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343자)

버터 젓는 날

저주받은 공녀의 전속 요리사 · 소예담

“⁠알고 왔습니다⁠.⁠”

루치오는 문간에서 한 걸음 들어와 말했다⁠. 재상이 등 뒤에 있었고 공녀가 침대에 있었다⁠. 둘 중 누구의 얼굴도 보지 않으려고 탁자 위 은 접시를 봤다⁠. 아침에 공녀가 손끝으로 피운 검은 고사리 무늬가 접시 가장자리에 아직 말라 있었다⁠.

“⁠살레르 항구 게시판에 방이 붙었어요⁠. 북부 공녀가 먹는 것마다 토하고⁠, 대야에 검은 서리가 핀다고⁠. 그걸 읽고 국밥집 문을 닫았습니다⁠.⁠” 루치오는 숨을 한 번 골랐다⁠. “⁠열 해 전 그날 밤에 주방장이 제 소스 냄비를 엎으면서 상했다고 소리쳤어요⁠. 냄비 바닥에 남은 걸 손가락으로 찍어 먹어 봤습니다⁠. 안 상했었어요⁠. 식은 쇠에 꿀 맛이 났습니다⁠. 손님 중에 북부 부인이 쓰러졌다는 말은 나중에 매 맞으면서 들었고요⁠. 그분이 누구였는지는 몰랐습니다⁠. 조금 전 객실에서 재상 각하가 물으실 때까지는요⁠.⁠”

“⁠어머니도⁠.⁠” 엘리시아가 말했다⁠. “⁠저주가 아니었네요⁠.⁠”

“⁠모릅니다⁠. 저는 그 냄비 바닥 맛만 압니다⁠.⁠”

재상이 침대 발치에서 한숨을 쉬었다⁠. 안됐다는 얼굴이었다⁠.

“⁠공녀⁠, 이런 자를 곁에 두실 수는⁠—⁠”

“⁠재상 각하⁠.⁠” 엘리시아가 말을 잘랐다⁠. “⁠늦었어요⁠. 나가 주세요⁠.⁠”

재상은 잠깐 서 있다가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문이 닫히고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멀어졌다⁠. 엘리시아가 이불 위에 놓인 손을 내려다봤다⁠. 아침에 검은 서리를 피웠던 손가락이었다⁠.

“⁠아버지가 알면⁠.⁠” 엘리시아가 말했다⁠. “⁠당신은 성문 밖 눈밭이에요⁠. 그럼 나는 다시 저 대야를 끌어안고요⁠. 그러니까 말 안 할 거예요⁠.⁠”

“⁠공녀님⁠.⁠”

“⁠대신 조건이 있어요⁠. 내 앞에 올라오는 건 전부 당신이 먼저 먹어요⁠. 내 숟가락으로⁠, 내가 보는 데서⁠. 국이든 빵이든 물이든⁠.⁠” 엘리시아가 고개를 들었다⁠. 큰 눈 밑이 거뭇했다⁠. “⁠그리고 그 맛을 아는 혀는 이 성에 당신 하나예요⁠. 그 혀로 갚아요⁠.⁠”

루치오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엘리시아가 말을 이었다⁠.

“⁠버터 넣은 손⁠, 어떻게 잡을 거예요⁠?⁠”

“⁠공녀님 저녁을 미끼로 쓰면 됩니다⁠.⁠”

“⁠미끼요⁠?⁠”

“⁠드시지는 않으실 거예요⁠. 쟁반만 올라가는 길로 올라가게 두는 거죠⁠. 손을 댄 사람이 층계참에 나타날 때까지⁠.⁠”

엘리시아가 루치오를 한참 봤다⁠. 그리고 처음으로 웃었다⁠. 입꼬리 한쪽만 올라가는 웃음이었다⁠.

“⁠배고픈 사람 저녁으로 덫을 놓겠다는 요리사는 처음 보네요⁠.⁠”

*

새벽 다섯 시⁠, 주방에는 화덕 하나만 살아 있었다⁠. 그레타가 교유기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아 크림을 부었다⁠. 루치오는 이 맞은편에 섰고⁠, 핀은 졸린 눈으로 장작을 날랐고⁠, 오렌은 밀가루 포대에 기대 코를 골았다⁠. 공녀 방 문 앞에서 밤을 새우고 내려와 독 검사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레타가 막대를 내렸다 올렸다⁠. 철벅⁠, 철벅⁠. 크림이 나무 통 벽을 치는 소리가 처음엔 묵직하더니 조금씩 가벼워졌다⁠. 그레타는 리듬을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 손목이 굵은 나무뿌리 같았다⁠.

“⁠마마가 시집오실 때 이걸 안고 오셨다⁠.⁠” 그레타가 막대를 내리며 말했다⁠. “⁠남쪽에서는 하녀가 젓는다며⁠, 북부에선 안주인이 젓는다고 하니까 직접 저으셨어⁠. 사흘 만에 손바닥이 다 까져서는⁠.⁠” 철벅⁠. “⁠공녀님 이유식 버터도 여기서 나왔다⁠. 내가 저었지⁠. 마마는 옆에서 웃기만 하시고⁠.⁠”

크림이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통 안에서 버터 알갱이가 뭉치며 물이 빠졌다⁠. 그레타가 뚜껑을 열고 노란 덩어리를 건져 찬물에 씻었다⁠. 풀 냄새와 젖 냄새가 새벽 주방에 퍼졌다⁠.

“⁠먹어 봐라⁠, 항구 놈아⁠.⁠”

루치오가 손가락으로 찍어 입에 넣었다⁠. 단맛은 크림에서 온 것뿐이었다⁠. 혀뿌리는 따뜻했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레타가 콧김을 내쉬었다⁠.

“⁠이제 이 버터는 내가 지킨다⁠.⁠”

“⁠주방장님⁠.⁠” 루치오가 목소리를 낮췄다⁠. “⁠오늘 저녁 쟁반은 원래대로 시녀가 들고 올라가게 해 주세요⁠. 층계참 접시에 이 버터를 덜어 놓고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시고요⁠.⁠”

그레타가 손을 멈췄다⁠. 루치오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들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레타 자신도 의심한다는 것을 알아들은 얼굴이기도 했다⁠.

“⁠나한테도 말하지 말라는 소리구나⁠.⁠”

“⁠네⁠.⁠”

그레타가 버터 덩어리를 행주에 싸서 루치오의 가슴에 탁 밀었다⁠.

“⁠네 놈이 맞으면 내가 그 손을 잡아 주마⁠. 틀리면 네 놈 혀를 내가 자른다⁠. 대공 나리 칼 기다릴 것도 없이⁠.⁠”

*

찬장 계단 층계참에는 벽장이 하나 있었다⁠. 겨울 소시지와 마른 사과를 매달아 두는 곳이었는데⁠, 사내 둘이 들어가니 무릎이 서로 부딪쳤다⁠. 루치오와 오렌은 해가 지기 전부터 이 안에 쭈그려 있었다⁠. 문틈으로 데움 화덕과 이 옆 선반의 버터 접시가 보였다⁠.

오렌의 배에서 소리가 났다⁠.

“⁠조용히 하세요⁠.⁠”

“⁠배가 하는 일이다⁠. 나는 조용하다⁠.⁠”

오렌이 손을 뻗어 머리 위에 매달린 소시지 하나를 뜯었다⁠. 루치오가 노려보자 오렌이 소시지를 반으로 뚝 잘라 내밀었다⁠. 루치오는 받지 않았다⁠. 오렌은 둘 다 먹었다⁠.

종이 저녁을 알렸다⁠. 계단 아래에서 시녀가 은쟁반을 들고 올라왔다⁠. 맑은 대구국과 호밀빵⁠. 시녀는 쟁반을 데움 화덕 위 철판에 올려놓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공녀의 손 씻을 물을 가지러 가는 것이었다⁠. 시녀의 발소리가 위로 사라졌다⁠. 층계참에 쟁반만 남았다⁠. 화덕 불이 그릇 바닥을 데우며 김이 올라왔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

국이 식어 가는 냄새가 벽장 틈으로 들어왔다⁠. 오렌이 숨을 죽였다⁠. 루치오는 손바닥에 땀이 차는 것을 바지에 닦았다⁠. 틀렸을 수도 있었다⁠. 손을 댄 사람이 어제 일로 겁을 먹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면 공녀는 오늘 밤 식은 국을 먹고⁠, 그레타는 내일 루치오의 혀를 자른다⁠.

계단 아래에서 발소리가 올라왔다⁠. 가볍고 빨랐다⁠. 앞치마에 밀가루가 묻은 여자가 층계참에 섰다⁠. 마타였다⁠. 마타는 위층을 한 번 올려다보고⁠, 아래층을 한 번 내려다봤다⁠. 그리고 소매에서 작은 것을 꺼냈다⁠. 새끼손가락만 한 뼈 대롱이었다⁠. 마개를 엄지로 밀어 열고⁠, 버터 접시 위에서 대롱을 기울였다⁠.

루치오가 벽장 문을 밀었다⁠. 오렌이 먼저 튀어 나갔다⁠. 오렌의 손이 마타의 손목을 잡았고⁠, 뼈 대롱이 손가락 사이에서 빠져나가 계단에 떨어졌다⁠. 대롱은 돌계단을 한 칸씩 튀며 아래로 굴러갔다⁠. 탁⁠, 탁⁠, 탁⁠. 루치오가 몸을 던져 일곱 칸 아래에서 이것을 손바닥으로 덮었다⁠.

“⁠놔요⁠!⁠” 마타가 소리쳤다⁠. “⁠약이에요⁠! 공녀님 잠 잘 주무시라고⁠, 의관님이⁠—⁠”

“⁠잠 오는 약을 왜 버터에 넣어요⁠?⁠” 루치오가 대롱을 쥐고 일어섰다⁠.

계단 아래에 그레타가 서 있었다⁠. 손에 국자를 들고 있었는데⁠, 국자를 든 채 움직이지 않았다⁠. 마타가 그레타를 보자 몸부림을 멈췄다⁠. 스무 해를 같은 화덕 앞에 선 두 여자가 계단 위아래에서 서로를 봤다⁠.

“⁠마타⁠.⁠” 그레타가 말했다⁠.

“⁠아들이 왕도에 있어요⁠.⁠” 마타가 말했다⁠.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졌다⁠. “⁠빚 감옥에요⁠. 스무 살 때 노름빚을 지고 들어갔어요⁠. 석 달 전에 의관님을 모시고 온 사람이 그랬어요⁠. 이것만 넣으면 아들을 꺼내 주겠다고⁠. 공녀님 돌아가실 정도는 아니라고⁠, 그냥 조금 아프시게만 하는 거라고⁠.⁠” 마타가 고개를 숙였다⁠. “⁠스무 해예요⁠, 그레타⁠. 내가 공녀님 기저귀도 갈았어요⁠.⁠”

그레타가 계단을 올라왔다⁠. 한 칸 한 칸 느렸다⁠. 마타 앞에 서서 국자를 내려놓고⁠, 마타의 앞치마 끈을 풀었다⁠. 밀가루 묻은 앞치마를 접어 팔에 걸었다⁠. 이것뿐이었다⁠. 그레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앞치마를 든 채 계단을 내려갔다⁠.

*

자정이 넘어 루치오가 새로 끓인 국을 들고 탑 방에 올라가니 엘리시아는 침대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미끼로 내려 보낸 저녁 대신 먹을 국이었다⁠. 루치오가 엘리시아의 숟가락으로 먼저 한 숟갈을 떠먹고 그릇을 내밀었다⁠. 엘리시아는 그릇을 받자마자 숟가락질을 세 번 하고서야 숨을 쉬었다⁠.

“⁠미끼 값은 받아야겠어요⁠. 한 그릇 더⁠.⁠”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은테 안경의 의관이 문간에 서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루치오의 앞치마 주머니를 봤다⁠.

“⁠그 대롱은 왕도 법정에 갈 증거요⁠. 재상 각하께 넘기시오⁠.⁠”

“⁠제가 계단에서 주운 겁니다⁠.⁠”

“⁠요리사가 증거를 쥐고 있을 자리는 없소⁠.⁠”

“⁠그럼 아버지한테 받아 오세요⁠.⁠” 엘리시아가 국그릇에서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아버지가 내놓으라면 내놓을게요⁠. 문은 닫고 가시고요⁠. 국 식어요⁠.⁠”

의관이 입술을 깨물고 물러갔다⁠. 이날 밤 대롱은 대공의 명으로 재상에게 넘어갔다⁠. 루치오가 쥐고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두 번째 날부터 가지고 있던 층계참의 작은 버터 접시 하나뿐이었다⁠. 접시에는 손가락으로 찍어 낸 자국이 그대로 남은 버터가 얼어붙어 있었다⁠.

*

엘리시아는 석 달 만에 성문까지 걸어 나갔다⁠. 털망토를 두 겹 둘렀는데도 새벽 바람이 뼈 사이로 들어왔고⁠, 열 걸음마다 오렌의 팔을 잡아야 했다⁠. 성문 앞 눈밭에 재상의 마차가 서 있었다⁠. 말 넷이 흰 김을 뿜었고⁠, 마차 문 안쪽에 손이 묶인 마타가 앉아 있었다⁠.

아버지가 마차 앞에 서 있었다⁠. 재상은 털망토 차림으로 이 맞은편에 섰다⁠. 재상의 손에 붉은 밀랍이 찍힌 양피지가 들려 있었다⁠.

“⁠대공가 후계를 해치려 한 일은 북부만의 일이 아닙니다⁠.⁠” 재상이 말했다⁠. “⁠왕국의 피를 노린 일이고⁠, 왕도 법정이 다룰 일이지요⁠. 이 여자는 제가 왕도로 데려가 누가 시켰는지 밝히겠습니다⁠.⁠”

“⁠북부 일이다⁠.⁠” 아버지가 말했다⁠.

“⁠그렇게 하시면 저는 왕도에 돌아가 북부가 왕국 법정을 거부했다고 아뢰야 합니다⁠.⁠” 재상이 부드럽게 웃었다⁠. “⁠봄 곡식 마차 허가가 제 책상 위에 올라오는 철이기도 하고요⁠.⁠”

아버지의 뒤에 선 가신 둘이 눈을 마주쳤다⁠. 아버지가 칼자루에 얹었던 손을 내렸다⁠. 아주 천천히였다⁠.

엘리시아가 앞으로 나섰다⁠. 오렌의 팔을 놓으니 다리가 휘청였다⁠.

“⁠그 여자를 데려가시면 이 성에서는 아무도 누가 시켰는지 못 들어요⁠.⁠”

“⁠왕도 법정이 듣지요⁠, 공녀⁠.⁠” 재상이 엘리시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공녀의 회복을 빌며 왕비 전하께서 보내신 것이 있습니다⁠.⁠”

시종이 마차 뒤에서 작은 통 하나를 내렸다⁠. 왕실 문장이 찍힌 참나무 통이었다⁠. 시종이 마개를 따자 꽃 냄새가 눈밭 위로 퍼졌다⁠. 진하고 무거운 꿀 냄새였다⁠.

“⁠남쪽 아홉 계곡의 꽃꿀입니다⁠. 그리고 의관은 두고 가겠습니다⁠. 저주든 독이든 공녀 곁에 의원은 있어야지요⁠.⁠”

재상의 눈이 엘리시아 뒤에 선 요리사에게 갔다⁠. 요리사는 앞치마 차림으로 눈밭에 서 있었다⁠. 밤새 한숨도 못 잔 얼굴이었다⁠.

“⁠자네 혀가 그렇게 좋다니⁠.⁠” 재상이 숟가락 하나를 꿀통에 담갔다가 내밀었다⁠. “⁠맛을 보게⁠.⁠”

요리사가 숟가락을 받았다⁠. 엘리시아는 요리사가 꿀을 입에 넣는 것을 봤다⁠. 요리사의 턱이 천천히 움직였다⁠. 꿀이 혀 위에 오래 머무는 것이 보였다⁠. 요리사의 눈썹 사이가 좁아졌다⁠. 한 번 더 혀를 굴렸다⁠. 그리고 재상의 얼굴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갔다⁠.

엘리시아는 이 얼굴을 알았다⁠. 대야에 검은 서리가 피기 직전⁠, 사제들이 노래를 멈추던 얼굴이었다⁠.

“⁠독인가⁠?⁠” 재상이 물었다⁠.

3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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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면은세개2026.10.27· 3화

    버터를 손으로 저어서 만들면 실제로 그렇게 오래 걸려요?

    • 소예담작가2026.10.27

      손으로 저으면 꽤 오래 걸려요. 그 시간 동안 두 사람이 나누는 말을 쓰고 싶어서 일부러 길게 뒀습니다.

버터 젓는 날 · 저주받은 공녀의 전속 요리사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