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별칭
목욕탕 장부의 이름들 · 백해원
이레가 지나고 열흘이 지났다. 사람들은 나를 아궁이라고 부른다. 내가 아궁이를 맡았으니까. 여기서는 다들 그렇게 불린다. 물지게를 지는 사람은 물지게, 수건을 개는 사람은 수건, 계산을 하는 사람은 셈. 일이 곧 이름이다.
열이틀째에 나는 그것이 편하다고 느꼈다. 편하다고 느낀 것이 무서웠다. 이름이 있으면 그 이름에 딸린 것들이 따라온다. 갚아야 할 빚, 두고 온 집, 나를 그렇게 부르던 사람들. 아궁이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아궁이는 불만 넣으면 된다. 열이틀 만에 나는 그게 얼마나 가벼운지 알아 버렸고, 알아 버린 다음에는 되돌리기가 어려웠다.
열나흘째 밤에 서기가 장부실 문을 열어 두었다. 일부러 열어 둔 것이었다. 나는 들어갔다.
“앉으세요.” 그가 차를 두 잔 놓았다. “연희 씨.”
나는 찻잔을 놓쳤다. 깨지지는 않았다. 뜨거운 물이 손등에 튀었는데 뜨거운 줄도 몰랐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연희 씨.”
내 이름이었다. 열나흘 동안 아무도 부르지 않은 것. 나 자신도 겨우 떠올리던 것. 그것이 남의 입에서 나와서 내 쪽으로 왔다.
“어떻게 부르세요.”
“저는 장부를 지키니까요.”
“장부를 지키면 부를 수 있어요?”
“읽을 수는 있습니다.”
“읽는 거랑 부르는 거랑 달라요?”
서기가 차를 마셨다. 김이 그의 얼굴 앞에서 흩어졌다. “다릅니다. 읽으면 종이에 있는 걸 보는 거고, 부르면 그 사람한테 돌아갑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손끝이 뜨거워졌다. 열나흘 동안 나는 내가 조금씩 얇아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저녁에 거울을 보면 얼굴은 그대로인데 뒤가 비칠 것 같은 느낌. 지금 그것이 한 겹 두꺼워졌다.
“그럼 매일 불러 주세요.”
서기가 찻잔을 놓았다. “그럴 수 없습니다.”
“왜요.”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횟수가 정해져 있으니까요.”
나는 웃었다. 웃음이 나와서 웃은 것이 아니라 웃지 않으면 다른 것이 나올 것 같아서 웃었다. “그것도 규칙이에요?”
“규칙이 아닙니다.” 그가 장부를 손바닥으로 짚었다. “제가 정한 겁니다.”
“왜 정하셨는데요.”
서기는 오래 대답하지 않았다. 등불이 한 번 흔들렸다. 밖에서 물 끓는 소리가 났고, 누가 수건 광주리를 옮기는 소리도 났다.
“예순한 해 전에.” 그가 말했다. “여기 일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서른일곱 개 중에 제일 오래된 사람이요?”
“예. 그 사람 이름을 제가 매일 불렀습니다.”
“그래서요.”
“그 사람이 못 나갔습니다.”
나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부르면 못 나가요?”
“부르면 여기 남습니다.” 그가 나를 봤다. “이름이 여기 있으니까요. 이름이 여기 있는데 사람이 그 이름을 자꾸 들으면, 사람도 이름 있는 데로 옵니다.”
그날 밤 나는 아궁이 앞에 앉아 있었다. 불이 사그라들 때까지 앉아 있었고, 새벽에 물지게가 지나가면서 말했다. “아궁이, 불 꺼졌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궁이라고 불리는 것이 왜 편했는지 그때 알았다. 편한 게 아니라 가벼운 거였다. 가벼운 것은 오래 들고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오래 들고 있으면, 원래 무거웠다는 걸 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