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296자) · 한석 · 시월 그믐

뒤가 있으면 덜 간다

강을 건네주는 값은 목숨 하나 · 한도윤

닷새 동안 짐이 일곱 나갔다. 작년 같은 닷새에는 넉 짐이었으니 셈으로는 빨라졌는데, 한석은 닷새째 저녁까지 그 셈이 반갑지 않았다.

기순이 날마다 저녁을 먹기 전에 발수를 불렀다. 적지 않고 부르기만 했다. 기순은 서른 해 치 발수를 머릿속에 넣어 두고 다니는 사람이라, 누가 어제 몇 발을 갔는지 물으면 밥을 씹다가도 숫자가 나왔다. 그 기순이 닷새째 저녁에는 숟가락을 들기 전에 목소리를 낮췄다.

“모돌이 삼백둘, 삼백, 이백아흔여섯, 이백아흔하나, 이백여든다섯.”

헛간 안에 숟가락 소리가 멎었다. 억쇠가 국그릇을 들다 말고 모돌을 봤다.

“제 말뚝까지 못 갔다는 소리요?”

“다섯 발 모자랐소.”

기순이 나머지도 불렀다. 넷째 자신은 아흔둘에서 여든넷으로, 한석은 열여덟에서 열여섯으로, 다섯째는 백스물여섯에서 백열여덟로 줄어 있었다. 열 사람 가운데 안 준 사람은 끝자리의 연우 하나였고, 연우는 날마다 남은 거리를 다 갔다. 남은 거리가 날마다 늘어났기 때문에 연우가 간 발수는 오히려 늘었다.

연우는 날마다 동안 나루에 짐을 내려놓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불목에서 본 것을 한 가지씩만 말했다. 첫날은 나루에 아무도 없었다고 했고, 이튿날은 아이 둘이 나와 쌀자루를 끌고 갔다고 했다. 사흘째에는 끌고 가는 아이가 하나로 줄었다고 했다. 나흘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모닥불 앞에 오래 앉아서 손바닥을 불에 쬐었다. 손바닥이 재에 쓸려 벌겠다.

“오늘은 뭘 봤소?”

억쇠가 묻자 연우가 대답했다.

“굴뚝 연기를 셌소. 열아홉 집에서 열한 줄 올랐소.”

“나머지 여덟 집은?”

“그 집들은 불을 안 땠소.”

억쇠는 그날 저녁 제 밥을 반만 먹고 남은 반을 주먹밥으로 뭉쳐 연우 손에 쥐여 줬다. 내일 동안 나루에 두고 오라고 했다. 연우가 그것을 받으면서, 이것은 제 것이 아니니 무겁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억쇠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반찬이 모자라서 그런다고 투덜댔다.

“재가 물러졌나 보오.”

한석이 말하자 기순이 고개를 저었다.

“재는 시월보다 동짓달이 굳소. 첫째가 그걸 모를 리가 없잖소?”

한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

그날 밤 모돌이 저녁을 먹으러 오지 않았다. 한석이 찾아 나가 보니 모돌은 강가 굳은 재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밤의 재는 낮보다 색이 옅어서 달빛을 받으면 넓게 편 무명처럼 보였다. 틈마다 올라오는 김이 달빛을 받아 희게 흔들렸고, 그 사이로 굳었다 풀리는 소리가 멀리서 가까이까지 번져 왔다. 마른 나뭇가지를 천천히 꺾는 소리였다.

한석이 옆에 앉았다.

“밥 안 먹소?”

모돌이 대답 대신 한석을 불렀다.

“첫째, 나는 삼십 년 이백구십이었소. 쉰 넘어서도 한 번도 안 줄었소.”

모돌은 제 손을 무릎 위에 펴 놓고 들여다봤다.

“그런데 닷새에 열일곱 발이 줄었소.”

“짚이는 게 있소?”

모돌이 한참 있다가 말했다.

“연우가 뒤에 있소.”

한석이 고개를 돌렸다.

“삼십 년 동안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소. 내가 내려놓으면 거기서 짐이 멈췄소. 그러니 내가 가야 했소. 이제는 내가 내려놓으면 누가 받는다는 걸 아오. 아니까 발이 먼저 아오.”

모돌이 일어서는데 무릎에서 뚝 소리가 났다.

“뒤가 있으면 덜 가오.”

한석이 그 등에 대고 물었다.

“삼십 년 전에 댁은 왜 왔소?”

모돌이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아무것도 없어서 왔소. 아무것도 없으면 제일 멀리 가오.”

“그게 여기 온 까닭이오?”

“제일 멀리 가는 사람이 하나는 있어야 하오.”

모돌이 헛간 쪽으로 걸어가다가 한 번 멈췄다.

“삼십 년 동안 그게 나였소. 지금은 연우가 있소.”

한석은 모돌의 말을 두 번 되뇌었다. 그리고 그 말이 뒤집으면 무엇이 되는지 생각했다. 제일 멀리 가는 사람이 하나만 있으면 된다.

*

이튿날 아침 한석은 연우를 부르지 않고 아홉만 나루에 세웠다.

짐은 소금 넉 말이었다. 한석이 열여덟을 갔는데, 어제는 열여섯이었다. 둘째와 셋째가 제자리를 찾았고 기순이 아흔둘, 다섯째가 백스물여섯을 갔다. 모돌이 이백구십에서 받아 걸었는데, 걸음이 닷새 전과 달랐다. 다리를 크게 뗐고, 무릎이 굽지 않았다. 스물두 발을 끊지 않고 가서 동안 나루에 소금을 내려놓았다.

서안 나루에서 기순이 소리를 죽여 셌다.

“스물두 발이오. 삼십 년 동안 제일 멀리 갔소.”

그런데 모돌이 돌아오는 걸음은 더뎠다. 빈손으로 돌아오는 길은 원래 얕아서 모두 말뚝을 짚어 가며 오는데, 모돌은 이백 발쯤에서 두 번이나 발목까지 빠졌고 그때마다 한참을 서 있었다. 나루에 닿았을 때 모돌의 무릎이 떨렸다.

기순이 한석에게 말했다.

“아홉이면 모돌 혼자 스물두 발을 더 가야 하오. 한 번은 가오. 매일은 못 가오.”

“열이면 어떻소?”

“열이면 다 줄어도 매일 닿소. 덜 가는데 더 건너오.”

기순이 모닥불 옆 재에 손가락으로 금을 그었다. 짧은 금 열 개가 모이면 긴 금 아홉 개보다 길었다.

“셈은 맞는데 사람은 안 맞소.”

그날 오후 한석은 헛간 뒤에서 장작을 패는 연우를 찾아갔다. 연우는 아침에 저를 빼고 짐이 나간 것을 알고 있었다. 나루에서 모두가 모돌의 스물두 발을 보고 있을 때, 연우는 헛간 뒤에서 도끼를 들고 있었다. 도끼날이 통나무에 박힐 때마다 마른 나무 냄새가 올라왔고, 장작이 벌써 두 무더기나 쌓여 있었다.

“댁을 왜 뺐는지 아오?”

“알고 있소.”

연우가 도끼를 내려놓았다.

“스무날까지 기다릴 것 없이 내가 나가면 되오. 동안으로 돌아가서 마중 자리에 서겠소. 셋이 누워 있으니 넷째 자리가 비었소.”

“거기 가면 또 뒤가 되오.”

“나는 어디를 가든 뒤요.”

한석은 장작 하나를 집어 들고 결을 봤다. 도끼가 결을 따라 곧게 들어가 있었다. 서두르지 않은 손이었다.

“열세 해 동안 늘 뒤에 섰소?”

“끝자리가 편하오. 내 뒤에는 아무도 없으니까.”

한석은 장작을 무더기에 올려놓고 돌아섰다. 무엇이라 대답할지 몰라서 대답하지 않았다.

*

그 셈을 듣고 제일 먼저 일어선 것은 여섯째 덕보였다. 헛간 안에서 저녁 밥상이 막 차려지던 참이었다.

“그럼 저 사람이 문제요.”

덕보는 손가락으로 문턱 쪽을 가리켰다. 연우가 거기 앉아 있었다.

“와서 닷새 만에 아홉이 다 줄었소. 나는 백예순이 백쉰셋이오. 스무날에 곽 도가가 데려간다고 했잖소? 그러면 우리는 제 발수로 돌아가오.”

기순이 숟가락을 놓았다.

“여섯째, 그 입 좀 닫으시오.”

“닫으면 발수가 느오?”

“느는 건 댁 입이지.”

억쇠가 킥 웃었다가 덕보 눈에 걸려 국을 마셨다.

덕보가 연우 앞에 섰다. 덕보는 여섯째 자리에서 열두 해를 버틴 사람이고 아이가 셋이었다. 곽 도가에 진 빚이 열두 냥이라는 것을 헛간 사람은 다 알았다. 발수가 줄면 여섯째 자리를 잃고, 자리를 잃으면 겨울 밥이 없었다.

“댁은 알고 왔소?”

연우가 고개를 들었다.

“알고 왔소.”

“뭘 알고 왔소?”

“내가 뒤에 있으면 다들 덜 가는 것.”

헛간이 조용해졌다. 한석이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아오?”

“동안에서도 그랬소.”

연우는 삿갓을 무릎에 내려놓았다. 챙이 닳아서 올이 풀려 있었다.

“열세 해 전 곽 도가에서 도망쳤을 때 동안 도강꾼이 셋이었소. 삼돌이라는 사람이 나를 넷째로 넣어 줬소. 그때 나는 열 살이었소. 넣고 나니 셋이 다 줄었소. 한 해 지나 삼돌이 제가 늙은 탓이라며 나갔소.”

“열 살에 넷째를 했소?”

“열 살은 가진 게 없소. 그래서 멀리 갔소.”

덕보가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연우가 이어서 말했다.

“삼돌은 마지막으로 혼자 건너겠다고 들어갔다가 빠졌소. 그때 무릎이 상해서 그 뒤로 절소.”

*

그 저녁이 다 끝나기 전에 나루에 사람이 왔다. 두칠이 새끼줄 한 타래와 막대 한 묶음을 든 빚꾼 둘을 데리고, 모닥불도 안 쬐고 곧장 재 가장자리로 내려갔다. 두칠이 아니면 그렇게 올 사람이 없었다.

한석이 나가 보니 두칠은 첫째 말뚝부터 차례로 새끼줄을 대어 거리를 재고 있었다. 막대를 꽂고 매듭을 짓고, 다음 말뚝으로 갔다.

“뭐 하는 거요?”

“스무날부터 도가 짐꾼이 쓸 자리요. 말뚝이 벌써 박혀 있으니 품이 덜 드오.”

두칠이 말뚝 하나를 손바닥으로 툭툭 쳤다.

“이것도 도가 것이 되오.”

그 말뚝 앞에 모돌이 와서 섰다. 언제 왔는지 아무도 못 봤다. 모돌은 두칠이 막대를 꽂으려던 자리에 짚신 한 짝을 딱 올려놓고, 팔짱을 끼고, 딴청을 부리듯 동안 쪽 하늘을 봤다.

“말뚝은 박은 사람 것이오.”

“도강첩에 그렇게 안 적혀 있소.”

“나는 글을 모르오.”

모돌이 짚신 뒤꿈치로 막대를 밀어냈다. 막대가 재 위로 굴러 김 속에 반쯤 박혔다. 두칠이 모돌의 멱살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모돌 뒤에 여덟이 서 있었다. 연우는 거기 없었다. 연우는 헛간 문턱에 앉아서, 제가 그 줄에 서면 누가 덜 가게 될지 셈하고 있었다.

두칠이 손을 거두고 웃었다.

“스무날까지 보름하고 닷새 남았소.”

두칠은 돌아서다가 아홉 가운데 덕보를 골라 눈을 맞췄다.

“여섯째, 댁 빚이 열두 냥이지? 도가에 들면 삯에서 까 주겠소. 하루 두 푼이면 두 해면 끝나오. 아이 셋 굶길 것 없잖소?”

덕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은 것을 아홉이 다 봤다. 기순이 덕보 옆구리를 팔꿈치로 찔렀는데, 덕보는 찔린 줄도 모르는 얼굴로 두칠이 가는 쪽을 끝까지 바라봤다.

“두 해에 열두 냥이면 이자가 빠졌소.”

기순이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 덕보가 그제야 기순을 봤다.

“이자까지 세면 몇 해요?”

“세 해 넉 달.”

“넉 달은 왜 붙소?”

“셈하는 사람이 곽진수니까.”

덕보가 웃지 않았다. 늘 기순의 말끝을 받아치던 사람이 그날은 아무것도 받아치지 않고 먼저 헛간으로 들어갔다.

두칠이 가고 나서 모돌이 짚신을 도로 신었다. 말뚝을 한 번 쓰다듬었다. 삼십 년 동안 손이 닿던 자리가 반들반들했다.

그날 밤 한석은 오래 잠이 오지 않았다. 헛간 안에는 아홉의 숨소리가 저마다 다른 박자로 오르내렸고, 억쇠의 코 고는 소리가 그 위를 덮었다. 이엉 틈으로 들어온 달빛이 문턱의 그릇 둘에 걸려 있었다. 한석은 그 그릇을 바라보다가, 모돌이 한 말을 다시 셌다. 제일 멀리 가는 사람이 하나는 있어야 한다. 그러면 그 한 사람은 누가 받아 주나.

열두 해 동안 한석은 그릇 하나를 비우고 하나를 채워 놓았다. 채운 그릇은 아침마다 식어 있었고, 한석은 그것을 재에 붓고 다시 채웠다. 누구 몫인지 묻는 사람이 있으면 모른다고 했다. 정말로 몰라서 그렇게 말했다. 손바닥이 아픈 날이면 까닭 없이 그 그릇을 더 오래 봤다.

문턱 바깥에서 연우가 모로 누워 자고 있었다. 헛간 안에 자리가 있는데도 문턱 바깥을 골랐다. 한석은 일어나 제 누비 한 장을 걷어 연우 등에 덮어 주고 돌아와 누웠다. 손바닥이 또 아팠다.

2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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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용한책상2026.05.05· 2화

    문장이 짧은데 밀도가 있어요. 계속 읽게 됩니다.

    • 한도윤작가2026.05.06

      끝까지 따라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2화는 문장을 덜어 내는 데 시간을 제일 많이 썼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