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석 달
빌린 재능 · 문가온
빌린 첫 주에 나는 내 인생을 다시 봤다.
수학 문제집 한 단원을 사십 분에 끝냈다. 예전 같으면 두 시간 반이었고, 그 두 시간 반 중 한 시간은 휴대폰을 봤다가 죄책감을 느꼈다가 다시 보는 데 썼다. 지금은 그 회로가 아예 없다. 앉으면 켜지고 켜지면 끝까지 간다.
둘째 주에 나는 조금 무서워졌다. 잘돼서 무서운 게 아니라, 이게 원래 내 것이라는 게 무서웠다. 주인은 없는 걸 빌려주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니까 이건 내 안에 있던 것이다. 열일곱 해 동안 내 안에 있었는데 나는 그걸 못 꺼내 쓰고 살았다는 뜻이다. 그 생각을 하면 지난 열일곱 해가 통째로 억울해졌다.
둘째 주 목요일에 나는 처음으로 야자를 끝까지 했다. 예전에는 아홉 시쯤 되면 눈이 글자 위에서 미끄러졌는데 그날은 열 시 반까지 미끄러지지 않았다. 집에 오는 길에 나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기쁜데 어딘가 빚진 것 같은 기분. 나는 그걸 기말이 다가와서 그런 거라고 정리했다. 사람은 설명이 필요하면 아무 설명이나 하나 만들어서 붙인다.
셋째 주 월요일에 태오가 이상해졌다.
토요일에 나는 태오네 집 앞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초인종을 누르면 뭐라고 할지 정하지 못해서였다. 야 너 요즘 왜 그래, 라고 물으면 태오는 모른다고 할 것이다. 모르는 사람한테 내가 아는 것을 말하려면 처음부터 다 말해야 한다. 나는 그걸 못 할 것 같았다.
태오는 우리 반에서 제일 오래 앉아 있는 애다. 오래 앉아 있는데 티를 안 낸다. 쉬는 시간에도 문제집을 덮지 않고 그냥 엎드려 있다가 일어나서 다음 문제를 푼다. 나는 그런 애를 처음 봤고, 솔직히 말하면 조금 미워했다.
그날 태오는 삼 교시 내내 창밖을 봤다.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냥 컨디션이 안 좋은가 보다 했다. 사 교시에도 창밖을 봤고, 다섯째 시간에는 필통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다시 열었다. 그 동작을 여섯 번 했다. 나는 그걸 세고 있었다. 요즘 나는 뭐든 정확히 센다.
“야, 너 왜 그래?”
“몰라.” 태오가 필통을 또 열었다. “안 돼. 안 붙어 있어.”
“뭐가?”
“그냥…” 태오가 말을 고르다가 포기했다. “문제를 읽었는데, 다 읽으면 앞이 없어져.”
나는 그 문장을 듣고 손끝이 차가워졌다. 그건 삼 주 전까지 내가 매일 겪던 일이었다. 나는 그 감각을 아주 정확히 안다. 읽고 있는 줄은 보이는데 그 위의 줄이 지워진다. 다시 올라가면 아래가 지워진다. 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다가 종이 친다.
“병원 가 봐.” 내가 말했다. 그것 말고는 할 말이 없었다.
수요일에 태오는 수학 시간에 필통을 떨어뜨렸다. 금요일에는 자습 시간에 엎드려 잤다. 나는 태오가 자는 걸 삼 년 만에 처음 봤다.
목요일 밤에 나는 처음으로 그 생각을 했다. 내가 잘된 만큼 누가 못 되고 있는 것 아닌가. 그 생각은 논리도 근거도 없었고, 그래서 더 빨리 왔다. 나는 그것을 밀어냈다가 삼십 분 뒤에 다시 꺼냈다가 또 밀어냈다. 그날 나는 한 문제도 못 풀었다. 빌린 뒤로 처음이었다.
금요일 저녁에 나는 학원가 뒷골목으로 갔다. 문에 종이가 그대로 붙어 있었다. 있는 것을 빌려드립니다.
“오늘은 두 번째 손님이시네요.” 주인이 말했다.
“빌린 게 어디서 오는 거예요?”
주인이 계산기를 옆으로 밀었다. “학생 안에서요.”
“그럼 왜 갑자기 잘돼요? 원래 내 거면 원래 잘됐어야죠.”
“꺼내 쓰는 걸 제가 도와드린 겁니다.”
“그러면 이자는요.” 나는 계약서를 꺼내 뒷면을 폈다. 손이 좀 떨렸다. “같은 종류로 갚는다면서요. 그 이자가 지금 어디 있어요?”
주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얼굴이 아니라, 학생이 스스로 도달하기를 기다리는 얼굴이었다. 나는 그 얼굴을 학교에서 아주 많이 봤다. 그런 얼굴은 대개 답이 나쁠 때 나온다.
“장부 보여 주세요.”
“보여 드릴 수 없습니다.”
“왜요?”
“다른 분들 이름이 있으니까요.”
나는 그 말에서 알아 버렸다. 다른 분들. 나는 그날 가게에서 나와 골목 끝까지 걸어가서, 벽에 손을 짚고 한참 서 있었다.
골목 끝에서 나는 세 가지를 정리했다. 첫째, 이자는 같은 종류로 나간다. 둘째, 태오는 삼 주 전부터 집중을 못 한다. 셋째, 내가 빌린 것이 집중력이고 빌린 날이 삼 주 전이다.
정리하는 데 십 초도 안 걸렸다. 빌리기 전이었으면 이걸 사흘은 붙들고 있었을 것이다.
이자는 미래에서 오는 게 아니었다. 이미 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