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있는 것을 빌려드립니다

빌린 재능 · 문가온

학원가 뒷골목에 간판 없는 가게가 하나 있다. 문에 종이 한 장이 붙어 있다. 있는 것을 빌려드립니다. 손님은 하루에 셋만 받습니다.

나는 그 종이를 작년에도 봤다. 작년에는 문고리까지 잡았다가 돌아섰다. 돌아선 이유는 지금 생각해도 우습다. 안에 아는 사람이 있으면 어떡하지, 였다. 나는 그런 걸 걱정하느라 열일곱 살까지 아무것도 못 해 본 사람이다.

이번에는 들어갔다.

가게 안은 밝았다. 나는 어둡고 향 냄새 나는 곳을 상상했는데 형광등이 켜져 있고 계산대 위에 계산기가 있었다. 계산기가 있다는 게 왜인지 제일 무서웠다.

주인은 나이를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스물여덟 같기도 하고 쉰 같기도 했다. 그가 나를 보고 말했다. “세 번째 손님이시네요.”

“…뭘 빌려주는 데예요?”

“이미 갖고 계신 걸 빌려드립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갖고 있으면 왜 빌려요?”

주인이 계산기 옆의 장부를 폈다. “갖고 있는 것과 쓸 수 있는 건 다르니까요. 학생은 집중을 못 하는 게 아니라, 집중을 꺼내 쓰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겁니다. 세 시간 앉으면 마흔 분 정도 쓰시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건 아무한테도 말한 적이 없는 숫자였다. 나는 늘 여섯 시간 앉아 있었고 여섯 시간 앉아 있었다는 사실로 나를 위로했고, 실제로 머리가 돌아간 시간이 얼마인지는 세지 않으려고 애썼다.

“기간은 네 가지입니다. 하루, 한 달, 석 달, 평생.”

“평생도 있어요?”

“있습니다.” 주인이 처음으로 나를 똑바로 봤다. “권하지는 않습니다.”

“하루는 왜 있어요? 하루 빌려서 뭐 해요?”

“면접 보는 분들이 하루를 빌리십니다. 한 달은 대개 수험생이고요.” 주인이 장부를 넘겼다. “석 달은 드뭅니다. 석 달쯤 되면 사람이 그 상태에 익숙해지거든요. 익숙해진 걸 돌려드릴 때가 제일 아픕니다.”

나는 그 말을 흘려들었다. 그때 내 머릿속에는 기말고사 날짜밖에 없었다. 사람은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듣는 게 아니라, 급할 때는 아예 아무것도 안 듣는다.

기말이 십일 주 남아 있었다. 나는 석 달을 골랐다.

가게를 나가기 전에 나는 벽에 걸린 액자를 봤다. 액자 안에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는데 글씨가 아주 오래된 것이었다. 여기서 빌린 것은 반드시 돌아온다, 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그것을 위로하는 문장으로 읽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건 위로가 아니라 경고였다.

계약서는 한 장이었다. 앞면에 조항이 여섯 개 있었다. 빌리는 것은 집중력, 기간은 석 달, 반환일은 날짜까지 적혀 있었다. 다섯 번째 조항이 이상했다. 반환 시 이자를 더한다.

“이자가 얼마예요.”

“빌린 것의 십분의 일입니다.”

“돈으로요?”

“아니요.” 주인이 계약서를 뒤집으려고 손을 댔다. “뒷면에 적혀 있습니다. 읽어 보시겠어요?”

바로 그때 가게 문이 열렸다. 네 번째 손님이었다. 오늘은 셋까지라고 주인이 말했고, 손님이 그럴 리가 없다고 했고, 둘이 문 앞에서 실랑이를 했다. 나는 그 틈에 서명했다.

나는 지금도 그 삼십 초를 생각한다. 나는 뒷면을 읽을 수 있었다. 시간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읽으면 안 할 것 같아서 안 읽었다. 사람이 자기를 속이는 데는 삼십 초면 충분하다.

“서명하셨네요.” 주인이 돌아와서 말했다. 화를 내지도 않았고 안타까워하지도 않았다. “그럼 오늘부터입니다.”

집에 오는 길에 나는 계약서를 꺼내 뒷면을 봤다. 조항이 두 개뿐이었다.

제7조. 이자는 빌린 것과 같은 종류로 받는다. 집중력은 집중력으로, 기억력은 기억력으로 갚는다.

제8조. 기한 내에 갚지 못하면, 채무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넘어간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그 두 줄을 다섯 번 읽었다. 여덟 번째 조항의 '가장 가까운'이 무슨 기준인지 적혀 있지 않았다. 나는 그 말을 좁게 읽고 싶었다. 가족이겠지. 아니면 같이 사는 사람이겠지.

그날 밤 나는 두 시간을 앉아 있었고, 두 시간을 다 썼다. 마흔 분이 아니라 백이십 분이었다. 나는 그게 무서워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날은 무섭지 않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머리가 시키는 대로 굴러갔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등굣길에 그 골목을 일부러 지나갔다. 셔터가 내려가 있었다. 간판이 없으니 셔터만 보면 그냥 빈 가게였다. 나는 그 앞에서 잠깐 서 있다가 갔다.

좋았다. 그게 문제였다.

이 회차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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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이배2026.06.08· 1

    조용한데 계속 긴장돼요. 이런 톤 좋아합니다.

    • 문가온2026.06.09

      그렇게 읽어 주시니 다음 화 쓰는 게 덜 무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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