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5,328자)

숟가락 뒷면

외계의 첫 답장 "밥은 먹었니?" · 은해록

새벽 네 시⁠, 송신실 안은 기계의 초록 불빛으로 밝았다⁠. 이십팔 년 동안 한 번도 쓰지 않은 송신기 앞에 마이크 하나가 놓였다⁠. 미경이 노트북을 송신기에 이었다⁠. 손가락이 떨려 선을 두 번 잘못 꽂았다⁠. 민석이 말없이 선을 받아 제자리에 꽂았다⁠.

“⁠한 분씩이요⁠. 자기 말로⁠, 먹었어⁠, 너도 먹어⁠. 자기 엄마한테 하듯이요⁠.⁠”

화영의 말에 응옥이 먼저 마이크 앞에 무릎을 꿇었다⁠. 돗자리가 없는 콘크리트 바닥이었다⁠. 응옥은 마이크를 두 손으로 감싸고 눈을 감았다⁠. 베트남 말이 나왔다⁠. 짧고 부드러웠고 끝이 내려앉았다⁠. 화면에 점과 틈이 찍혔다⁠. 응옥이 눈을 뜨고 웃었다⁠.

“⁠우리 엄마가 이거 들으면 거짓말이라고 할 거예요⁠. 나 어제 국수만 팔고 밥 안 먹었어요⁠.⁠”

“⁠지금 먹었잖아요⁠. 영철 선생님 죽⁠.⁠”

“⁠아⁠, 그럼 진짜네⁠.⁠”

다음은 가위바위보에서 이긴 인도네시아 청년이었다⁠. 진 청년이 뒤에서 입 모양으로 따라 했다⁠. 태국 여자는 귤 냄새 나는 손으로 마이크를 쥐었다⁠. 중국인 안내사는 말이 끝나자 습관처럼 깃발을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네팔 남자는 너무 크게 말해서 미경이 소리를 줄였다⁠. 필리핀 몫은 대전의 마리셀이 영상 통화로 했다⁠. 마리셀은 요양원 야간 근무를 하던 휴게실 구석에서 속삭이듯 말했다⁠.

미얀마 남자 차례에서 송신실이 조용해졌다⁠. 남자는 마이크 앞에서 한참 숨만 쉬었다⁠. 이윽고 말했다⁠. 말이 끝나고도 남자는 마이크에서 입을 떼지 않았다⁠. 고향 말로 한 마디를 더 했다⁠. 화면에는 찍히지 않게 미경이 녹음을 끊은 뒤였다⁠. 응옥이 옆에서 작게 옮겨 주었다⁠. 엄마⁠, 나 다음 달에 가⁠.

부영철이 마이크 앞으로 나서려다 민석에게 붙잡혔다⁠. 제주 말도 넣자는 것이었다⁠. 1985년 목록에 제주 말은 없었다고 민석이 말리자 부영철이 팔짱을 꼈다⁠. 목록 만든 사람이 제주에 안 와 봐서 그렇다고⁠, 오십 년 전에 왔으면 몸국부터 먹였을 거라고 했다⁠. 송신실 안의 사람들이 다 웃었다⁠. 부영철은 웃음이 그칠 때까지 팔짱을 풀지 않았다⁠.

마지막이 화영이었다⁠. 화영은 마이크 앞에 쪼그려 앉았다⁠. 니트 소매를 걷어 올렸다⁠. 머리 위의 안경이 미끄러질 것 같아 손으로 눌렀다⁠.

세 해 동안 하루에 열 번씩 해 온 말이었다⁠. 먹었어⁠. 뒤에 붙일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은 말이었다⁠.

“⁠먹었어⁠.⁠”

세 시 반에 부영철이 끓여 준 전복죽 한 그릇이 배 속에 있었다⁠. 끝이 바닥에 닿았다⁠.

“⁠너도 먹어⁠.⁠”

끝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반 마디쯤이었다⁠. 화영은 반 마디의 높이를 처음 들었다⁠. 자기 입에서 나온 높이였다⁠. 미경이 화면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막내님⁠, 이거 어머님 반가울 때 높이예요⁠, 하고 말했다⁠.

*

네 시 십일 분⁠, 부영철이 송신기 앞으로 갔다⁠. 민석이 손짓으로 단추를 가리켰다⁠. 커다란 빨간 단추가 아니었다⁠. 화면 귀퉁이의 작은 네모였다⁠. 「⁠송신⁠」⁠. 부영철은 마우스를 쥐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미경이 부영철의 손 위에 자기 손을 얹었다⁠.

“⁠선생님이 누르세요⁠. 저는 손만 얹을게요⁠.⁠”

“⁠이십팔 년 동안 듣기만 했수다⁠.⁠” 부영철이 마우스를 쥐었다⁠. 손등에 핏줄이 돋았다⁠. “⁠처음 말하는 날 내가 누르게 해 줘서 고맙수다⁠. 곱단이도 고마워할 거우다⁠.⁠”

네 시 십이 분⁠, 헤드폰 속에서 하늘의 줄이 왔다⁠. 똑똑⁠, 틈⁠, 똑똑똑⁠. 걱정의 높이로 시작하는 두 번째 답장이었다⁠. 스물하루 동안 같은 시각에 오던 줄이었다⁠. 줄이 시작되자 부영철이 마우스를 눌렀다⁠.

밖에서 접시가 아주 작게 움찔했다⁠. 송신실 벽이 낮게 웅웅 울렸다⁠. 화면 위로 아홉 사람의 점과 틈이 흘러 올라갔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줄과 땅에서 올라가는 줄이 화면에서 잠깐 나란히 흘렀다⁠. 묻는 줄과 대답하는 줄이었다⁠.

일 분 사십 초 뒤에 송신이 끝났다⁠. 화면이 다시 고요해졌다⁠.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았다⁠. 박수를 치기에는 송신실이 좁았고⁠, 다들 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었다⁠. 국자⁠, 깃발⁠, 휴대전화⁠, 보온병 뚜껑⁠.

민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이십오 년⁠.⁠”

“⁠그동안 뭐 해요⁠?⁠” 미경이 물었다⁠.

“⁠밥 먹어야지⁠.⁠” 민석이 안경을 벗어 넥타이 끝에 문질렀다⁠. “⁠하늘이 너도 먹으라잖아⁠. 아니⁠, 우리가 그랬지⁠.⁠”

부영철이 송신실 문을 열고 나갔다⁠. 억새 들판 너머로 동쪽 하늘이 희끄무레했다⁠. 부영철은 접시 받침대에 손바닥을 대고 한참 서 있었다⁠. 무어라 중얼거렸다⁠. 제주 말이었다⁠. 화영은 알아들었다⁠. 먹었수다⁠, 느도 먹읍서⁠. 1985년 목록에도⁠, 아홉 사람의 줄에도 없는 말이었다⁠. 곱단이만 들은 말이었다⁠.

편정훈은 송신실 문밖에 서 있었다⁠. 송신하는 동안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문틀에 어깨를 기대고 헤드폰도 없이 웅웅 울리는 벽 소리만 들었다⁠. 화영이 나오자 편정훈이 몸을 문틀에서 뗐다⁠.

“⁠끝까지 들으셨어요⁠?⁠”

“⁠들었습니다⁠. 헤드폰은 없었지만 벽이 울려서요⁠.⁠” 편정훈이 동쪽 하늘을 보았다⁠. “⁠박사님 귀에는 어떻게 들렸습니까⁠? 아홉 사람 목소리요⁠.⁠”

“⁠각자 자기 집에서요⁠.⁠” 화영이 대답했다⁠. “⁠아홉 명이 다 자기 엄마한테 했어요⁠. 하늘한테 한 사람은 없었어요⁠.⁠”

편정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다가 멈추고 한마디를 보탰다⁠.

“⁠그럼 저쪽도 자기 집에서 먹겠지요⁠.⁠”

“⁠네⁠. 그러라고 한 말이니까요⁠.⁠”

편정훈의 엄지가 바지 솔기에 닿았다가 문지르지 않고 떨어졌다⁠. 오늘은 거짓말할 일이 없는 날이었다⁠.

*

여섯 시 사십 분⁠, 관측소 부엌에서 김제 할머니가 압력솥 뚜껑을 열었다⁠. 김이 천장까지 올라갔다⁠. 할머니가 햅쌀밥을 주걱으로 크게 떠서 그릇에 담고⁠, 그릇을 아들 앞에 탁 내려놓았다⁠.

부엌 창밖으로 억새가 아침 햇빛을 받아 은빛으로 누웠다가 일어났다⁠. 쌀국수집의 여덟 사람은 돗자리 위에서 서로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편정훈은 군복 상의를 벗어 의자에 걸쳐 두었다⁠. 런닝셔츠 차림이었다⁠. 휴대전화에는 국방부에서 온 문자가 와 있었다⁠. 화영은 화면을 보지 않았다⁠. 편정훈이 먼저 말했다⁠.

“⁠군사 재판이 열립니다⁠. 전역 지원서를 미리 내겠다고 했습니다⁠. 서른 해 채우기 두 달 전입니다⁠.⁠”

“⁠대령님⁠.⁠”

“⁠이제 대령이라고 하실 날도 두 달입니다⁠.⁠” 편정훈이 숟가락을 들었다⁠. 숟가락 뒷면에 못으로 긁은 글씨가 있었다⁠. 연구원 식당의 숟가락이었다⁠. 누구의 이름인지 편정훈은 보지 않고 밥을 떴다⁠.

할머니가 아들 맞은편에 앉았다⁠. 밥그릇을 아들 쪽으로 조금 더 밀었다⁠.

“⁠밥은 묵었냐⁠?⁠”

편정훈이 첫 숟가락을 입에 넣고 씹었다⁠. 다 씹고 삼킨 뒤에 대답했다⁠.

“⁠인자 묵어라⁠, 엄니⁠.⁠”

할머니가 아들의 숟가락이 다시 그릇으로 가는 것을 끝까지 보았다⁠. 두 번째 숟가락⁠, 세 번째 숟가락⁠. 할머니는 자기 밥을 뜨지 않았다⁠. 아들이 밥 먹는 모습을 보려고 서른 해를 기다린 사람이었다⁠. 두 숟가락쯤 더 기다리지 못할 까닭이 없었다⁠.

“⁠엄니도 묵어요⁠.⁠”

할머니가 숟가락을 들었다⁠.

여덟 시⁠, 대표들의 검은 차가 철조망 문을 빠져나갔다⁠. 미국 대표가 차에 타기 전에 부엌 컨테이너로 와서 김제 할머니의 두 손을 잡았다⁠. 할머니는 무슨 말인지 모르는 채로 미국 대표의 손등을 두드렸다⁠. 김치는 냉장고에 넣어야 혀⁠, 하고 당부했다⁠. 통역사가 옮기려다 그만두었다⁠. 미국 대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의 당부는 옮기지 않아도 다 건너갔다⁠.

민석이 숟가락 상자를 승합차에 싣다가 화영을 불렀다⁠.

“⁠박사님⁠. 연구원장이 해독팀 정식 자리를 하나 냈어요⁠. 계약직 말고요⁠.⁠” 민석이 상자 뚜껑을 닫았다⁠. “⁠막내 자리예요⁠. 다음 사람이 들어와도 박사님이 계속 막내예요⁠. 미경이가 선배 자리 안 내놓겠대요⁠.⁠”

“⁠막내면 돼요⁠.⁠”

“⁠그럼 월요일부터요⁠. 아침은 식당에서 먹고 오세요⁠. 조장님이 박사님 계란말이 따로 빼 둔대요⁠.⁠”

*

11월 17일 낮 열두 시⁠, 유성 햇살요양원 정문 앞에는 헌병이 없었다⁠. 신도들도 없었다⁠. 첫말씀교회는 요양원 앞 골목에 무료 급식 천막을 세웠다는 소식이 있었고⁠, 화영은 천막 앞을 지나며 흰 점퍼 차림의 여동현이 밥을 퍼 담는 것을 보았다⁠. 여동현은 화영을 보고 국자를 든 채 고개를 숙였다⁠. 화영도 고개를 숙였다⁠.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헌병들이 떠난 정문 기둥에는 테이프 자국만 남아 있었다⁠. 정문 오십 미터 밖에 기자 하나가 남아 있었다⁠. 카메라를 목에 걸고 있었지만 렌즈 뚜껑을 닫아 두었다⁠. 손에는 첫말씀교회 천막에서 받은 밥그릇이 들려 있었다⁠.

삼 층 식당의 블라인드는 반쯤 올라가 있었다⁠. 은행나무는 잎을 다 떨궜다⁠. 마른 가지 사이로 하늘이 넓게 보였다⁠. 어머니는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앞에 김제 햅쌀로 지은 밥과 미역국이 놓였다⁠. 오른손에 숟가락을 쥐고 있었다⁠. 열하루 동안 놓지 않은 요양원 숟가락이었다⁠. 밥은 반쯤 줄어 있었다⁠. 말은 아직이었다⁠.

마리셀이 쟁반을 들고 지나가다 화영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다른 할머니들의 쟁반을 거두러 갔다⁠. 마리셀이 말없이 지나가는 것을 화영은 처음 보았다⁠.

맞은편 할머니가 화영에게 손짓했다⁠. 요구르트를 쥐여 주던 할머니였다⁠. 엄마 말 하게 했어⁠? 화영이 고개를 젓자 할머니가 혀를 찼다⁠. 그럼 밥부터 혀⁠. 말은 밥 먹고 나오는 거여⁠.

화영은 어머니 옆자리에 앉았다⁠. 니트 주머니에서 냅킨에 싼 것을 꺼냈다⁠. 뉴욕의 막내 외교관이 돌려준 호두과자는 비행기에서 먹었고⁠, 냅킨에는 다른 것이 싸여 있었다⁠. 제주의 긴 상에서 여동현이 화영 앞으로 밀어 준 숟가락이었다⁠. 서른 해 동안 연구원들 입을 드나들어 조금 휜 숟가락이었다⁠.

화영은 숟가락을 뒤집어 어머니의 왼손에 쥐여 주었다⁠.

어머니가 숟가락을 보았다⁠. 엄지로 뒷면을 쓸었다⁠. 못으로 긁은 두 글자가 엄지 밑에서 까끌까끌했다⁠. 어머니는 엄지를 몇 번이고 다시 쓸었다⁠. 스물두 살에 새긴 글자였다⁠. 오른손의 요양원 숟가락이 식판 위로 내려갔다⁠. 열하루 만에 놓은 숟가락이었다⁠.

“⁠엄마⁠. 나 먹었어⁠.⁠”

어머니가 딸을 보았다⁠.

“⁠엄마도 먹어⁠.⁠”

어머니가 왼손의 숟가락으로 햅쌀밥을 떴다⁠. 떠서 자기 입으로 가져가지 않았다⁠. 딸의 입으로 가져갔다⁠. 숟가락이 화영의 입술 앞에서 멈췄다⁠. 어머니의 손이 조금 떨렸고⁠, 숟가락 위의 밥알이 한 알 식판에 떨어졌다⁠.

화영은 입을 벌렸다⁠. 밥이 들어왔다⁠. 햅쌀은 달았다⁠. 화영이 씹는 동안 어머니는 숟가락을 거두지 않고 딸의 입을 보았다⁠. 다 씹고 삼키는 것까지 보았다⁠. 그러고 나서 입술이 열렸다⁠.

“⁠밥은 먹었니⁠?⁠”

끝이 올라갔다⁠. 한 마디⁠, 두 마디⁠, 그리고 한 마디 더⁠. 화영은 휴대전화를 꺼내지 않았다⁠. 녹음 단추를 누르지 않았다⁠. 세 마디의 높이는 사전에 적지 않았고⁠, 이름도 붙이지 않았다⁠. 이번 한 번은 들은 사람이 하나뿐이었다⁠.

“⁠응⁠, 엄마⁠. 지금 먹었어⁠. 엄마는⁠?⁠”

어머니는 대답 대신 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이번에는 자기 입에 넣었다⁠. 오래 씹었다⁠. 창밖의 마른 은행나무 가지 위로 햇빛이 들어와 식판까지 내려왔다⁠. 어머니 손에 쥔 숟가락 뒷면에서 「⁠봉애⁠」 두 글자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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