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398자) · 연우 · 시월 스무엿새
빈손으로 건너온 사람
강을 건네주는 값은 목숨 하나 · 한도윤
재의 강이 굳은 첫날 아침, 강 한복판에 사람이 하나 서 있었다.
서안 나루에서 보면 동안 쪽 잿빛 언덕까지가 삼백열두 발이고, 그 사이는 해가 떠도 색이 바뀌지 않는 마른 회색이다. 겉이 굳은 자리마다 가는 금이 거미줄처럼 나 있고, 금 사이로 김이 한 줄씩 올라와 아침 바람에 눕는다. 그 한가운데를 누가 걸어오고 있었다. 등에 아무것도 지지 않았고, 손에도 든 것이 없었다.
도강꾼 아홉은 나루 모닥불 앞에서 그것을 봤다. 넷째 기순이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사람 지금 백오십 발을 넘었소.”
일곱째 억쇠가 들고 있던 주먹밥을 내렸다.
“빈손으로 백오십이면 귀신이지.”
“귀신은 발자국이 안 나오.”
기순이 턱으로 재를 가리켰다. 굳은 겉에 발자국이 한 줄로 찍혀 있었고, 발자국마다 가장자리가 조금씩 무너져 김을 올렸다. 무게가 있는 사람이었다.
첫째 한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루 끝으로 걸어 나갔다. 서른 해 동안 이 강에서 빈손으로 스무 발을 넘긴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재는 짐을 진 사람을 받치고, 빈손은 발목부터 삼킨다. 그런데 저 사람은 발목까지도 안 빠지고 걸었다. 걸음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고, 뒤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기순이 입으로 셌다.
“이백을 넘었소. 이백사십도 넘었소. 모돌 자리를 지났소.”
아홉째 모돌이 제 말뚝 쪽을 봤다. 이백구십 발 자리에 서 있는 말뚝을 누가 옆으로 스쳐 지나가는 것을, 모돌은 삼십 년 만에 처음 봤다.
“내 말뚝을 그냥 지나가네.”
“말뚝이 인사라도 하랬소?”
“인사는 몰라도 좀 서운하오.”
억쇠가 주먹밥을 도로 입에 넣었다.
*
사내는 나루 앞 세 발 자리에서 한 번 멈췄다. 거기서 처음으로 발목까지 빠졌다. 뺀 발에서 짚신 바닥이 눋는 냄새가 났다. 그는 마지막 세 발을 천천히 걸어 나루 널판에 올라섰고, 올라서자마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숨이 가빠 어깨가 크게 오르내렸다. 삿갓 아래로 드러난 얼굴은 스물 몇쯤 되어 보였고, 턱이 좁고 눈썹이 짙었다.
한석이 사내 앞에 쪼그려 앉아 물었다.
“어디서 왔소?”
“동안 불목에서 왔소.”
“빈손으로 어찌 왔소?”
사내가 숨을 고르고 대답했다.
“가진 게 없어서 왔소.”
아홉이 서로 얼굴을 봤다. 기순이 먼저 웃었다가, 아무도 안 웃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사내가 일어서며 말했다.
“연우라 하오. 도강꾼 자리가 있으면 들고 싶소.”
“서안 도강꾼 자리는 아홉이오.”
“열째로 들면 안 되겠소?”
한석은 대답하지 않고 강 쪽을 봤다. 서른 해 동안 서안 도강꾼은 아홉이었다. 아홉이 제 말뚝까지 짐을 이어 옮기고, 이백구십 발에서 모돌이 내려놓으면 나머지 스물두 발은 동안 마중이 받아 갔다. 그런데 오늘 아침 동안 나루에는 마중 나온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동안 마중은 왜 안 나오오?”
연우가 불목 쪽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마중 서던 셋이 다 누워 있소.”
“어디가 그리 앓소?”
“재를 먹었소. 우물에 재가 들었소.”
한석이 그 말을 듣고 오래 서 있었다. 동안 마중이 안 나오면 이백구십에서 내려놓은 짐은 재 위에 놓인 채로 밤을 난다. 불목 열아홉 집이 겨울을 날 쌀과 소금이 전부 그 스물두 발에 걸려 있었다.
“그래서 빈손으로 건너왔소?”
“그래서 빈손으로 건너왔소.”
*
해가 한 뼘쯤 올랐을 때 나루로 난 길에서 말굽 소리와 사람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맨 앞에 선 것은 붉은 털 토시를 낀 사내였다. 쉰은 넘어 보였고, 볼이 둥글고 눈이 가늘었으며, 걸으면서 손바닥 위에서 엽전 한 닢을 굴렸다. 그 뒤로 현아 이방이 도포 자락을 여미며 따라왔고, 육모 방망이를 찬 사령이 둘, 그리고 빈 자루를 어깨에 걸친 젊은이들이 열둘 줄지어 왔다. 젊은이들 가운데 몇은 아이라고 해도 좋을 나이였다. 행렬 끝에서 목이 굵은 사내 하나가 그 아이들을 몰았다.
기순이 한석 옆에 와서 낮게 말했다.
“잿골 도가 곽진수요. 뒤에 목 굵은 게 행수 두칠이고.”
“나도 얼굴은 아오.”
곽진수는 나루 널판 앞에서 멈추고 모닥불을 한 번 내려다본 다음 도강꾼 아홉을 차례로 봤다. 그 눈이 연우에게서 조금 오래 머물렀다가 지나갔다.
“첫째가 뉘시오?”
“첫째는 내가 맡고 있소.”
“이방 나리, 읽어 드리시오.”
민 이방이 소매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현아 도장이 붉게 찍혀 있었다. 이방은 목을 가다듬고, 읽는 동안 한 번도 도강꾼들 얼굴을 보지 않았다.
“동짓달 스무날부터 재의 강 도강은 잿골 도가가 맡는다. 도강꾼은 도가 삯꾼으로 들거나, 짐 하나에 세 푼씩 세를 문다. 읽을 것은 이상이오.”
아홉 가운데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김이 한 줄 올라와 이방의 종이를 흔들었다.
곽진수가 웃었고, 목소리가 뜻밖에 부드러웠다.
“겁먹을 것 없소. 나는 댁들을 내쫓으러 온 게 아니오. 삼십 년을 한 푼도 안 받고 옮겼다지? 그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오. 도가에 들면 짐 하나에 두 푼씩 주겠소.”
한석이 곽진수의 토시를 보며 대답했다.
“우리 삯은 동안 궤에 두오.”
“아, 그 궤.”
곽진수가 엽전을 쥐었다.
“삼십 년 치 삯이 자물쇠도 없이 불목 나루에 쌓여 있다지. 그것도 도강 삯이니 스무날부터는 도가가 거두겠소. 아까운 돈이 재 먼지를 먹고 있으니 내 속이 다 쓰리오.”
“그 궤는 아무도 못 옮기오.”
“못 옮기는 게 아니라 안 옮긴 거요. 나는 옮길 수 있소.”
곽진수는 뒤에 선 아이들을 턱으로 가리켰다.
“저 아이들은 빈 자루도 끝까지 지고 가오. 받는 게 없으니까. 재는 공짜 짐을 좋아하오. 나는 공짜를 좋아하고.”
억쇠가 뒤에서 작게 말했다.
“둘이 잘 맞네.”
기순이 억쇠 발등을 밟았다.
곽진수가 연우 앞으로 한 걸음 옮겼다. 품에서 누렇게 바랜 종이를 한 장 더 꺼냈다. 가장자리가 닳아 부드러웠고, 아래쪽에 엄지 지장이 작게 찍혀 있었다.
“이건 도강첩이 아니라 빚 문서요. 열세 해 전에 불목에서 도망친 빚꾼 아이 것이오. 아비가 서른 냥을 지고 아이를 맡겼지. 얼굴이 그때하고 똑같구먼.”
연우는 종이를 보지 않았다. 대신 곽진수의 토시를 봤다. 열세 해 전에도 붉었던 털이 지금도 붉었다.
한석이 둘 사이에 섰다.
“이 사람은 오늘부터 열째요.”
“스무날까지는 그렇게 하시오.”
곽진수는 문서를 접어 품에 넣었다.
“열세 해 이자를 치면 서른 냥이 백스무 냥쯤 되오.”
기순이 참지 못했다.
“한 해 한 푼 오 리로 치면 백열일곱 냥이오.”
곽진수가 기순을 돌아보고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셈 잘하는 사람이 있구먼. 도가에 오면 삯을 곱으로 쳐 주겠소.”
“나는 공짜로 세 주는 거요.”
곽진수는 행렬을 돌려세웠다. 두칠이 빚꾼 아이들을 몰고 나루를 떠나다가, 모돌의 말뚝이 보이는 자리에서 한 번 멈춰 강을 오래 봤다. 무엇을 재는 눈이었다.
*
그날 낮에 첫 짐이 나갔다. 쌀 두 섬이었다.
한석이 지고 열여덟 발까지 가서 내려놓았고, 둘째가 받아 서른아홉까지, 셋째가 예순넷까지 갔다. 기순이 아흔둘, 다섯째가 백스물여섯, 여섯째 덕보가 백예순, 억쇠가 이백, 여덟째 판개가 이백사십넷까지 옮겼다. 재 위에서는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굳은 겉을 밟는 소리가 눈 밟는 소리보다 낮고 말라서, 나루까지 사각사각 건너왔다.
모돌이 이백사십넷에서 받았다. 제 말뚝까지 마흔여섯 발을 갔고, 말뚝 앞에서 늘 하던 대로 짐을 내려놓으려다가 멈췄다. 모돌의 뒤에 연우가 서 있었다. 이백구십 발 자리에서 쌀 두 섬을 받아 줄 사람이 서른 해 만에 처음으로 모돌 뒤에 있었다.
모돌은 짐을 내려놓지 않고 열두 발을 더 갔다. 삼백두 발 자리에서 쌀 두 섬을 재 위에 내려놓고, 허리를 펴고, 돌아섰다. 돌아서니 연우가 바로 앞에 있었다.
“이제 댁이 받으시오.”
모돌이 말하는 목소리가 조금 쉬어 있었다.
“삼십 년 동안 이 말을 할 데가 없었소.”
연우가 쌀 두 섬을 지고 남은 열 발을 걸어 동안 나루에 닿았다. 나루에 아무도 없었다. 연우는 널판 위에 쌀을 내려놓고 불목 쪽을 봤다. 집마다 오르는 연기가 가늘었다. 나루 끝에는 뚜껑 덮인 궤 셋이 재를 뒤집어쓴 채 나란히 놓여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도 연우는 빈손이었다. 서안 나루에서 기순이 그 걸음을 끝까지 셌고, 삼백열두 발을 다 세고 나서 한참 입을 벌리고 있었다.
“또 안 빠졌소.”
한석이 모닥불 너머로 물었다.
“그 까닭이 뭐요?”
“내가 그걸 알면 서른 해를 넷째로 살았겠소?”
*
해 질 녘에 연우는 혼자 나루 끝에 앉아 짚신을 갈아 신고 있었다. 바닥이 눋다 못해 구멍이 나 있었다. 뒤에서 자갈 밟는 소리가 났다.
아침에 곽진수의 행렬 끝에 섰던 아이였다. 열대여섯쯤 되었고, 빈 자루를 여전히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자루 끈에 매듭이 하나 묶여 있었는데, 끈을 묶으려고 지은 매듭이 아니라 무언가를 표시하려고 공들여 지은 매듭이었다. 아이는 두칠이 볼까 봐 길 쪽을 두 번 돌아본 다음에 말했다.
“형도 옛날에 빚꾼이었다면서요?”
“누가 그런 말을 하더냐?”
“행수 아저씨가 그랬어요. 도망친 놈은 결국 제 발로 온다고.”
연우는 짚신 끈을 묶었다. 매듭을 두 번 감았다.
“네 이름이 뭐냐?”
“막동이라고 불러요.”
“그 매듭은 뭐냐?”
막동이 자루 끈을 손으로 가렸다.
“제 이름 대신 묶은 거예요. 자루가 다 똑같아서요.”
아이는 그 말만 하고 뛰어갔다. 뛰는 걸음이 가벼웠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의 걸음이었고, 연우는 그 걸음을 열세 해 전 제 발에서 알았다.
그날 저녁 헛간에서 기순이 입으로 셌다.
“모돌이 오늘 열두 발을 더 갔소. 삼백두 발까지 갔소.”
모돌이 국을 떠먹다 말고 대답했다.
“늘 이백구십이었소.”
“오늘은 삼백둘이오. 내 눈으로 봤소.”
모돌이 숟가락을 내려놓고 문 쪽을 봤다. 연우가 문턱 바깥에 앉아 있었다. 문턱 안쪽에는 밥그릇 둘이 나란히 놓여 있었는데, 하나는 비어 있고 하나는 밥이 그대로 담긴 채 식어 가고 있었다. 연우가 그 그릇을 보고 물었다.
“저건 누구 것이오?”
한석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연우에게 수저를 내밀었다.
“들어와서 같이 먹으시오. 스무날까지는 댁이 열째요.”
연우가 문턱을 넘으면서 그릇 둘을 밟지 않으려고 발을 크게 벌렸다. 헛간은 흙벽에 짚 이엉을 얹은 긴 집이었고, 서까래에는 아래쪽이 하얗게 삭은 말뚝 하나가 새끼줄에 묶여 걸려 있었다. 모닥불 연기가 그 말뚝을 휘감고 이엉 틈으로 빠져나갔다. 아홉이 둘러앉은 자리 끝에 무릎 하나 들어갈 틈이 생겼다. 억쇠가 엉덩이를 옆으로 밀면서 제 밥그릇을 품으로 당겼다.
“밥은 나눠도 반찬은 못 나누오.”
기순이 억쇠 반찬 그릇에서 무 한 쪽을 집어 연우 앞에 놓았다.
“이제 열이니까 열로 나누오.”
모돌은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다 먹고 나서 제 발을 한참 내려다봤다. 삼십 년 동안 이백구십에서 멈추던 발이 오늘은 열두 발을 더 갔고, 그 열두 발 끝에서 짐을 받아 간 사람이 지금 제 옆에서 무를 씹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