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403자)

쓴 꿀

저주받은 공녀의 전속 요리사 · 소예담

엘리시아는 요리사가 숟가락을 돌려주는 손을 봤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재상의 마차가 성문을 빠져나가 눈길 위의 검은 점이 될 때까지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고⁠, 마차가 고개 너머로 사라지자 요리사가 그녀에게만 들리게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너무 달아서요⁠.⁠”

이 말은 엘리시아가 짐작한 것과 같았다⁠. 같아서 더 추웠다⁠.

아침은 작은 식당에서 먹었다⁠. 아버지와 가신 둘⁠, 집사장⁠, 은테 안경의 의관이 탁자에 둘러앉았고 엘리시아의 자리 앞에 꿀물 한 잔이 놓였다⁠. 왕비의 꿀을 따뜻한 물에 푼 것이었다⁠. 꽃 냄새가 잔 위로 피어올랐다⁠. 석 달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사람의 코에는 이 냄새가 지나치게 달콤했다⁠.

“⁠북부 예법으로는⁠.⁠” 집사장이 공손하게 말했다⁠. 서른 해를 대공가에서 일한 사람이었고⁠, 성의 모든 열쇠가 집사장의 허리띠에 달려 있었다⁠. “⁠하사품은 받은 분이 드셔야 예를 다한 것이 됩니다⁠.⁠”

“⁠왕비 전하께서 친히 보내신 꿀입니다⁠.⁠” 의관이 거들었다⁠. “⁠아침저녁으로 한 잔씩⁠, 제가 직접 타 올리겠습니다⁠. 재상 각하께서도 그리 당부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아버지의 손이 빵을 반으로 찢었다⁠. 빵 찢는 소리가 오래 갔다⁠. 엘리시아는 이 침묵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봄 곡식 마차⁠, 재상의 책상⁠, 왕비의 꿀⁠. 북부의 겨울은 길었다⁠.

“⁠요리사가 먼저 마셔야죠⁠.⁠” 엘리시아가 말했다⁠. “⁠요즘 제 앞에 오는 건 다 그렇게 해요⁠.⁠”

요리사가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입 안에서 오래 굴렸다⁠. 그리고 잔을 내려놓았다⁠. 요리사의 얼굴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말할 것이 없는 얼굴이었다⁠.

엘리시아는 손끝을 잔에 담갔다⁠. 따뜻한 꿀물이 손톱 밑을 감쌌다⁠. 서리가 피지 않았다⁠. 흰 것도 검은 것도 피지 않았다⁠. 새벽에 성문까지 걸어 나갔다 온 다리가 아직 떨리고 있었고⁠, 이 떨림이 손끝의 차가운 기운까지 다 가져가 버렸다⁠.

“⁠식었네요⁠.⁠” 엘리시아가 잔을 밀어냈다⁠. “⁠북부 꿀물은 데워 먹어야죠⁠. 요리사⁠, 이거 북부식으로 데워 와요⁠. 점심에 마실게요⁠.⁠”

의관이 무언가 말하려 했다⁠. 아버지가 빵 조각을 입에 넣으며 의관을 봤고⁠, 의관은 입을 다물었다⁠.

식당을 나서자 계단이 문제였다⁠. 탑 방까지 백 칸이 넘었고⁠, 엘리시아의 다리는 세 칸째에서 꺾였다⁠. 오렌이 팔을 내밀기 전에 아버지가 먼저 엘리시아 앞에 등을 내밀고 쭈그려 앉았다⁠. 북부 대공이 딸을 업고 계단을 오르는 동안 아무도 따라오지 않았다⁠. 아버지의 털옷에서 말 냄새와 장작 연기 냄새가 났다⁠. 어릴 때 맡던 냄새 그대로였다⁠.

“⁠아버지는 왜 아무 말도 안 했어요⁠?⁠”

“⁠곡식⁠.⁠”

“⁠그게 다예요⁠?⁠”

아버지가 계단 하나를 더 올랐다⁠. 숨소리가 무거웠다⁠.

“⁠북부에 사람이 열두만이다⁠. 봄까지 왕도 곡식이 안 올라오면 셋에 하나는 굶는다⁠. 굶는 놈부터 죽는 게 아니다⁠. 애들하고 노인부터 죽는다⁠.⁠”

“⁠그래서 나는 꿀을 마셔요⁠?⁠”

“⁠요리사가 먼저 마셨다⁠.⁠”

“⁠그 사람은 마력이 없어요⁠. 마셔도 몰라요⁠.⁠”

아버지가 계단 중간에서 멈췄다⁠. 엘리시아를 업은 채로 한참 서 있었다⁠. 층계 창으로 들어온 바람이 둘의 머리카락을 같이 흔들었다⁠.

“⁠너는 그놈을 믿느냐⁠?⁠”

엘리시아는 아버지 어깨에 턱을 얹었다⁠. 열 해 전 겨울⁠, 이 남자가 낸 소스 이야기가 목 바로 아래까지 올라왔다⁠. 이것을 삼켰다⁠.

“⁠그 사람 혀를 믿어요⁠.⁠”

아버지는 다시 계단을 올랐다⁠. 탑 방 문 앞에 엘리시아를 내려놓고 허리를 폈다⁠. 그리고 문고리를 잡은 채로 말했다⁠.

“⁠네 어미도 남쪽 음식을 좋아했다⁠.⁠” 아버지가 문을 열어 주었다⁠. “⁠점심에 그놈이 무얼 들고 오든 나도 같이 본다⁠.⁠”

*

“⁠꿀을 태워⁠?⁠” 그레타가 국자를 휘둘렀다⁠. “⁠왕비 꿀을⁠? 네 놈이 미쳤구나⁠.⁠”

“⁠태워야 맛이 보여요⁠.⁠”

루치오는 작은 구리 냄비 두 개를 화덕에 올렸다⁠. 하나에는 왕비의 꿀을⁠, 다른 하나에는 대공성 뒤뜰 벌통에서 거둔 북부 꿀을 같은 양만큼 부었다⁠. 북부 꿀은 빛이 탁했고 풀뿌리 냄새가 섞여 있었다⁠. 왕비의 꿀은 맑은 금빛이었다⁠.

불을 올리자 두 냄비가 같이 끓기 시작했다⁠. 거품이 작게 올라오다 점점 굵어졌다⁠. 꽃 냄새가 주방 천장까지 차올랐다⁠. 핀이 냄새에 취한 얼굴로 냄비 앞을 서성였다⁠.

“⁠그거 다 되면 저도 한 입⁠—⁠”

“⁠이건 못 먹어⁠. 너 마력 있어⁠?⁠”

“⁠없죠⁠.⁠”

“⁠그럼 먹어도 되긴 하는데⁠, 맛이 없을 거야⁠.⁠”

거품이 갈색으로 변했다⁠. 꽃 냄새가 빠지고 구운 빵 껍질 냄새가 올라왔다⁠. 루치오는 나무 주걱으로 냄비 바닥을 긁으며 불을 더 올렸다⁠. 갈색이 짙어지더니 검붉어졌다⁠. 연기가 가늘게 피었다⁠. 그레타가 코를 막았고 핀은 기침을 했다⁠. 단내가 탄내로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루치오는 불에서 냄비를 내리고 북부 꿀 쪽을 먼저 찍어 먹었다⁠. 혀가 오그라들 만큼 썼다⁠. 단맛은 바닥에만 조금 남았고⁠, 탄 껍질의 씁쓸함이 혀 전체를 덮었다⁠. 혀뿌리는 그대로 따뜻했다⁠.

이번엔 왕비의 꿀⁠. 똑같이 썼다⁠. 같은 탄내⁠, 같은 쓴맛⁠. 단맛이 걷힌 자리에서⁠, 쓴맛을 다 넘긴 다음에 혀뿌리가 식었다⁠. 아주 천천히⁠, 그러나 틀림없이⁠. 꿀이 덮고 있던 식은 쇠가 단맛이 타 버린 자리로 드러났다⁠.

루치오는 숟가락을 입에 문 채 눈을 감았다⁠.

“⁠있냐⁠?⁠” 그레타가 물었다⁠.

“⁠있어요⁠.⁠”

그레타가 국자를 내려놓았다⁠. 국자 끝이 돌바닥에 부딪쳐 맑은 소리가 났다⁠. 그레타는 왕비의 꿀 냄비를 한참 노려보다가 루치오에게 고개를 돌렸다⁠.

“⁠네 혀 하나 말고 증거가 있냐⁠?⁠”

“⁠없어요⁠.⁠”

“⁠그럼 너는 오늘 끝장이다⁠.⁠”

그레타가 숟가락을 집어 왕비의 꿀 냄비를 찍었다⁠. 루치오가 말릴 틈도 없었다⁠. 그레타는 탄 꿀을 혀에 올리고 한참 오물거리다 얼굴을 찡그렸다⁠.

“⁠쓰기만 하다⁠. 쇠는 무슨 쇠냐⁠?⁠”

“⁠주방장님 혀는 이걸 모르세요⁠. 제 혀만 압니다⁠.⁠”

“⁠네 혀가 틀렸으면⁠?⁠”

“⁠그럼 혀를 드리죠⁠. 아침에 약속하신 대로요⁠.⁠”

그레타가 숟가락을 행주에 문질러 닦았다⁠. 닦고 또 닦았다⁠. 그러다 행주를 내던지며 핀에게 소리쳤다⁠.

“⁠뭘 봐⁠. 북부 꿀 냄비 남은 거 긁어 먹어⁠. 태운 꿀은 네 녀석 기침에 좋다⁠.⁠”

핀이 냄비 바닥을 긁어 입에 넣었다가 혀를 내밀고 몸서리를 쳤다⁠. 그레타는 이것을 보며 한 번도 웃지 않았는데⁠, 핀이 물을 찾아 뛰어나가자 등을 돌리고 어깨를 한 번 들썩였다⁠.

문간에서 오렌이 들어왔다⁠. 공녀 방으로 올라가는 모든 것을 먼저 먹는 기사답게⁠, 냄비를 보자마자 손가락을 뻗었다⁠. 루치오가 냄비를 들어 올렸다⁠. 오렌은 대신 옆 선반에서 그레타가 아침에 구운 꿀 과자 접시를 집어 들었다⁠. 공녀께 올리려다 루치오가 막은 과자였다⁠.

“⁠이건 검사 안 했지⁠.⁠”

“⁠그건 안 올라가요⁠.⁠”

“⁠그러니까 검사해서 버려야지⁠.⁠”

오렌이 과자 셋을 연달아 입에 넣었다⁠. 씹으면서 허리띠를 만지작거렸다⁠. 허리띠 버클이 배에 눌려 있었다⁠. 오렌은 버클을 풀어 구멍 하나를 뒤로 옮겨 채웠다⁠. 핀이 이걸 보고 웃음을 터뜨렸고⁠, 오렌이 노려보자 장작더미 뒤로 숨었다⁠.

“⁠기사님⁠, 요리사님 오시고 나흘인데 벌써 구멍 하나예요⁠?⁠”

“⁠이건 검사의 값이다⁠.⁠”

*

점심 무렵 엘리시아는 성 안뜰로 내려왔다⁠. 아버지가 가신들과 겨울 사냥 일정을 의논하는 자리였다⁠. 눈을 쓸어 낸 안뜰 한가운데 탁자가 놓였고⁠, 화로 둘이 탔다⁠. 요리사가 구리 냄비 둘을 들고 따라왔다⁠. 의관과 집사장이 탁자 끝에 섰다⁠.

요리사가 두 냄비를 탁자에 내려놓고 말했다⁠. 하나는 북부 꿀을 태운 것⁠, 하나는 왕비의 꿀을 태운 것⁠. 단맛을 태워 걷어 냈더니 왕비의 꿀에서만 식은 쇠 맛이 난다고⁠.

의관이 웃었다⁠. 소리를 내서 웃었다⁠.

“⁠이 자는 하사품을 냄비에 붓고 태웠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냄비에서 독 맛이 난답니다⁠. 누가 그 냄비 앞에 서 있었습니까⁠?⁠” 의관이 가신들을 돌아봤다⁠. “⁠이 자 혼자였습니다⁠. 꿀이 이 자 손에 들어간 지 반나절입니다⁠.⁠”

“⁠주방장님도 계셨어요⁠.⁠” 엘리시아가 말했다⁠.

“⁠주방장은 냄비 안에 무엇이 들어가는지 봤습니까⁠?⁠”

탁자 끝에서 그레타가 입을 다물었다⁠.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엘리시아는 왕비의 꿀 냄비에 손을 뻗었다⁠. 검게 굳은 꿀 가장자리에 손끝을 댔다⁠. 차갑고 단단했다⁠. 숨을 모아 손끝으로 밀어 보냈다⁠. 열여섯 살 때처럼⁠, 아침마다 창유리에 서리꽃을 그리던 때처럼⁠. 아무것도 피지 않았다⁠. 손끝이 하얗게 질릴 뿐이었다⁠.

의관이 엘리시아의 손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동정하는 얼굴이었다⁠.

“⁠공녀⁠, 저주가 깊으시면 서리도 안 나는 법입니다⁠. 요리사 혀에 속지 마십시오⁠.⁠”

엘리시아는 일어섰다⁠. 다리가 휘청했지만 탁자를 짚고 버텼다⁠. 탁자 끝에 놓인 참나무 통으로 걸어갔다⁠. 왕실 문장이 찍힌 꿀 통이었다⁠. 아직 반 넘게 차 있었다⁠. 두 손으로 통을 들었다⁠. 무거웠다⁠. 오렌이 달려오려 했고 고개를 저었다⁠.

통을 기울였다⁠.

금빛 꿀이 굵은 줄기가 되어 안뜰의 눈밭으로 쏟아졌다⁠. 꿀은 눈 위에 떨어지자마자 식어 굳었고⁠, 눈밭에 금색 웅덩이가 생겼다가 가장자리부터 하얗게 얼어 갔다⁠. 꽃 냄새가 안뜰 가득 퍼졌다⁠. 가신 하나가 숨을 들이쉬었다⁠.

“⁠북부 눈이 먼저 드셨습니다⁠.⁠” 엘리시아가 빈 통을 내려놓았다⁠. “⁠의관께서 왕비 전하께 그렇게 아뢰세요⁠.⁠”

집사장이 먼저 움직였다⁠. 허리띠의 열쇠 꾸러미를 짤랑거리며 하인 둘을 불렀다⁠.

“⁠하사품을 땅에 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눈 위에 굳은 것은 아직 떠 담을 수 있으니 통에 도로 담아 창고에 두거라⁠.⁠”

하인들이 국자를 들고 다가왔다⁠. 엘리시아는 금빛 웅덩이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다⁠. 굳어 가는 꿀이 신발 밑창에 들러붙어 걸음마다 쩍쩍 소리를 냈다⁠. 웅덩이 위에서 발을 굴렀다⁠. 꿀과 눈과 흙이 한데 짓이겨졌다⁠. 하인들이 국자를 든 채 집사장을 돌아봤고⁠, 집사장은 아버지를 봤다⁠. 아버지는 딸의 신발을 보고 있었다⁠.

“⁠떠 담으세요⁠.⁠” 엘리시아가 말했다⁠. “⁠흙 맛 나는 꿀을 왕비 전하께서 좋아하시면요⁠.⁠”

가신 하나가 기침으로 웃음을 덮었다⁠.

의관의 얼굴이 굳었다⁠. 품에서 접힌 양피지를 꺼냈다⁠. 붉은 밀랍에 재상의 문장이 찍혀 있었다⁠.

“⁠재상 각하께서 제게 공녀의 치료를 맡기시며 주신 위임장입니다⁠. 왕국의 의원으로서 말씀드리지요⁠. 이 요리사는 하사품에 손을 대 더럽혔고⁠, 공녀께서 그 손에 속아 왕비 전하를 모욕하셨습니다⁠.⁠” 의관이 기사들을 돌아봤다⁠. “⁠이 자를 묶어 객실 아래 가두시오⁠. 재상 각하께 보고하고 처분을 기다리겠소⁠.⁠”

기사 둘이 머뭇거리며 아버지를 봤다⁠. 아버지는 칼자루에 손을 얹고 있었는데⁠, 칼을 뽑지 않았다⁠. 아버지의 눈이 눈밭의 꿀 웅덩이에서 왕실 문장이 찍힌 빈 통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아버지는 말하지 않았다⁠.

기사들이 다가와 요리사의 양팔을 잡았다⁠. 요리사는 저항하지 않았다⁠. 엘리시아를 봤다⁠. 고개를 아주 작게 저었다⁠.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무엇을 하지 말라는지 엘리시아는 알았다⁠. 요리사도 엘리시아가 무엇을 할지 알았다⁠.

엘리시아는 탁자 위 왕비의 꿀 냄비에서 숟가락을 뽑았다⁠. 숟가락 끝에 검게 탄 꿀이 엉겨 붙어 있었다⁠.

“⁠공녀님⁠!⁠” 그레타가 소리쳤다⁠.

엘리시아는 숟가락을 입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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