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055자) · 하빈 · 10월 21일

한 뼘

내가 일등을 하자 짝꿍이 망가졌다 · 문가온

셋째 주 수요일이었다. 십월 이십일일. 계약한 지 이십일 일째. 나는 날짜를 세고 있었다. 이십 일 동안 하루 두 시간, 사십 시간의 머리. 나는 그 시간을 쓰는 사람이 나라는 걸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쓰는 사람과 값을 치르는 사람이 다를 수 있다는 걸, 열일곱은 모른다. 학교에서 그런 건 안 가르친다.

이교시 수학 시간에 나루가 필통을 열었다. 닫았다. 열었다. 닫았다. 나는 처음에는 세지 않았다. 세 번째부터 셌다. 여섯 번이었다. 필통은 검은 천 필통이고 지퍼가 하나다. 지퍼 소리가 작게 났다. 지익, 지익. 나루는 뭘 꺼내지 않았다. 열고 안을 보고 닫았다. 샤프는 손에 쥔 채였다.

삼 년 동안 나루가 수업 시간에 필통을 여는 걸 나는 본 적이 없다. 나루는 샤프 하나, 지우개 하나, 빨간 볼펜 하나를 아침에 꺼내 놓고 종례 때까지 안 넣는다. 그게 태오다. 남들이 필통을 뒤지는 시간에 나루는 한 문제를 더 푼다.

칠판에 도형이 있었다. 선생님이 보조선을 그었다. 나루가 그 선을 보다가 문제집으로 눈을 내렸다가 다시 칠판을 봤다. 그러고는 필통을 열었다. 일곱 번째.

쉬는 시간에 나루가 눈을 눌렀다. 엄지와 검지로 양쪽 눈두덩을 안쪽으로 밀었다. 눈을 감고. 나는 그 손을 봤다. 손톱 밑이 하얬다. 세게 누르고 있었다.

“머리 아파?”

“아니.”

나루가 손을 뗐다. 눈가에 손가락 자국이 빨갛게 남았다.

“눈 뒤가 좀. 조여.”

“병원 가.”

“잠을 못 자서 그래.”

나루는 문제집을 다시 폈다. 나는 내 문제집을 폈다. 우리 팔꿈치 사이 한 뼘. 그 한 뼘 너머에서 나루가 한 쪽을 읽었다. 읽고 나서 필통을 열었다. 닫았다. 다시 첫 줄로 갔다.

“나루.”

“어.”

“왜 자꾸 열어.”

나루가 잠깐 멈췄다. 샤프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아주 작게, 옆 사람만 들리게 말했다.

“읽으면 앞이 없어져.”

교실이 시끄러웠다. 준기가 뒤에서 누구 의자를 끌고 있었고 창가에서 누가 웃었다. 그 소리들이 다 멀어졌다. 나는 내 귀 안에서 뭔가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읽고 있는 줄은 보이는데 그 위 줄이 지워져. 다음 줄로 가면 방금 줄이 지워지고. 한 쪽 다 읽으면 아무것도 안 남아.” 나루가 필통 지퍼를 만졌다. “그래서 여닫아. 여닫으면 처음부터 다시 읽게 되거든. 그럼 조금 남아.”

“언제부터?”

“삼 주쯤.”

“……”

“괜찮아. 잠 못 자서 그래. 엄마가 요새 야간을 이틀 연속으로 서서 내가 새벽에 편의점 나가.”

나는 그 증상을 안다. 그건 내 증상이었다. 읽는 줄 위가 지워지는 것. 한 쪽을 다 읽고 나면 아무것도 안 남는 것. 아무한테도 설명해 본 적 없는 것. 나는 그것을 이십 일 전에 잃었다. 잃었다고 생각했다. 잃은 게 아니었다. 옮겨 갔다. 한 뼘 옆으로.

가장 가까운 사람. 나는 그 말을 좁게 읽었다. 가족. 엄마는 밤에 늦게 온다. 그렇게 정하고 편해했다. 정하고 나니까 편했다고 나는 버스에서 생각했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누구인지 나는 삼 년 동안 매일 알았다. 팔꿈치 한 뼘. 몰랐던 게 아니라 안 봤다.

삼교시가 시작됐다. 나는 칠판을 봤다. 글씨가 보였다. 다 보였다. 위의 줄이 지워지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잘 보고 있었고, 그게 옆에서 오고 있었다.

사교시에 나는 시험을 해 봤다. 국어 지문 한 쪽.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눈을 감았다. 첫 문장이 있었다. 마지막 문장도 있었다. 가운데도 있었다. 눈을 뜨고 옆을 봤다. 나루가 같은 지문의 두 번째 문단을 읽고 있었다. 세 번째로. 필통 지퍼가 열려 있었다. 나는 그 지문이 뭐였는지 지금도 말할 수 있다. 나루는 그날 그 지문을 끝까지 못 읽었다.

점심을 못 먹었다. 급식실에서 식판을 들고 앉았는데 숟가락이 안 올라갔다. 준기가 맞은편에서 김치를 젓가락으로 집어 들고 말했다.

“야, 오늘 김치 봐. 이거 작년 김치야. 내가 안다. 작년 시월에 이 김치 먹었어. 색깔이 똑같아.”

“김치는 원래 색깔이 똑같아.” 민지가 말했다.

“아니야. 김치도 나이를 먹어. 얘 지금 재수생이야.”

나는 웃어야 하는 자리에서 웃지 못했다. 준기가 나를 봤다.

“하빈이 왜 저래. 김치한테 미안해?”

나루가 식판을 들고 옆에 앉았다. 밥을 먹었다. 밥을 먹으면서 한 번 눈을 눌렀다. 아무도 안 봤다. 나만 봤다.

야자를 뺐다. 담임한테는 병원이라고 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나는 아픈 데를 고치러 가는 중이었다. 다만 아픈 사람이 내가 아니었다.

저녁 일곱 시. 학원가는 이십 일 전과 똑같았다. 본 입시 오 층 불, 그 아래 수학, 영어, 컵밥. 학원 버스. 교복. 골목. 실외기. 상자. 문. 문에 붙은 종이. 있는 것을 빌려드립니다. 손님은 하루에 셋만 받습니다. 나는 그 종이를 이번에는 끝까지 읽었다. 셋만 받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이제 알 것 같았다. 셋이면 이자 낼 사람도 셋이다.

문고리를 잡는데 안에서 문이 먼저 열렸다. 남자애 하나가 나왔다. 교복이 우리 학교 게 아니었다. 회색 조끼에 남색 넥타이, 길 건너 사립 교복. 본 입시 로고가 박힌 가방. 손에 A4 한 장을 반으로 접어 들고 있었다. 접힌 종이 끝에 조항 번호가 보였다. 그 애는 나를 봤고, 내 교복을 봤고,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런데 얼굴이 밝았다. 이십 일 전 내 얼굴이 저랬을 것이다. 두 시간을 다 쓴 다음 날 아침 나루가 잘 잔 얼굴이라고 한 그 얼굴. 그 애는 골목을 나가면서 종이를 가방 앞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뒷면은 안 읽은 채로 접혀 있었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면, 접힌 자리가 앞면 서명란 바로 아래였기 때문이다. 나도 거기서 접었다.

가게 안은 밝았다. 형광등. 흰 벽. 계산기. 주인이 장부에 뭔가를 적고 있었다. 이번에도 고개를 안 들었다.

“오늘 셋은 다 오셨습니다.”

“저는 손님 아니에요.”

“그래서 받습니다.”

“반환일은 일월 일일입니다. 아직 멀었어요.”

“장부 보여 주세요.”

주인이 볼펜을 놓았다.

“보여 드릴 수 없습니다.”

“제 거잖아요. 제 이름 적은 거.”

“학생 이름은 학생 겁니다. 그 아래 줄은 학생 것이 아닙니다.”

나는 계산대를 잡았다. 계산대는 차가웠다. 스테인리스. 그 위에 계산기. 계산기 액정에 숫자가 없었다. 꺼져 있었다. 그 꺼진 계산기가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누구예요.”

“말씀드리지 않습니다.”

“어떻게 재요. 가깝다는 걸.”

주인이 처음으로 나를 봤다. 그 사람 눈은 피곤하지도 않고 맑지도 않았다. 그냥 정확했다.

“거리로 잽니다. 계약하신 주에, 삼 미터 안에서, 하루 여덟 시간 가장 오래 앉아 계셨던 분.”

“학교요.”

“그럴 겁니다.”

“옆자리요.”

주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것이 대답이었다.

“취소할게요.”

“취소는 없습니다.”

“그럼 안 쓸게요. 안 쓰면 안 나가는 거죠. 십분의 일이니까.”

“안 쓰시면 안 나갑니다.” 주인이 장부를 반쯤 덮었다. “쓰실 겁니다.”

“안 써요.”

“빌려드린 건 학생 안에 있던 겁니다. 없던 걸 드린 게 아니라 꺼내 드린 겁니다. 꺼내진 건 다시 넣을 수 없어요. 반환일까지는요. 학생은 오늘 밤에도 쓰실 겁니다. 안 쓰려고 애쓰는 것도 쓰는 겁니다.”

“그동안 나간 건요.”

“그동안 계속 나갑니다. 오늘까지 나간 건 돌아오지 않습니다. 반환일에 빌린 것이 돌아가면 그때부터 안 나갑니다.”

“제가 대신 낼게요. 제 걸로.”

“제8조입니다. 계약자에게서는 받지 않습니다.”

“왜요.”

주인이 볼펜을 손가락 사이에서 한 바퀴 돌렸다. 그 동작이 너무 익숙해서, 이 사람이 이 질문을 몇 번이나 받았는지 알 것 같았다.

“받으면 아무도 안 빌리니까요. 자기 것을 잃는 건 다들 견딥니다. 남의 것을 잃게 하는 건 못 견딥니다. 그래서 그 조항은 뒷면에 있습니다. 앞면에 두면 아무도 서명 안 하거든요.”

“그건 사기예요.”

“앞면 다섯째 조항을 읽으셨습니까?”

나는 읽었다. 곁에 스스로 앉는 자. 시 같은 조항. 나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지금도 몰랐다.

“그게 무슨 뜻인데요.”

“규칙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제가 설명하면 그건 규칙이 아니라 제 말이 됩니다. 제 말은 틀릴 수 있어요. 규칙은 안 틀립니다.”

주인이 장부를 폈다. 내 이름이 있는 쪽이 아니었다. 다른 쪽. 그 사람은 거기에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나는 그 자리에 더 서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발이 안 떨어졌다. 형광등이 윙 소리를 냈다. 나는 그 소리를 이십 일 전에는 못 들었다. 지금은 들렸다. 들리는 것도 집중이었다. 그것도 옆에서 오는 거였다.

“한 가지만요.”

“네.”

“그 사람, 아파요?”

주인이 볼펜을 멈췄다.

“이자가 나갈 때는 눈 뒤가 조입니다. 많이 나가면 두통. 그 정도입니다.”

“많이 나가면요.”

“학생이 많이 쓰시면요.”

가게를 나왔다. 종이 두 번 울렸다. 골목에 실외기 바람이 미지근하게 불었다. 나는 상자 옆에 서서 손을 봤다. 손톱을 물어뜯은 자국. 나는 그 자국을 이십 일 동안 안 만들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 이십 일 동안 나루는 필통을 열었다 닫았다.

집에 와서 나는 문제집을 안 폈다. 책상에 앉지도 않았다. 침대에 누웠다. 불을 켜 놓고 천장을 봤다. 안 쓰면 된다. 안 쓰면 안 나간다.

천장에 벽지 무늬가 있었다. 작은 마름모. 나는 그것을 세고 있었다. 세려고 한 게 아니었다. 세어졌다. 가로로 마흔둘. 세로로 스물아홉. 나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니까 오늘 낮에 본 칠판 도형이 떠올랐다. 보조선까지. 그 도형이 저절로 풀렸다. 나는 풀려고 하지 않았다. 풀려고 하지 않는데 풀리는 것을 멈추는 방법이 없었다. 꺼내 쓰는 게 아니라 이제 그게 꺼내져 있었다. 주인 말이 맞았다. 안 쓰려고 애쓰는 것도 쓰는 거였다.

나는 나루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았다. 스터디 본 오 층. 관리형 독서실. 오늘 세 시간을 채워야 한다. 그 자리에서 나루는 지금 한 쪽을 읽고 있을 것이다. 위의 줄이 지워지고 있을 것이다. 필통을 열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보고 있는 것처럼 알았다. 잘 보는 것. 잘 아는 것. 그게 지금 이 방에서 내 안에 켜져 있는 거였고, 그 값을 오 층 독서실에서 내는 중이었다.

나는 불을 껐다. 어둠 속에서도 머리는 돌아갔다.

2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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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곱줄2026.06.09· 2화

    첫 문단에서 이미 분위기가 잡히네요. 다음 화 기다립니다.

    • 문가온작가2026.06.10

      첫 문단은 언제나 제일 오래 붙잡고 있는 자리예요. 다음 화도 이어서 읽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