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496자)
칼꽂이의 열쇠
저주받은 공녀의 전속 요리사 · 소예담
복도가 조용했다. 엘리시아의 말이 벽에 부딪혀 돌아오는 것 같았다. 기사단장이 횃불을 든 채 굳었고, 계단참까지 올라온 하인들이 서로의 소매를 잡았다. 엘리시아는 문틀을 짚은 손을 떼지 않았다. 손끝에서 번진 흰 서리가 문틀을 타고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아버지가 움직였다. 기사들 사이를 지나 엘리시아 앞에 섰다. 아버지의 눈이 엘리시아를 내려다봤다. 화가 난 얼굴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재는 얼굴이었다.
“네 입으로 말했다.” 아버지가 말했다.
“네.”
“그럼 네가 지고 가라.” 아버지가 기사단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공녀가 말했다. 칼 내려라.”
기사들이 물러섰다. 재상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엘리시아의 맨발을 보고 눈을 내리깔았다. 점잖은 사람이 민망한 것을 보는 얼굴이었다.
“대공, 공녀의 말씀을 의심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오늘 이 복도에 선 사람이 스물은 됩니다. 해가 뜨면 북부의 공녀가 대공비 마마를 해친 요리사와 밤을 보냈다는 말이 고개를 넘겠지요.” 재상이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공녀의 명예를 지킬 방도는 있습니다. 왕도에.”
“왕도엔 안 가요.” 엘리시아가 말했다.
재상은 웃기만 하고 돌아섰다.
*
해가 뜨기도 전에 말은 대전까지 내려갔다. 아침 대전 탁자에 가신들이 모였는데 아무도 빵에 손을 대지 않았다. 서쪽 영주가 탁자를 주먹으로 쳤다.
“공녀께서 남쪽 요리사를 침소에 들이셨소! 판정을 받은 그날 밤에! 북부 후계가!”
“들인 게 아니라 끌고 올라갔다더군요.” 얼음골 영주가 중얼거렸다.
“그게 더 나쁘오!”
대전 옆문이 쾅 열렸다. 그레타가 국자를 들고 들어왔다. 앞치마에 밀가루가 묻었고 뺨이 벌겠다.
“그 항구 놈은 코를 곤다.” 그레타가 대전 한가운데 서서 말했다. “주방 다락에서 자면 내 침상까지 들린다. 지난 스무 날 동안 한 번도 안 빼고 들렸다. 어젯밤엔 안 들렸어. 대신 탑 꼭대기에서 들리더라. 새벽까지.” 그레타가 국자로 서쪽 영주를 가리켰다. “그러니까 그놈은 밤새 탑에 있었다. 감옥에 갈 틈이 없었어. 할 말 있으면 나한테 해.”
서쪽 영주가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대전 문간에 오렌이 서 있었다. 오렌은 공녀의 방 문 앞에서 밤을 새우는 기사였다. 가신들의 눈이 그에게로 갔다. 오렌의 얼굴이 천천히 붉어졌다.
“기사 오렌.” 아버지가 말했다. “말해라.”
“문 앞에 있었습니다.” 오렌이 앞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요리사는 들어갔고, 새벽까지 나오지 않았습니다.” 오렌이 침을 삼켰다. “그리고 코를 골았습니다. 그것뿐입니다. 그것만 들었습니다.”
얼음골 영주가 빵을 집어 들었다. 서쪽 영주는 아무것도 집지 않았다. 아버지는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는데, 잔 너머의 수염이 한 번 들썩였다.
*
엘리시아는 아침을 먹지 않고 주방으로 내려갔다. 요리사와 오렌과 그레타가 칼꽂이 앞에 서 있었다. 벽에 박힌 참나무 장이었고 문에 쇠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자물쇠는 잠겨 있었다. 안에 칼 서른 자루가 꽂혀 있었는데 한 자리만 비어 있었다. 손잡이에 물고기가 새겨진 칼이 꽂혀 있던 자리였다.
“어젯밤 내가 잠갔다.” 그레타가 목에 건 열쇠를 들어 보였다. 가죽 끈이 땀에 절어 검었다. “이건 내 목에서 안 떨어진다. 목욕할 때도.”
“아침에 열어 보셨어요?”
“기사단장이 칼을 들고 오기 전엔 안 열었다. 열어 보니 잠겨 있었고, 저 자리가 비어 있었다.”
엘리시아는 비어 있는 자리를 봤다. 잠긴 칼꽂이에서 칼 한 자루가 빠져나갔고, 칼꽂이는 다시 잠겼다. 열쇠를 가진 사람이 열고, 꺼내고, 다시 잠갔다.
“열쇠는 둘이죠.” 엘리시아가 말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증거가 없어요.” 요리사가 말했다. 요리사는 이 비어 있는 자리를 오래 보고 있었다. “열쇠가 둘이라는 것만으론 아무것도 안 돼요. 집사장은 자기 열쇠가 밤새 방 못에 걸려 있었다고 하겠죠. 누가 훔쳐 갔을 수도 있다고.”
“그럼 뭘로 해요?”
“의관을 봐야겠어요.”
요리사는 그렇게 말하고도 한동안 이 빈자리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엘리시아가 루치오의 소매를 잡아당기자 루치오가 말했다.
“살레르에서 처음 산 칼이에요. 왕도에서 쫓겨나 걸어 내려가서, 생선 가게 뒤에서 대가리 자르는 일을 석 달 하고 받은 돈으로요. 그 뒤로 열 해 동안 다른 사람 손에 안 쥐여 줬어요. 국밥집 문 닫을 때도 그것만 챙겼고요.” 요리사가 빈자리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그 칼로 생선 말고 다른 걸 벤 적이 없어요.”
엘리시아는 루치오의 손가락 끝을 봤다. 손톱 밑에 청어 비늘 하나가 끼어 있었다.
“찾아서 다시 생선 자르게 해요.” 엘리시아가 말했다. “가요.”
*
의관은 객실 아래 방 짚 침상에 누워 있었다. 기사들이 칼을 뽑아 간 뒤 가슴에 천을 덮어 두었다. 방 안은 추웠고 포도주 저장고였던 시절의 시큼한 냄새가 벽에 배어 있었다. 침상 옆에 루치오가 어젯밤 건넨 국그릇이 비어 있었다. 숟가락이 그릇 안에 걸쳐져 있었다.
루치오는 의관 곁에 무릎을 꿇었다. 엘리시아가 문간에 섰다. 오렌이 엘리시아 앞을 반쯤 가렸다. 루치오는 의관의 얼굴에 몸을 숙였다. 죽은 사람의 입 가까이에 코를 대는 것은 처음이었다. 숨을 들이쉬었다.
보리, 순록 뼈. 루치오가 끓인 국 냄새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리고 이 위에 다른 냄새가 덮여 있었다. 독하고 맑고, 소나무 숲을 씹은 것 같은 쓴 향. 혀가 먼저 기억했다. 노간주 열매로 담근 독주였다.
“술을 마셨어요.” 루치오가 말했다. “국을 먹은 다음에. 노간주 술이에요.”
“감옥에 술은 없어요.” 엘리시아가 말했다.
“그러니까 누가 들고 왔죠. 술을 따라 주고, 마시게 하고.”
“노간주 술.” 엘리시아 뒤에서 그레타가 말했다. 따라 내려와 있었다. “그건 이 성에서 대공 나리만 드신다. 남쪽 독주는 안 드시고 그것만. 집사장 찬장에 넣어 두고 그놈이 열쇠로 지킨다. 서른 해 동안 그랬다. 나도 한 방울 못 얻어 마셨어.”
오렌이 문밖을 돌아봤다. 어젯밤 이 문 앞을 지킨 기사는 새벽까지 한 번도 깨지 않았다고 했다. 기사단장에게 불려 가 무릎을 꿇은 이 기사의 입에서도 같은 소나무 냄새가 났다고 오렌이 말했다. 자정 무렵 누가 추운 밤 고생한다며 잔 하나를 건넸는데, 등잔을 등지고 서 있어 얼굴은 못 봤다고 했다.
루치오가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침상 아래 짚 사이에서 무언가가 반짝였다. 허리를 숙여 집어 올렸다. 작은 주석 잔이었다. 잔 바닥에 노간주 술이 한 방울 남아 있었고, 잔 옆면에 대공가의 문장이 찍혀 있었다. 서리 눈꽃.
엘리시아가 이 잔을 받아 들었다. 손끝에 닿자 잔 표면에 흰 서리가 피었다.
“아버지 잔이에요.”
*
집사장의 열쇠 방은 성 이층 끝에 있었다. 벽 한 면이 못으로 덮여 있었고 못마다 열쇠가 하나씩 걸려 있었다. 찬장이 둘 있었다. 엘리시아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집사장이 탁자 앞에서 일어섰다. 아침 내내 가신들의 방을 돌며 무언가를 전하고 온 얼굴이었다.
“공녀.”
엘리시아는 주석 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아버지 노간주 술 찬장 열어 줘요.”
집사장의 눈이 잔에서 멈췄다. 한 박자였다. 그리고 집사장은 웃으며 허리띠의 열쇠 하나를 골라 찬장을 열었다. 찬장 안에 흙빛 병 다섯 개가 나란히 서 있었다. 그중 하나의 마개가 덜 닫혀 있었고, 이 앞자리에 잔 하나가 빠진 동그란 자국이 먼지 위에 남아 있었다. 잔 다섯 개 자리에 넷만 있었다.
“이 잔은.” 집사장이 말했다. “어제 판정 잔치 때 누가 가져갔겠지요. 대공 전하 잔이니 아무나—”
“제가 들었어요.”
문간에서 목소리가 났다. 핀이었다. 요리사의 뒤에 숨어 있다가 앞으로 나온 것이었다. 핀의 무릎이 떨리고 있었다.
“어젯밤 오줌 누러 다락에서 내려왔다가요. 주방이 깜깜했는데 칼꽂이 쪽에 등잔 불빛이 있었어요. 누군지는 못 봤어요. 근데.” 핀이 집사장의 허리띠를 봤다. “열쇠 소리가 났어요. 짤랑짤랑. 많이요. 주방장님은 열쇠 하나만 목에 거세요. 그렇게 많이 짤랑거리는 건 이 성에 하나밖에 없어요.”
방 안이 조용해졌다. 집사장의 얼굴에서 웃음이 그대로 굳었다. 집사장은 핀을 봤다. 서른 해 동안 이 성의 모든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지켜본 눈이었다.
집사장이 움직였다. 생각보다 빨랐다. 찬장 문 안쪽에 걸린 과일칼을 뽑았다. 그리고 문간의 핀에게 달려들어 핀의 목을 팔로 감았다. 칼끝이 핀의 턱 밑에 닿았다. 핀이 비명도 못 지르고 굳었다.
“비키시오.” 집사장이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공녀, 비키시오. 나는 고개 너머로 가야 합니다. 재상 각하는 나를 의관처럼 버리실 거요. 나는 그 술을 따라 주고 나서 알았소. 다음은 나라는 걸.”
“핀을 놔요.”
“고개까지만. 고개에서 놓아주겠소.”
오렌이 엘리시아 옆을 스쳐 지나갔다. 칼을 뽑지 않았다. 맨손으로 집사장에게 몸을 던졌다. 집사장이 핀을 밀치며 칼을 휘둘렀다. 칼끝이 오렌의 옆구리로 들어갔다. 오렌이 신음했는데, 멈추지 않았다. 칼에 찔린 채 집사장을 껴안고 벽으로 밀어붙였다. 벽에 걸린 열쇠 수십 개가 한꺼번에 흔들려 비 오듯 짤랑거렸다. 오렌의 팔이 집사장의 칼 든 손목을 벽에 짓눌렀다. 과일칼이 바닥에 떨어졌다.
요리사가 칼을 발로 차서 멀리 밀어냈다. 핀이 바닥에 주저앉아 울었다. 오렌은 집사장을 벽에 누른 채 숨을 몰아쉬었다. 오렌의 옆구리에서 피가 흘러 허리띠를 적셨다. 허리띠에 매달린 금 간 소금 단지에도 피가 튀었다.
“기사님.” 요리사가 오렌의 옆구리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검사.” 오렌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끝났다.”
*
그레타가 앞치마를 찢어 오렌의 옆구리를 동였다. 오렌은 벽에 기대 앉아 이를 악물었는데, 그레타의 손이 매듭을 조일 때마다 신음 대신 욕을 했다. 북부 기사가 쓰는 욕이 아니라 항구 뒷골목 욕이었다. 요리사가 놀란 얼굴로 봤다.
“어디서 배웠어요?”
“주방에서. 네 놈이 날마다 했다.”
오렌이 피 젖은 허리띠를 내려다봤다. 과일칼이 들어간 자리에 가죽이 찢겨 구멍이 하나 나 있었다. 오렌이 이 구멍을 손가락으로 만졌다.
“구멍이 하나 더 생겼군.”
핀이 울다가 웃었다. 그레타는 웃지 않고 오렌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한 대 때렸다. 아주 살살이었다.
*
기사들이 집사장을 꿇어앉혔다. 아버지가 열쇠 방에 들어왔고, 뒤이어 재상이 들어왔다. 재상은 방을 한 번 둘러보고 피 묻은 오렌을 보고 꿇어앉은 집사장을 봤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대공, 이 성의 집사장이 무슨 짓을 했든 왕도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북부 일이니 북부가 다루시지요.”
집사장이 고개를 들었다. 재상을 봤다. 재상은 집사장을 보지 않았다. 의관을 버릴 때와 같았다. 집사장의 입술이 비틀렸다. 웃음이었다. 재상이 아니라 엘리시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공녀.” 집사장이 말했다. “오늘 밤 고개를 넘는 짐마차가 하나 있습니다. 상단의 마지막 마차입니다. 곡식 길이 닫혀도 그 마차는 넘어옵니다. 왕도에서 꿀을 싣고 옵니다.” 집사장이 재상을 곁눈질했다. “공녀의 혼례에 쓸 꿀입니다.”
재상의 얼굴이 처음으로 굳었다. 아주 잠깐이었다.
엘리시아는 집사장을 내려다봤다.
“무슨 혼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