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454자)

방을 붙인 고양이

십이지에서 빠진 고양이의 도전 · 오달래

연탄은 사과 상자 안에서 눈을 떴다⁠. 바닥에 깔아 둔 헌 솜이불이 밤새 몸 모양대로 꺼져 있었고⁠, 귀 한쪽이 상자 모서리에 접혀 있었다⁠. 판자 틈으로 들어오는 빛이 하얬다⁠. 새벽빛은 저렇게 하얗지 않았다⁠.

“⁠늦었어⁠.⁠”

귀 바로 옆에서 누가 말했다⁠. 이어서 찍⁠, 하고 쥐 소리가 났다⁠. 연탄의 눈동자가 단번에 둥글어지고 엉덩이가 저절로 들썩였다⁠. 상자가 옆으로 넘어갔다⁠. 연탄은 솜이불을 뒤집어쓴 채 장터 바닥으로 굴러 나왔다⁠.

쪼롬이 넘어진 상자 위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사람 모습이었다⁠. 잿빛 저고리에 앞치마를 둘렀고⁠, 앞치마 주머니에서 놋쇠 저울추 두 개가 부딪쳐 달그락거렸다⁠. 쪼롬은 들썩이다 만 연탄의 엉덩이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아직도 못 고쳤네⁠. 이백 살이나 먹고⁠.⁠”

“⁠네가 귀에 대고 그러니까 그렇지⁠.⁠”

연탄도 사람 모습으로 잠들었는데⁠, 바지 뒤로 잿빛 줄무늬 꼬리 하나가 삐져나와 있었다⁠. 놀라면 꼬리부터 나온다⁠. 장터에 사는 신령은 다 그랬다⁠. 장터와 사람 세상에서는 사람 모습과 짐승 모습을 마음대로 오가도 되지만⁠, 마음이 덜컥하면 몸이 먼저 본모습을 내민다⁠. 연탄은 꼬리를 손바닥으로 꾹 눌러 바지 안에 밀어 넣었다⁠.

“⁠저울 종이 벌써 두 번 울렸어⁠. 방 붙인다며⁠? 아버지 나오기 전에⁠.⁠”

연탄은 대답 대신 품을 더듬었다⁠. 접힌 종이가 아직 있었다⁠. 사흘 전 밤⁠, 상자 바닥에서 나온 종이였다⁠. 누가 넣었는지는 몰랐다⁠. 쪼롬은 종이를 힐끗 보고는 모른 척 앞치마 끈을 고쳐 맸다⁠.

*

고양이 집안은 장터 둘레의 틈에 살았다⁠. 하늘 문 아래 둥글게 펼쳐진 「⁠열두 문 장터⁠」에는 열두 띠 집안이 문을 하나씩 내고 살았다⁠. 쥐 문⁠, 소 문⁠, 호랑이 문⁠, 이렇게 돌아가다 마지막이 돼지 문이었다⁠. 돼지 문과 쥐 문 사이에만 담이 끊겨 바람이 샜다⁠. 천 년 전부터 고양이 집안은 바람구멍에 사과 상자를 쌓고 살았다⁠. 상자는 마흔 개쯤 되었고⁠, 위로 갈수록 작았다⁠. 맨 아래 큰 상자에서 할머니가 화로를 끌어안고 자고 있었다⁠.

연탄은 할머니 꼬리를 밟지 않으려고 까치발로 넘었다⁠. 할머니는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어디 가냐⁠?⁠”

“⁠생선 사러요⁠.⁠”

“⁠생선 장은 내일이다⁠.⁠”

“⁠내일 것 미리 보러요⁠.⁠”

할머니는 흐린 한쪽 눈을 반쯤 떴다가 도로 감았다⁠. 천 이백 살 고양이의 수염이 화로 열기에 하나씩 꼬부라져 있었다⁠.

“⁠늦잠 잔 고양이는 뛰어도 늦는다⁠.⁠”

연탄은 대답하지 않고 뛰었다⁠. 목에 단 붉은 끈 방울이 가슴께에서 둔하게 울렸다⁠. 돌로 만든 방울이라 소리가 맑지 않았다⁠. 어릴 때 할머니가 목에 걸어 준 뒤로 한 번도 벗은 적이 없었다⁠.

장터 한가운데 하역 마당에서는 사람 세상의 제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섣달 그믐이 사흘 남아 차례 음식이 몰리는 철이었다⁠. 쌀가마가 하늘에서 툭툭 떨어져 짚 더미에 박혔고⁠, 한 가마가 떨어질 때마다 발바닥이 먼저 울렸다⁠. 두꺼비 떡장수가 가래떡 묶음을 등에 지고 지나갔다⁠. 까치 우체부는 부리에 소원 종이를 한 움큼 물고 쥐 문으로 날아갔다⁠. 사람 세상에서 올라온 소원은 전부 쥐 집안의 바구니로 먼저 들어간다⁠. 열두 띠의 우두머리가 쥐 집안이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내가 반가운 손님 온다고 우는 줄 알아⁠.⁠”

까치가 연탄 머리 위를 지나가며 투덜거렸다⁠.

“⁠나는 무겁다고 욕하는 건데⁠.⁠”

사람은 신령이 짐승 모습으로 하는 말을 울음으로만 듣는다⁠. 사람 모습일 때 한 말만 알아듣는다⁠. 까치는 천 년째 욕을 하고 천 년째 반가운 새 소리를 들었다⁠.

*

방 붙이는 판은 큰 저울 옆에 있었다⁠. 어른 키 세 배쯤 되는 나무판에 하늘 궁의 방과 장터의 알림이 겹겹이 붙어 있었다⁠. 연탄은 판 아래에서 숨을 한 번 고르고 기둥을 타고 올라갔다⁠. 높은 데 올라가면 마음이 놓였다⁠. 판 꼭대기에 쪼그려 앉아 밑을 내려다보자 장터가 한눈에 들어왔다⁠. 열두 문의 지붕⁠, 쌀가마⁠, 떡장수의 등⁠, 저울⁠.

연탄은 종이를 펴서 판 맨 위에 대고 주머니에서 꺼낸 못을 돌멩이로 박았다⁠. 못 소리에 장터 사람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었다⁠. 너구리 엿장수가 엿판을 내려놓았다⁠.

“⁠고양이 집 막내가 또 높은 데 올라갔네⁠.⁠”

“⁠또가 아니에요⁠. 처음이에요⁠. 방 붙이는 건⁠.⁠”

연탄은 종이를 손바닥으로 펴고 큰 소리로 읽었다⁠.

“⁠「⁠섣달 안에 열두 띠를 소부터 돼지까지 차례로⁠, 끝으로 쥐까지⁠, 저마다 고른 겨루기로 꺾은 짐승은 열세 번째 자리를 낸다⁠. 꺾인 띠는 제 자리돌에서 한 조각을 떼어 이긴 짐승에게 준다⁠.⁠」⁠”

장터가 조용해졌다⁠. 쌀가마 하나가 떨어지는 소리만 났다⁠. 두꺼비가 가래떡을 고쳐 지며 물었다⁠.

“⁠열세 번째 자리라니⁠? 하늘 궁 바퀴에⁠?⁠”

“⁠바퀴에요⁠.⁠”

너구리가 엿 자르는 가위를 딸깍딸깍 놀렸다⁠.

“⁠걸 사람⁠? 고양이가 몇 판 가나⁠. 나는 소한테서 끝난다에 엿 한 판⁠.⁠”

웃음이 터졌다⁠. 연탄은 판 꼭대기에서 꼬리를 흔들었다⁠. 언제 나왔는지 꼬리가 또 바지 밖에 있었다⁠.

*

쥐 문이 열리고 자미가 나왔다⁠.

사람 모습의 자미는 키가 연탄의 가슴께밖에 오지 않는 늙은이였다⁠. 잿빛 두루마기를 입었고⁠, 동그란 안경 너머로 수염이 양쪽에 세 가닥씩 뻗어 있었다⁠. 왼손에 손바닥만 한 주판을 들고 있었다⁠. 자미는 방 판보다 저울을 먼저 보았다⁠. 아침마다 하는 일이었다⁠. 저울판 위에 올라서자 바늘이 크게 돌아갔다⁠. 쌀 한 섬 반 근처에서 겨우 멈췄다⁠. 저 작은 늙은이 하나가 저울을 저렇게 누르는 까닭을 장터에서 아는 이는 없었다⁠. 다들 쥐 집안 우두머리는 원래 무겁다고만 알았다⁠.

쪼롬이 저울 곁으로 가서 바늘을 읽었다⁠.

“⁠오늘도 한 섬 반입니다⁠.⁠”

“⁠어제와 같구나⁠.⁠”

자미는 저울에서 내려와 방 판 아래까지 걸어왔다⁠. 고개를 들어 종이를 읽었다⁠. 주판알이 한 번 탁 튕겼다⁠. 다 읽고 나서 한 번 더 튕겼다⁠.

“⁠있는 규칙입니다⁠.⁠”

연탄은 귀를 의심했다⁠. 아무도 모르는 규칙이라고⁠, 하늘 궁이 감춘 규칙이라고 할 줄 알았다⁠. 그래야 싸울 수 있었다⁠. 자미는 안경을 손가락으로 밀어 올렸다⁠.

“⁠내려오시지요⁠. 높은 데서 하는 말은 바람이 반을 가져갑니다⁠.⁠”

연탄은 내려가지 않았다⁠. 판 꼭대기에서 엎드린 채 턱만 괴었다⁠.

“⁠여기서도 잘 들려요⁠.⁠”

“⁠그럼 들으시지요⁠. 하늘 궁의 돌바퀴는 열두 자리로 돕니다⁠. 한 자리 돌 때마다 사람 세상의 달이 하나 바뀌고⁠, 열두 자리를 다 돌면 해가 바뀝니다⁠. 자리가 열셋이 되면 달이 열셋이 됩니다⁠. 사람 세상의 입춘이 엇나가고⁠, 보리 심는 날과 못자리 내는 날이 엇나갑니다⁠.⁠”

“⁠날짜 좀 틀린다고 보리가 안 나요⁠?⁠”

자미는 바구니에서 까치가 놓고 간 소원 종이 한 장을 집어 들었다⁠. 누런 종이에 연필 글씨가 꾹꾹 눌려 있었다⁠. 자미가 소리 내어 읽었다⁠.

“⁠「⁠고창 보리밭 늙은이 올립니다⁠. 올해도 입춘에 땅 녹고 경칩에 개구리 나오게 해 주십시오⁠. 작년처럼만⁠.⁠」⁠”

자미는 종이를 접었다⁠.

“⁠보리는 날짜를 모릅니다⁠. 땅이 녹는 날만 압니다⁠. 땅이 일찍 녹고 다시 얼면 보리 뿌리가 들뜹니다⁠. 이 사람은 일흔이 넘었고⁠, 올해 보리가 안 되면 내년에는 밭을 못 갈 겁니다⁠.⁠”

연탄은 턱을 괸 손을 내렸다⁠. 바람이 판 꼭대기를 쓸고 갔다⁠. 연탄은 바람에 대고 말했다⁠.

“⁠천 년 전에 날짜를 속인 분이 날짜 걱정을 하시네요⁠.⁠”

장터에서 누가 웃음을 참다가 기침을 했다⁠. 너구리가 엿판으로 얼굴을 가렸다⁠. 자미는 웃지 않았다⁠. 주판알도 튕기지 않았다⁠.

“⁠속였지요⁠.⁠”

자미는 한마디만 하고 연탄을 올려다보았다⁠. 변명은 따라 나오지 않았다⁠. 연탄이 준비해 둔 말들이 갈 데를 잃었다⁠. 자미가 덧붙였다⁠.

“⁠그래서 바퀴가 지금껏 열두 자리로 바르게 돕니다⁠.⁠”

자미가 고창 늙은이의 종이를 바구니에 도로 넣을 때⁠, 바구니 바닥에서 종이 한 장이 바람을 타고 빠져나왔다⁠. 종이는 팔랑거리며 방 판을 따라 올라왔다⁠. 연탄은 생각하기도 전에 앞발⁠, 아니 손을 뻗었다⁠. 탁⁠. 허공에서 종이를 후려쳐 판에 눌러 붙였다⁠. 장터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연탄은 박수를 못 들은 척 손바닥 밑의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크레파스로 그린 고양이가 있었다⁠. 귀가 세모나고 수염이 길었다⁠. 고양이 밑에 삐뚤삐뚤한 글씨가 있었다⁠. 받침 몇 개가 빠져 있었다⁠.

「⁠고양이 해에 우리 아기 나게 해 주세요⁠. 우리 고향 달력에는 고양이가 있어요⁠. 여기 달력에는 없어요⁠.⁠」

“⁠돌려주시지요⁠.⁠”

자미가 아래에서 손을 내밀었다⁠. 연탄은 종이를 반으로 접어 품에 넣었다⁠.

“⁠고양이한테 온 거잖아요⁠.⁠”

“⁠쥐 집안 바구니로 온 겁니다⁠. 하늘로 오는 소원은 전부 우리가 먼저 셉니다⁠.⁠”

“⁠그럼 세셨으니까 됐네요⁠.⁠”

자미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연탄도 품에서 손을 빼지 않았다⁠. 둘 사이로 쌀가마 하나가 떨어져 짚 더미에 박혔다⁠. 자미가 먼저 손을 내렸다⁠. 주판알이 짧게 한 번 튕겼다⁠. 알 하나를 잘못 놓은 사람처럼⁠.

*

자미는 방 판 앞에서 몸을 돌려 장터를 둘러보았다⁠. 열두 띠 집안의 어른들이 장터 여기저기에 서 있었다⁠. 소 문 앞의 큰 사내⁠, 호랑이 문 앞의 줄무늬 두건⁠, 토끼 문 앞에서 귀를 감싸 쥔 여자⁠. 자미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는데 장터 끝까지 갔다⁠.

“⁠규칙에는 심판이 있어야 합니다⁠. 이긴 자와 진 자를 하늘 궁에 아뢸 심판입니다⁠. 겨루는 양쪽이 다 받아들이는 이라야 하지요⁠. 열두 집 가운데 누가 서시겠습니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소 문 앞의 큰 사내는 짚을 씹으며 땅을 보았고⁠, 호랑이 두건은 코웃음을 쳤다⁠. 토끼 여자는 아예 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연탄은 판 위에서 장터를 한 바퀴 내려다보았다⁠. 고양이 집안 편을 들어 줄 집은 하나도 없었다⁠. 천 년 동안 그랬다⁠.

“⁠심판이 없으면 겨루기도 없습니다⁠.⁠”

자미가 주판을 앞섶에 넣었다⁠. 다 끝났다는 몸짓이었다⁠. 연탄은 판 꼭대기에서 일어났다⁠. 무릎이 저렸다⁠. 내려갈 생각은 없었다⁠. 내려가면 지는 거였다⁠.

“⁠제가 볼게요⁠.⁠”

쪼롬이었다⁠. 저울 곁에서 앞치마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서 있었다⁠. 저울추 두 개가 주머니 안에서 서로 부딪쳤다⁠. 장터의 눈이 한꺼번에 쪼롬에게 갔다가 자미에게 갔다⁠.

“⁠저울지기는 저울만 봅니다⁠. 누구 집 딸인지는 안 봐요⁠.⁠”

자미가 딸을 보았다⁠. 오래 보았다⁠. 연탄은 자미의 수염 세 가닥이 한 번 떨리는 것을 보았다⁠. 자미는 다시 주판을 꺼냈다⁠.

“⁠저울지기가 보면 저울대로 나오겠지요⁠.⁠”

탁⁠, 하고 주판알이 튕겼다⁠.

“⁠좋습니다⁠. 겨루기를 받지요⁠. 심판은 제 딸이 봅니다⁠. 첫 판은 해 지기 전⁠, 소 문입니다⁠.⁠”

자미는 판 위의 연탄을 올려다보았다⁠.

“⁠내려오시지요⁠. 이제는 정말 내려오셔야 합니다⁠. 겨루기 판에서는 짐승 모습이어야 하니까요⁠.⁠”

연탄은 판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생각보다 높았다⁠. 올라올 때는 몰랐다⁠. 장터 사람들이 연탄을 올려다보며 기다렸다⁠. 너구리 엿장수가 엿판에 분필로 새로 적었다⁠. 「⁠고양이 소한테서 끝 — 엿 두 판⁠」

쪼롬이 판 아래로 와서 두 팔을 벌렸다⁠.

“⁠뛰어⁠. 받아 줄게⁠.⁠”

“⁠쥐가 고양이를 받는다고⁠?⁠”

“⁠한 섬 반 받는 저울 옆에서 일하거든⁠.⁠”

연탄은 뛰지 않았다⁠. 꼬리를 바지 안에 넣고⁠, 아주 천천히⁠, 기둥을 거꾸로 타고 내려왔다⁠. 땅에 발이 닿자 가슴께에서 방울이 둔하게 한 번 울렸다⁠. 소 문 지붕 위로 짚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1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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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발2026.10.31· 1화

    연탄이 쥐 소리에 엉덩이부터 들썩이는 거 우리 집 고양이랑 똑같아요.

    • 오달래작가2026.10.31

      고양이 키우시는 분들이 다 그 장면에서 댓글을 주세요. 연탄도 어쩔 수 없는 고양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