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5,537자)

왕명

저주받은 공녀의 전속 요리사 · 소예담

사자의 목소리는 안뜰 벽을 두 번 울리고 끝났다⁠. 엘리시아는 계단 위에서 이 끝을 들었다⁠. 공녀가 혼담을 받으면 왕도는 북부로 가는 곡식과 소금의 길을 다시 연다⁠. 혼례의 은혜로 대공비 마마의 일로 내린 체포 명은 거둔다⁠. 공녀가 이 달 안에 왕도에 닿지 않으면 북부는 왕명을 두 번 거역한 땅이 되고⁠, 봄에 왕의 군대가 고개를 넘는다⁠.

아버지가 계단을 내려갔다⁠. 사자 앞에 서서 두루마리를 내려다봤다⁠. 아버지의 손이 두루마리로 갔다⁠. 찢으려는 손이었다⁠. 엘리시아가 그보다 먼저 아버지의 소매를 잡았다⁠.

“⁠사흘 주세요⁠.⁠” 엘리시아가 사자에게 말했다⁠. “⁠북부 법으로는 혼담에 사흘을 생각하고 답해요⁠.⁠”

사자가 재상을 봤다⁠. 재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흘이면 충분하지요⁠, 공녀⁠.⁠”

엘리시아는 아버지의 소매를 놓지 않았다⁠. 안뜰 저편 썰매 위에서 요리사가 엘리시아를 보고 있었다⁠. 썰매에는 참나무 통 셋이 실려 있었고⁠, 이 옆 말 위에 털모자를 빼앗긴 상단 행수가 묶여 있었다⁠. 요리사의 얼굴이 눈바람에 거칠게 터 있었다⁠.

*

밤에 대전에 가신들이 모였다⁠. 탁자 한가운데 고갯길에서 가져온 통 셋이 놓였다⁠. 서쪽 영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받으십시오⁠. 셋째 왕자면 나쁜 혼처가 아니오⁠. 공녀가 왕도에 계시면 왕도는 북부를 굶기지 못하오⁠. 서쪽 골짜기 마을에선 벌써 쥐를 잡아먹소⁠.⁠”

“⁠얼음골 우물에서 오늘 첫 솥이 끓었소⁠.⁠” 얼음골 영주가 말했다⁠. 손등의 동상 자국이 등잔 불빛에 검게 보였다⁠. “⁠소금 한 자루가 나왔지⁠. 쉰 해 묵은 우물에서 한 자루⁠. 열흘이면 열 자루는 나올 거요⁠. 북부 열두만이 먹기엔 모자라오⁠.⁠”

“⁠싸운다⁠.⁠” 아버지가 말했다⁠. “⁠봄에 왕의 군대가 오면 고개에서 막는다⁠. 북부 고개는 백 년 동안 아무도 못 넘었다⁠.⁠”

“⁠백 년 동안 왕도가 북부를 칠 이유가 없었소⁠!⁠” 서쪽 영주가 외쳤다⁠.

엘리시아는 아무 말도 보태지 않았다⁠. 일어나서 탁자 가운데로 걸어갔다⁠. 꿀 통 하나의 마개를 열었다⁠. 꽃 냄새가 대전에 퍼졌다⁠. 고갯길에서 요리사가 맡았다던 이 꽃 냄새였다⁠. 검지를 꿀에 담갔다⁠.

판정 날 이후로 엘리시아의 서리는 날마다 더 굵어졌다⁠. 오늘 아침엔 세숫대야 물을 손끝 하나로 바닥까지 얼렸다⁠. 꿀 속에 담근 손끝이 시려 왔고⁠, 곧 서리가 꿀 위로 번졌다⁠. 검었다⁠. 검은 가지가 꿀 표면을 덮고 통 가장자리를 넘어 탁자 위로 흘러내렸다⁠. 꿀이 쩍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두 번째 꿀 통⁠. 검었다⁠. 세 번째 기름 통⁠. 검은 서리가 통 안을 다 채우고 마개 구멍으로 솟아올랐다⁠.

대전이 조용했다⁠. 엘리시아가 손가락을 거두었다⁠. 손끝이 하얗게 질려 아렸다⁠. 얼음골 영주가 의자에서 반쯤 일어나 통 안을 들여다봤다⁠. 쉰 해 동안 소금 우물을 덮어 두고 왕도 소금을 사 먹은 사람의 얼굴이 천천히 굳었다⁠.

“⁠이게 혼례 꿀이에요⁠.⁠” 엘리시아가 말했다⁠. “⁠내가 왕도에 가면 혼례 연회에서 이걸 먹어요⁠. 그리고 왕도 사람들 앞에서 검은 서리를 토하겠죠⁠. 북부 공녀는 판정을 받고도 저주받은 몸이었다고⁠. 북부 판정은 엉터리였다고⁠.⁠” 엘리시아가 서쪽 영주를 봤다⁠. “⁠그러면 왕도는 북부를 굶길 필요도 없어요⁠. 후계가 없는 땅은 왕이 정하니까요⁠.⁠”

서쪽 영주의 입이 닫혔다⁠.

“⁠그래서 가요⁠.⁠” 엘리시아가 말했다⁠. “⁠이 통하고 행수를 데리고⁠. 혼담을 받는 척 왕도 성문을 넘어서 왕 앞에 이걸 놓을 거예요⁠. 왕궁 연회장에서⁠, 재상 앞에서⁠.⁠”

“⁠왕도는⁠.⁠” 아버지가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네 어미가 죽은 곳이다⁠.⁠”

“⁠그러니까 가요⁠. 어머니가 무얼 먹었는지 왕도 사람들 앞에서 말해야죠⁠.⁠”

아버지가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아버지는 딸을 오래 봤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대전을 나갔다⁠. 문이 닫히지 않았다⁠. 아버지는 문을 닫지 않고 갔다⁠. 열린 문으로 복도의 찬바람이 들어와 등잔 불꽃을 한쪽으로 눕혔다⁠. 아무도 이 문을 닫으러 가지 않았다⁠.

*

자정 무렵 재상이 주방에 내려왔다⁠. 루치오는 화덕 앞에서 대구 대가리를 손질하고 있었다⁠. 고개에서 돌아와 처음 끓이는 국이었다⁠. 오렌에게 약속한 두 그릇이었다⁠. 재상은 혼자였다⁠. 털망토 대신 남색 실내복 차림이었고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국 냄새가 객실까지 올라오더군⁠.⁠” 재상이 화덕 옆 의자에 앉았다⁠. “⁠한 그릇 주겠나⁠? 첫날 대전에서 먹은 그 국⁠.⁠”

루치오는 국을 떠서 내밀었다⁠. 재상이 받아 한 숟갈 먹었다⁠. 오래 굴렸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북부 대구에 청어 젓국이군⁠. 살레르 소금이 떨어져서⁠.⁠”

“⁠네⁠.⁠”

“⁠그래도 맛있네⁠. 자네는 소금이 없어도 간을 하는 사람이야⁠.⁠” 재상이 숟가락을 그릇에 걸쳤다⁠. “⁠열 해 전 자네 소스도 맛있었지⁠.⁠”

루치오의 손이 멈췄다⁠. 대구 대가리에서 칼이 빠져나왔다⁠.

“⁠그날 연회에서 저도 그 소스를 먹었다는 말씀이세요⁠?⁠”

“⁠주인은 손님 접시를 먼저 맛보는 법일세⁠. 자네가 공녀에게 그러듯이⁠.⁠” 재상이 웃었다⁠. “⁠나는 마력이 없어⁠. 왕도 재상 집안은 대대로 그랬지⁠. 그래서 무엇이든 먹을 수 있었네⁠.⁠”

화덕 불이 탁 소리를 내며 튀었다⁠. 루치오는 칼을 도마에 내려놓았다⁠. 손이 떨리는 것을 재상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마타는요⁠?⁠”

“⁠살아 있네⁠.⁠” 재상이 국을 한 숟갈 더 떴다⁠. “⁠왕도에 데려가 법정에 세우는 대신 내 집 주방에 넣었지⁠. 손이 좋은 사람이라⁠. 아들도 빚 감옥에서 꺼내 주었네⁠. 나는 약속은 지키는 사람이야⁠, 요리사⁠. 마타에게 한 약속도⁠, 대공에게 한 약속도⁠.⁠”

“⁠대공님은 약속을 거두셨는데요⁠.⁠”

“⁠그래서 왕명이 온 거지⁠.⁠”

재상은 국그릇을 다 비우고 일어섰다⁠.

“⁠내일 아침 왕의 사자가 그 통 셋과 행수를 왕도 호송대에 넘기라고 명할 걸세⁠. 고갯길에서 왕도 상단의 짐을 북부 기사가 빼앗았으니⁠, 왕도 법정이 따질 일이지⁠. 대공도 왕의 사자는 못 막아⁠.⁠” 재상이 빈 그릇을 화덕 옆에 내려놓았다⁠. “⁠맛있게 먹었네⁠. 왕도에서도 끓여 주게⁠.⁠”

재상이 나갔다⁠. 루치오는 칼을 쥔 채 오래 서 있었다⁠. 재상이 앉았던 의자에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

엘리시아가 주방에 내려온 것은 그보다 조금 뒤였다⁠. 요리사가 재상의 말을 전했다⁠. 듣고 나서 화덕 옆에 섰다⁠.

“⁠가지 마세요⁠.⁠” 요리사가 말했다⁠.

“⁠가요⁠.⁠”

“⁠통을 빼앗기면 공녀님 손에 남는 건 행수 하나예요⁠. 왕도에선 행수 따위 하루 만에 입이 막혀요⁠. 의관처럼요⁠.⁠” 요리사가 칼을 도마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혼례 연회요⁠. 셋째 왕자 옆에 앉아서 그 과자를 받는 걸 제가 주방에서 굽고 있으라고요⁠?⁠”

“⁠혼례까지 안 가요⁠. 그 전 연회에서 깨요⁠.⁠”

“⁠못 깨면요⁠?⁠”

“⁠그럼 당신이 깨요⁠. 그러라고 데려가는 거예요⁠.⁠” 엘리시아가 루치오의 앞치마 자락을 잡아당겼다⁠. “⁠당신은 내 요리사예요⁠. 아버지가 당신한테 평생 내 국을 끓이라고 했어요⁠. 평생이에요⁠. 왕도에서도⁠.⁠”

요리사가 엘리시아를 내려다봤다⁠. 화가 난 얼굴이었는데 이 밑에서 다른 것이 올라오고 있었다⁠. 루치오는 한숨을 쉬고 이마를 엘리시아의 이마에 댔다⁠. 루치오의 이마는 화덕 열기로 뜨거웠고 엘리시아의 이마는 차가웠다⁠.

“⁠통은 어떻게 해요⁠.⁠”

엘리시아가 주방 구석을 봤다⁠. 청어 통 다섯이 줄지어 서 있었다⁠.

동이 트기 전 주방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레타가 얼음 저장고에서 빈 참나무 통 셋을 꺼내 왔다⁠. 고갯길의 통과 크기가 같았다⁠. 핀이 이 통에 청어 젓국을 국자로 퍼 담았다⁠. 오렌은 옆구리 붕대를 감싸 쥔 채 문간에 서서 코를 막았다⁠. 진짜 통 셋은 얼음 저장고 가장 깊은 곳⁠, 순록 몸통 뒤에 들어갔다⁠. 요리사가 가짜 통의 마개를 고갯길 통에서 뽑아 온 마개로 바꿔 끼웠다⁠. 마개마다 왕도 상단의 낙인이 찍혀 있었다⁠.

“⁠이게 왕도까지 가면⁠.⁠” 그레타가 젓국 묻은 손을 앞치마에 문질렀다⁠. “⁠왕도 법정 냄새가 아주 좋겠구나⁠.⁠”

“⁠삼 주면 더 익어요⁠.⁠” 요리사가 말했다⁠. “⁠살레르에선 그걸 최상품이라고 해요⁠.⁠”

오렌이 코를 막은 채 웃다가 옆구리를 붙잡고 주저앉았다⁠.

*

해 뜨기 직전⁠, 엘리시아는 성벽 위로 올라갔다⁠. 남쪽으로 고갯길이 하얗게 굽이쳐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바람이 털망토 자락을 들어 올렸다⁠. 소매에서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석 달 전 베개 밑에 넣어 둔 것이었다⁠. 아버지 앞으로⁠, 대야를 끌어안고 쓴 것⁠. 끝내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은 이 종이를 펴 보지도 않고 손끝으로 쥐었다⁠. 손끝에서 흰 서리가 번져 종이가 빳빳하게 얼었다⁠. 언 종이를 두 손으로 비틀어 부쉈다⁠. 하얀 조각들이 바람을 타고 고갯길 쪽으로 흩어졌다⁠. 계단에서 무거운 발소리가 올라왔다⁠.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엘리시아 옆에 서서 한동안 고갯길만 봤다⁠.

“⁠네 어미도 왕도 가기 전날 여기 서 있었다⁠.⁠” 아버지가 말했다⁠. “⁠남쪽 소스 맛을 보러 간다고 웃었다⁠.⁠”

엘리시아는 아무 말도 보태지 않았다⁠. 아버지의 손이 성벽 돌 위에 놓여 있었다⁠. 손등의 회색 서리 자국은 다 지워졌다⁠. 아버지가 이 손을 들어 엘리시아의 손 위에 얹었다⁠. 크고 거칠고 따뜻했다⁠. 두 사람의 손끝에서 동시에 서리가 피었다⁠. 흰 서리였다⁠. 두 서리가 성벽 돌 위에서 만나 한 장의 눈꽃이 됐다⁠.

“⁠봄이 오면 기사들을 고개 아래까지 내린다⁠.⁠” 아버지가 말했다⁠. “⁠왕도가 너를 돌려보내지 않으면 내가 데리러 간다⁠. 왕의 군대가 고개를 넘기 전에 내가 먼저 넘는다⁠.⁠”

“⁠아버지⁠.⁠”

“⁠대공 자리는 네 거다⁠. 내가 앉아 있는 건 네가 돌아올 때까지다⁠.⁠” 아버지가 손을 거두었다⁠. 눈꽃이 돌 위에 남았다⁠. “⁠그리고 그 요리사한테 일러라⁠. 평생이라고 한 건 빈말이 아니라고⁠.⁠”

아버지는 이 말만 남기고 계단을 내려갔다⁠. 엘리시아는 성벽 위 눈꽃이 아침 해에 녹을 때까지 거기 서 있었다⁠.

*

아침 대전에 사자와 재상과 가신들이 모였다⁠. 아버지는 대공 자리에 앉아 있었다⁠. 밤을 꼬박 새운 얼굴이었다⁠. 사자가 재상에게 귀엣말을 듣고 말했다⁠.

“⁠고갯길에서 북부 기사가 빼앗은 왕도 상단의 짐 셋과 상단 행수를 왕도 호송대에 넘기시오⁠. 왕의 사자의 명이오⁠.⁠”

엘리시아가 손짓했다⁠. 기사들이 통 셋을 대전으로 굴려 왔다⁠. 마개마다 상단 낙인이 찍혀 있었다⁠. 사자의 시종들이 통을 받아 갔다⁠. 재상은 통을 보지 않았다⁠. 엘리시아를 보고 있었다⁠.

“⁠행수는 제가 데려가요⁠.⁠” 엘리시아가 말했다⁠. “⁠북부 성을 해치려 한 죄인이에요⁠. 북부 후계가 왕 앞에 직접 세울게요⁠. 혼담을 받으러 가는 길이니 사자님도 거절하실 이유가 없겠죠⁠.⁠”

사자가 재상을 봤다⁠. 재상이 잠깐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왕도까지는 스무 날 길이었다⁠. 이 길 위에서 행수 하나쯤 어떻게 될지 아는 얼굴이었다⁠.

엘리시아는 대전 한가운데로 나섰다⁠. 아버지가 엘리시아를 봤다⁠. 아버지를 보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사자에게 말했다⁠.

“⁠왕명을 받겠습니다⁠. 이 달이 가기 전에 왕도에 닿겠습니다⁠.⁠”

가신들이 웅성거렸다⁠. 서쪽 영주가 숨을 내쉬었다⁠. 아버지는 움직이지 않았다⁠.

“⁠단⁠, 하나 청할 게 있어요⁠.⁠” 엘리시아가 대전 문간을 돌아봤다⁠. 요리사가 앞치마 차림으로 서 있었다⁠. “⁠제 전속 요리사를 데려가겠어요⁠. 저는 그 사람 국 말고는 아무것도 못 먹어요⁠. 판정 받기 전에 석 달을 토했거든요⁠. 혼례 날까지 살아 있으려면 그 사람이 있어야 해요⁠.⁠”

재상이 웃었다⁠. 이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물론이지요⁠, 공녀⁠.⁠” 재상이 요리사를 봤다⁠. “⁠왕궁 연회 주방에 그의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열 해 전 그 자리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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