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509자)

손끝의 성에

저주받은 공녀의 전속 요리사 · 소예담

엘리시아는 아버지가 칼을 반쯤 뽑는 소리를 침대에서 들었다⁠. 쇠가 가죽 칼집을 긁는 소리는 짧고 건조했다⁠. 은대야를 끌어안은 채 고개를 들 힘이 없어서⁠, 바닥에 드리운 그림자로 방 안을 봤다⁠. 아버지의 그림자⁠, 이 앞에 선 요리사의 그림자⁠, 문간에서 움직이지 않는 재상의 그림자가 벽난로 불빛에 길게 늘어져 있었다⁠.

“⁠사흘⁠.⁠” 아버지가 말했다⁠. “⁠재상이 떠나는 날 아침까지 독이라는 걸 보여라⁠. 못 보이면 혀를 자르고 성문 밖 눈밭에 버린다⁠.⁠”

“⁠공정하십니다⁠.⁠” 재상의 목소리였다⁠. “⁠저도 그날 아침까지 머물지요⁠.⁠”

요리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엘리시아는 대야 가장자리의 검은 성에를 손톱으로 긁었다⁠. 성에는 바스러지지 않고 손톱 밑으로 차갑게 파고들었다⁠. 석 달 동안 서른 번 넘게 본 것이었다⁠. 처음 검은 서리가 폈을 때 서리 신전의 사제들이 와서 노래를 불렀고⁠, 두 번째엔 향을 피웠고⁠, 열 번째쯤엔 아무도 오지 않았다⁠. 베개 밑에는 접힌 종이 한 장이 있었다⁠. 아버지 앞으로 쓴 것이었는데⁠, 아직 아무에게도 안 보였다⁠.

“⁠그 그릇⁠.⁠” 엘리시아가 말했다⁠. 목이 쉬어 있었다⁠. “⁠버리지 마요⁠. 내일 아침에 내 앞에서 보여 줘요⁠. 다들 여기서⁠.⁠”

아버지의 그림자가 엘리시아 쪽으로 돌아섰다⁠. 엘리시아는 이 그림자를 보지 않고 요리사의 그림자를 봤다⁠. 그림자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

아침에 오렌이 그릇을 들고 왔다⁠. 밤새 그릇을 품에 안고 문 앞에 앉아 있었다는데⁠, 졸다가 두 번 쏟을 뻔했다고 시녀가 일러바쳤다⁠. 그릇 속 국은 차갑게 식었고⁠, 녹아 있던 버터가 하얗게 굳어 국물 위에 뚜껑처럼 덮여 있었다⁠.

방에 사람이 가득했다⁠. 아버지⁠, 재상⁠, 은테 안경의 의관⁠, 주방장 그레타⁠, 오렌⁠, 요리사⁠. 요리사는 소매를 걷고 탁자 앞에 섰다⁠. 손등에 데인 자국이 여러 개 있었다⁠. 요리사가 숟가락 끝으로 하얀 기름 뚜껑을 들어 올려 작은 접시에 옮겼다⁠. 접시 하나에는 굳은 기름⁠, 그릇에는 맑은 국물이 남았다⁠.

“⁠먼저 제가 먹겠습니다⁠.⁠”

요리사가 굳은 기름을 한 숟갈 떠 입에 넣었다⁠. 식은 버터를 그냥 먹는 얼굴이었다⁠. 느끼한지 미간을 찡그렸고⁠, 다 삼키고 나서 혀를 한 번 찼다⁠.

“⁠역시 이거예요⁠. 식은 쇠에 꿀⁠. 근데 저는 멀쩡하죠⁠.⁠”

의관이 안경테를 손가락으로 올렸다⁠. “⁠독이 없다는 증거로군⁠.⁠”

“⁠기사님은 어젯밤 이 국을 먼저 드시고 들여보내셨죠⁠. 지금은 어떠세요⁠? 한 번 더 드셔 보세요⁠. 이번엔 기름만요⁠.⁠”

오렌이 대공을 봤다⁠. 대공이 턱을 들었다⁠. 오렌은 공녀의 호위 기사답게 망설이지 않고 기름을 크게 한 숟갈 떠서 씹었다⁠. 씹다가 멈추고⁠, 엘리시아를 보고⁠, 다시 씹었다⁠.

“⁠어떠냐⁠?⁠” 대공이 물었다⁠.

“⁠느끼합니다⁠.⁠”

“⁠그것뿐이냐⁠?⁠”

“⁠빵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레타가 혀를 찼다⁠. 엘리시아는 웃음이 터질 뻔해서 입술을 깨물었다⁠. 석 달 만에 웃음이 목까지 올라온 것이었는데⁠, 웃으면 배가 땅겨 토할 것 같아 참았다⁠. 요리사가 엘리시아 쪽으로 돌아섰다⁠.

“⁠저도 기사님도 마력이 한 방울도 없습니다⁠. 이게 마력 있는 몸에만 붙는 거라면⁠, 저희가 먹어서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나요⁠. 기미를 백 번 봐도 소용이 없습니다⁠.⁠” 루치오가 맑은 국물이 든 그릇과 기름 접시를 엘리시아 앞에 나란히 놓았다⁠. “⁠공녀님⁠. 손끝을 대 주시겠어요⁠? 국물 먼저요⁠.⁠”

엘리시아는 손을 내려다봤다⁠. 북부 대공의 피는 손끝과 숨으로 서리를 낸다⁠. 열여섯 살 서리 판정 때 신전 얼음 제단에 손을 얹고 눈꽃처럼 흰 서리를 제단 끝까지 뻗게 했다⁠. 지금 이 손은 손가락 마디가 굵어 보일 만큼 말라 있었다⁠.

엘리시아는 검지 끝을 맑은 국물 표면에 댔다⁠. 차가운 국물이 손톱 밑까지 스몄다⁠. 아주 천천히⁠, 손끝에서 흰 서리가 피었다⁠. 바늘 끝만 한 서리가 두세 가닥 국물 위로 퍼지다 멈췄다⁠. 약했지만 희었다⁠.

“⁠이제 기름이요⁠.⁠”

손가락을 닦고 굳은 버터에 댔다⁠. 닿자마자 손끝이 시렸다⁠. 서리가 피었는데 피는 속도가 달랐다⁠. 검은 가지가 버터 표면을 따라 순식간에 뻗었고⁠, 가지 끝이 접시 가장자리까지 기어가 은 접시에 검은 고사리 무늬를 새겼다⁠. 버터가 이 자리에서 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방 안이 조용했다⁠. 그레타가 숨을 들이켰다⁠. 의관이 먼저 입을 열었다⁠.

“⁠공녀께 내린 저주가 닿는 것을 검게 물들이는 겁니다⁠. 그러니 손을 대시면⁠—⁠”

“⁠그럼 국물은 왜 희었어요⁠?⁠” 엘리시아가 물었다⁠.

의관이 대답하지 않았다⁠. 재상은 이 접시를 오래 내려다보다가 웃었다⁠. 웃는 얼굴로 대공에게 말했다⁠.

“⁠놀랍군요⁠. 기름에만 붙는 저주라니⁠.⁠”

“⁠저주가 아니라니까요⁠.⁠” 엘리시아가 말했다⁠. “⁠버터를 넣은 손이 있어요⁠. 찾아요⁠.⁠”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오렌에게 짧게 말했다⁠. “⁠주방 기름을 다 가져와라⁠.⁠” 그리고 덧붙였다⁠. “⁠빵도⁠.⁠”

엘리시아는 손끝을 이불에 문질렀다⁠. 검은 서리가 녹으며 물이 됐다⁠. 손끝에 남은 시린 기운이 한참 가시지 않았다⁠.

“⁠지난달에⁠.⁠” 엘리시아가 요리사에게만 들리게 말했다⁠. “⁠엿새 동안 물만 마신 적이 있어요⁠. 아무것도 넘어가지 않아서요⁠. 엿새째 되던 날 대야에 핀 서리가 회색이었어요⁠. 그때는 죽을 때가 돼서 색이 빠지는 줄 알았어요⁠.⁠”

요리사가 엘리시아를 봤다⁠. 무언가를 셈하는 얼굴이었다⁠.

“⁠이레만 깨끗하게 드시면 되겠네요⁠.⁠”

“⁠이레 동안 당신이 끓인 거만 먹으라고요⁠?⁠”

“⁠제가 먼저 먹고요⁠.⁠”

*

주방의 기름 단지를 마당에 늘어놓으니 열한 개였다⁠. 버터 통 넷⁠, 라드 단지 셋⁠, 크림 항아리 둘⁠, 순록 골수 기름 한 단지⁠, 그리고 층계참 데움 화덕 옆 선반에 놓여 있던 작은 버터 접시 하나⁠. 공녀 쟁반에 올릴 버터만 따로 담아 두는 접시라고 막내가 일러 주었다⁠. 막내는 스물이고 이름이 핀이었는데⁠, 루치오가 단지를 하나 열 때마다 뒤에서 숨을 참았다⁠.

루치오는 열한 개를 하나씩 손가락으로 찍어 맛봤다⁠. 버터 통 넷은 풀 냄새가 나는 좋은 버터였다⁠. 라드는 돼지기름의 고소함이 혀를 덮었다⁠. 크림은 조금 시었다⁠. 골수 기름은 짐승 냄새가 깊었다⁠. 혀뿌리는 식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층계참의 작은 접시를 찍었다⁠. 혀에 닿는 순간 버터의 풀 냄새가 났고⁠, 넘어간 뒤 혀뿌리가 식었다⁠. 식은 쇠⁠, 꿀⁠.

“⁠이거 하나예요⁠.⁠” 루치오가 접시를 들었다⁠. “⁠공녀님 쟁반 버터만⁠.⁠”

“⁠그럼 그거 하나 버리면 될 거 아니냐⁠?⁠” 그레타가 두 팔을 앞치마 위로 엇걸었다⁠.

“⁠다 버려요⁠. 오늘은 깨끗해도 내일 누가 손을 댈지 모르잖아요⁠.⁠”

그레타가 루치오의 앞을 막아섰다⁠. 키는 루치오의 가슴께까지였는데 막아서니 문짝 같았다⁠.

“⁠항구 놈아⁠. 이 버터는 내가 지난여름 내내 저은 거다⁠. 이 라드는 가을에 잡은 돼지 서른 마리야⁠. 북부의 겨울을 너 같은 놈이 알아⁠? 기름 없이 이 성 사람들이 한겨울을 날 것 같으냐⁠?⁠”

“⁠성 사람들 건 두세요⁠. 공녀님 것만 새로 하죠⁠. 제가 보는 데서⁠.⁠”

“⁠네가 보는 데서⁠? 내 주방에서 내가 네 눈치를 보라고⁠?⁠”

“⁠네⁠.⁠”

마당에 선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부주방장 마타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다가왔다⁠. 마흔셋⁠, 그레타 곁에서 스무 해를 일했다는 여자였다⁠.

“⁠주방장님⁠, 층계참 접시는 제가 씻어 둘게요⁠. 저도 찜찜해서요⁠.⁠”

“⁠놔둬요⁠.⁠” 루치오가 말했다⁠. “⁠그 접시는 제가 가지고 있겠습니다⁠.⁠”

마타가 손을 거두며 웃었다⁠. 그레타는 마타를 보지 않고 루치오를 노려봤다⁠. 한참 노려보다가 등을 돌려 주방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단 건 어쩔 거냐⁠? 공녀님은 꿀 과자를 좋아하신다⁠.⁠”

“⁠단 건 당분간 안 올립니다⁠. 단맛이 세면 제 혀도 속아요⁠. 꿀 범벅이면 저도 몰라요⁠.⁠”

그레타가 문간에서 멈췄다⁠. 이 말을 곱씹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문을 쾅 닫았다⁠.

해 질 무렵 루치오가 주방에 돌아가 보니 화덕 옆에 나무 교유기가 하나 놓여 있었다⁠. 버터를 젓는 통이었는데⁠, 손잡이가 손때로 까맣게 반들거렸다⁠. 이 옆에 크림 항아리 하나가 뚜껑이 덮인 채 놓여 있었다⁠. 그레타는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반죽을 쳤다⁠.

“⁠대공비 마마가 시집올 때 들고 온 교유기다⁠.⁠” 그레타가 반죽에다 대고 말했다⁠. “⁠내일 새벽에 네 눈앞에서 젓는다⁠. 그 꼴 보기 싫으면 일찍 일어나⁠.⁠”

저녁 국은 루치오가 들고 올라갔다⁠. 층계참 화덕 앞에서 오렌이 기다리고 있다가 한 숟갈을 떠먹고 얼굴을 찌푸렸다⁠. 버터 한 점 없는 맑은 국이 북부 기사의 혀에는 맹물로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오렌은 두 숟갈을 더 떴고⁠, 루치오가 그릇을 잡아당기자 그제야 놓았다⁠. 탑 방에서 엘리시아는 그릇을 받아 들고 숟가락을 루치오에게 먼저 내밀었다⁠. 루치오가 한 숟갈을 떠먹고 돌려주자 입을 댄 숟가락을 행주에 닦지도 않고 그대로 국에 담갔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그릇을 다 비웠다⁠. 대야는 끝내 깨끗했다⁠.

*

이날 밤 재상이 루치오를 객실로 불렀다⁠. 객실에는 화로가 둘이었고⁠, 탁자 위에 그레타가 저녁으로 올린 순록 스튜가 반쯤 남아 있었다⁠. 재상은 털망토를 벗고 의자에 깊이 앉아 있었다⁠.

“⁠앉게⁠.⁠”

“⁠서 있겠습니다⁠.⁠”

“⁠항구 사람은 앉으라면 앉던데⁠.⁠” 재상이 탁자 위로 가죽 주머니 하나를 밀었다⁠. 주머니가 탁자 위를 미끄러지며 묵직하게 짤랑거렸다⁠. “⁠금화 쉰 닢이네⁠. 대공이 건 백 닢의 반이지⁠. 자네는 공녀의 목에 국을 넘겼으니 그만큼은 받을 자격이 있어⁠. 오늘 밤 남쪽으로 내려가는 썰매가 있네⁠.⁠”

“⁠내일 새벽에 버터를 저어야 해서요⁠.⁠”

재상이 웃었다⁠. 웃음이 오래 갔다⁠.

“⁠자네 혀는 정말 좋더군⁠. 국 한 숟갈로 소금 산지를 맞히는 사람을 왕도에서 딱 한 번 봤네⁠. 열 해 전 겨울⁠, 왕궁 연회 주방에서⁠.⁠” 재상이 스튜 그릇을 한쪽으로 밀었다⁠. “⁠막내였지⁠. 소스 냄비 앞에 섰고⁠, 열아홉이었고⁠. 그날 연회가 끝나고 등에 매를 스무 대 맞았어⁠. 상한 소스를 낸 죄로⁠.⁠”

화로에서 장작 터지는 소리가 났다⁠. 루치오는 등 한가운데가 당기는 것을 느꼈다⁠. 열 해 전에 아문 자리였다⁠.

“⁠그 소스를 먹고 쓰러진 분이 누구였는지 자네는 아나⁠?⁠”

“⁠북부에서 오신 부인이라고만 들었습니다⁠.⁠”

“⁠그렇겠지⁠.⁠” 재상이 일어나 털망토를 걸쳤다⁠. “⁠그럼 오늘 알게 될 거네⁠. 금화는 두고 가게⁠. 내일 아침엔 그 값이 없을 테니⁠.⁠”

*

엘리시아는 재상이 방에 들어오는 소리에 눈을 떴다⁠. 재상 뒤로 요리사가 들어왔다⁠. 요리사의 얼굴이 낮보다 하얬다⁠.

“⁠늦은 시각에 죄송합니다⁠, 공녀⁠.⁠” 재상이 침대 발치에 서서 말했다⁠. “⁠말씀드릴 것이 있어서요⁠. 공녀께서 오늘 새 요리사를 믿으셨으니⁠, 그가 누구인지는 아셔야지요⁠.⁠”

재상은 침착하게 말했다⁠. 열 해 전 겨울 왕도 연회⁠, 연회 주방의 막내⁠, 상한 소스⁠, 매 스무 대⁠. 그리고 이 소스를 받은 손님의 이름⁠.

“⁠대공비 마마셨습니다⁠. 공녀의 어머님이시지요⁠. 마마는 그 연회 뒤 북부로 돌아오셔서 한 달 만에 같은 저주로 가셨습니다⁠. 그 마지막 접시를 낸 손이 지금 공녀의 국을 끓이고 있습니다⁠.⁠”

엘리시아는 재상을 보지 않았다⁠. 요리사를 봤다⁠. 요리사는 문간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부정하지 않았다⁠. 재상의 손이 앞치마 자락을 쥐었다가 놓았다⁠.

어머니가 북부로 돌아와 은대야를 끌어안던 겨울을 엘리시아는 기억했다⁠. 열두 살이었다⁠. 대야에 검은 서리가 피었고⁠, 사제들이 노래를 불렀다⁠. 엘리시아는 이 노래를 지금도 끝까지 부를 수 있었다⁠.

“⁠알고 왔어요⁠?⁠” 엘리시아가 물었다⁠.

2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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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필깎이2026.10.27· 2화

    손끝에 성에가 끼는 게 공녀의 저주 증상이에요?

    • 소예담작가2026.10.27

      증상 가운데 하나예요. 요리사는 그걸 보고 음식 온도부터 바꿔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