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어디서 왔나
빌린 재능 · 문가온
금요일 밤에 나는 계약서를 스물여섯 번 읽었다. 읽을 때마다 다른 데서 걸렸다. 제7조의 '같은 종류'와 제8조의 '가장 가까운'. 그 두 마디가 붙으면 무슨 뜻이 되는지 나는 새벽 세 시에 알았다.
알고 나서 잠을 못 잤다. 잠을 못 잤는데도 다음 날 머리가 맑았다. 그것도 빌린 것이었다.
토요일에 나는 가게 문이 열리기 전에 갔다.
주인은 셔터를 반쯤 올린 채로 안에서 뭔가를 닦고 있었다. 나는 셔터 아래로 들어갔다. 무릎을 굽히고 들어가는 게 좀 우스웠지만 웃을 상황이 아니었다.
“오늘은 아직 손님을 받지 않습니다.”
“손님으로 온 거 아니에요.”
주인이 걸레를 놓았다. “그러면요.”
“제8조 물어보러 왔어요.”
그가 잠깐 나를 봤다. “뒷면을 읽으셨군요.”
“서명한 다음에요.”
“대부분 그렇습니다.” 그가 계산대 뒤로 들어갔다. “그게 그 조항이 있는 이유입니다.”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되묻지 않았다. 되물으면 내가 더 초라해질 것 같았다.
“제7조요. 이자는 같은 종류로 받는다. 그 종류가 꼭 제 것이어야 한다고는 안 적혀 있어요.”
주인이 손을 멈췄다. 그가 처음으로 표정 비슷한 걸 보였다. 놀란 건 아니고, 계산이 맞아떨어졌을 때의 얼굴이었다.
“학생, 그 문장을 언제 찾으셨습니까?”
“어젯밤에요. 스물여섯 번 읽었어요.” 나는 계약서를 계산대에 놓았다. “빌린 뒤로 저는 세는 게 정확해졌어요. 그러니까 스물여섯 번이 맞아요.”
“…맞습니다.” 그가 계약서를 손끝으로 밀어서 나에게 돌려줬다. “이자는 학생 것에서만 나가지 않습니다. 가장 가까운 데서 나갑니다.”
“가까운 게 뭔데요. 가족이요?”
“거리로 잽니다.”
나는 그 말을 이해하는 데 이 초쯤 걸렸다. 이해하고 나서 다리에 힘이 빠졌다.
거리. 하루에 여덟 시간을 나와 삼 미터 안에서 보내는 사람. 삼 년 동안 짝이었던 사람. 학원까지 같은 길로 가고 같은 버스를 타는 사람.
“장부 보여 주세요.”
“다른 분들 이름이…”
“한 줄만요.” 나는 목소리가 커지는 걸 참지 못했다. “제 이름 밑에 한 줄만요.”
주인이 장부를 폈다. 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그는 장부를 나에게 돌려놓고, 손가락으로 한 줄을 짚어서 그 줄만 보이게 했다. 그 배려가 그날 제일 잔인했다.
내 이름이 있었다. 서린. 빌린 것, 집중력. 기간, 석 달. 그 아래 줄에 작은 글씨가 있었다.
이자 출처 — 태오
나는 그 이름을 오래 봤다. 태오는 자기가 뭘 빌려준 줄도 모른다. 계약서도 안 썼고 서명도 안 했고 이 골목에 와 본 적도 없을 것이다. 태오는 그냥 나랑 삼 미터 안에 앉아 있었을 뿐이다.
나는 그 줄에서 눈을 못 뗐다. 글씨가 작았다. 장부에 적힌 다른 이름들도 다 그렇게 작을 것이다. 이 가게는 사람 하나를 한 줄로 적는 곳이었다.
“태오는 계약 안 했어요.”
“계약은 학생이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태오가 내요?”
“이자는 계약자에게 받지 않습니다.” 주인이 장부를 손으로 덮었다. “계약자에게 받으면 아무도 안 빌리니까요. 그렇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건 사기잖아요.”
“뒷면에 적혀 있습니다.”
“취소할게요.”
“취소는 없습니다.”
“그럼 지금 갚을게요.”
“기한 전에는 못 받습니다.” 주인이 장부를 덮었다. “석 달을 빌리셨으니 석 달 뒤에 받습니다.”
“그동안 태오는요.”
주인이 대답했다. 이번에는 바로 대답했고, 그래서 더 나빴다.
“그동안 계속 나갑니다.”
나는 가게에서 나와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갔다. 버스가 두 대 지나가는 동안 앉아 있었다. 머리는 여전히 잘 돌아갔다. 그게 최악이었다. 나는 그 상황을 아주 명료하게, 아주 빠르게, 아주 정확하게 분석하고 있었다. 태오한테서 빼앗은 머리로.
일요일에 태오한테서 문자가 왔다. 야 나 학원 그만둘까 봐. 앉아 있는 게 무서워.
나는 답장을 쓰다가 지웠다. 여섯 번 쓰고 여섯 번 지웠다. 마지막에 보낸 건 한 줄이었다.
내가 어떻게 좀 해 볼게.
보내고 나서 나는 그 문장을 오래 봤다. 어떻게 좀 해 볼게. 나는 태어나서 남한테 그런 말을 해 본 적이 없다. 도와 달라는 말도 못 하는 사람이 도와주겠다는 말은 어떻게 했는지 나도 모르겠다.
무슨 수로 해 볼 건지는 아직 몰랐다. 아는 건 하나였다. 이자를 어디선가 구해 와야 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