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325자) · 연우 · 동짓달 초하루

물은 못 보낸다

강을 건네주는 값은 목숨 하나 · 한도윤

동짓달 초하루, 연우가 동안 나루에 무명 다섯 필을 내려놓았을 때 나루 끝에 노인이 하나 앉아 있었다.

노인은 한쪽 다리를 앞으로 뻗은 채 나루 기둥에 등을 대고 있었다. 뻗은 다리는 무릎 아래가 안쪽으로 조금 휘어 있었고, 그 무릎을 덮은 삼베 바지에 재가 하얗게 앉아 있었다. 연우는 삿갓 챙을 한 번 내렸다. 열두 해가 지났어도 그 휜 무릎을 모를 수가 없었다. 동안 도강꾼 둘째였던 삼돌이었다.

“마중은 어디 갔소?”

연우가 목소리를 조금 낮게 내어 물었다.

“셋 다 누웠소.”

“그게 무슨 병이오?”

삼돌이 강을 턱으로 가리켰다.

“재를 먹었소. 올가을이 가물어서 우물이 말랐는데, 아홉 자를 더 팠더니 물 대신 재가 나왔소. 그걸 걸러서 먹었는데, 거르면 된다고들 했지.”

“몇 사람이나 앓소?”

삼돌이 손가락을 꼽다가 그만뒀다.

“열둘이오. 열아홉 집에서 열둘이면 집집마다 하나는 누웠다고 보면 되오. 의원이 물을 끓이라는데 끓일 물이 없소.”

연우는 무명 필을 풀어 놓고 돌아섰다. 삼돌은 그 뒷모습을 한참 봤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

그날 저녁 헛간에서 연우가 그 말을 하자 기순이 먼저 말했다.

“물을 보내야 하오.”

한석이 고개를 저었다.

“물은 못 보내오.”

“왜 못 보내오?”

“물은 무겁소.”

억쇠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한석을 봤다.

“쌀 두 섬도 옮기는 사람이 물 한 통이 무겁다고 하오?”

“쌀은 무게가 아니라 셈이오. 물은 셈도 무겁고 근도 무겁소.”

한석이 모닥불에 장작 하나를 밀어 넣었다. 불똥이 튀어 올라 이엉 아래에서 꺼졌다.

“스물두 해 전에 해 봤소. 우리 아버지가 첫째이던 때요. 동안이 가물어서 통에 물을 담아 지고 들어갔소. 백 발쯤에서 통이 깨져 물이 재에 쏟아졌소. 물 먹은 재는 안 굳소. 그 자리가 한 해 동안 구멍이었고, 셋이 빠졌소.”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판개가 그해를 기억한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순이 손가락을 꼽으며 물었다.

“근수는 상관없다고 하지 않았소? 쌀 백사십 근을 지고 열여덟 발 간 날이 있고, 무명 열두 근을 지고 열여섯 발 간 날이 있소. 내가 서른 해를 외웠소.”

“근수는 상관이 없소.”

“그럼 물은 왜 무겁소?”

한석이 한참 있다가 대답했다.

“물은 우리 것이오. 서안 우물에서 뜨오.”

헛간 안에서 아무도 말을 잇지 못했다. 쌀은 불목 사람 것이고 도강꾼은 옮기기만 했다. 서른 해 동안 도강꾼은 제 것을 지고 재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연우가 입을 열었다.

“통을 안 쓰면 되오. 얼리면 깨져도 안 쏟아지오. 동짓달이니 밤이면 어오.”

“그래도 우리 우물 물이오.”

“그러면 우리 것이 아니게 만들면 되오.”

*

이튿날 아침 서안 우물가에 사람들이 모였다. 모인 까닭은 물이 아니라 우물 옆에 새로 박힌 말뚝 하나였다. 말뚝에 널빤지가 붙어 있었고, 널빤지에 먹으로 글이 적혀 있었다. 글을 아는 사람이 드물어서 다들 두칠의 입만 보고 있었다.

“이 우물터는 관둔전이었소. 현아가 도가에 팔았소. 오늘부터 한 동이에 한 푼이오.”

두칠 옆에 사령 하나가 육모 방망이를 짚고 서 있었다. 두칠이 두레박 줄을 제 손에 감아쥐었다.

사람들 틈에서 늙은이 하나가 앞으로 나왔다. 봉출이라는 늙은이였다. 일흔이 넘었고, 허리가 구부정했고, 목소리만은 마을에서 제일 컸다.

“이 우물은 우리 할애비가 판 우물이오.”

“할애비가 판 우물을 현아가 팔았소.”

“그럼 현아가 팠소?”

“현아는 팔기만 했다니까.”

“판 사람이 안 팔았는데 안 판 사람이 팔았으면 그건 도둑이지.”

사람들이 웃었고, 두칠의 얼굴이 붉어졌다. 두칠이 봉출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밀었고, 봉출이 뒤로 비틀거렸다. 한석이 사람들 사이에서 나와 그 등을 받았다.

그때 기순이 우물이 아니라 봉출의 집 쪽을 가리켰다.

“할배, 댁 부엌에 물독 있소?”

“어제 길어 둔 물이 한 독 있지.”

“그 물은 할배 것이오?”

“내가 길었으니까 내 것이지.”

“그걸 불목에 주시겠소?”

봉출이 기순을 보고, 연우를 보고, 강 쪽을 봤다.

“주면 불목 것이 되지.”

기순이 두칠을 돌아봤다.

“집집마다 물독에 있는 물은 도가가 산 게 아니잖소?”

두칠이 대답을 못 했다. 사령이 방망이를 들었다가, 들고 누구를 칠지 몰라서 도로 내렸다.

그날 한낮부터 해 질 녘까지 서안 사람들이 제 부엌 물독에서 한 동이씩 떠다 나루 옆 나무틀에 부었다. 틀은 여섯째 덕보가 짰다. 한 자 네모로 여섯 개였고, 덕보는 틀을 짜면서 아무에게도 말을 걸지 않았다. 사람들이 물을 부을 때마다 기순이 그 사람 이름을 불렀다. 적지 않고 불렀고, 부르고 나면 입속으로 한 번 더 되뇌었다.

“봉출 할배.”

“크게 불러 주시오. 불목 사람들이 들을 수 있게.”

“재 건너까지 들리게 부르면 불목 사람들이 놀라서 더 앓소.”

“그럼 강 중간까지만 들리게.”

기순이 봉출의 이름을 한 번 더 불렀다. 이번에는 조금 크게 불렀다. 봉출이 만족한 얼굴로 빈 동이를 들고 갔다.

해가 기울 무렵 여섯 살쯤 된 계집아이 하나가 제 몸통만 한 동이를 안고 비틀비틀 걸어왔다. 동이 안의 물은 반쯤 흘리고 와서 바닥에 한 뼘밖에 없었다. 아이는 그것을 틀에 붓고, 붓고 나서 동이 바닥을 손바닥으로 탁탁 쳐 마지막 방울까지 떨어뜨렸다. 기순이 이름을 묻자 아이는 대답 대신 제 동생 이름을 댔다. 동생 몫으로 떠 왔다고 했다. 기순은 두 이름을 다 불렀다.

그날 서른여덟 사람이 물을 부었다. 아이도 둘 있었다. 기순은 동생 이름까지 서른아홉 이름을 다 외웠다. 서른 해 동안 도강꾼 아홉 이름 말고 다른 이름을 외워 둔 것은 처음이었다.

*

첫날 밤 연우는 헛간에 들어가지 않고 나무틀 옆에 앉아 있었다. 틀 속의 물이 가장자리부터 하얗게 잡히기 시작했고, 가운데는 아직 검게 흔들렸다. 밤바람이 강을 건너오면서 재 냄새와 유황 냄새를 실어 왔다. 연우는 틀 하나에 손바닥을 얹고 얼음이 잡히는 속도를 가늠했다.

자정이 조금 지나 나루로 내려오는 발소리가 났다. 모두 셋이었는데, 둘은 몽둥이를 들었고, 하나는 빈손이었다. 빈손인 아이가 제일 뒤에서 머뭇거렸다. 자루 끈의 매듭이 달빛에 보였다.

“틀을 엎으라는 거냐?”

연우가 앉은 채로 물었다. 앞의 둘이 멈칫했다. 도가 빚꾼들이었고, 막동보다 두어 살 많아 보였다.

“행수가 시킨 일이오. 물이 얼면 도가 물을 안 사 간다고.”

“엎으면 서른여덟 집 물이 재에 쏟아진다. 그 자리는 한 해 동안 구멍이 된다. 너희가 스무날부터 지고 다닐 길이다.”

둘이 서로 얼굴을 봤다. 막동이 뒤에서 작게 말했다.

“형, 우리는 엎었다고 하고 가면 안 돼요?”

“행수가 와서 보면?”

“아침에 녹았다고 하죠.”

연우는 웃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동짓달 밤에 녹았다는 거짓말을 두칠이 믿을 리가 없었다. 연우가 일어나 틀 하나를 가리켰다.

“하나만 엎어라. 가장자리만 깨고 물은 내 등에 부어라. 그러면 엎은 흔적은 남고 물은 안 쏟아진다.”

막동이 한참 연우를 보다가 틀 가장자리의 얼음을 발로 깼다. 앞의 둘이 깨진 얼음 조각을 주워 연우 등에 쏟았다. 얼음물이 목덜미로 들어가 등을 타고 흘렀고, 연우는 이를 악물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제 어서 가라.”

셋이 뛰어가는데 막동이 한 번 돌아봤다. 연우는 젖은 저고리를 벗어 짜고 도로 입었다. 이튿날 아침 기순이 틀 하나가 모자란 것을 보고 누구 짓이냐고 물었을 때, 연우는 제가 넘어졌다고 했다.

물은 이틀 밤을 지나 얼음이 되었다. 여섯 덩이였고, 한 덩이에 스무 근이 넘었다. 기순이 셈을 했다. 여섯이면 백이십 근이고, 열이 나눠 지면 열두 근씩이었다.

“이어서 옮기면 안 되오.”

연우가 틀 앞에 쪼그려 앉아 말했다.

“한 사람이 스무 근 얼음을 지고 제 말뚝까지 가면 받는 사람이 또 받아야 하오. 주고받다가 떨어뜨리면 그걸로 끝이오. 열이 쪼개 지고 한꺼번에 들어갑시다.”

한석이 턱을 쓸며 물었다.

“열이 한꺼번에 들어가면 재가 어떻소?”

“그건 모르오. 나도 해 본 적이 없소.”

동짓달 초이레 아침, 열이 나루에 한 줄로 섰다. 한석이 간격을 정했다. 한 자리에 둘이 서면 재가 갈라진다는 것이 서른 해 동안의 말이라 여섯 발씩 떨어져 섰다. 얼음 덩이를 쪼갠 조각이 저마다의 등에서 무명에 싸여 차가운 물을 조금씩 흘렸다. 그 물이 허리를 타고 내려가 짚신에 스몄다.

열이 재에 들어갔다.

한석이 열여덟 발에서 멈췄다. 늘 돌아서던 자리였다. 멈추고, 돌아서지 않았다.

“첫째, 안 돌아서오?”

뒤에서 억쇠가 소리를 죽여 물었다.

“아직 안 빠졌소.”

한석이 스물두 발을 갔다. 스물여섯 발을 갔다. 서른 발에 이르러서야 무릎까지 빠졌다. 한석은 얼음을 내려놓지 않았다. 그 자리에 서서 뒤를 돌아봤다. 아홉이 여섯 발 간격으로 재 위에 서 있었다. 서른 해 동안 도강꾼은 한 사람씩 들어갔고, 누가 재 위에 서 있으면 나머지는 나루에서 봤다. 재 위에 열이 한꺼번에 서 있는 것을 한석은 처음 봤다.

둘째가 서른아홉을 넘어 마흔넷까지 갔고, 기순이 아흔둘을 넘어 백넷에 닿았다. 억쇠는 이백을 넘으면서 입을 벌렸다가 도로 다물었다. 재 위에서는 소리가 멀리 간다.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한석이 무릎을 뺐다. 뺀 무릎에서 김이 올랐다. 발밑이 다시 단단해졌다. 옆에서 둘째가 조금 앞서 걷고 있었다. 한석이 다시 걸었다.

기순은 백넷 발에서 얼음 조각을 고쳐 메다가, 제 발밑의 재가 어제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혼자 들어갈 때는 발을 디딜 때마다 겉이 조금 가라앉았다가 받쳤는데, 오늘은 디디기 전부터 단단했다. 앞에도 사람이 있고 뒤에도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뒤에 있는 사람은 받아 줄 사람이 아니라 같이 가는 사람이었다. 기순은 그 둘이 어떻게 다른지 입속으로 셈을 해 보려다가, 셈이 안 되는 것을 알고 입을 다물었다. 서른 해 치 발수 어디에도 이 걸음은 들어 있지 않았다.

나루에 서안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물을 부은 서른여덟이었다.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봉출이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 저 사람들이 지금 발을 세고 있다는 것을 알아서였다.

그날 얼음 여섯 덩이가 다 동안에 닿았다. 연우가 마지막 두 덩이를 동안 나루 널판에 내려놓았고, 삼돌이 절룩이며 다가와 얼음에 손바닥을 댔다.

“이게 정말 물이오?”

“녹이면 그대로 물이오. 서안 서른여덟 집 부엌 물이오.”

삼돌은 손을 떼지 않았다. 얼음이 녹아 손바닥 밑으로 물이 흘렀다. 삼돌은 그 물을 한참 보다가 제 뺨에 대고 문질렀다. 뺨에 묻어 있던 재가 씻겨 한 줄로 흘러내렸다.

연우가 돌아서자, 그 등에 대고 삼돌이 불렀다.

“여보시오, 댁.”

연우가 걸음을 멈췄다.

“동안 넷째 자리에 있던 아이 아니오?”

연우는 돌아보지 않았다. 강에서 김이 한 줄 올라와 둘 사이를 지나갔다.

3화는 어땠나요?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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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겨울차2026.05.06· 3화

    설정이 과하지 않게 깔려서 편하게 따라갔습니다.

    • 한도윤작가2026.05.07

      설정은 장면이 필요로 할 때만 꺼내려고 했어요. 편하게 읽혔다니 다행입니다.

    • 한화만더2026.05.07

      완전 공감합니다. 특히 마지막 대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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