 화덕 앞에서 일하던 하녀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그레타가 국자를 들고 다가왔다⁠. 루치오가 뭐라 하기도 전에 국자 등이 루치오의 정수리를 때렸다⁠. 둔한 소리가 났다⁠.

“⁠마마 접시를 낸 놈이⁠.⁠” 그레타가 말했다⁠. 국자가 한 번 더 내려왔다⁠. “⁠마마 딸 국을 끓여⁠? 세상 참⁠.⁠”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 그만해라⁠. 귀에 딱지 앉는다⁠.⁠” 그레타가 국자를 내려놓고 화덕 위 냄비에서 국을 한 그릇 떠 루치오의 앞에 탁 놓았다⁠. 보리와 순록 고기를 오래 고은 북부 국이었다⁠. “⁠먹어⁠. 아침부터 안 먹은 거 다 안다⁠.⁠”

루치오가 숟가락을 들었다⁠. 그레타가 맞은편에 앉아 먹는 것을 지켜봤다⁠.

“⁠마마는 남쪽 소스를 좋아하셨다⁠. 왕도 갈 때마다 그 맛 얘기를 하셨지⁠. 마지막으로 왕도 다녀오셔서도 그러셨어⁠. 연회 소스가 참 맛있었다고⁠. 토하시면서도⁠.⁠” 그레타가 앞치마로 손을 닦았다⁠. “⁠그 소스 네가 저었냐⁠?⁠”

“⁠네⁠.⁠”

“⁠맛있었냐⁠?⁠”

루치오는 숟가락을 멈췄다⁠. 열 해 전의 냄비 바닥이 혀끝에 돌아왔다⁠. 버터와 샬롯과 졸인 포도주⁠. 그리고 이 밑의 식은 쇠⁠.

“⁠독만 없었으면 맛있었을 거예요⁠.⁠”

그레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일어서서 루치오의 정수리를 국자로 한 번 더 때렸다⁠. 이번엔 아프지 않았다⁠.

“⁠판정 날 넘겨진다며⁠. 그럼 그날까지는 내 주방 놈이다⁠. 내 주방 놈은 내가 때린다⁠. 남이 때리면 내가 그놈을 때린다⁠.⁠”

핀이 화덕 뒤에서 고개를 내밀었다가 그레타와 눈이 마주쳐 다시 숨었다⁠.

*

오후에 서리 신전에서 사제 하나가 내려와 엘리시아에게 대사제의 말을 전했다⁠. 이방인은 신전 부엌에 들어올 수 없다는 말을 이미 들었는데⁠, 이번엔 한 줄이 더 붙어 있었다⁠. 마마의 마지막 접시를 낸 손이 공녀의 정화 죽에 닿는 일은 서리 신께서 받지 않으실 것이라고⁠.

엘리시아는 이 말이 어디서 왔는지 알았다⁠. 털망토를 걸치고 신전 언덕을 올랐다⁠. 오렌이 뒤에서 숨을 헐떡이며 따라왔다⁠. 오렌의 허리에서 소금 단지가 덜렁거렸다⁠.

신전은 얼음과 흰 돌로 지어진 둥근 건물이었다⁠. 문 앞 계단에 대사제가 서 있었다⁠. 이 아래 계단에 집사장이 막 돌아서 내려오고 있었다⁠. 집사장은 엘리시아를 보고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 없이 지나갔다⁠. 집사장의 열쇠 소리가 언덕 아래로 멀어졌다⁠.

“⁠집사장이 다녀갔네요⁠.⁠” 엘리시아가 말했다⁠.

“⁠성의 일을 알려 주러 왔습니다⁠.⁠” 대사제가 말했다⁠.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얼굴이었다⁠. “⁠공녀⁠, 저는 서리 신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마마께서 가신 겨울에 마마 곁에서 노래를 부른 것도 저였습니다⁠. 그 접시를 낸 손이 공녀의 죽을 끓이게 둘 수는 없습니다⁠.⁠”

“⁠그 손 아니면 제 죽에 독이 들어도 아무도 몰라요⁠.⁠”

“⁠신전 부엌에는 독이 들어올 수 없습니다⁠.⁠”

“⁠제 버터에도 들어올 수 없었어요⁠. 서른 해 일한 주방이었는데요⁠.⁠”

대사제가 입을 다물었다⁠. 언덕 바람이 대사제의 흰 수염을 흔들었다⁠. 엘리시아는 계단 한 칸을 더 올라 대사제와 눈높이를 맞췄다⁠.

“⁠신전의 옛 법에 이방인이 신전 문지방을 넘는 길이 있죠⁠. 정결 의식이요⁠. 얼음물에 몸을 씻고 사흘 동안 신전 밖으로 안 나가는 거⁠.⁠”

“⁠그건 사제가 되려는 이방인을 위한⁠—⁠”

“⁠그럼 사흘만 사제를 시켜요⁠. 사제들이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게 하고요⁠. 그 사람이 죽에 무얼 넣는지 대사제께서 직접 보세요⁠. 독이 아니라 소금 한 알이라도 이상한 걸 넣으면⁠, 그 자리에서 제가 판정을 포기할게요⁠.⁠”

오렌이 뒤에서 숨을 들이쉬었다⁠. 대사제가 엘리시아를 오래 봤다⁠. 열여섯 살 판정 때 엘리시아의 손끝에서 흰 서리가 제단 끝까지 뻗어 가는 것을 본 사람이었다⁠.

“⁠얼음물은 신전 우물에서 길어 옵니다⁠.⁠” 대사제가 말했다⁠. “⁠남쪽 사람이 견딜지 모르겠군요⁠.⁠”

“⁠견딜 거예요⁠. 생선 비린내는 좀 빠지겠죠⁠.⁠”

*

이 밤 엘리시아가 주방에 내려왔다⁠. 루치오는 화덕 앞에서 월귤을 고르고 있었다⁠. 의자에 앉지 않고 화덕 건너편에 섰다⁠. 화덕 불이 둘 사이에서 일렁였다⁠.

“⁠왜 그 연회가 누구 집이었는지 안 물어봤어요⁠?⁠” 엘리시아가 물었다⁠. “⁠열 해 동안⁠.⁠”

“⁠물어볼 데가 없었어요⁠. 매 맞고 왕도 성문 밖에 던져졌으니까요⁠. 살레르까지 걸어 내려가는 데 한 달이 걸렸어요⁠.⁠” 루치오가 상한 월귤 하나를 골라냈다⁠. “⁠그리고 무서웠어요⁠. 그 맛을 다시 볼까 봐⁠.⁠”

“⁠다시 봤잖아요⁠.⁠”

“⁠네⁠. 공녀님 수프에서요⁠.⁠”

엘리시아가 화덕 옆으로 돌아왔다⁠. 루치오의 손에서 월귤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시었다⁠.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아버지가 당신을 넘기면 나는 판정에서 흰 서리를 내고 그 자리에서 대공위를 받을 거예요⁠. 그다음에 내가 정해요⁠. 넘길지 말지⁠.⁠”

“⁠대공님은 아직 살아 계세요⁠.⁠”

“⁠알아요⁠. 그러니까 판정 날 아버지 칼보다 내가 먼저 말해야죠⁠.⁠”

루치오는 월귤을 그릇에 쏟았다⁠. 그리고 엘리시아의 손을 잡았다⁠. 손끝이 차가웠다⁠. 판정을 위해 날마다 서리를 피워 보는 손이었다⁠.

“⁠판정만 넘기세요⁠. 그다음은 제 일입니다⁠.⁠”

“⁠당신 일이 아니에요⁠. 당신은 내 요리사예요⁠.⁠”

*

판정 사흘 전 아침⁠, 성문 망루에서 나팔이 두 번 울렸다⁠. 엘리시아는 아버지와 함께 안뜰로 나갔다⁠. 아버지는 엿새 만에 처음으로 자기 발로 걸었고⁠, 오렌이 반걸음 뒤에서 따라왔다⁠. 요리사는 신전으로 떠날 짐을 꾸린 채 주방 문간에 서 있었다⁠.

성문으로 마차 세 대가 들어왔다⁠. 가운데 마차 문에 재상의 문장이 걸려 있었다⁠. 뒤 마차에서 상단 행수가 털모자를 벗으며 내렸고⁠, 앞 마차에서는 흰 옷을 입은 사제 둘이 참나무 상자 하나를 조심스럽게 내렸다⁠. 상자에 왕도 대신전의 해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재상이 마차에서 내렸다⁠. 눈밭에 발을 디디며 털망토를 여미고⁠, 안뜰을 한 바퀴 둘러봤다⁠. 재상의 눈이 지난번 꿀을 쏟았던 자리에 잠깐 머물렀다⁠. 눈이 새로 쌓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대공⁠, 쾌차하셨다니 기쁩니다⁠.⁠” 재상이 고개를 숙였다⁠. “⁠판정에 쓰실 왕도 대신전의 축성 기름을 가져왔습니다⁠. 대사제께 드릴 선물입니다⁠. 그리고⁠.⁠”

재상의 눈이 주방 문간으로 갔다⁠. 요리사에게서 멈췄다⁠.

“⁠기사를 보내 주신 편지 잘 받았습니다⁠. 약속하신 요리사는 언제 받아 가면 되겠습니까⁠?⁠”

안뜰의 눈들이 아버지에게로 갔다⁠. 가신들⁠, 하인들⁠, 오렌⁠, 요리사⁠. 엘리시아는 아버지의 옆얼굴을 봤다⁠. 반백의 수염에 회색 서리 자국이 아직 남아 있었다⁠. 아버지는 딸을 보지 않았다⁠.

“⁠판정 날⁠.⁠” 아버지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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