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379자)

거절의 밤

저주받은 공녀의 전속 요리사 · 소예담

대공의 칼은 칼집을 반 뼘 나오다 멈췄다⁠. 루치오는 신전 벽 아래 무릎을 꿇은 채 이 칼날을 봤다⁠. 둥근 방에 깔린 흰 서리가 칼날에 비쳐 칼이 얼음처럼 보였다⁠. 대공은 칼을 이 이상 뽑지 않았다⁠. 대신 재상의 손에 들린 양피지를 오래 내려다봤다⁠.

“⁠왕명은 받았다⁠.⁠” 대공이 말했다⁠. “⁠저놈은 안 보낸다⁠.⁠”

“⁠대공⁠, 그건 받지 않으셨다는 말씀입니다⁠.⁠”

“⁠내 아내를 죽인 손은 저놈이 아니다⁠.⁠” 대공이 칼을 칼집에 도로 밀어 넣었다⁠. 쇠가 가죽을 긁는 소리가 끝까지 났다⁠. “⁠그 연회를 연 집이 어디였는지 북부 사람들은 다 안다⁠. 왕도 법정에 서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 집 주인이다⁠.⁠”

재상의 얼굴은 변하지 않았다⁠. 양피지를 천천히 말아 붉은 끈으로 묶었다⁠.

“⁠그렇다면 북부는 왕명을 거역한 땅이 됩니다⁠. 오늘부로 왕도의 곡식과 소금은 북부 어느 고개도 넘지 않습니다⁠. 상단 열두 대만이 아니라⁠, 봄까지 올라올 마차 전부입니다⁠.⁠” 재상이 가신들을 한 바퀴 둘러봤다⁠. 서쪽 영주가 눈을 피했다⁠. “⁠그리고 저는 왕의 사자로서 왕명이 행해질 때까지 이 땅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그것도 왕국의 법입니다⁠.⁠”

“⁠있어라⁠.⁠” 대공이 말했다⁠. “⁠내 집에서 같이 굶어 봐라⁠.⁠”

서쪽 영주가 앞으로 나섰다⁠. 얼굴이 붉었다⁠.

“⁠전하⁠, 서쪽 골짜기 마을들은 왕도 밀로 겨울을 납니다⁠. 요리사 하나를⁠—⁠”

“⁠얼음골 소금 우물에 장작을 보냈다⁠.⁠” 대공이 서쪽 영주를 보지 않고 말했다⁠. “⁠첫 솥이 끓으면 서쪽에도 떼어 준다⁠. 밀은 기사단 창고를 연다⁠. 그래도 모자라면 내 몫부터 줄인다⁠.⁠” 대공이 그제야 서쪽 영주를 봤다⁠. “⁠네 몫은 그다음이다⁠.⁠”

서쪽 영주가 입을 다물었다⁠.

대공이 돌아섰다⁠. 사제들이 루치오의 손목을 풀었다⁠. 밧줄이 쓸린 자리가 붉게 부어 있었다⁠. 대공은 둥근 방을 나가다 루치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루치오를 내려다보지는 않았다⁠. 문 쪽을 보며 말했다⁠.

“⁠내 아내 접시값이다⁠. 내 딸 국으로 갚아라⁠. 평생⁠.⁠”

대공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나갔다⁠.

*

판정 잔치는 소금 없이 치러야 했다⁠. 창고에는 열나흘 치가 남았고⁠, 그레타는 저울을 앞에 놓고 한 숟갈도 더 내주지 않았다⁠. 루치오는 청어 통을 세 개 더 열었다⁠. 청어 젓국으로 국 간을 하고⁠, 청어 살을 보리 가루에 굴려 튀기고⁠, 순록 뼈를 하루 종일 고아 뽀얀 국물을 냈다⁠. 얼음골에서 얼음 낚시로 잡아 온 송어는 소금 대신 월귤 즙에 재웠다가 숯불에 구웠다⁠. 신맛이 송어 기름을 잡아 주었다⁠. 공녀의 그릇만은 따로⁠, 버터 없이⁠, 루치오의 손으로 끓였다⁠.

대전이 가득 찼다⁠. 가신들과 기사들과 성의 하인들까지 긴 탁자에 붙어 앉았다⁠. 튀긴 청어 접시가 들어가자 기사들이 손부터 뻗었다⁠. 아흐레 전 청어 눈과 눈싸움을 하던 이 기사들이었다⁠. 서쪽 영주는 이번엔 대가리부터 씹었다⁠. 씹으며 옆자리 얼음골 영주에게 말했다⁠.

“⁠대가리가 제일 고소하오⁠. 지난번엔 내가 몰랐소⁠.⁠”

“⁠지난번에 영주께서 대가리를 열 개나 쌓아 두셨지요⁠.⁠”

“⁠그건 버린 게 아니라 아껴 둔 거요⁠.⁠”

오렌은 탁자 끝에서 허리띠를 풀어 들여다보고 있었다⁠. 마지막 구멍까지 다 썼다⁠. 핀이 주방에서 송곳을 들고 뛰어와 오렌의 허리띠에 새 구멍을 뚫어 주었다⁠. 기사들이 박수를 쳤다⁠. 오렌은 얼굴이 빨개진 채 새 구멍에 버클을 끼우고 청어를 하나 더 집었다⁠.

“⁠검사다⁠.⁠”

“⁠기사님⁠, 판정 끝났어요⁠.⁠” 핀이 말했다⁠.

“⁠공녀님은 아직 드신다⁠. 그러니 검사도 아직이다⁠.⁠”

재상은 대공 오른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왕의 사자 자리였다⁠. 순록 뼈 국을 한 그릇 비우고 송어 구이를 발라 먹었다⁠. 맛있게 먹었다⁠. 루치오가 공녀의 그릇을 들고 이 곁을 지나가자 재상이 루치오를 불러 세웠다⁠.

“⁠이 성에서 내가 마음 놓고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자네 국뿐이군⁠.⁠” 재상이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얄궂지 않나⁠?⁠”

“⁠각하 국에는 버터 안 넣었습니다⁠.⁠”

“⁠알고 있네⁠. 그래서 맛있는 거야⁠.⁠” 재상이 웃었다⁠. “⁠왕도로 가면 연회 주방에 자네 자리를 하나 만들어 주지⁠. 열 해 전 자네 자리 말일세⁠.⁠”

루치오는 대답하지 않고 공녀의 자리로 갔다⁠. 엘리시아의 숟가락으로 국을 한 숟갈 떠먹고 그릇을 내려놓았다⁠. 엘리시아가 그릇을 받으며 탁자 밑으로 루치오의 손가락 끝을 잠깐 쥐었다가 놓았다⁠.

잔치가 끝나고 루치오는 늘 하던 대로 칼을 씻어 칼꽂이에 꽂았다⁠. 살레르에서 가져온 생선 뼈칼이었다⁠. 손잡이에 작은 물고기가 새겨져 있었다⁠. 그레타가 칼꽂이 문을 닫고 목에 건 열쇠로 잠갔다⁠. 칼꽂이 열쇠는 그레타의 목에 하나⁠, 집사장의 허리에 하나가 있었다⁠.

칼을 꽂고 나서 루치오는 국 한 그릇을 들고 객실 아래로 내려갔다⁠. 북부 감옥이라고 불렀지만 원래는 포도주 저장고였던 방이었다⁠. 문 앞에 기사 하나가 섰고⁠, 쇠창살 달린 작은 창으로 등잔 불빛이 새어 나왔다⁠. 의관은 짚을 깐 침상에 앉아 안경을 손에 쥐고 있었다⁠. 안경알 하나에 금이 가 있었다⁠.

“⁠국입니다⁠. 보리하고 순록 뼈요⁠. 버터는 없습니다⁠.⁠”

의관이 창살 너머로 그릇을 받았다⁠. 받고서 한참 들여다봤다⁠.

“⁠자네가 먼저 먹지 않나⁠?⁠”

“⁠의관님은 마력이 있으시니까요⁠. 제가 먹어도 소용없죠⁠. 그래도 원하시면 먹을게요⁠.⁠”

의관이 웃었다⁠. 웃음 끝이 떨렸다⁠. 국을 한 숟갈 떠서 입에 넣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릇을 무릎에 내려놓았다⁠.

“⁠각하는 나를 숨 한 번에 버렸네⁠.⁠” 의관이 말했다⁠. “⁠그 기름 상자는 내가 꾸린 게 아니야⁠. 나는 왕도 대신전 문 앞에서 받아 마차에 실었을 뿐이지⁠. 버터에 넣으라고 마타에게 준 대롱도⁠, 꿀 통도 다 그랬어⁠. 나는 나르는 사람이었네⁠. 열 해 전에도 나르는 사람이 있었겠지⁠.⁠”

“⁠누가 줬습니까⁠?⁠”

의관이 창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등잔 불빛이 금 간 안경알에 걸렸다⁠.

“⁠내일 아침 대공 앞에서 말하겠네⁠. 왕도의 어느 약방에서 그것이 나오는지⁠, 누가 그 약방 문을 여는지⁠. 대신 내 목숨을 대공이 맡아 주셔야 해⁠. 북부 감옥이 왕도 감옥보다는 오래 살 수 있을 테니⁠.⁠” 의관이 국그릇을 다시 들었다⁠. “⁠그리고 요리사⁠, 이 국은 맛있군⁠. 왕도 의원 노릇 스무 해에 이런 걸 처음 먹어 보네⁠.⁠”

루치오는 빈 그릇을 내일 아침 가지러 오겠다고 하고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 위에서 집사장과 마주쳤다⁠. 집사장은 등잔을 들고 객실 복도 쪽으로 가는 길이었다⁠. 둘은 말없이 비켜 지나갔다⁠. 열쇠 소리가 등 뒤에서 멀어졌다⁠.

*

엘리시아는 주방 문을 열었다⁠. 화덕 하나만 살아 있었고 요리사는 이 앞에 쭈그려 앉아 내일 아침 보리를 고르고 있었다⁠. 들어오는 소리에 요리사가 고개를 들었다⁠. 혀끝이 아직 조금 부어 말이 둥글었다⁠.

“⁠배고프세요⁠?⁠”

“⁠아뇨⁠.⁠”

“⁠그럼요⁠?⁠”

엘리시아는 대답하지 않고 루치오의 손에서 보리 바가지를 빼앗아 화덕 옆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루치오의 손을 잡아끌었다⁠. 루치오가 일어섰다⁠. 손바닥이 거칠었고 따뜻했다⁠. 청어와 월귤과 숯 냄새가 났다⁠. 이 손을 놓지 않고 찬장 계단을 올랐다⁠. 일흔두 칸⁠. 첫날 루치오가 국을 들고 뛰어 올라온 계단이었다⁠. 오늘은 루치오를 끌고 올라갔다⁠. 층계참의 데움 화덕은 꺼져 있었다⁠.

탑 방 벽난로에 불이 남아 있었다⁠. 은대야는 치워지고 없었다⁠. 엘리시아가 문을 닫고 빗장을 걸었다⁠. 빗장 소리에 요리사가 엘리시아를 봤다⁠.

“⁠공녀님⁠.⁠”

“⁠엘리시아요⁠.⁠”

루치오가 이 이름을 한 번 입 안에서 굴렸다⁠. 처음 보는 맛을 보는 사람처럼⁠. 그리고 불렀다⁠. 엘리시아는 이 소리를 들으며 루치오의 앞치마 끈을 풀었다⁠. 매듭이 단단해 손톱이 두 번 미끄러졌다⁠. 루치오가 웃으며 자기 손으로 풀었다⁠. 앞치마가 바닥에 떨어졌다⁠.

엘리시아가 루치오의 셔츠 안으로 손을 넣었다⁠. 등이었다⁠. 손끝에 오래된 흉터가 걸렸다⁠. 한 줄⁠, 두 줄⁠. 엘리시아는 이것을 세지 않았다⁠. 손바닥을 이 위에 얹었다⁠. 엘리시아의 손끝에서 서리가 피었다⁠. 흰 서리가 루치오의 등 위에 눈꽃처럼 번졌다가 루치오의 체온에 금세 녹아 물방울이 되어 흘러내렸다⁠. 루치오가 숨을 들이켰다⁠.

“⁠차가워요⁠.⁠”

“⁠참아요⁠. 내 손이 원래 이래요⁠.⁠”

루치오가 엘리시아를 안아 올렸다⁠. 생각보다 힘이 셌다⁠. 침대가 둘의 무게에 낮게 삐걱거렸다⁠. 루치오의 입술이 엘리시아의 목덜미에 닿았다⁠. 이곳은 석 달 동안 은대야 위로 숙여져 있던 자리였다⁠. 루치오는 서두르지 않았다⁠. 국 간을 볼 때처럼 한 번 대고⁠, 기다리고⁠, 다시 댔다⁠. 엘리시아가 웃음을 터뜨리자 루치오도 웃었다⁠. 웃음이 서로의 입 안으로 들어갔다⁠.

벽난로의 장작이 내려앉았다⁠. 창밖에서 눈이 유리를 스쳤다⁠. 엘리시아는 루치오의 어깨를 붙잡았고⁠, 손끝이 닿는 자리마다 서리가 피었다가 녹았다⁠. 녹은 물이 루치오의 피부 위에서 엘리시아의 피부로 흘러왔다⁠. 차갑고 뜨거웠다⁠. 숨이 엉켰다⁠. 루치오의 이름을 불렀다⁠. 루치오는 대답 대신 엘리시아의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서리를 내는 이 손을⁠.

한참 뒤 둘은 이불 속에 나란히 누워 천장을 봤다⁠. 벽난로 불빛이 천장 대들보에서 흔들렸다⁠. 엘리시아의 머리카락이 루치오의 팔 위에 흩어져 있었다⁠. 루치오가 말했다⁠.

“⁠아침 국을 아직 안 끓였어요⁠.⁠”

“⁠여기서 그 얘기를 해요⁠?⁠”

“⁠보리를 반만 골랐어요⁠.⁠”

엘리시아가 루치오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루치오가 몸을 비틀었다⁠. 루치오의 가슴에 귀를 댔다⁠. 심장 소리가 느리게⁠, 크게 들렸다⁠. 이 소리를 들으며 석 달 만에 처음으로 대야 생각을 하지 않고 잠들었다⁠.

*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엘리시아는 눈을 떴다⁠. 창밖이 희뿌옜다⁠. 새벽이었다⁠. 두드리는 소리가 다시 났다⁠. 주먹이었다⁠. 여러 개였다⁠.

“⁠공녀님⁠! 문을 여십시오⁠!⁠”

요리사가 먼저 일어나 앉았다⁠. 엘리시아는 루치오의 팔을 잡아 눕히고 혼자 일어나 털망토를 둘렀다⁠. 빗장을 풀고 문을 열었다⁠. 복도에 기사 넷이 서 있었다⁠. 맨 앞은 기사단장이었고 손에 횃불을 들었다⁠. 뒤로 아버지가 털옷 차림으로 서 있었고⁠, 아버지 뒤에 재상이 서 있었다⁠. 재상은 이 새벽에도 털망토를 단정히 여몄다⁠.

“⁠의관이 죽었습니다⁠.⁠” 기사단장이 말했다⁠. “⁠북부 감옥⁠, 객실 아래 방에서⁠. 가슴에 칼이 꽂혀 있었습니다⁠.⁠”

기사단장이 천에 싼 것을 들어 보였다⁠. 천을 젖히자 칼 한 자루가 나왔다⁠. 피가 손잡이까지 말라붙어 있었다⁠. 손잡이에 작은 물고기가 새겨져 있었다⁠.

“⁠요리사의 칼입니다⁠. 요리사를 찾으러 주방에 갔는데 없었습니다⁠. 숙소에도 없었습니다⁠.⁠” 기사단장의 눈이 엘리시아의 어깨 너머 방 안으로 갔다⁠. 침대 위에서 요리사가 셔츠를 집어 들고 있었다⁠. “⁠공녀님⁠, 비켜 주십시오⁠.⁠”

재상이 기사단장 뒤에서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슬픈 얼굴이었다⁠.

“⁠증인이 될 사람이었는데⁠. 안타깝군요⁠.⁠”

엘리시아는 비키지 않았다⁠. 문틀을 한 손으로 짚었다⁠. 손끝에서 흰 서리가 문틀을 따라 번졌다⁠. 아버지를 봤다⁠. 아버지는 엘리시아의 털망토 아래로 드러난 맨발과 방 안의 요리사를 번갈아 봤다⁠. 복도의 기사들도⁠, 재상도⁠, 이 아래 계단참까지 따라 올라온 하인들도 봤다⁠.

“⁠그 사람은⁠.⁠” 엘리시아가 말했다⁠. 목소리가 복도 끝까지 갔다⁠. “⁠밤새 내 방에 있었어요⁠.⁠”

11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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