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5,491자)

단상 앞의 칼

백정의 칼로 무림맹주의 사위가 되었다 · 류청산

맹회 날 아침⁠, 돌계단 삼백 개가 사람으로 찼다⁠.

맨 아래 칸에서 맨 위 칸까지 한 줄로 이어졌다⁠. 한수 나루 도축장 열두 집의 백정들⁠, 짐꾼 조합⁠, 국밥집 골목의 아낙들⁠, 생선 좌판 사람들⁠, 나루 사공들⁠. 아무도 손에 무엇을 들지 않았다⁠. 칼도 갈고리도 국자도⁠. 쇠전 영감이 그렇게 정했다⁠. 그냥 올라가서 서 있는다고⁠.

계단이 좁아 사람들이 둘씩 나란히 올랐다⁠. 뒤에서 미는 사람이 없었는데 줄이 멈추지 않았다⁠. 늙은 사람이 숨이 차면 옆 사람이 팔을 걸었다⁠. 이백 번째 계단쯤에서 생선 좌판 아낙 하나가 주저앉자⁠, 뒤에 오던 짐꾼이 아낙을 업었다⁠. 삼백 개 계단을 다 오른 사람들은 정문 앞 마당 가장자리에 줄지어 섰다⁠. 정문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았다⁠. 문밖에 섰다⁠.

정문 무사가 이들 앞에 창을 세우고 섰다⁠. 처음 진가 고기가 끊겼을 때 덕순의 국밥을 제일 먼저 먹었던 무사였다⁠. 무사는 창을 내밀지 않았다⁠. 그냥 세워 들고 있었다⁠. 사람들이 이 창 앞에서 멈추었다⁠. 창이 사람들을 막은 게 아니었다⁠. 사람들이 창 앞에서 섰다⁠.

덕순은 정문 옆 담장 밑에 솥을 걸었다⁠. 새벽에 춘길과 형당 무사 셋이 지고 올라온 솥이었다⁠. 불이 붙고 국물이 끓었다⁠. 사흘 우린 뼈 국물이었다⁠.

담장 그늘에서 늙은 거지 하나가 이 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키가 크고⁠, 누더기가 분타주보다 더 해졌고⁠, 허리에 녹슨 대나무 지팡이를 찼다⁠. 개방 분타주가 이 곁에 서서 허리를 반쯤 숙이고 있었다⁠. 개방 방주였다⁠.

“⁠이게 그 국밥이냐⁠?⁠”

“⁠드셔 보슈⁠.⁠” 덕순이 그릇에 국밥을 퍼서 내밀었다⁠. 고기를 두 국자 얹었다⁠. “⁠열 해 동안 분타주 영감네 애들이 우리 뒷문에서 먹고 간 거야⁠. 방주는 처음이지⁠?⁠”

방주는 그릇을 받아 들고 담장 밑에 쪼그려 앉았다⁠. 숟가락을 들지 않고 그릇째 입에 대고 마셨다⁠. 국물이 수염을 타고 흘렀다⁠. 다 마시고 나서 그릇을 덕순에게 돌려주었다⁠.

“⁠한 그릇 더⁠.⁠”

“⁠값은⁠?⁠”

방주가 분타주를 보았다⁠. 분타주가 이 빠진 입으로 웃었다⁠. 방주가 다시 덕순을 보았다⁠.

“⁠개방은 얻어먹는 집이오⁠. 값은 안 내오⁠.⁠” 방주가 일어서서 허리의 대나무 지팡이를 고쳐 찼다⁠. “⁠대신 얻어먹은 집은 안 잊소⁠.⁠”

덕순은 아무 말 없이 두 번째 그릇을 펐다⁠. 이번에는 고기를 세 국자 얹었다⁠.

*

갑돌은 형당 뒷방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혼례 날 입었던 붉은 혼례복이 아니었다⁠. 형당주의 검은 옷도 아니었다⁠. 덕순이 아침에 올려 보낸 보따리 안에 든 것은 도축장에서 입던 무명옷이었다⁠. 소매가 짧고 팔뚝이 넉넉했다⁠. 피 얼룩은 덕순이 사흘 동안 빨아 빼 놓았다⁠. 빠지지 않은 자리가 소매 끝에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소교가 문간에 서서 이것을 보았다⁠.

“⁠그걸 입고 가요⁠?⁠”

“⁠다른 옷은 무게를 모르오⁠.⁠”

소교는 웃지 않았다⁠. 다가와서 갑돌의 허리에 끈을 매 주었다⁠. 두 겹으로 맸다⁠. 매듭 하나는 배꼽 앞에⁠, 하나는 옆구리에 두었다⁠. 갑돌이 이 매듭을 내려다보았다⁠.

“⁠매 호위 매듭이구먼⁠.⁠”

“⁠바지 안 내려가게요⁠. 오늘은 내려가면 안 돼요⁠.⁠” 소교가 매듭을 꽉 당겼다⁠. 그리고 손바닥을 갑돌의 가슴 위에 얹었다⁠. 옷 속에 맹주령이 있었다⁠. 손바닥 아래에서 쇳조각의 모서리가 만져졌다⁠. “⁠아버지가 아침에 눈을 뜨셨어요⁠. 말은 못 하셨는데 손가락으로 제 손바닥에 무언가 쓰셨어요⁠.⁠”

“⁠뭐라고 쓰셨소⁠?⁠”

“⁠두 글자요⁠. 국밥⁠.⁠” 소교의 입꼬리가 처음으로 올라갔다⁠. “⁠어머님께 전했어요⁠. 미음에 고기 넣어서 올려 보내셨어요⁠.⁠”

소교가 손을 뗐다⁠. 그리고 소매에서 산가지 열다섯 개를 꺼내 갑돌의 손바닥에 쥐여 주었다⁠. 대나무 열다섯 토막이 손바닥 안에서 달그락거렸다⁠.

“⁠지금 셈으로 당신 손이 셋 반이에요⁠. 개방 하나⁠, 강가 세가 하나⁠, 서쪽 세가 하나⁠, 그리고 남쪽 세가가 반⁠. 반은 아직 몰라요⁠.⁠” 소교가 갑돌의 손을 접어 주먹을 쥐게 했다⁠. “⁠진무상은 진가에 세가 하나⁠, 그리고 구파 아홉 가운데 일곱이 고개를 끄덕였어요⁠. 아홉이에요⁠. 여덟이면 맹주가 나와요⁠.⁠”

“⁠셈으로는 진 거요⁠?⁠”

“⁠셈으로는요⁠.⁠” 소교가 문을 열었다⁠. 아침 햇빛이 형당 계단으로 쏟아졌다⁠. “⁠셈 말고는 아직 몰라요⁠.⁠”

*

맹회장은 총단 서쪽 대연무장이었다⁠. 갑돌이 진무상에게 어깨를 베였던 이 돌마당이었다⁠. 돌바닥 한가운데에 단상이 섰다⁠. 돌을 쌓고 이 위에 나무를 깐 단이었고⁠, 단 위에 맹주의 빈 의자가 놓였다⁠. 단상 아래로 열다섯 자리가 반원으로 둘렀다⁠. 아홉 자리는 구파 장문인의 것⁠, 한 자리는 개방 방주의 것⁠, 다섯 자리는 세가 가주들의 것이었다⁠. 뒤로 장로들과 사절들이 섰고⁠, 다시 뒤로 맹의 무사들이 연무장 가장자리를 빙 둘렀다⁠.

마지막 두 장문인은 새벽에 닿았다⁠. 아미와 공동이었다⁠. 공동 장문인은 앉자마자 공동 장로와 귓속말을 나눴다⁠. 아미 장문인은 코를 막지 않았다⁠. 장문인은 개방 방주 옆자리에 앉으면서 방주의 수염에 묻은 국물 냄새에 얼굴을 찡그렸다가⁠, 이내 무언가를 떠올리는 얼굴이 되었다⁠.

개방 방주가 자리에 앉아 수염의 국물을 손등으로 닦았다⁠. 세가 가주들 가운데 강가 세가 가주가 갑돌 쪽을 한 번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남쪽 세가 가주는 아무 쪽도 보지 않았다⁠. 손을 무릎 위에 꼭 쥐고 있었다⁠.

진무상은 세가 자리 맨 앞에 서 있었다⁠. 흰 장포를 새로 지어 입었다⁠. 허리에 진가의 검을 찼다⁠. 진무상의 뒤에 매서한이 섰다⁠. 늘 서던 자리였다⁠. 칼집에 흠집 하나 없는 새 검이었다⁠.

갑돌이 대연무장에 들어서자 정문 쪽 담장 너머에서 목소리 하나가 날아왔다⁠. 국밥집 골목 끝 평상까지 닿던 이 목소리였다⁠.

“⁠갑돌아⁠! 밥은 먹었냐⁠!⁠”

열다섯 자리가 일제히 정문 쪽을 돌아보았다⁠. 소림 장문인의 눈썹이 꿈틀했다⁠. 개방 방주가 수염을 쓸며 웃음을 참았다⁠. 갑돌은 담장 쪽을 보지 않고 대답했다⁠.

“⁠먹었소⁠!⁠”

“⁠거짓말⁠! 대답 소리가 비었다⁠! 빈 배에서 나는 소리야⁠!⁠”

무사들 몇이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떨었다⁠. 화산 장로가 헛기침을 크게 했다⁠. 갑돌은 그대로 걸어가 형당주 자리에 섰다⁠. 뒤에 소교가 섰다⁠. 형당 무사들이 뒤에 섰고⁠, 맨 끝에 처진 어깨의 객경이 왼손을 칼자루에 얹고 섰다⁠.

공동 장로가 단상 옆에서 맹회를 열었다⁠. 맹주가 병으로 나오지 못한다고⁠, 후계 후보가 둘이라고⁠, 후보마다 말할 기회를 한 번씩 준다고⁠. 맹주령 이야기는 없었다⁠. 장로회가 맹주령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장문인들은 이미 들었을 터였다⁠. 갑돌의 옷 안쪽에서 쇳조각 모서리가 숨 쉴 때마다 갈비뼈를 눌렀다⁠. 크기보다 무거운 쇠였다⁠.

*

진무상이 먼저 단상 앞으로 나섰다⁠.

“⁠장문인들께서는 서쪽 골짜기의 세 해를 기억하실 겁니다⁠.⁠” 진무상의 목소리가 대연무장 끝까지 고르게 갔다⁠. 웃음이 없었다⁠. “⁠진가 땅 뒷산에는 그 세 해에 묻은 사람의 비석이 줄지어 서 있습니다⁠. 제 아버지는 그 골짜기에 한쪽 팔을 두고 오셨습니다⁠. 그 싸움이 끝났을 때 맹은 적과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손을 잡았고⁠, 우리가 피로 넘은 강 건너 땅은 도로 그쪽 것이 되었습니다⁠.⁠”

장문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당 장문인이⁠, 화산 장문인이⁠, 청성 장문인이⁠.

“⁠저는 그 피의 대가를 받으러 이 자리에 섰습니다⁠. 진가를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그 싸움에서 피 흘린 구파의 모든 집을 위해서입니다⁠. 화산도 그 싸움에서 사람을 잃었고⁠, 무당도⁠, 소림도 잃었습니다⁠. 그 대가를 아무도 받지 못했습니다⁠.⁠” 진무상이 돌아서서 갑돌을 보았다⁠. “⁠그런데 맹주께서는 그 맹을 저잣거리 백정에게 주려 하십니다⁠. 피 한 방울 맹을 위해 흘린 적 없는 손에⁠.⁠”

대연무장이 웅성거렸다⁠. 진무상이 손을 들어 이 소리를 눌렀다⁠.

“⁠그리고 하나 더 말씀드려야겠습니다⁠. 형당주에게는 맹을 쥐려는 까닭이 따로 있습니다⁠. 그 골짜기에서 돌아오던 여름⁠, 한수 나루 시장에서 백정 하나가 죽었습니다⁠. 그 백정의 아들이 형당주입니다⁠. 형당주는 그날의 일을 진가에 갚으려 합니다⁠. 맹주 자리를 쥐고⁠, 맹의 칼로⁠.⁠” 진무상이 장문인들을 둘러보았다⁠. “⁠원수를 갚으려는 손에 맹을 맡기시겠습니까⁠?⁠”

대연무장이 조용해졌다⁠. 장문인들의 눈이 한꺼번에 갑돌에게 왔다⁠. 갑돌은 이 눈들의 무게를 받았다⁠. 아홉⁠, 열⁠, 열다섯⁠. 뒤의 장로들⁠, 사절들⁠, 무사들⁠. 수백의 눈이 한 사람에게 실리는 무게는 소 한 마리보다 무거웠다⁠.

이때 소림 장문인이 일어섰다⁠. 열한 해 전 이 북을 새로 메운 절의 장문인이었다⁠. 이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진무상 쪽으로 걸어가 뒤에 섰다⁠. 장문인 자리 뒤에서 소림 사절 장로가 긴 눈썹 아래로 갑돌을 보았다⁠. 눈을 내리깔지 않았다⁠.

무당 장문인이 일어섰다⁠. 진무상 뒤에 섰다⁠. 화산 장문인이 일어섰다⁠. 장로들 틈에서 화산 장로가 숨을 들이켰다⁠. 화산 장문인은 장로 쪽을 보지 않고 진무상 뒤에 섰다⁠. 청성⁠, 곤륜⁠, 점창⁠, 종남⁠. 일곱 장문인이 진무상 뒤에 반원으로 섰다⁠. 공동 장문인이 공동 장로를 한 번 보고⁠, 여덟 번째로 일어섰다⁠.

아미 장문인만 앉아 있었다⁠. 장문인은 개방 방주 옆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구파 가운데 여덟이 한 사람 뒤에 섰다⁠. 맹이 선 뒤로 처음 있는 일이라고 누군가 속삭였다⁠.

진무상 바로 뒤⁠, 장문인들 앞에 매서한이 서 있었다⁠. 늘 서던 자리였다⁠. 매서한의 오른손이 새 검의 칼자루에 얹혀 있었다⁠. 뽑지 않았다⁠. 손등의 힘줄이 줄처럼 서 있었다⁠. 갑돌은 이 손목 안쪽을 보았다⁠. 거기서 무엇이 정해지고 있는지는 무게로도 알 수 없었다⁠.

*

공동 장로가 갑돌을 보았다⁠. 목소리가 굳어 있었다⁠.

“⁠형당주⁠. 둘째 후보⁠. 말할 기회를 한 번 주겠소⁠.⁠”

갑돌은 형당주 자리에서 걸어 나왔다⁠. 돌바닥에 무명 신발이 끌리는 소리가 났다⁠. 허벅지가 당겼다⁠. 등 딱지가 무명옷에 스쳤다⁠.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정문 밖에서 저잣거리 사람들이 담장 너머로 이것을 보고 있었다⁠. 맨 앞에 쇠전 영감이 굽은 등을 펴려고 애쓰고 있었다⁠. 이 옆에 덕순이 국자를 내려놓고 섰다⁠.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삼백 개 계단을 오른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갑돌은 단상 앞에 섰다⁠. 진무상과 다섯 걸음이었다⁠. 진무상 뒤로 매서한⁠, 다시 뒤로 구파 장문인 여덟이 서 있었다⁠. 이들의 그림자가 아침 햇빛에 길게 누워 갑돌의 발끝까지 닿았다⁠.

갑돌은 소매에 손을 넣었다⁠. 대연무장의 무사들이 일제히 칼자루를 쥐었다⁠. 장문인 몇이 몸을 틀었다⁠.

갑돌이 꺼낸 것은 버들잎처럼 휜 발골칼이었다⁠. 손바닥 길이⁠, 손가락 셋 너비⁠. 스무 해 숫돌에 갈려 처음보다 한 마디 짧아진 칼⁠. 손잡이에 감은 끈은 감빛이었다⁠. 어머니의 앞치마 끈이었다⁠.

갑돌은 이 칼을 쥔 손을 단상 앞에 내렸다⁠. 칼끝이 돌바닥을 향했다⁠.

“⁠진 공자 말이 맞소⁠. 스무 해 전 그날⁠, 고기 수레 옆에 여덟 살짜리가 있었소⁠. 그게 나였소⁠.⁠” 갑돌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도축장에서 근수를 외치던 목소리였다⁠. 대연무장 끝까지⁠, 정문 밖 담장까지 갔다⁠. “⁠그 아이가 그날 수레 밑에서 주운 게 이 칼이오⁠.⁠”

진무상의 오른손이 검자루를 감쌌다⁠. 매서한의 엄지가 코등이를 밀었다⁠. 칼집 밖으로 날이 한 마디 비어져 나왔다⁠.

갑돌은 칼을 놓지 않았다⁠. 단상 위 맹주의 빈 의자를 한 번 올려다보고⁠, 다시 여덟 장문인을 보았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섰다⁠.

“⁠그러니 이제 그날 그 시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 자리에서 다 같이 들어 보시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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