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387자)

소금 단지가 비던 밤

저주받은 공녀의 전속 요리사 · 소예담

엘리시아가 숟가락을 입에서 뺐을 때 루치오는 기사들의 손을 뿌리치고 있었다⁠. 탁자에 닿기 전에 이미 꿀을 삼켰다⁠. 목울대가 한 번 움직였다⁠. 숟가락을 탁자에 내려놓고 아버지를 봤다⁠. 그리고 웃으려다 말았다⁠.

무릎이 먼저 꺾였다⁠. 오렌이 엘리시아의 허리를 받쳤고⁠, 엘리시아는 오렌의 팔에 매달린 채 눈밭에 대고 토했다⁠. 토한 것이 눈에 닿는 순간 성에가 번졌다⁠. 이번에는 대야가 아니라 안뜰 눈밭이었다⁠. 검은 서리가 엘리시아의 발치에서 뻗어 나가 눈 위를 기었고⁠, 짓이겨진 꿀 웅덩이 위를 넘어 탁자 다리까지 가지를 쳤다⁠. 흰 안뜰 한가운데 검은 고사리 숲이 한 걸음 넓이로 피어올랐다⁠. 화로 불이 꺼질 듯 흔들렸다⁠.

가신들이 뒤로 물러섰다⁠. 의관이 이 검은 무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보십시오⁠. 저주가 이리 깊습니다⁠. 하사품 탓을 하시면⁠—⁠”

“⁠의관님은 손으로 맥을 짚으시죠⁠.⁠” 루치오가 탁자 앞에 섰다⁠. 숨이 가빴다⁠. “⁠왕도 의원들은 손끝에 마력을 흘려 사람 몸속을 본다고 들었어요⁠. 그러니까 의관님 몸에도 마력이 있으시겠네요⁠.⁠”

의관의 손가락이 안경다리로 갔다⁠. 대답이 반 박자 늦었다⁠.

“⁠그게 무슨 상관인가⁠.⁠”

루치오는 왕비의 꿀 냄비에서 새 숟가락으로 탄 꿀을 듬뿍 떴다⁠. 그리고 의관 앞에 내밀었다⁠.

“⁠저주라면 공녀님 피에만 내리는 거잖아요⁠. 그럼 의관님은 드셔도 아무 일 없으시겠죠⁠. 한 숟갈 드셔 보세요⁠. 저는 아까 먹었습니다⁠. 주방장님도 드셨고요⁠.⁠”

안뜰의 모든 눈이 숟가락으로 갔다⁠. 숟가락 끝에서 검게 탄 꿀이 천천히 늘어지며 떨어지려 했다⁠. 의관이 숟가락을 봤다⁠. 손을 들지 않았다⁠. 의관의 목이 침을 삼키느라 움직였다⁠.

“⁠나는 요리사의 장난에 응하지 않네⁠.⁠”

“⁠장난 아닙니다⁠. 공녀님은 방금 드셨어요⁠.⁠”

의관이 한 발 물러섰다⁠. 이 한 발이 안뜰에서 가장 큰 소리를 냈다⁠.

대공이 칼자루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의관에게 걸어갔다⁠. 대공의 그림자가 의관의 발끝을 덮었다⁠.

“⁠먹어라⁠.⁠”

의관이 고개를 저었다⁠. 대공은 더 묻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기사들에게 말했다⁠.

“⁠객실에 넣어라⁠. 문밖에 둘 세워라⁠. 왕도 의원이니 묶지는 마라⁠.⁠”

기사들이 루치오의 팔을 놓고 의관의 팔을 잡았다⁠. 의관이 위임장을 흔들며 재상의 이름을 외쳤지만 안뜰 바람이 이 소리를 반쯤 가져갔다⁠. 대공은 돌아서서 딸을 안아 들었다⁠. 엘리시아는 아버지의 털옷에 얼굴을 묻은 채 루치오를 봤다⁠. 입술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 입술이 움직였는데⁠, 소리는 나지 않았다⁠. 루치오는 이것을 읽었다⁠.

이레⁠, 다시⁠.

*

이 밤 엘리시아는 일곱 번을 토했다⁠. 일곱 번째 대야에 핀 서리는 처음보다 옅었지만 여전히 검었다⁠. 대야를 밀어내고 베개에 머리를 묻었다⁠. 창밖으로 눈이 내렸다⁠. 벽난로 앞에 앉은 요리사가 냄비 하나를 숯불 위에 올려 두고 나무 숟가락으로 천천히 저었다⁠.

“⁠뭐예요⁠.⁠”

“⁠보리 미음이요⁠. 소금 한 알⁠, 물⁠, 보리⁠. 그게 다예요⁠.⁠”

“⁠맛없겠네요⁠.⁠”

“⁠네⁠, 맛없습니다⁠.⁠”

엘리시아는 웃다가 배가 땅겨 신음했다⁠. 요리사가 미음을 한 숟갈 떠서 자기가 먼저 먹고⁠, 이 숟가락을 엘리시아에게 내밀었다⁠. 고개를 들 힘이 없어 누운 채로 입을 벌렸다⁠. 미음은 따뜻하고 묽었고⁠, 정말 아무 맛도 없었다⁠. 혀뿌리까지 따뜻했다⁠.

“⁠살레르는 어때요⁠?⁠” 엘리시아가 물었다⁠. “⁠바다요⁠.⁠”

“⁠겨울엔 회색이에요⁠. 여름엔 초록이고요⁠. 국밥집 문을 열면 바다 냄새가 먼저 들어와요⁠. 손님들이 새벽 네 시에 그물 걷고 와서 국 한 그릇 먹고 자러 가요⁠.⁠”

“⁠그 사람들 다 버리고 왔어요⁠?⁠”

“⁠문에 써 붙이고 왔어요⁠. 주인이 북부에 볼일 보러 갔다고⁠.⁠”

“⁠볼일⁠.⁠” 엘리시아가 눈을 감았다⁠. “⁠나 말이에요⁠?⁠”

요리사는 대답 대신 숟가락을 내밀었다⁠. 엘리시아는 받아먹었다⁠. 대야에는 이날 밤 더 아무것도 차오르지 않았다⁠.

*

이튿날 새벽⁠, 루치오는 미음 냄비를 들고 객실 복도를 지났다⁠. 의관이 갇힌 방 앞에 기사 둘이 창을 세우고 졸고 있었다⁠. 루치오의 발소리에 문 안쪽에서 의관의 목소리가 났다⁠. 문틈에 입을 대고 하는 말이었다⁠.

“⁠요리사인가⁠. 냄새로 알겠네⁠. 생선 비린내⁠.⁠”

루치오는 걸음을 멈췄다⁠.

“⁠재상 각하께는 이미 편지가 갔네⁠. 어제 아침⁠, 꿀물을 데워 오라는 말이 떨어졌을 때 내 하인이 말을 타고 나갔지⁠. 고개 아래 마을에 상단이 머물고 있다는 건 아나⁠?⁠” 문 안쪽에서 의관이 낮게 웃었다⁠. “⁠자네는 내 입을 막았다고 생각하겠지⁠. 북부 성이 무엇으로 겨울을 나는지 곧 알게 될 걸세⁠.⁠”

“⁠의관님⁠.⁠” 루치오가 문에 대고 말했다⁠. “⁠아침 미음 드릴까요⁠? 소금 한 알⁠, 보리⁠, 물이요⁠.⁠”

문 안쪽이 조용해졌다⁠. 기사 하나가 졸다가 깨어 루치오의 냄비를 보더니⁠, 침을 삼켰다⁠. 루치오는 냄비를 들고 계단을 올라갔다⁠.

*

사흘째 아침⁠, 상단이 왔다⁠. 성문 망루에서 나팔이 울렸고⁠, 루치오가 주방 창으로 내다보니 고개 아래 눈길에 짐마차 열두 대가 검은 줄을 이루고 있었다⁠. 왕도에서 겨울마다 올라오는 상단이었다⁠. 소금⁠, 밀⁠, 남쪽 향신료⁠, 포도주⁠, 등잔 기름⁠. 북부가 봄까지 버틸 것들이었다⁠.

짐마차는 성문 앞에서 멈췄다⁠. 성문이 열렸는데도 들어오지 않았다⁠.

루치오는 앞치마를 두른 채 성문으로 나갔다⁠. 대공은 겨울 사냥터에 나가 있었고⁠, 성문 앞에는 집사장과 가신 하나가 서 있었다⁠. 선두 마차에서 털모자를 쓴 사내가 내려왔다⁠. 배가 둥글었고 손가락마다 반지가 끼어 있었다⁠. 상단 행수였다⁠.

“⁠재상 각하의 말씀을 전합니다⁠.⁠” 행수가 웃으며 말했다⁠. “⁠왕비 전하의 하사품을 눈밭에 버린 성에 왕도의 짐을 들이기가 난처하다고 하십니다⁠. 다만 그 일을 꾸민 요리사가 성을 나가면 하사품 일은 없던 일로 하시겠답니다⁠.⁠”

“⁠꾸민 건 공녀님이신데요⁠.⁠” 루치오가 말했다⁠.

“⁠공녀께서 무엇을 꾸미셨겠습니까⁠. 꾸민 건 늘 아랫사람이지요⁠.⁠” 행수가 루치오를 위아래로 훑었다⁠. “⁠자네가 그 항구 요리사구먼⁠. 살레르 소금을 들고 다닌다던⁠. 그 소금⁠, 얼마나 남았나⁠?⁠”

루치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주방 화덕 옆에 놓인 금 간 단지 속이 떠올랐다⁠. 바닥이 보였다⁠. 엿새 동안 공녀의 국⁠, 미음⁠, 빵 반죽에 이 소금만 썼다⁠. 남은 건 두세 줌이었다⁠.

“⁠북부 성 주방에 소금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구먼⁠.⁠” 행수가 장갑을 다시 꼈다⁠. “⁠마차는 고개 아래 마을에서 기다리겠네⁠. 자네가 성을 나서면 그날 저녁에 소금이 들어오지⁠. 보름 넘기면 왕도로 돌려 내려가고⁠.⁠”

“⁠나가면 공녀님 국은 누가 끓이죠⁠?⁠”

“⁠이 성엔 주방장이 있지 않나⁠. 서른 해를 끓인⁠.⁠”

행수가 손을 들었다⁠. 짐마차들이 하나씩 방향을 틀었다⁠. 바퀴가 눈을 짓이기는 소리가 길게 이어졌고⁠, 열두 대가 고개 아래로 다시 내려갔다⁠. 집사장이 뒤를 보며 허리띠의 열쇠를 만지작거렸다⁠.

“⁠항구 요리사⁠.⁠” 집사장이 말했다⁠. “⁠성의 소금 창고에는 한 달 치가 남았다⁠. 기사단과 하인들까지 합쳐서⁠. 자네가 결정하게⁠.⁠”

*

주방은 이날부터 소금을 셌다⁠. 그레타가 창고에서 한 달 치를 꺼내 저울에 달았고⁠, 끼니마다 몇 숟갈씩 덜어 냈다⁠. 루치오는 공녀 몫까지 성의 소금을 쓸 수 없었다⁠. 이 소금이 창고에서 누구 손을 거쳐 왔는지 몰랐다⁠.

“⁠그럼 뭘로 간을 하냐⁠?⁠” 그레타가 물었다⁠.

루치오는 주방 구석의 청어 통을 열었다⁠. 가을에 절여 둔 북부 청어였다⁠. 짠물이 통 가장자리까지 차 있었고⁠, 이 물에서 바다와 비린내와 오래 묵은 단내가 같이 올라왔다⁠. 국자로 짠물을 떠서 맛봤다⁠. 짰고⁠, 깊었고⁠, 혀뿌리는 따뜻했다⁠.

“⁠이걸로요⁠.⁠”

“⁠청어 국물로 공녀님 국 간을 해⁠? 네 놈 항구에선 그러냐⁠?⁠”

“⁠항구에선 그걸 젓국이라고 해요⁠. 공녀님 첫 국에도 들어간 적 없지만⁠, 오늘부턴 들어갑니다⁠.⁠”

오렌이 문간에 서서 이 청어 통을 내려다봤다⁠. 청어 대가리 수십 개가 국물 위로 눈을 뜨고 있었다⁠. 오렌이 한 걸음 물러섰다⁠.

“⁠검사는⁠.⁠” 오렌이 말했다⁠. “⁠국이 다 된 다음에 하겠다⁠.⁠”

*

꿀을 먹은 날부터 나흘째 밤이었다⁠. 이틀째 대야가 깨끗했다⁠. 엘리시아는 혼자 침대에서 일어나 찬장 계단을 내려갔다⁠. 일흔두 칸을 내려가는 데 쉬기를 네 번 했다⁠. 주방에는 화덕 하나만 살아 있었고 이 앞에 요리사가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요리사는 금 간 소금 단지를 거꾸로 들고 바닥을 손바닥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회색 소금 몇 알이 오렌의 손바닥에 떨어졌다⁠.

“⁠다 썼어요⁠?⁠” 엘리시아가 물었다⁠.

요리사가 돌아섰다⁠. 놀란 얼굴이 금세 풀어졌다⁠.

“⁠공녀님이 다 드셨죠⁠.⁠”

엘리시아는 화덕 옆 의자에 앉았다⁠. 주방은 따뜻했고 청어 젓국 냄새와 보리 굽는 냄새가 섞여 있었다⁠. 내려온 이유는 배가 고파서였다⁠. 이레 만에 처음으로⁠, 대야가 아니라 배가 고팠다⁠.

“⁠뭐 만들어요⁠?⁠”

“⁠내일 아침이요⁠. 월귤 조림을 할까 했는데 꿀을 못 쓰니까 시기만 해요⁠.⁠”

“⁠줘 봐요⁠.⁠”

요리사가 작은 그릇에 붉은 월귤 조림을 덜어 줬다⁠. 엘리시아가 한 숟갈 먹고 눈을 질끈 감았다⁠. 혀 끝이 오그라들 만큼 셨다⁠. 그릇을 쥔 손끝에 숨을 모았다⁠. 안뜰에서 아무것도 피우지 못한 손끝이었다⁠. 손끝이 시려 왔다⁠. 그릇 가장자리에 하얀 서리가 피었다⁠. 바늘 같은 가지가 그릇 안쪽으로 뻗어 가더니 월귤 조림 위를 얇게 덮었다⁠. 흰 서리였다⁠. 조림이 사각사각 얼었다⁠.

“⁠이러면 좀 덜 시려나⁠.⁠” 엘리시아가 언 조림을 숟가락으로 떠서 루치오에게 내밀었다⁠. “⁠먼저 먹어요⁠. 규칙이잖아요⁠.⁠”

요리사가 엘리시아의 숟가락을 입에 물었다⁠. 언 월귤이 루치오의 혀 위에서 녹으며 신맛이 퍼지는 것을 엘리시아는 루치오의 얼굴로 봤다⁠. 루치오의 눈썹이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루치오가 숟가락을 빼지 않은 채 엘리시아를 봤다⁠. 화덕 불빛이 루치오의 눈 한쪽에만 들었다⁠.

엘리시아가 숟가락을 빼냈다⁠. 그리고 몸을 기울였다⁠. 루치오의 입술에서 언 월귤 맛이 났다⁠. 차갑고 시고⁠, 이 아래가 따뜻했다⁠. 요리사의 손이 엘리시아의 뺨에 닿았다가 멈칫했다⁠. 손바닥에서 청어 젓국 냄새가 났다⁠. 웃음이 나오는 걸 참지 않았다⁠. 웃음이 루치오의 입술에 닿았다⁠.

“⁠비려요⁠.⁠” 엘리시아가 말했다⁠.

“⁠씻고 올까요⁠?⁠”

“⁠아뇨⁠.⁠”

주방 뒷문에서 눈 털어 내는 소리가 났다⁠. 둘이 떨어지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은빛 털을 두른 늙은 사내가 문간에 서 있었다⁠. 머리에 눈이 앉았고⁠, 목에 얼음 결정 모양의 신전 표식이 걸려 있었다⁠. 서리 신전 대사제였다⁠. 대사제는 둘을 번갈아 보고⁠, 화덕 옆의 빈 소금 단지를 봤다⁠.

“⁠공녀⁠.⁠” 대사제가 고개를 숙였다⁠. “⁠집사장이 가신들의 이름으로 청한 일을 신전이 받아들였습니다⁠. 열사흘 뒤 보름날⁠, 신전 얼음 제단에서 서리 판정을 엽니다⁠. 공녀께 내린 것이 저주인지 아닌지⁠, 서리 신께서 보실 겁니다⁠.⁠”

엘리시아는 언 숟가락을 쥔 채 일어섰다⁠.

“⁠받겠습니다⁠.⁠”

“⁠판정 사흘 전부터는 신전 부엌에서 끓인 정화 죽만 드셔야 합니다⁠. 옛 법입니다⁠.⁠”

“⁠그 죽⁠.⁠” 요리사가 말했다⁠. “⁠제가 끓이겠습니다⁠.⁠”

대사제가 처음으로 요리사를 똑바로 봤다⁠. 눈썹에 앉은 눈이 녹아 물방울이 됐다⁠.

“⁠신전 부엌의 문지방은 이방인의 발을 받지 않습니다⁠, 남쪽 사람⁠.⁠”

5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

소금 단지가 비던 밤 · 저주받은 공녀의 전속 요리사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