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337자)

흰 서리

저주받은 공녀의 전속 요리사 · 소예담

창문 밖에서 누가 유리를 긁었다⁠. 엘리시아는 정화 방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자정을 한참 넘긴 시각이었고⁠, 창밖은 신전 꼭대기 층의 바깥벽이었다⁠. 사람이 올라올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다시 긁는 소리가 났다⁠. 이번엔 작은 목소리가 섞였다⁠.

“⁠공녀님⁠. 저 오렌입니다⁠. 떨어지기 전에 열어 주십시오⁠.⁠”

엘리시아가 창을 열자 찬바람과 함께 오렌의 얼굴이 들어왔다⁠. 오렌은 바깥벽 돌 틈에 손가락과 발끝을 걸고 매달려 있었다⁠. 눈썹에 서리가 앉았고⁠, 허리의 소금 단지가 바람에 흔들려 벽을 두드렸다⁠. 엘리시아가 오렌의 팔을 잡아당겼다⁠. 오렌은 창틀을 넘어 방바닥에 굴러떨어졌다⁠.

“⁠아래층 문은 사제들이 지킵니다⁠.⁠” 오렌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요리사가 제단을 핥았습니다⁠.⁠”

“⁠뭘요⁠?⁠”

“⁠제단이요⁠. 얼음 제단⁠. 혀로⁠.⁠” 오렌이 일어나 앉았다⁠. “⁠재상이 왕도에서 가져온 축성 기름을 대사제가 제단 위하고 앞면에 발랐습니다⁠. 요리사가 그 기름에서 식은 쇠 맛이 난다고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혀가 제단에 붙었습니다⁠.⁠”

“⁠붙었다고요⁠?⁠”

“⁠붙었습니다⁠. 제가 입김으로 떼 줬습니다⁠.⁠” 오렌의 얼굴이 진지했다⁠. “⁠지금은 신전 지하에 묶여 있습니다⁠. 혀는 조금 벗겨졌지만 말은 합니다⁠.⁠”

엘리시아는 웃음이 터질 것 같아 손등으로 입을 막았다⁠. 손등 아래에서 웃음이 한 번 새어 나왔고⁠, 이후에 목이 메었다⁠. 창가에 서서 바람을 맞으며 숨을 골랐다⁠. 기름⁠. 두 번째 날 아침⁠, 걷어 낸 버터에 손끝을 댔을 때 검은 가지가 접시 끝까지 뻗던 것이 떠올랐다⁠.

“⁠위하고 앞면이라고 했죠⁠.⁠” 엘리시아가 물었다⁠. “⁠뒷면은요⁠?⁠”

오렌이 눈을 깜빡였다⁠.

“⁠뒷면은 벽 쪽이라 대사제가 손이 안 닿았습니다⁠.⁠”

*

새벽에 문을 두드린 사람은 재상이었다⁠. 정화 방 문은 판정 전 사흘 동안 열지 않는 것이 법이었고⁠, 재상은 이 법을 지켰다⁠. 문 너머 복도에서 재상의 목소리만 들어왔다⁠.

“⁠공녀⁠, 잠을 깨워 송구합니다⁠. 오늘이 지나면 이야기할 틈이 없을 것 같아서요⁠.⁠”

엘리시아는 문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나무 문이 차가웠다⁠.

“⁠요리사가 제단을 더럽혔다는 이야기는 들으셨겠지요⁠. 대사제는 몹시 노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판정이 끝나면 제 마차에 탑니다⁠. 대공께서도 그러기로 하셨고요⁠.⁠” 재상의 목소리가 한결 낮아졌다⁠. “⁠왕도에 가면 그 사람은 대공비 마마를 해친 손으로 법정에 섭니다⁠. 열 해 전 일이라도 귀부인의 죽음은 목으로 갚습니다⁠.⁠”

“⁠그래서요⁠.⁠”

“⁠공녀께서 오늘 판정을 미루시면 됩니다⁠. 몸이 아직 덜 나으셨다고⁠, 봄에 다시 받겠다고⁠. 그러면 저는 그 사람을 왕도로 데려가지 않겠습니다⁠. 살레르로 돌려보내지요⁠. 국밥집 문을 다시 열게⁠.⁠”

엘리시아는 문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봄⁠. 봄까지 판정을 미루면 북부는 후계 없이 겨울을 난다⁠. 그사이 서쪽 영주는 양자 이야기를 다시 꺼낼 것이다⁠. 상단은 고개 아래에서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엘리시아의 버터에⁠, 꿀에⁠, 아버지의 골수에 들어간 것이 다시 어딘가에 들어갈 것이다⁠.

“⁠재상 각하⁠.⁠” 엘리시아가 말했다⁠. “⁠그 사람 국 드셔 보셨죠⁠. 첫날 대전에서요⁠.⁠”

“⁠좋은 국이었지요⁠.⁠”

“⁠그 사람이 살레르로 돌아가면⁠, 각하는 그 국을 다시는 못 드세요⁠. 저는 오늘 판정을 받고 그 국을 계속 먹을 거예요⁠.⁠”

문 너머가 한참 조용했다⁠. 이후에 발소리가 멀어졌다⁠. 엘리시아는 문에 기댄 채 손끝을 바닥 돌에 댔다⁠. 흰 서리가 엘리시아의 손 둘레에 동그랗게 피었다가 천천히 녹았다⁠.

*

판정은 해가 가장 높을 때 열렸다⁠. 둥근 방에 가신 일곱이 둘러섰고⁠, 아버지가 제단 맞은편에 섰다⁠. 재상은 아버지 오른편에 섰고⁠, 이 곁에 은테 안경의 의관이 있었다⁠. 판정의 증인으로 재상이 객실에서 풀어 데려온 것이었다⁠. 집사장은 가신들 뒤에 서 있었다⁠. 열쇠 소리가 나지 않았다⁠. 오늘은 열쇠 꾸러미를 허리에서 풀어 두고 온 모양이었다⁠.

방 한쪽 벽 아래에 요리사가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사제 둘이 요리사의 양옆에 섰다⁠. 입술이 부어 있었다⁠. 엘리시아가 방에 들어서자 요리사가 고개를 들었다⁠. 엘리시아는 요리사를 보지 않으려 했는데 눈이 먼저 갔다⁠. 요리사가 혀를 조금 내밀어 보였다⁠. 혀끝이 벗겨져 붉었다⁠. 그러고는 웃었다⁠. 엘리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대사제가 노래를 시작했다⁠. 서리 신의 옛 노래였다⁠. 열두 살 겨울⁠, 어머니 곁에서 서른 날 동안 들은 노래였다⁠. 엘리시아는 이 노래를 들으며 제단 앞으로 걸어갔다⁠. 사흘 동안 정화 죽만 먹은 몸이 가벼웠다⁠. 손끝이 저릿했다⁠. 이레를 두 번 넘기는 동안 엘리시아의 서리는 날마다 조금씩 굵어졌다⁠. 오늘 아침 정화 방 창유리에 손끝을 대자 서리꽃이 창틀까지 번졌다⁠.

노래가 멎었다⁠. 대사제가 말했다⁠.

“⁠공녀⁠, 손을 제단에 얹으십시오⁠. 서리 신께서 보십니다⁠.⁠”

엘리시아는 제단 앞면을 봤다⁠. 여섯 갈래 눈꽃이 새겨진 얼음 위로 기름이 금빛으로 번들거렸다⁠.

“⁠대사제님⁠, 판정 전에 제단을 눈으로 씻어 주세요⁠.⁠”

방 안이 웅성거렸다⁠. 대사제가 고개를 저었다⁠.

“⁠축성 기름입니다⁠. 어미 신전의 축복을 씻어 낼 수는 없습니다⁠.⁠”

“⁠그럼 이렇게 할게요⁠.⁠”

엘리시아는 오른손을 제단 앞면에 얹었다⁠.

손바닥이 기름에 닿는 순간 손끝이 타는 것처럼 시렸다⁠. 서리가 피었다⁠. 검었다⁠. 검은 가지가 손바닥 밑에서 터져 나와 제단 앞면의 눈꽃 조각을 따라 기어올랐다⁠. 눈꽃의 여섯 갈래가 하나씩 검게 물들었다⁠. 가지는 멈추지 않고 제단 윗면으로 넘어가 기름이 발린 자리를 전부 덮었다⁠. 방 안이 갑자기 추워졌고⁠, 가신 하나가 뒷걸음질 치다 벽에 부딪쳤다⁠.

“⁠저주⁠—⁠” 집사장이 말했다⁠.

“⁠아직이에요⁠.⁠”

엘리시아는 오른손을 떼지 않은 채 제단을 돌아 걸었다⁠. 손바닥이 얼음 위를 미끄러졌다⁠. 제단 옆면을 지나 벽 쪽 뒷면에 닿았다⁠. 왼손을 뒷면에 얹었다⁠. 기름이 없는 맨 얼음이었다⁠.

흰 서리가 피었다⁠.

눈꽃 같은 흰 가지가 왼손 밑에서 뻗어 나와 뒷면을 덮었다⁠. 앞면에서 넘어온 검은 가지와 뒷면에서 피어난 흰 가지가 제단 옆면에서 만났다⁠. 두 서리는 섞이지 않았다⁠. 기름이 발린 곳까지는 검고⁠, 기름이 끝나는 자리부터 희었다⁠. 이 경계가 칼로 자른 듯 또렷했다⁠.

“⁠제 손은 하나예요⁠.⁠” 엘리시아가 말했다⁠. 두 손을 제단에 얹은 채였다⁠. 숨이 하얗게 나왔다⁠. “⁠제 피에 저주가 있으면 뒷면에서도 검어야죠⁠. 제 몸은 꿀을 쏟은 날부터 깨끗한 것만 먹었어요⁠. 검은 건 제가 아니라 저 기름이에요⁠.⁠”

방이 조용했다⁠. 대사제가 제단으로 다가왔다⁠. 검은 서리와 흰 서리가 만나는 경계를 오래 내려다봤다⁠. 늙은 손이 떨렸다⁠. 그리고 대사제는 자기 손가락을 앞면의 기름에 댔다⁠.

서리 신전의 대사제는 대대로 북부 옛 가문에서 나왔고⁠, 이 손끝에도 서리가 조금 돌았다⁠. 대사제의 손가락 끝에서 검은 서리가 바늘만 하게 피었다⁠. 대사제가 손을 떼고 이 손가락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뒷면 맨 얼음에 같은 손가락을 댔다⁠. 희었다⁠.

대사제가 숨을 들이쉬었다⁠. 이 숨이 길었다⁠.

“⁠눈을 가져오너라⁠.⁠” 대사제가 사제들에게 말했다⁠. 목소리 끝이 쉬어 있었다⁠. “⁠제단을 씻는다⁠.⁠”

사제들이 신전 마당에서 눈을 퍼 왔다⁠. 대사제가 직접 눈 한 줌을 쥐고 제단을 문질렀다⁠. 금빛 기름이 눈에 묻어 나와 제단 아래로 떨어졌다⁠. 검은 서리가 기름과 함께 녹아 흘러내렸다⁠. 대사제는 손바닥이 빨개질 때까지 문질렀다⁠. 그리고 물러섰다⁠.

“⁠공녀⁠.⁠”

엘리시아는 두 손을 거두었다가 씻긴 제단 윗면에 다시 얹었다⁠.

서리가 피었다⁠. 희었다⁠. 손바닥 밑에서 흰 가지가 사방으로 뻗었다⁠. 가지는 제단 윗면을 덮고 가장자리를 넘어 앞면의 눈꽃 조각을 하나씩 채웠다⁠. 여섯 갈래가 다 하얗게 차오르자 서리는 제단 아래 바닥 돌까지 뻗어 나갔다⁠. 열여섯 살 때처럼⁠, 제단 끝까지⁠. 아니⁠, 그보다 더 멀리⁠. 가신들의 발끝 앞에서 흰 서리가 멈췄다⁠.

엘리시아는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가 엘리시아를 보고 있었다⁠. 반백의 수염 끝이 떨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이 큰 손이 칼자루가 아니라 자기 가슴 앞 털옷 자락을 움켜쥐고 있었다⁠. 방 벽 아래에서 요리사가 묶인 채로 고개를 숙였다⁠. 요리사의 어깨가 한 번 들썩였다⁠.

“⁠서리 신께서 보셨습니다⁠.⁠” 대사제가 말했다⁠. “⁠흰 서리입니다⁠. 대공가의 후계는 공녀 엘리시아입니다⁠.⁠”

신전 문간에서 누가 크게 코를 풀었다⁠. 그레타였다⁠. 언제부터인지 국자를 쥔 채 문간에 서 있었는데⁠, 국자로 눈가를 문지르다가 국자 끝에 묻은 죽에 얼굴을 찡그렸다⁠.

*

재상이 앞으로 나섰다⁠. 박수를 쳤다⁠. 세 번⁠, 천천히⁠.

“⁠축하드립니다⁠, 공녀⁠.⁠” 재상이 말했다⁠. 웃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부끄럽습니다⁠. 왕도에서 온 기름이 북부를 해칠 뻔했군요⁠.⁠” 재상이 몸을 돌려 곁에 선 의관을 봤다⁠. “⁠이 기름 상자는 대신전에서 의관이 받아 꾸렸소⁠. 그렇지 않소⁠?⁠”

의관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각하⁠, 저는 그저⁠—⁠”

“⁠북부 공녀의 치료를 맡긴 사람이 북부 판정을 더럽히려 했다니⁠.⁠” 재상이 고개를 저었다⁠. “⁠대공⁠, 이자를 왕도 법정으로 데려가 엄히 묻겠습니다⁠.⁠”

“⁠북부 감옥에 둔다⁠.⁠” 아버지가 말했다⁠. 아버지가 손짓하자 기사 둘이 의관의 양팔을 잡았다⁠. 의관이 재상을 돌아봤다⁠. 입이 무언가를 말하려고 벌어졌는데⁠, 재상이 의관을 보지 않았다⁠. 의관은 끌려 나가며 끝내 이 말을 하지 못했다⁠.

엘리시아는 이것을 봤다⁠. 재상이 한 사람을 버리는 데 걸린 시간은 숨 한 번이었다⁠.

가신들 뒤에서 집사장이 한 걸음 물러섰다⁠. 의관이 끌려 나간 문을 오래 보고 있었다⁠. 늘 열쇠 꾸러미가 매달려 있던 허리에 손을 얹었다가⁠, 거기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손을 내렸다⁠. 엘리시아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숙였다⁠. 서른 해 동안 숙여 온 각도 그대로였다⁠.

“⁠그럼⁠.⁠” 재상이 다시 아버지에게 돌아섰다⁠. “⁠약속대로 요리사를 받아 가겠습니다⁠. 상단은 오늘 저녁 들어올 겁니다⁠.⁠”

엘리시아가 먼저 말했다⁠. 여드레 전 주방에서 정한 대로였다⁠.

“⁠그 사람은 제 요리사예요⁠. 저는 방금 후계로 판정받았고요⁠. 제 사람은 제가 정해요⁠.⁠”

아버지가 딸을 봤다⁠. 재상도 엘리시아를 봤다⁠. 재상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이 말을 기다린 얼굴이었다⁠. 털망토 안쪽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 붉은 끈을 풀자 양피지가 펼쳐졌다⁠. 맨 아래에 금빛 밀랍이 찍혀 있었다⁠. 왕관을 쓴 사자 문장이었다⁠.

“⁠공녀⁠, 이건 대공의 약속도 공녀의 요리사도 아닙니다⁠.⁠” 재상이 양피지를 들어 가신들에게 보였다⁠. “⁠왕명입니다⁠. 열 해 전 왕도 연회에서 대공비 마마를 해친 손을 왕도 법정에 세우라는⁠. 대공비 마마는 왕국의 귀부인이셨고⁠, 그분의 죽음은 왕국의 일입니다⁠. 북부가 이 사람을 감싸면 북부는 대공비를 죽인 자를 감싼 땅이 됩니다⁠.⁠”

신전 둥근 방에 흰 서리가 아직 바닥에 깔려 있었다⁠. 이 위에서 가신들이 서로를 봤다⁠. 서쪽 영주가 침을 삼켰다⁠. 벽 아래에서 요리사가 묶인 손목을 비틀었다⁠.

아버지의 손이 털옷 자락을 놓고 칼자루로 갔다⁠.

10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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