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058자) · 하빈 · 10월 23일
이백칠십육 분
내가 일등을 하자 짝꿍이 망가졌다 · 문가온
목요일 하루를 나는 안 쓰려고 썼다.
야자실에서 나는 국어 문제집을 펴 놓고 일부러 딴 데를 봤다. 창밖. 운동장 조명. 조명 밑에 날벌레. 날벌레가 몇 마리인지 세어졌다. 열일곱. 하나가 빠져나갔다. 열여섯. 나는 눈을 감았다. 감으면 문제집 지문이 떠올랐다. 안 읽었는데 떠올랐다. 펼 때 눈에 들어온 첫 문단이 통째로. 나는 연습장에 낙서를 했다. 낙서를 하는데 낙서가 도형이 됐다. 어제 칠판 도형. 보조선이 세 개 그어졌다. 내 손이 그었다.
안 쓰는 방법이 없었다.
나루는 야자실 앞줄에 있었다. 지정석. 야자실은 번호순이라 우리는 교실처럼 붙어 앉지 않는다. 나루 14번, 나 22번. 나는 두 줄 뒤에서 나루 뒷머리를 봤다. 나루가 한 쪽을 읽고 필통을 열었다. 닫았다. 아홉 시가 되기 십 분 전에 나루가 책상에 엎드렸다. 삼 년 동안 나루가 야자실에서 엎드린 걸 나는 본 적이 없다. 뒤에서 누가 「나루 잔다」 하고 작게 말했다. 웃는 소리. 나루는 안 잤다. 엎드린 채로 손이 눈을 누르고 있었다.
금요일 점심시간에 나루가 문제집을 내 쪽으로 밀었다. 삼 년 동안 없던 일이다. 나루는 남한테 문제를 물어본 적이 없다. 남이 나루한테 물어보면 물어봤지.
“이거 답이 왜 삼이야.”
확률 문제였다. 나는 봤다. 보는 순간 풀렸다. 경우의 수가 둘로 갈리고 하나가 빠지고 남는 게 셋이었다. 나는 그것을 말로 설명했다. 이십 초쯤 걸렸다. 나루가 듣고 있었다. 듣고 나서 필통을 열었다. 닫았다.
“한 번만 더.”
나는 한 번 더 설명했다. 나루가 연습장에 적었다. 적다가 멈췄다. 앞에 적은 줄을 봤다. 자기가 적은 줄을 못 읽는 얼굴이었다. 나루가 웃었다.
“너 요새 진짜 잘한다.”
“……”
“원래 잘했는데 내가 몰랐나.”
그 말이 칼이었으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칼이 아니었다. 나루는 진짜로 좋아하고 있었다. 짝이 잘하게 된 걸. 삼 년 동안 자기가 앞줄에서 문제집을 안 덮는 동안 옆에서 여섯 시간을 앉아만 있던 애가 갑자기 이십 초 만에 확률을 푸는 걸, 나루는 기뻐했다. 그 기쁨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고. 나는 그것도 알았다. 알게 하는 것이 옆에서 오고 있었다.
“나루, 너 눈.”
“어, 괜찮아. 주말에 잘 거야.”
주말에 나루는 오 층에서 여덟 시간을 앉아야 했다. 나는 그것도 알았다.
집에서 나올 때 부엌 의자에 엄마 마트 조끼가 걸려 있었다. 어제 것. 엄마는 오늘 그걸 안 입고 갔다. 여벌이 있으니까. 나는 그 조끼 주머니에 손을 넣어 봤다. 영수증 한 장. 마트 직원 할인 도장. 나는 그것을 도로 넣었다. 왜 넣어 봤는지 모르겠다. 나가기 전에 뭔가를 만지고 싶었던 것 같다. 내 것이 아닌 것을.
금요일 밤 열한 시 사십 분에 나는 골목에 있었다.
낮에는 셔터가 내려가 있고 저녁에는 문이 열려 있다. 그러면 닫는 시각이 있다. 주인이 반환일은 일월 일일이라고 두 번 말했다. 날짜가 바뀌는 시각. 나는 그 시각에 그 사람이 뭘 하는지 보고 싶었다. 보고 싶었다기보다, 열한 시에 집에서 나올 이유가 그것밖에 없었다. 엄마는 열한 시 사십 분에 온다. 나는 엄마가 오기 전에 나왔다. 처음이었다.
셔터가 반쯤 올라가 있었다. 허리 높이. 그 밑으로 형광등 빛이 골목 바닥에 네모나게 깔려 있었다. 나는 허리를 굽히고 들어갔다. 교복 치마가 셔터 밑에 걸렸다. 안에 주인이 있었다. 계산대 앞에. 장부를 펴 놓고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계산기가 켜져 있었다. 액정에 숫자가 있었다. 나는 그 숫자를 못 읽었다. 거꾸로였다.
밤의 가게는 낮의 가게와 같았다. 그게 이상했다. 형광등은 같은 흰빛이었고 벽은 같은 흰 벽이었고 계산대는 같은 스테인리스였다. 골목이 어두워진 만큼만 안이 더 밝아 보였다. 형광등 하나가 아주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낮에는 안 보이던 떨림. 계산기 자판 소리가 났다. 딸깍. 딸깍. 그 소리가 흰 벽에 부딪혀 돌아왔다. 장부는 낮에 보던 것보다 두꺼웠다. 아니, 같은 장부인데 밤에는 두께가 보였다. 종이 옆면이 누렇게 층이 져 있었다. 앞쪽은 더 누렇고 뒤로 갈수록 희었다. 앞쪽 종이는 아주 오래된 것이었다. 액자 속 종이만큼.
“닫았습니다.”
“문이 열려 있는데요.”
“셔터가 반이면 닫은 겁니다.”
“그럼 반은 열린 거네요.”
주인이 고개를 들었다. 나를 봤다. 그러고는 계산기를 껐다. 액정이 검어졌다.
“열두 시까지 십육 분입니다. 그 안에 끝내야 하는 게 있어요.”
“뭔데요.”
“반환일입니다.”
“일월 일일이라면서요.”
“학생 것은요.” 주인이 볼펜을 들었다. “제 건 매일입니다.”
나는 그 말을 못 알아들었다. 못 알아들은 채로 계산대 앞에 섰다. 장부가 펴져 있었다. 이번에는 안 덮었다. 주인이 손바닥으로 장부 한 쪽을 가렸다. 손가락 사이로 한 줄만 보이게. 그 사람은 그 줄을 짚었다.
“한 줄만입니다. 학생 몫입니다.”
출처. 나루.
그 옆에 날짜. 십월 일일부터 십월 이십삼일. 그 옆에 숫자. 이백칠십육 분.
나는 그 숫자를 두 번 읽었다. 이십삼 일. 하루 두 시간. 이천칠백육십 분. 십분의 일. 이백칠십육. 계산이 맞았다. 계산이 맞는다는 것이 제일 무서웠다. 이 가게는 틀리지 않는다. 틀리지 않는 것을 상대로는 화를 낼 데가 없다.
“이게 다예요?”
“학생 몫은요.”
주인의 손바닥 위, 그 한 줄 위쪽에 다른 줄이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글자 끝이 보였다. 받침. ㅗ. 나는 그 글자를 알았다. 나루의 오. 다른 사람 이름일 수도 있었다. 오로 끝나는 이름은 많다. 그런데 나는 그 순간 이미 알고 있었다. 잘 아는 것이 내 안에 켜져 있었으니까. 그 줄의 이자도 나루한테서 나가고 있었다. 나 말고 누군가가 나루 곁에 삼 미터 안에 여덟 시간 앉아 있었다.
“위에 줄이요.”
“다른 분 것입니다.”
“태오예요?”
주인이 장부를 덮었다.
그때 셔터 밑으로 구두가 들어왔다. 검은 구두. 남색 양복 바지. 구본혁이 허리를 굽히고 들어와 몸을 폈다. 그 사람은 나를 봤다. 이번에는 바로 알아봤다.
“서담고.”
“……”
“여 사장, 나도 장부 좀 보자고 왔는데 손님이 있네.”
“보여 드릴 수 없습니다. 대표님 몫도 한 줄입니다.”
“한 줄은 아까 봤어. 다른 줄 보러 왔지.” 구본혁이 계산대에 손을 얹었다. 크고 매끄러운 목소리. 열두 시 가까운 골목 가게에서도 그 목소리는 설명회장에 있는 것처럼 울렸다. “우리 애가 요새 시간을 못 채워. 왜 그런가 했더니.”
그 사람이 나를 봤다.
“서담고 이학년 삼반. 나루 옆자리.”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구본혁은 내 대답이 필요 없었다.
“학생, 나루가 요새 오 층에서 세 시간 앉아 있는데 한 쪽을 못 넘겨. 우리 장학생 중에 제일 오래 앉는 애였는데. 나는 그 이유를 알아. 학생도 알지.”
“……”
“그래서 제안을 하나 하려고. 우리 학원 와. 고객으로. 옆자리 하나 붙여 줄게. 그러면 나루는 덜 힘들어져.”
“출처는 바뀌지 않습니다.” 주인이 말했다.
“여 사장.”
“계약한 주에 정해진 출처는 기간 내내 그대로입니다. 대표님도 아시잖아요.”
“그건 내 영업이야. 여 사장이 끼어들 데가 아니지.”
“규칙입니다. 영업이 아니라.”
두 사람이 잠깐 서로를 봤다. 구본혁이 먼저 웃었다. 그 사람은 지는 자리에서 웃는 사람이었다. 웃고 나서 나한테 돌아섰다.
“학생, 하나만 물어볼게. 학생 지금 나 나쁜 사람 같지.”
“……”
“학생도 빌렸잖아. 뒷면 안 읽고. 그 값을 나루가 내는 거 알고도 오늘 하루 종일 그 머리 썼잖아. 나는 장학생을 고객 옆에 앉혀. 학생은 그냥 옆에 앉아 있었고. 나랑 학생이랑 뭐가 달라.”
나는 대답이 없었다. 있었으면 했다. 없었다. 그 사람 말이 맞아서가 아니라, 맞는 데가 있어서였다. 맞는 데가 있는 말은 틀린 말보다 오래 남는다.
“열두 시 삼 분 전입니다.” 주인이 말했다. “두 분 다 나가 주십시오.”
구본혁이 먼저 나갔다. 허리를 굽히고. 나가면서 셔터를 손바닥으로 한 번 쳤다. 쇳소리가 골목에 울렸다.
나는 셔터 밑에서 뒤를 돌아봤다. 주인이 계산기를 다시 켰다. 장부를 폈다. 다른 쪽. 볼펜이 움직였다. 한 줄. 그 사람은 계산기를 안 봤다. 액정에 숫자가 떠 있는데 안 보고 적었다. 적고 나서 볼펜을 놓았다. 그러고는 아주 잠깐 두 손으로 눈을 눌렀다. 나루처럼. 엄지와 검지로 눈두덩을 안쪽으로.
“틀리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나한테 말한 건지 자기한테 말한 건지 알 수 없었다. “틀리면 제 것이 안 돌아오니까요.”
셔터가 끝까지 내려왔다. 열두 시였다.
정류장은 골목 밖 큰길에 있었다. 나는 거기 앉았다. 플라스틱 의자. 차가웠다. 버스 노선표에 불이 들어와 있었고 학원가 간판은 반쯤 꺼져 있었다. 본 입시 오 층은 아직 켜져 있었다. 관리형 독서실은 열두 시까지다. 저 창 안에 나루가 있을 것이다. 한 쪽을 못 넘기면서.
버스 한 대가 왔다. 우리 집 가는 버스였다. 나는 안 탔다. 버스가 문을 열었다 닫고 갔다.
나는 제안을 받은 사람이었다. 구본혁의 제안은 거짓말이었다. 주인이 그렇게 말했고 나는 주인을 믿었다. 이 가게는 틀리지 않으니까. 그런데 그 제안이 거짓말이라는 게 아니라 그 제안이 나왔다는 것이 무서웠다. 저 사람은 나루 옆에 누굴 앉힐지 정하는 사람이다. 나루가 오 층에서 세 시간 앉는 자리는 저 사람이 정했다. 그 자리 옆에 누가 앉는지도.
장부 위 줄. 오로 끝나는 이름. 삼 미터 안에 여덟 시간.
버스 한 대가 더 왔다. 안 탔다.
나는 나루한테 말할 수 없었다. 말하면 나루는 가게에 갈 것이다. 나루는 그런 애다. 자기가 대신 낼 방법을 찾으러 갈 것이다. 그리고 그 가게에서 서명할 것이다. 뒷면을 읽고도 서명할 것이다. 나는 나루가 뭘 빌릴지까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말할 수 없었다. 그러면 나는 매일 나루 옆에 앉아서 나루 것으로 잘 보고 잘 알면서 아무 말도 안 하는 사람이 된다. 그것도 알았다.
머리는 여전히 잘 돌아갔다. 이 밤에 이 정류장에서 이렇게 또렷하게 생각하는 것도 나루 것이었다. 나는 이 또렷함으로 아무것도 못 정하고 있었다.
세 번째 버스가 왔다. 나는 탔다. 맨 뒷자리. 창에 내 얼굴이 비쳤다. 잘 잔 얼굴은 아니었다.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이십삼 일 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