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028자) · 하빈 · 10월 1일
있는 것을 빌려드립니다
내가 일등을 하자 짝꿍이 망가졌다 · 문가온
학원가 뒷골목에 간판 없는 가게가 하나 있다. 문에 종이 한 장이 붙어 있다. 있는 것을 빌려드립니다. 손님은 하루에 셋만 받습니다.
나는 그 종이를 작년에도 봤다. 작년 시월에는 문고리까지 잡았다가 돌아섰다. 돌아선 이유는 지금 생각해도 우습다. 안에 아는 사람이 있으면 어떡하지, 였다. 나는 그런 걸 걱정하는 사람이다. 시험을 망치는 것보다 시험을 망칠까 봐 뭘 했다는 걸 남이 아는 게 더 무섭다. 그래서 나는 늘 아무것도 안 한다. 아무것도 안 하고 여섯 시간을 앉아 있는다.
시월 일일 목요일. 저녁 일곱 시. 서담동 학원가는 층마다 간판이 켜져 있었다. 본 입시 오 층, 그 아래 수학 전문, 그 아래 영어 회화, 그 아래 컵밥. 학원 버스가 아이들을 쏟아 놓고 떠났다. 교복이 흩어졌다. 나는 그 사이를 뚫고 컵밥집 옆 골목으로 들어갔다. 실외기가 돌았다. 상자가 쌓여 있었다. 그 사이에 문이 있었다. 간판이 없어서 문만 있었다. 그 문에만 안쪽 불이 켜져 있었다.
이번에는 들어갔다.
가게 안은 밝았다. 나는 어둡고 향 냄새 나는 곳을 상상했는데 형광등이 켜져 있고 흰 벽이 있고 계산대 위에 계산기가 있었다. 선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촛불도 부적도 없었다. 문구점 같았다. 문구점인데 파는 물건이 없었다. 계산기가 있다는 게 왜인지 제일 무서웠다. 계산기가 있다는 것은 셈을 한다는 뜻이고, 셈을 한다는 것은 여기서 무언가가 정확히 오간다는 뜻이었다.
주인은 나이를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스물여덟 같기도 하고 쉰 같기도 했다. 흰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고 두꺼운 장부에 뭔가를 적고 있었다. 고개를 안 들고 말했다.
“세 번째 손님이시네요.”
“뭘 빌려주는 데예요?”
“이미 갖고 계신 걸 빌려드립니다.”
“갖고 있으면 왜 빌려요?”
주인이 볼펜을 놓았다. 그러고는 계산기 옆 장부를 반쯤 덮었다. 다른 사람 이름이 보이지 않게.
“갖고 있는 것과 쓸 수 있는 건 다르니까요. 학생은 집중을 못 하는 게 아니라 집중을 꺼내 쓰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겁니다. 여섯 시간 앉아 계시죠. 머리가 돌아가는 건 사십 분이고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건 아무한테도 말한 적이 없는 숫자였다. 나는 늘 여섯 시간 앉아 있었고, 여섯 시간 앉아 있었다는 사실로 나를 위로했고, 실제로 머리가 돌아간 시간은 사십 분이었다. 사십 분이 지나면 읽고 있는 줄은 보이는데 그 위의 줄이 지워진다. 다음 줄로 가면 방금 읽은 줄이 지워진다. 그렇게 한 쪽을 다 읽고 나면 아무것도 안 남는다. 나는 그것을 아무한테도 설명해 본 적이 없다. 설명하면 그냥 공부 안 하는 애로 들리니까.
“기간은 네 가지입니다. 하루, 한 달, 석 달, 평생.”
“평생도 있어요?”
“있습니다.” 주인이 처음으로 나를 똑바로 봤다. “권하지는 않습니다.”
“하루는 왜 있어요?”
“면접 보는 분들이 하루를 빌리십니다. 한 달은 대개 수험생이고요. 석 달은 드뭅니다.” 주인이 장부를 넘겼다. “석 달쯤 되면 사람이 그 상태에 익숙해지거든요. 익숙해지면 원래 자기가 어땠는지 잊습니다.”
나는 그 말을 흘려들었다. 그때 내 머릿속에는 기말고사 날짜밖에 없었다. 십이월 십오일. 십일 주. 사람은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듣는 게 아니라, 급할 때는 아예 아무것도 안 듣는다.
“석 달이요.”
주인이 서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A4. 앞면에 조항이 여섯 개 번호로 나뉘어 있었다. 빌리는 것, 집중력. 기간, 석 달. 반환일, 일월 일일. 다섯 번째 조항 옆에 손톱으로 눌린 자국이 나 있었다.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이 거기서 멈췄던 자국. 다섯 번째 조항은 이랬다. 대여물의 이자는 차용인이 지정할 수 없다. 다만 차용인 곁에 스스로 앉는 자가 있으면 그 자에게 나뉜다.
나는 그 문장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곁에 앉는 자. 그게 규칙 같지가 않았다. 시 같았다.
“이자가 얼마예요.”
“쓰신 것의 십분의 일입니다.”
“돈으로요?”
“아니요.” 주인이 종이를 뒤집으려고 손을 댔다. “뒷면에 적혀 있습니다. 읽어 보시겠어요?”
바로 그때 가게 문이 열렸다.
네 번째 손님이었다. 마흔 중반의 남자. 남색 양복에 넥타이. 본 입시 대표 구본혁. 나는 그 사람 얼굴을 안다. 학원가 건물 옆면에 그 사람 얼굴이 삼 층 높이로 붙어 있다. 설명하면 이해되고 이해되면 오른다. 그 사람은 문을 열자마자 계산대 쪽으로 걸어왔다. 나를 봤다. 교복을 봤다. 그러고는 나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여 사장, 오늘 하나 더 받아 줘야겠어.”
“오늘은 셋까지입니다.”
“하나만. 우리 애들 중에 급한 애가 있어서.”
“내일 오시면 됩니다.”
“내일은 내가 못 와.”
두 사람이 문 앞에서 실랑이를 했다. 실랑이라고 하기엔 주인은 목소리를 안 높였고, 구본혁은 목소리를 높였다. 그 사람 목소리는 크고 매끄러웠다. 설명하는 목소리. 그 목소리가 형광등 아래에서 벽에 부딪혀 튕겼다. 나는 계산대 앞에 혼자 남아 있었다. 계약서와 볼펜과 함께. 앞면 맨 아래에 서명란이 있었다.
나는 지금도 그 삼십 초를 생각한다. 나는 뒷면을 읽을 수 있었다. 시간이 없었던 게 아니다. 읽으면 안 할 것 같아서 안 읽었다. 사람이 자기를 속이는 데는 삼십 초면 충분하다.
나는 서명했다.
구본혁이 돌아섰다. 나를 다시 봤다. 이번에는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사람은 내 손에 든 볼펜을 봤고, 계약서를 봤고, 뭔가를 계산하는 얼굴을 했다. 그 얼굴은 삼 층짜리 광고판의 얼굴과 달랐다. 훨씬 빨랐다.
“학생, 어디 학교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구본혁이 웃었다.
“서담고 교복이네. 우리 학원 안 다니지? 다니면 알 텐데.”
“뭘요.”
“빌리는 데 돈 안 들지만 공짜는 아니라는 거.”
그 사람은 그 말을 하고 나갔다. 문 위에 달린 종이 두 번 울렸다. 열 때 한 번, 닫힐 때 한 번. 주인이 돌아왔다. 내 계약서를 봤다. 서명을 봤다. 화를 내지도 않았고 안타까워하지도 않았다.
“서명하셨네요.”
“네.”
“그럼 오늘부터입니다.”
“아까 그 사람, 뭘 빌렸어요?”
“다른 분 것은 말씀드리지 않습니다.”
주인이 장부를 폈다. 내 이름을 적었다. 하빈. 빌린 것, 집중력. 기간, 석 달. 그 아래에 한 줄을 비워 두었다. 나는 그 빈 줄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때는.
가게를 나가기 전에 벽에 걸린 액자를 봤다. 싸구려 액자 안에 아주 오래된 종이 한 장. 다른 물건은 다 새것인데 그것만 오래됐다. 글씨가 굵고 먹빛이었다. 여기서 빌린 것은 반드시 돌아온다. 나는 그것을 위로로 읽었다. 돌아온다니까 괜찮다고. 그것이 경고라는 것은 한참 뒤에 알았다.
집에 오는 길에 나는 버스 안에서 계약서를 꺼냈다. 뒷면을 봤다. 조항이 두 개뿐이었다. 앞면과 달리 아래가 텅 비어 있었다. 그 여백이 무서웠다.
제7조. 이자는 빌린 것과 같은 종류로 받는다. 집중력은 집중력으로, 기억력은 기억력으로 갚는다.
제8조. 이자는 차용인에게 받지 않는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받는다.
나는 그 자리에 앉아 그 두 줄을 다섯 번 읽었다. 버스가 세 정거장을 갔다. 가장 가까운 사람. 그게 무슨 기준인지 적혀 있지 않았다. 나는 그 말을 좁게 읽고 싶었다. 가족이겠지. 엄마는 밤에 늦게 오고 나는 방에 혼자 있다. 가까운 사람이 없으면 아무한테서도 안 받겠지. 나는 그렇게 정했다. 정하고 나니까 편했다.
그날 밤 나는 두 시간을 앉아 있었고, 두 시간을 다 썼다.
사십 분이 아니라 백이십 분이었다. 수학 문제집 한 단원. 읽은 줄이 지워지지 않았다. 위의 줄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지문을 다 읽었는데 지문이 남아 있었다. 그런 일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나는 무서워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날은 무섭지 않았다. 연습장이 여섯 장 나왔다. 연필심이 닳았다. 지우개 가루가 책상에 그대로였다. 나는 그 가루를 안 치우고 잤다. 치우면 사라질 것 같아서.
자기 전에 엄마가 왔다. 열한 시 사십 분. 마트 마감조는 열한 시에 끝나고 버스가 이십 분 걸린다. 엄마는 현관에서 내 방 문틈의 불빛을 봤을 것이다. 늘 보는 불빛이다. 나는 늘 그 시간까지 불을 켜 두니까. 다른 점은 엄마가 모르는 데 있었다. 그 불빛 아래에서 오늘은 내가 진짜로 뭘 했다는 것. 엄마가 문을 두드리지 않고 말했다.
“밥은.”
“먹었어.”
“자.”
“응.”
엄마는 내 성적을 물어본 적이 없다. 물어보면 내가 여섯 시간 앉아 있는 게 헛것이 될까 봐 안 물어보는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도 내 생각이다. 물어본 적이 없으니까. 우리 집은 그런 집이다. 서로 안 물어보는 걸로 서로를 봐준다. 문틈으로 엄마 발소리가 부엌으로 가는 게 들렸다. 냉장고 문. 물 따르는 소리. 마트 조끼를 벗어 의자에 거는 소리까지 들렸다. 그러고는 방문 닫히는 소리. 나는 연습장 여섯 장을 다시 넘겨 봤다. 내 글씨였다. 내 글씨가 여섯 장이나 있는 걸 처음 봤다. 연필이 종이를 누른 자국이 뒷장까지 배어 있었다. 손에 힘이 들어갔던 모양이다. 나는 그 자국을 손끝으로 만져 봤다. 울퉁불퉁했다.
다음 날 아침 등굣길에 나는 그 골목을 일부러 지나갔다. 셔터가 내려가 있었다. 간판이 없으니 셔터만 보면 그냥 빈 가게였다. 나는 그 앞에 잠깐 서 있다가 갔다.
학교에 가니 나루가 먼저 와 있었다. 삼 년째 내 짝. 중학교 삼 학년 때 번호가 붙어서 짝이 됐고, 고등학교에 와서도 어쩌다 같은 반 같은 줄이 됐다. 나루는 우리 반에서 제일 오래 앉아 있는 애다. 오래 앉아 있는데 티를 안 낸다. 쉬는 시간에도 문제집을 덮지 않는다. 나루네는 엄마가 편의점 야간을 한다. 나루는 그 이야기를 한 번 했고 다시는 안 했다. 대신 앉아 있었다. 본 입시 장학생이다. 스터디 본 오 층 관리형 독서실에서 하루 여덟 시간을 채우면 학원비가 없다. 나루는 한 번도 못 채운 적이 없다.
“야, 너 얼굴이 왜 그래.”
나루가 나를 보고 말했다.
“뭐가?”
“잘 잔 얼굴이야.”
나는 웃었다. 나루가 다시 문제집으로 고개를 숙였다. 우리 책상 두 개는 붙어 있다. 나루 팔꿈치와 내 팔꿈치 사이가 한 뼘이다. 삼 년 동안 그랬다. 나는 그 한 뼘을 그날 처음으로 봤다. 왜 봤는지 모르겠다. 그냥 눈에 들어왔다.
좋았다. 그게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