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636자)

구두 벗고 들어오세요

목욕탕 남북 회담 · 모세담

2028년 12월 6일 수요일 새벽 다섯 시 반⁠, 봉옥자는 통일탕 뒤편 보일러실에서 가스 밸브를 돌렸다⁠. 마흔 해 넘은 보일러는 켜질 때마다 늙은 영감처럼 두 번 기침을 하고 나서야 불을 붙였다⁠. 쇠문 틈으로 파란 불꽃이 보이자 옥자는 보일러 옆구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두 번 쳤다⁠. 고맙다는 인사였다⁠.

여탕 탕에 물이 차오르는 동안 옥자는 탈의실 거울 앞에서 수건을 어깨에 걸었다⁠. 거울 속에 작고 다부진 일흔두 살이 서 있었다⁠. 짧은 흰 꼬불 파마⁠, 꽃무늬 셔츠에 꽃무늬 몸뻬 바지⁠, 분홍 고무장화⁠, 어깨에 흰 수건⁠. 오른손에는 초록 때밀이 장갑을 꼈다⁠. 손녀 채은은 할머니 차림을 보고 꽃밭에서 장화 신고 전쟁 나가는 사람 같다고 했다⁠.

탕 가장자리에 노란 플라스틱 바가지 열두 개를 줄지어 엎었다⁠. 탕 옆 벽에는 못 하나에 낡은 박 바가지를 걸어 두었다⁠. 금이 간 자리를 녹슨 철사로 세 바퀴 감은 바가지였다⁠. 옥자는 철사 매듭을 엄지로 한 번 쓸고 온도계를 탕에 넣었다⁠. 41도⁠. 수요일 아침에는 41도여야 했다⁠. 40도면 정분 언니가 미지근하다고 하고⁠, 42도면 복녀 언니가 혈압이 오른다고 했다⁠. 실은 둘 다 반대로 말한 적도 많았다⁠.

카운터에 앉아 보니 어제 온 고지서가 그대로 있었다⁠. 「⁠11월 도시가스 요금 6⁠,104⁠,000원⁠」⁠. 옥자는 고지서를 네 번 접어 몸뻬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 안에는 이미 접힌 종이가 하나 더 있었다⁠.

*

여섯 시 정각에 유리문이 열리고 찬바람과 함께 할머니들이 들어왔다⁠. 맨 앞은 길정분이었다⁠. 여든네 살⁠, 털모자 위에 목도리를 두 번 감고⁠, 한 손에는 목욕 바구니⁠, 다른 손에는 휴대전화를 들었다⁠.

“⁠옥자야⁠, 단톡방에 물 몇 도냐고 물었는데 왜 답이 없어⁠?⁠”

“⁠언니가 보낸 건 「⁠물몇도ㅋ⁠」였어⁠. ㅋ은 왜 붙여⁠?⁠”

“⁠손가락이 미끄러졌지⁠. 손주 놈이 방을 만들어 놓고 방장을 나 시켰잖아⁠.⁠”

정분의 휴대전화 화면에는 「⁠통일탕 수요반 (⁠11⁠)⁠」이 떠 있었다⁠. 할머니 열한 명이 모인 방이었다⁠. 맨 위 공지에 손주가 적어 준 글이 있었다⁠. 「⁠수요일·토요일 아침 6시⁠~9시 / 사천 원 / 사장님이 등 밀어 주심⁠」⁠.

일반 요금은 구천 원이었다⁠. 목욕날에는 옛날 요금 사천 원만 받고⁠, 옥자가 한 사람씩 등을 밀었다⁠. 남는 게 없다고 아들 재국이 전화로 세 번 따졌고⁠, 옥자는 세 번 다 같은 말로 끊었다⁠. “⁠목욕탕이 남는 장사였으면 진작 다 남았지⁠.⁠”

허복녀가 두 번째로 들어왔다⁠. 여든아홉⁠, 귀가 어두워 남의 말은 반만 듣고 제 말은 꼭 필요한 것만 했다⁠. 신발을 벗으며 복녀가 한마디 했다⁠.

“⁠물 좀 더 뜨겁게⁠.⁠”

“⁠아직 탕에 들어가지도 않았잖아⁠.⁠”

“⁠들어가면 늦어⁠.⁠”

마달순이 떡집에서 남은 절편 한 봉지를 들고 들어오고⁠, 나머지 할머니들이 줄줄이 따라왔다⁠. 탈의실 평상에 바구니 열한 개가 놓이자 통일탕이 비로소 깼다⁠.

옥자는 장갑 낀 손으로 탕 물을 한 번 휘젓고 정분의 등부터 밀었다⁠. 때밀이에도 순서가 있었다⁠. 목덜미에서 어깨뼈까지 세 번 쓸어내리고⁠, 손바닥으로 두 번 툭툭 두드린 다음⁠, 허리로 내려갔다⁠. 쓸 때는 결대로⁠, 두드릴 때는 가볍게⁠. 세 번 쓸고 두 번 두드리는 손은 옥자가 처음 만든 게 아니었다⁠. 시집온 해에 문산 할매에게 손목을 붙잡혀 배운 손이었다⁠.

“⁠아이고⁠, 시원하다⁠. 너 손은 아직 안 늙었다⁠.⁠”

“⁠늙었어⁠. 언니 등이 더 늙어서 그렇게 느끼는 거야⁠.⁠”

휴게실 텔레비전에서 아침 뉴스가 흘러나왔다⁠. 김 서린 유리 너머로 자막이 뿌옇게 보였다⁠. 「⁠남북⁠, 다섯 해 만에 판문점 연락 채널 복구⁠… 고위급 회담 이달 20일 열기로⁠」 「⁠장소는 추후 발표⁠」⁠.

탕 맨 안쪽에 앉은 복녀가 텔레비전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복녀는 열두 살 겨울에 개풍에서 강을 건너왔다⁠. 강을 건넌 다음 날 문산역 앞 목욕탕에서 처음으로 씻었다는 말을 옥자는 서른 번은 들었다⁠. 열 번째부터는 옥자가 먼저 말끝을 받아 주었다⁠.

“⁠장소가 어디래⁠?⁠”

“⁠아직 안 정했대⁠, 언니⁠.⁠”

복녀는 다시 물속으로 어깨를 묻었다⁠. 자막이 바뀔 때까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

여덟 시 십 분⁠, 출입문 종이 울렸다⁠. 옥자는 남의 등을 밀다가 장갑을 낀 채로 카운터로 나갔다⁠.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짙은 갈색 탁자 하나를 끌어안고 서 있었다⁠. 쉰 살쯤⁠, 안경⁠, 목에는 출입증 줄⁠. 탁자 앞판에는 금빛 지구 문양이 박혀 있었다⁠. 남자는 탁자를 안은 채 구두 신은 발로 현관 매트를 지나 젖은 타일 위로 한 발을 내디뎠다⁠.

“⁠구두 벗고 들어오세요⁠!⁠”

옥자의 목소리가 김 속에서 쩌렁 울렸다⁠. 남자의 오른발이 타일 위에서 한 뼘 미끄러졌다⁠. 탁자가 기우뚱했고⁠, 남자는 탁자를 놓지 않으려고 허리를 반으로 꺾었다⁠. 옥자는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초록 장갑 낀 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남자를 붙잡으려던 손이 아니었다⁠. 거기서 멈추라는 손이었다⁠.

남자는 탁자를 바닥에 내려놓고 숨을 골랐다⁠. 안경에 김이 하얗게 서려 눈이 보이지 않았다⁠.

“⁠실례했습니다⁠. 대통령실 의전비서관 남기오입니다⁠.⁠”

“⁠대통령실이고 뭐고 구두는 벗어요⁠. 여기 타일 미끄러워서 작년에 우체국 아저씨 꼬리뼈 금 갔어⁠.⁠”

남기오는 구두를 벗어 현관 매트에 가지런히 놓았다⁠. 검은 양말이 타일에 닿자마자 물을 빨아들였다⁠. 기오는 젖은 발가락을 한 번 꼼지락거리고 안경을 벗어 손수건으로 닦았다⁠. 닦고 쓰자 다시 하얘졌다⁠.

“⁠목욕탕은 처음 와 보셨수⁠?⁠”

“⁠집에서 샤워만 해서요⁠.⁠”

“⁠쉰 살에 처음이면 등에 때가 쉰 해치 있겠네⁠.⁠”

기오는 대답 대신 서류철을 열었다⁠. 서류를 꺼내는 손이 반듯했다⁠. 낱장마다 모서리가 맞았다⁠.

“⁠사장님⁠, 이달 20일 수요일에 남북 고위급 회담이 열립니다⁠. 회담을 이곳 통일탕에서 하려고 합니다⁠.⁠”

옥자는 장갑을 벗지 않고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남북 고위급 회담 장소 협조 요청⁠」⁠. 맨 아래 대통령실 도장이 찍혀 있었다⁠.

“⁠우리 목욕탕에서⁠? 회담을⁠?⁠”

“⁠예⁠. 준비와 검측 때문에 13일부터 20일까지 여드레 동안 건물 전체를 빌리고 싶습니다⁠. 대여료는 평소 하루 매출의 두 배로 드리겠습니다⁠.⁠”

“⁠13일이 무슨 요일이야⁠?⁠”

“⁠수요일입니다⁠.⁠”

“⁠16일은⁠?⁠”

“⁠토요일입니다⁠.⁠”

“⁠20일은⁠?⁠”

“⁠수요일입니다⁠.⁠”

옥자는 장갑 낀 손가락을 세 개 펴 보였다⁠.

“⁠목욕날이 세 번이네⁠. 안 돼⁠.⁠”

“⁠목욕날이 무엇입니까⁠?⁠”

탈의실 문이 벌컥 열리고 정분이 머리에 수건을 감은 채 나왔다⁠. 옷은 다 입었는데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내가 다 들었어⁠. 수요일하고 토요일 아침마다 우리 할머니들 목욕하는 날이야⁠. 사천 원에 등까지 밀어 줘⁠. 서른 해 됐어⁠.⁠”

기오가 정분에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인사 잘하네⁠. 바나나우유 먹어⁠.⁠”

정분은 휴게실 냉장고에서 바나나우유를 꺼내 빨대까지 꽂아 내밀었다⁠. 기오가 근무 중이라 사양하겠다고 하자 정분이 “⁠공짜야⁠.⁠” 하고 빨대를 기오 입에 거의 밀어 넣었다⁠. 기오는 바나나우유를 받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대통령실 의전비서관의 입가에 노란 우유가 묻었다⁠.

“⁠말씀은 알겠습니다⁠. 다만 회담 날에는 대통령께서도 이곳에 오십니다⁠. 회담이 끝날 무렵 두 대표를 만나러 오십니다⁠. 그래서 경호처가 건물 전체를 미리 비우고 살펴야 합니다⁠.⁠”

“⁠대통령이 오면 대통령도 구두 벗어야 돼⁠.⁠”

“⁠전달하겠습니다⁠.⁠”

“⁠내 탕에선 내가 대통령이야⁠.⁠”

기오는 이 말도 수첩에 적었다⁠. 적는 척인지 진짜 적는 건지 옥자는 알 수 없었다⁠.

*

옥자는 카운터 의자에 앉고 기오는 젖은 양말로 카운터 앞에 서 있었다⁠. 김이 두 사람 사이를 천천히 지나갔다⁠.

“⁠다른 데 많잖아⁠. 판문점에 그 좋은 집 있잖아⁠. 텔레비전에 나오던 거⁠.⁠”

“⁠평화의집 말씀이시지요⁠.⁠”

“⁠거기서 해⁠.⁠”

“⁠북측이 이곳을 정했습니다⁠.⁠”

“⁠북에서⁠? 우리 목욕탕을⁠? 왜⁠?⁠”

“⁠아직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말 못 하는 사정으로 남의 목욕날을 빼 달라는 거야⁠?⁠”

기오는 바나나우유를 카운터에 내려놓았다⁠. 빨대 끝이 납작하게 눌려 있었다⁠.

“⁠사장님⁠, 연락 채널이 다시 열리는 데 다섯 해가 걸렸습니다⁠. 이번 회담이 깨지면 다음 정부까지 다시 못 엽니다⁠. 북측이 장소 하나를 조건으로 걸었고⁠, 장소가 틀어지면 회담도 틀어집니다⁠. 여드레만 내주시면 됩니다⁠.⁠”

“⁠할머니들은 여드레를 어디서 씻어⁠?⁠”

“⁠일산 찜질방 이용권을 드리겠습니다⁠. 버스도 대겠습니다⁠.⁠”

“⁠복녀 언니는 찜질방 가면 길 잃어⁠. 작년에 수원 아들 집 갔다가 역에서 세 시간 헤맸어⁠.⁠”

“⁠직원을 붙이겠습니다⁠.⁠”

“⁠등은 누가 밀어⁠?⁠”

기오가 대답하지 못했다⁠. 옥자는 장갑 낀 손을 펼쳐 보였다⁠. 손바닥 쪽 초록 실이 반들반들 닳아 있었다⁠.

“⁠이 장갑이 열한 사람 등을 서른 해 밀었어⁠. 찜질방 이용권으로는 안 밀려⁠.⁠”

기오는 서류철을 덮지 않았다⁠. 대신 맨 뒷장을 넘겨 한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지난달 가스 요금이 육백만 원을 넘으셨지요⁠. 대여료면 두 달 치가 됩니다⁠.⁠”

옥자의 손이 몸뻬 주머니로 갔다가 멈췄다⁠. 주머니 속 고지서가 바스락 소리를 냈다⁠.

“⁠남의 가스 요금은 어떻게 알았어⁠?⁠”

“⁠의전은 미리 아는 일입니다⁠.⁠”

“⁠미리 알았으면 수요일이 목욕날인 것도 알았어야지⁠.⁠”

기오가 처음으로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 웃음인지 항복인지 모를 얼굴이었다⁠.

정분이 휴대전화를 들어 기오 얼굴을 찍었다⁠. 찰칵 소리가 크게 났다⁠. 정분은 사진을 단톡방에 올리고 한 손가락으로 글자를 찍었다⁠. 「⁠대통령실에서옴 잘생김 안경⁠」⁠. 옥자의 휴대전화가 카운터 위에서 열 번 연달아 울렸다⁠. 할머니들이 탕 안에서 젖은 손으로 이모티콘을 누르고 있었다⁠.

열한 번째로 울린 것은 단톡방이 아니었다⁠. 손녀 채은이었다⁠. 「⁠할머니 혹시 오늘 정장 입은 아저씨 왔어⁠?⁠」 곧바로 한 줄이 더 떴다⁠. 「⁠오면 화내지 말고 바나나우유 하나 줘⁠. 나중에 설명할게⁠」⁠. 옥자는 장갑을 벗지 않은 손가락으로 자판을 꾹꾹 눌렀다⁠. 「⁠벌써 먹었다⁠」⁠. 통일부에 들어간 지 두 해 된 손녀가 할머니 목욕탕에 들어올 정장을 미리 알고 있었다⁠. 옥자는 휴대전화를 엎어 놓고 기오를 다시 보았다⁠. 기오는 젖은 양말 끝을 바닥에서 살짝 들고 서 있었다⁠. 발끝으로 서서 버티는 사람이 이 남자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옥자의 머리를 스쳤다⁠.

*

“⁠오늘은 안 되겠다는 말씀으로 듣겠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안 돼⁠.⁠”

“⁠모레 다시 오겠습니다⁠.⁠”

기오는 탁자를 다시 들어 올렸다⁠. 탁자 다리 하나가 문틀에 부딪혀 쿵 소리를 냈다⁠. 옥자가 카운터에서 일어났다⁠.

“⁠그건 왜 끌고 왔어⁠?⁠”

“⁠회담용 탁자입니다⁠. 크기가 맞는지 재 보려고 했습니다⁠.⁠”

“⁠어디에 맞는지⁠?⁠”

기오는 탁자를 문 앞에 내려놓고 젖은 양말을 신은 발을 구두에 밀어 넣었다⁠. 양말이 구두 속에서 철벅 소리를 냈다⁠. 기오는 철벅 소리에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다⁠.

“⁠사장님⁠, 한 가지 더 말씀드려야 합니다⁠. 북측이 정한 자리는 남탕이 아닙니다⁠.⁠”

옥자는 장갑 낀 손을 허리에 얹었다⁠.

“⁠그럼⁠?⁠”

“⁠여탕입니다⁠. 수석대표 두 분이 단독으로 만나는 자리는 여탕 탕 안입니다⁠.⁠”

탈의실 문 앞에서 정분의 손에 들린 바나나우유가 바닥에 떨어졌다⁠. 노란 우유가 타일 줄눈을 따라 천천히 퍼졌다⁠. 탈의실 안에서 할머니들 목소리가 한꺼번에 멎었다⁠. 탕 물 넘치는 소리만 남았다⁠.

“⁠남자가⁠? 우리 여탕에⁠?⁠”

정분이 물었다⁠. 기오는 안경을 고쳐 쓰고 고개를 숙였다⁠.

“⁠예⁠. 그것도 맨몸으로 들어가시겠다고 합니다⁠.⁠”

탕 안쪽에서 복녀가 고개를 들었다⁠. 귀가 어두운 복녀가 이번 말은 한 번에 알아들었다⁠.

“⁠물 좀 더 뜨겁게 해 놔라⁠, 옥자야⁠. 손님 온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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