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5,383자)

고갯길의 짐마차

저주받은 공녀의 전속 요리사 · 소예담

“⁠어느 통인지는 제 혀만 알아요⁠.⁠”

루치오는 주방 탁자 위에 고개 지도를 펴 놓은 기사단장에게 말했다⁠. 대공은 탁자 끝에 서 있었고 엘리시아는 이 맞은편에 서 있었다⁠. 화덕 불이 지도 위의 고갯길을 붉게 비췄다⁠. 눈 덮인 산허리를 세 번 굽이쳐 넘는 길이었다⁠.

“⁠기사들이 마차를 통째로 끌고 오면 된다⁠.⁠” 기사단장이 말했다⁠.

“⁠상단 사람들이 들킨 걸 알면 통을 벼랑에 던질 거예요⁠. 다 던지기 전에 독이 든 통을 골라 붙잡아야 해요⁠. 꿀통이면 저도 못 골라요⁠. 기름 통이면 골라요⁠.⁠”

대공이 엘리시아를 봤다⁠. 엘리시아는 아버지를 보지 않고 루치오를 봤다⁠.

“⁠가요⁠.⁠” 엘리시아가 말했다⁠. “⁠나는 못 가니까⁠.⁠”

“⁠저도 갑니다⁠.⁠” 문간에서 오렌이 말했다⁠. 옆구리에 앞치마 천을 칭칭 감았고⁠, 이 위로 피 젖은 허리띠를 다시 맸다⁠. 얼굴이 하얬다⁠.

“⁠기사님은 누워 계셔야죠⁠.⁠”

“⁠공녀님 혼례 꿀이다⁠. 공녀님 입에 들어갈 것은 내가 먼저 먹는다⁠. 아직 검사가 안 끝났다⁠.⁠”

“⁠저도요⁠.⁠” 핀이 오렌 뒤에서 손을 들었다⁠. 손이 떨렸다⁠. “⁠제 어머니가 고개 주막을 하세요⁠. 기사님들 다니는 큰길 말고 나무꾼 길이 있어요⁠. 그 길로 가면 반나절이 빨라요⁠. 마차는 큰길밖에 못 다녀요⁠.⁠”

대공이 핀을 내려다봤다⁠. 핀이 이 시선에 한 발 물러서려다 버텼다⁠.

“⁠가라⁠.⁠” 대공이 말했다⁠. 그리고 루치오에게 덧붙였다⁠. “⁠통만 가져와라⁠. 사람은 산 채로⁠.⁠”

뒷문 마구간에서 말에 오르려는데 엘리시아가 따라 나왔다⁠. 털망토 자락에 지푸라기가 붙어 있었다⁠. 엘리시아가 루치오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 주었다⁠. 작은 은숟가락이었다⁠. 손잡이 끝에 서리 눈꽃이 새겨져 있었고⁠, 숟가락 오목한 자리가 오래 써서 조금 닳아 있었다⁠.

“⁠내가 쓰던 숟가락이에요⁠. 석 달 동안 대야 옆에 놓여 있던 거⁠.⁠” 엘리시아가 말했다⁠. “⁠거기서 뭘 먹든 이걸로 먼저 먹어요⁠. 규칙이니까⁠.⁠”

“⁠고개에서 제가 먹을 건 말린 고기뿐일 텐데요⁠.⁠”

“⁠그럼 말린 고기를 이걸로 떠먹어요⁠.⁠” 엘리시아가 루치오의 털망토 깃을 여며 주었다⁠. 손끝이 닿은 자리에 흰 서리가 잠깐 피었다⁠. “⁠그리고 돌아와서 아침 끓여요⁠. 대구로⁠.⁠”

루치오는 숟가락을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 안에서 숟가락이 차가웠다가 금세 루치오의 체온을 닮아 갔다⁠.

해 질 무렵 성 뒷문으로 말 여덟 필이 나갔다⁠. 기사 다섯⁠, 오렌⁠, 핀⁠, 루치오⁠. 루치오가 말 위에서 돌아보니 성 서쪽 마구간 쪽에서 말 한 필이 큰길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털망토를 두른 사내가 고삐를 바짝 쥐고 있었다⁠. 재상의 하인이었다⁠.

“⁠먼저 가네요⁠.⁠” 루치오가 말했다⁠.

“⁠큰길로⁠.⁠” 핀이 말했다⁠. “⁠우린 나무꾼 길로요⁠.⁠”

*

나무꾼 길은 길이 아니었다⁠. 전나무 사이로 사람 하나 겨우 지나갈 틈이 이어졌고⁠, 눈이 말의 무릎까지 찼다⁠. 가지에 쌓인 눈이 말 등에 쏟아질 때마다 오렌이 신음했다⁠. 달빛이 전나무 꼭대기에만 걸려 있어 아래는 캄캄했다⁠. 핀이 앞장서서 등잔 하나를 들고 갔다⁠. 등잔 불빛이 눈 위에서 노랗게 흔들렸다⁠.

“⁠여기서 어릴 때 버섯 땄어요⁠.⁠” 핀이 말했다⁠. “⁠여름에요⁠. 겨울엔 처음 와요⁠.⁠”

“⁠그럼 길은 아는 거냐⁠?⁠” 오렌이 물었다⁠.

“⁠여름 길은 알아요⁠.⁠”

오렌이 무언가 말하려다 옆구리를 붙잡았다⁠. 루치오가 말을 오렌 곁으로 붙였다⁠. 오렌의 앞치마 붕대에 피가 다시 배어 나오고 있었다⁠. 오렌은 루치오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너 그 국⁠. 판정 날 아침에 끓인다던 거⁠.⁠”

“⁠대구요⁠.⁠”

“⁠그거 오늘 아침에 못 먹었다⁠.⁠”

“⁠돌아가서 끓여 드릴게요⁠.⁠”

“⁠두 그릇이다⁠. 검사는 두 그릇⁠.⁠”

자정이 지나 숲이 끝났다⁠. 눈앞이 갑자기 트이며 고개 꼭대기가 보였다⁠. 큰길이 산허리를 감아 올라와 고개 마루를 넘어가는 자리였다⁠. 길 한쪽은 산벽이었고 다른 쪽은 벼랑이었다⁠. 벼랑 아래로 얼어붙은 개울이 달빛에 하얗게 빛났다⁠. 길 아래쪽⁠, 두 굽이 너머에 등불 넷이 흔들리며 올라오고 있었다⁠. 짐마차 한 대와 말 탄 호위 넷⁠. 그리고 그보다 한 굽이 아래⁠, 말 한 필이 혼자 미친 듯이 달려 올라오고 있었다⁠.

“⁠재상 하인이 따라붙기 전에⁠.⁠” 기사단장이 칼을 뽑았다⁠.

*

기사들이 길 양쪽 바위 뒤에서 뛰쳐나가자 호위 넷이 칼을 뽑았다⁠. 칼날 부딪히는 소리가 고개 마루에 울렸다⁠. 말들이 놀라 앞발을 들었고 눈이 사방으로 튀었다⁠. 짐마차 마부석에서 털모자를 쓴 사내가 일어섰다⁠. 둥근 배⁠, 반지 낀 손가락⁠. 고개 아래에서 보름을 버틴 이 상단 행수였다⁠.

재상의 하인이 이 순간 마지막 굽이를 돌아 올라왔다⁠. 하인이 외쳤다⁠.

“⁠행수⁠! 들켰소⁠! 통을⁠—⁠”

행수는 이 말이 끝나기 전에 움직였다⁠. 마부석에서 뛰어내려 짐칸 끈을 칼로 끊었다⁠. 짐칸에 통 여섯이 묶여 있었다⁠. 행수가 짐칸 뒤쪽 판자를 발로 차서 열었다⁠. 짐마차가 벼랑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통들이 굴러 나왔다⁠.

첫 통이 길 가장자리를 넘어 벼랑 아래로 떨어졌다⁠. 한참 뒤에 아래에서 나무 깨지는 소리가 올라왔다⁠. 두 번째 통이 굴렀다⁠. 루치오가 이 앞으로 몸을 던졌다⁠. 통이 루치오의 가슴에 부딪혔다⁠. 숨이 막혔다⁠. 통을 끌어안은 채 벼랑 끝 눈 위에 쓰러졌다⁠. 다리 한쪽이 허공에 걸렸다⁠.

세 번째 통이 이 옆을 지나 떨어졌다⁠. 네 번째⁠. 핀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와 다섯 번째 통에 매달렸다⁠. 핀의 발이 미끄러졌다⁠. 오렌이 뒤에서 핀의 허리띠를 잡아챘다⁠. 오렌이 옆구리를 붙잡고 무릎을 꿇었는데⁠, 핀의 허리띠를 놓지 않았다⁠. 핀과 통이 벼랑 끝에서 멈췄다⁠. 핀은 통을 끌어안은 채 벼랑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울음인지 웃음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통에 이마를 박았다⁠.

여섯 번째 통은 행수가 직접 밀었다⁠. 기사단장이 행수의 팔을 칼등으로 내리쳤다⁠. 행수가 비명을 지르며 눈 위에 쓰러졌고⁠, 여섯 번째 통은 벼랑 끝에서 반 바퀴 돌다가 멈췄다⁠.

호위들이 칼을 내려놓았다⁠. 재상의 하인은 말머리를 돌려 큰길 아래로 도망쳤다⁠. 기사 하나가 쫓아갔다⁠.

루치오는 벼랑 끝에서 기어 나와 통 셋을 봤다⁠. 붙잡은 것⁠, 핀이 붙잡은 것⁠, 행수가 밀다 만 것⁠. 칼집에서 핀이 빌려준 막내용 칼을 꺼내 첫 통의 마개를 비틀어 땄다⁠. 꽃 냄새가 확 올라왔다⁠. 꿀이었다⁠. 왕비의 꿀과 같은 냄새였다⁠. 손가락으로 찍어 혀에 대 봤다⁠. 단맛이 혀를 덮었고 이 밖엔 아무것도 없었다⁠. 루치오의 혀로는 모르는 통이었다⁠.

두 번째 통도 꿀이었다⁠.

세 번째 통⁠, 행수가 밀다 만 통의 마개를 따자 냄새가 달랐다⁠. 버터를 오래 끓여 맑게 걸러 낸 기름이었다⁠. 정제 버터⁠. 남쪽에서 연회 과자를 구울 때 쓰는 것이었다⁠. 노란 기름이 통 안에서 얼어 반쯤 굳어 있었다⁠. 루치오는 손가락으로 찍어 맛봤다⁠.

버터의 고소함이 혀를 덮었다⁠. 이 고소함이 다 넘어간 뒤 혀뿌리가 얼었다⁠. 식은 쇠와 꿀이 한꺼번에 왔다⁠. 그리고 이 맛 밑에 깔린 버터가 처음 맛보는 것이 아니었다⁠. 풀 냄새가 하나도 없는 남쪽 왕도의 버터였다⁠. 열 해 전 연회 주방에서 루치오가 소스 냄비에 녹이던 바로 이 버터였다⁠.

“⁠이거예요⁠.⁠” 루치오가 말했다⁠.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이 기름이요⁠. 꿀 둘도 같이 가져가요⁠. 공녀님 손끝이면 꿀도 알아요⁠. 지금은 공녀님 서리가 세니까요⁠.⁠”

*

고개 주막은 고개 마루에서 북쪽으로 조금 내려간 자리에 있었다⁠. 통나무로 지은 집이었고 굴뚝에서 연기가 올랐다⁠. 문을 열고 나온 여자가 핀을 보자마자 국자를 떨어뜨렸다⁠. 핀의 어머니였다⁠.

행수는 주막 아궁이 앞 기둥에 묶였다⁠. 기사들이 행수의 털모자와 반지를 빼앗았다⁠. 행수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기사단장이 칼등으로 위협해도 다물었다⁠. 루치오는 주막 부엌을 빌렸다⁠.

“⁠말 안 할 거예요⁠?⁠” 루치오가 아궁이에 냄비를 올리며 물었다⁠.

“⁠나는 상인이네⁠. 상인은 짐 주인 이름을 안 팔아⁠.⁠”

루치오는 고개를 끄덕이고 칼을 들었다⁠. 주막 부엌에 걸린 말린 송어 한 마리⁠, 핀의 어머니가 내준 보리 한 줌⁠, 양파 둘⁠. 그리고 고개 주막 소금 단지의 마지막 소금⁠. 송어 뼈를 바르고 대가리를 반으로 갈라 냄비에 넣었다⁠. 양파를 굵게 썰어 기름 없는 냄비 바닥에 눌러 태웠다⁠. 단내와 탄내가 섞여 올라왔다⁠. 물을 붓자 치익 소리와 함께 김이 천장까지 올라갔다⁠.

행수의 코가 움찔했다⁠. 루치오는 이것을 봤다⁠.

“⁠상단은 고개 아래 마을에서 보름을 기다렸죠⁠. 그동안 뭐 드셨어요⁠?⁠”

“⁠말린 고기와 비스킷이네⁠.⁠”

“⁠보름 동안이요⁠?⁠”

행수가 침을 삼켰다⁠. 국이 끓기 시작했다⁠. 송어 대가리에서 우러난 국물이 뽀얗게 변했다⁠. 루치오는 보리를 넣고 불을 줄였다⁠. 소금을 손가락 세 개로 집어 넣었다⁠. 국자로 떠서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행수 코앞에서 이 국자를 천천히 저었다⁠.

“⁠말하면 한 그릇이에요⁠. 두 번째 그릇은 더 말하면요⁠.⁠”

“⁠이건 고문이야⁠.⁠”

“⁠네⁠.⁠”

행수가 오래 버티지 못했다⁠. 첫 그릇 앞에서 통이 어디서 채워졌는지 말했다⁠. 왕도 재상 집 뒤뜰의 약방⁠. 재상 집안이 대대로 의원을 두고 약을 짓는 곳이었고⁠, 이 약방 문은 재상의 시종장이 열었다⁠. 두 번째 그릇 앞에서는 이 통이 무엇에 쓰일 것인지 말했다⁠.

“⁠왕도에서 사자가 떠났네⁠. 우리보다 하루 늦게⁠. 왕의 금빛 사자 깃발을 들고⁠.⁠” 행수가 국그릇을 핥았다⁠. “⁠공녀를 셋째 왕자의 배필로 부르는 왕명이야⁠. 혼담을 받으면 곡식 길을 열어 준다는⁠. 혼례 연회는 왕도에서 열리고⁠, 이 기름은 그 연회 과자에 들어가지⁠. 왕궁 연회 주방에도 같은 통이 있네⁠. 나는 이 통을 북부 성에 넘기고⁠, 공녀가 왕도까지 내려가는 길에 먹을 과자를 굽게 하라는 말만 들었어⁠.⁠”

루치오는 국자를 내려놓았다⁠.

“⁠북부 성에 이 통을 받을 사람은요⁠?⁠”

“⁠집사장이었지⁠.⁠” 행수가 빈 그릇을 내밀었다⁠. “⁠한 그릇 더 되나⁠?⁠”

*

이튿날 해 질 무렵 이들은 성에 닿았다⁠. 기사들이 행수를 말에 묶었고 통 셋은 썰매에 실었다⁠. 오렌은 말 위에서 반쯤 졸았고⁠, 핀이 이 고삐를 잡고 걸었다⁠. 핀의 어머니가 싸 준 보리빵이 핀의 품에서 온기를 냈다⁠.

성문이 보이는 언덕을 넘었을 때 루치오는 말을 세웠다⁠.

성문 망루 위에 깃발 둘이 꽂혀 있었다⁠. 하나는 대공가의 서리 눈꽃이었고⁠, 다른 하나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붉은 바탕에 금빛 사자가 왕관을 쓰고 있었다⁠. 성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안뜰에서 나팔 소리가 길게 울렸다⁠.

루치오는 말에 박차를 넣었다⁠. 성문을 지나 안뜰로 들어서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가신들과 기사들과 하인들⁠. 안뜰 한가운데 금빛 사자 깃발을 든 기수 둘이 섰고⁠, 이 사이에 붉은 외투를 입은 사내가 두루마리를 펴 들고 있었다⁠. 왕의 사자였다⁠. 사자 곁에 재상이 서 있었다⁠. 털망토를 단정히 여몄고 손을 앞으로 모았다⁠.

본관 계단 위에 대공이 서 있었고⁠, 이 한 칸 아래에 엘리시아가 서 있었다⁠. 루치오를 봤다⁠. 썰매 위의 통을 봤다⁠. 다시 루치오를 봤다⁠. 엘리시아의 얼굴에 아무 빛도 없었다⁠.

사자가 두루마리를 읽었다⁠. 목소리가 안뜰 벽에 부딪혀 울렸다⁠.

“⁠북부 대공 비요른의 딸⁠, 서리 판정을 받은 후계 엘리시아를 왕국 셋째 왕자의 배필로 정하노니⁠, 공녀는 이 달이 가기 전에 왕도로 내려와⁠—⁠”

13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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