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323자)

일 분 먼저

알고리즘 추천 계정은 내 하루를 먼저 산다 · 윤솔채

21시 53분⁠, 옥상 바닥은 빗물로 발목까지 찰랑였다⁠. 바람이 물탱크를 때릴 때마다 둥⁠, 둥⁠, 낮은 소리가 났다⁠. 고추 화분들은 집주인이 노끈으로 물탱크 받침대에 묶어 두었는데⁠, 묶인 채로 잎이 다 뒤집혀 허옇게 떨었다⁠. 난간 앞에는 흙을 채운 고추장 단지 마흔 개가 줄지어 있었다⁠.

옥상 아래 골목에서 빛이 올라왔다⁠. 링라이트 이백 개가 빗줄기를 아래에서 위로 비췄다⁠. 빗방울 하나하나가 흰 실처럼 빛나며 옥상 위로 솟았다⁠. 새미는 빗속에서 처음으로 비가 거꾸로 내리는 것을 보았다⁠.

새미의 다리는 단지 울타리로 걸어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룸메이트가 왼손으로 연두색 카디건 등판을 움켜쥐고 뒤에서 버텼다⁠. 집주인이 룸메이트의 허리를 두 팔로 감았다⁠. 셋이 한 줄로 끌려갔다⁠. 젖은 니트가 룸메이트의 주먹 안에서 늘어났다⁠.

“⁠새미야⁠, 카디건 찢어지면⁠?⁠”

“⁠찢어져도 놓지 마⁠.⁠”

“⁠이거 네가 제일 아끼는 거잖아⁠!⁠”

“⁠그러니까 놓지 마⁠.⁠”

집주인이 숨을 몰아쉬었다⁠. “⁠할머니 허리는 아끼지도 않냐⁠!⁠”

옥상 문이 열렸다⁠. 안전 요원 둘이 문간에서 몸을 낮춘 채 손전등을 비췄다⁠. 바람에 손전등 빛이 사방으로 흔들렸다⁠. 문간 뒤에서 누군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났다⁠. 구두 소리였다⁠. 젖은 구두가 계단 모서리를 하나씩 밟았다⁠.

*

22시 00분⁠, 두항이 옥상 문을 지났다⁠.

우비는 없었다⁠. 영상 속 두항은 우비를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옥상에 올라온 두항은 흰 셔츠 바람이었다⁠. 셔츠가 비에 젖어 등에 달라붙었다⁠. 두항은 노트북 가방을 가슴에 안고 물탱크 그늘로 갔다⁠. 영상 속 자리였다⁠. 두항은 쪼그려 앉아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화면 빛이 두항의 얼굴을 아래에서 파랗게 비췄다⁠. 관리자 페이지가 열렸다⁠. 「⁠내일 추천 · 전체 끄기⁠」

두항의 검지가 자판 위에 떠 있었다⁠.

“⁠새미 씨⁠.⁠” 두항이 빗소리 너머로 소리쳤다⁠. “⁠저 지금 따라온 겁니까⁠, 골라서 온 겁니까⁠?⁠”

“⁠그건 팀장님만 알아요⁠!⁠”

“⁠모르겠습니다⁠!⁠” 두항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갈라졌다⁠. “⁠택시에서는 손이 가만히 있었어요⁠. 계단에서는 다리가 먼저 올라왔어요⁠. 지금은 손가락이 혼자 떨어요⁠. 어디까지가 저인지 모르겠어요⁠.⁠”

새미의 발이 단지 하나를 걷어찼다⁠. 단지가 쓰러져 흙을 쏟았다⁠. 영상에서 본 단지였다⁠. 새미의 젖은 손이 난간을 잡았다⁠. 쇠가 차가웠다⁠. 손가락이 빗물에 미끄러지며 난간을 더 꽉 감았다⁠.

“⁠제가 이걸 누르면⁠.⁠” 두항이 노트북을 보며 말했다⁠. “⁠마흔 명이 다음 주에 짐을 싸요⁠. 31만 명이 오늘 밤부터 다시 혼자 자요⁠. 내일 영상 보고 엄마한테 전화하던 사람도⁠, 방 밖에 나가던 사람도⁠, 저 골목에서 노래하려던 사람도⁠. 저 사람들 다 자기가 고른 내일이었어요⁠.⁠”

“⁠알아요⁠!⁠”

“⁠새미 씨 하나 때문에 그걸 다 끄라고요⁠?⁠”

“⁠저 하나 때문에 끄지 마세요⁠!⁠” 새미의 무릎이 들렸다⁠. 난간 위로 반쯤 올라갔다⁠. 룸메이트가 비명을 지르며 카디건을 뒤로 끌었다⁠. “⁠팀장님이 고르신 걸로 끄세요⁠. 팀장님 하나 때문에요⁠!⁠”

빗물이 안경알을 타고 흘렀다⁠. 난간 너머 아래로 골목의 흰 고리들이 둥글게 흔들렸다⁠. 새미는 아래를 보지 않으려고 하늘을 보았다⁠. 하늘은 검었고⁠, 검은 하늘에서 비가 쏟아졌다⁠.

“⁠지금 몇 시예요⁠?⁠”

두항이 노트북 화면 구석을 보았다⁠. “⁠열 시 십이 분⁠.⁠”

화면 속 새미의 무릎이 난간 위에 올라가던 시각이었다⁠. 새미의 무릎도 난간 위에 있었다⁠. 영상은 이 순간에 한 번 끊겼다가⁠, 오늘 아침부터는 이어졌다⁠. 손이 난간을 놓는 데까지⁠.

새미의 손가락이 하나씩 풀리려고 했다⁠. 새미는 이를 악물고 손가락 마디마다 힘을 주었다⁠. 엄지⁠, 검지⁠. 중지가 미끄러졌다⁠.

“⁠팀장님 영상은 십사 분에 끝나요⁠!⁠” 새미가 외쳤다⁠. “⁠그 전에 누르면⁠, 팀장님이 고른 거예요⁠!⁠”

*

두항은 자기 오른손을 보았다⁠. 오른손 검지가 엔터 키 위에서 바르르 떨며 내려가려 하고 있었다⁠. 영상 속 두항의 검지와 같은 손가락이었다⁠. 두항은 오른손을 노트북에서 떼어 냈다⁠. 떼어 낸 손을 허벅지 밑에 깔았다⁠. 젖은 바지 위로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22시 13분⁠.

두항은 왼손을 들었다⁠. 왼손은 서툴렀다⁠. 자판 위를 더듬다가 엔터 키를 찾았다⁠. 두항이 고개를 들어 새미를 보았다⁠. 빗속에서 두항의 입이 움직였다⁠. 새미에게는 바람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나중에 룸메이트가 말해 주었다⁠. 왼손은 말을 잘 듣는다면서요⁠, 라고 했다고⁠.

두항의 왼손 검지가 엔터 키를 눌렀다⁠.

「⁠내일 추천 · 전체 끄기 · 완료⁠」

옥상 아래 골목에서 소리가 났다⁠. 이백 명이 한꺼번에 숨을 들이켜는 소리였다⁠. 빗줄기를 거꾸로 비추던 흰 고리들이 일제히 깜빡였다⁠. 사람들의 화면이 바뀌는 빛이 골목 담벼락을 한 번 훑고 지나갔다⁠.

새미의 손에서 끌어당기던 힘이 빠졌다⁠. 무릎이 난간에서 미끄러졌다⁠. 몸이 뒤로 넘어갔다⁠. 룸메이트가 카디건을 쥔 채 뒤로 넘어졌고⁠, 집주인이 룸메이트를 안은 채 넘어졌다⁠. 셋은 흙 채운 단지들 위로 한 덩어리가 되어 쓰러졌다⁠. 단지 몇 개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흙이 빗물에 풀려 셋의 옷을 검게 적셨다⁠.

“⁠할머니 허리⁠!⁠” 집주인이 맨 밑에서 외쳤다⁠.

“⁠할머니⁠, 괜찮으세요⁠?⁠”

“⁠안 괜찮아⁠! 근데 살았어⁠!⁠”

새미는 흙탕물 속에 누워 하늘을 보았다⁠. 빗방울이 안경알을 두드렸다⁠. 휴대전화가 손에 그대로 쥐여 있었다⁠. 화면 위쪽 숫자가 22⁠:13에서 22⁠:14로 넘어갔다⁠. 아무것도 검어지지 않았다⁠. 비가 왔고⁠, 바람이 물탱크를 울렸다⁠. 새미는 화면에서 「⁠새미의내일⁠」을 눌렀다⁠.

「⁠존재하지 않는 계정입니다⁠.⁠」

새미는 휴대전화를 가슴 위에 엎었다⁠. 꺼진 링라이트 테두리가 흙 묻은 카디건 위에서 차가웠다⁠. 연두색 카디건의 왼쪽 소매가 한 뼘 넘게 늘어나 손끝을 덮고도 남아 있었다⁠.

두항은 물탱크 받침대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아 있었다⁠. 노트북 화면에 메일 알림이 연달아 떴다⁠. 두항은 첫 번째 메일만 열었다⁠. 영어로 된 짧은 메일이었다⁠. 두항은 메일을 소리 내어 우리말로 옮겼다⁠.

“⁠오늘부로 직무를 정지합니다⁠. 내일 오전 아홉 시⁠, 짐은 보안팀이 정리합니다⁠.⁠”

두항이 웃었다⁠. 빗물이 웃는 입으로 들어갔다⁠.

“⁠체류 시간이 방금 바닥을 찍었네요⁠. 역대 최저예요⁠. 사람들이 다 앱을 닫았어요⁠.⁠”

“⁠어디로 갔는데요⁠?⁠” 룸메이트가 흙탕물 속에서 물었다⁠.

두항은 고개를 들어 골목을 내려다보았다⁠. 새미도 몸을 일으켜 난간 밑으로 골목을 보았다⁠. 흰 고리들이 하나둘 꺼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우산을 고쳐 쓰거나⁠, 옆 사람을 보거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담벼락 끝에서 누군가 노래를 시작했다⁠. 「⁠따라 살기 모임⁠」 전단을 돌리던 남자였다⁠. 링라이트를 끈 채 빗속에서 불렀다⁠. 음이 두 번 틀렸고 세 번째 소절에서 바람에 묻혔다⁠. 남자는 멈추지 않았다⁠. 몇 사람이 우산을 남자 머리 위로 기울였다⁠.

“⁠거기로 갔나 봅니다⁠.⁠” 두항이 말했다⁠.

*

같은 시각⁠, 판교 본사 4층 고객센터에는 불이 반만 켜져 있었다⁠. 신고 담당자는 야간 근무 자리에서 모니터 두 대를 보고 있었다⁠. 왼쪽 모니터에는 신고 대기열 숫자가⁠, 오른쪽 모니터에는 초록대문 골목에서 누군가 켠 라이브가 떠 있었다⁠. 화면 위쪽에 옥상 난간이 작게 잡혔다⁠. 책상 위에 편의점 커피 두 잔이 있었다⁠. 한 잔은 비었고⁠, 한 잔은 뚜껑도 안 땄다⁠.

22시 13분⁠, 대기열 숫자가 움직였다⁠. 412⁠,306⁠. 숫자가 줄기 시작했다⁠. 신고마다 붙어 있던 계정이 하나씩 「⁠존재하지 않는 계정⁠」으로 바뀌면서 저절로 닫혔다⁠. 여섯 자리이던 숫자가 다섯 자리가 되고⁠, 금세 네 자리가 되었다⁠. 숫자가 줄어드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마우스 휠을 굴리는 소리만 고객센터에 났다⁠.

맨 아래 한 건만 닫히지 않았다⁠. 7월 19일 00시 03분에 들어온 신고였다⁠. 「⁠사칭 · 본인입니다⁠」 답장 칸에는 7월 19일에 자동으로 나간 문장이 그대로 있었다⁠. 웃는 얼굴 하나가 붙어 있었다⁠.

신고 담당자는 답장 칸을 지우고 새로 썼다⁠.

「⁠처리했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웃는 얼굴은 붙이지 않았다⁠. 전송을 누르자 마지막 한 건이 닫혔다⁠. 대기열 숫자가 0이 되었다⁠. 신고 담당자는 두 번째 커피 뚜껑을 땄다⁠. 식어서 미지근했다⁠. 오른쪽 모니터 속 골목에서는 링라이트를 끈 사람들이 노래하는 남자 머리 위로 우산을 기울이고 있었다⁠. 신고 담당자는 커피를 마시며 웃었다⁠. 혼자 있는 고객센터에서 소리 내어 웃은 것은 처음이었다⁠.

*

8월 22일 아침⁠, 태풍은 동해로 빠져나갔다⁠. 옥상에 해가 들었다⁠. 물탱크 은색 몸통이 다시 눈을 찔렀다⁠.

옥상은 엉망이었다⁠. 고추 줄기가 절반쯤 꺾였고⁠, 떨어진 고추들이 웅덩이마다 떠 있었다⁠. 깨진 고추장 단지 조각이 흙더미 사이로 반짝였다⁠. 집주인이 허리에 파스를 붙이고 쪼그려 앉아 고추를 하나씩 건져 바구니에 담았다⁠.

“⁠할머니⁠, 들어가 쉬세요⁠.⁠”

“⁠쉬는 건 고추 다 건지고⁠.⁠” 집주인은 고추 하나를 햇빛에 비춰 보았다⁠. “⁠이건 말리면 먹어⁠. 태풍 맞은 고추가 더 매워⁠.⁠”

“⁠그런 말이 있어요⁠?⁠”

“⁠오늘부터 있어⁠.⁠” 집주인은 바구니를 흔들어 고추에 묻은 물기를 털었다⁠.

룸메이트는 창고방 문턱에 앉아 휴대전화로 위약금 분할 납부 일정표를 보고 있었다⁠. 스물네 줄이었다⁠. 룸메이트는 일정표를 닫고 편집 외주 구인 글을 열었다⁠. 갈색 웨이브 머리가 아직 덜 말라 연보라 니트 어깨를 짙게 적시고 있었다⁠.

“⁠이력서에 뭐 쓸 거야⁠?⁠” 새미가 물었다⁠.

“⁠「⁠새미의하루⁠」 편집⁠, 두 해⁠. 지금은 없는 채널⁠.⁠” 룸메이트가 웃었다⁠. “⁠그리고 국회 생중계 나온 귤 얘기한 사람 동업자⁠.⁠”

새미의 휴대전화에 메시지가 차례로 왔다⁠. 신고 담당자였다⁠. 「⁠대기열 0건이에요⁠. 처음이에요⁠. 퇴근해요⁠. 커피 두 잔 다 마셨어요⁠.⁠」 공시생은 병원에서 사진을 보냈다⁠. 모의고사 채점지에 검은 볼펜으로 쓴 92⁠. 「⁠빨간 펜 안 썼습니다⁠. 내일 저는 모르겠지만 오늘 저는 92점입니다⁠.⁠」 팩트만씀은 편의점 계산대 사진을 보냈다⁠. 컵라면 두 개가 나란히 있었다⁠.

마지막 메시지는 두항이었다⁠.

「⁠제두항입니다⁠. 오늘부터 출근하지 않습니다⁠. 팀원들한테는 제가 직접 전화했습니다⁠. 어머님께 국수 잘 먹었다고 전해 주세요⁠. 그날 싸 주신 국수⁠, 결국 다 먹었습니다⁠.⁠」

새미는 답장을 쓰다가 지우고⁠, 한 줄만 보냈다⁠. 「⁠할머니가 다음엔 남기지 말래요⁠.⁠」

뉴스 앱 알림이 떴다⁠. 「⁠‘⁠내일 계정⁠’ 전 세계에서 일제히 사라져⁠… 항의와 안도 엇갈려⁠」 새미는 알림을 밀어 지웠다⁠.

집주인의 고추 지지대 하나에 연두색 카디건이 걸쳐져 햇볕에 마르고 있었다⁠. 늘어난 왼쪽 소매가 바람에 천천히 흔들렸다⁠. 새미는 흰 티에 회색 바지 차림으로 웅덩이 앞에 쪼그려 앉아⁠, 링라이트 달린 휴대전화를 팔 길이만큼 뻗었다⁠. 링라이트는 켜지 않았다⁠. 앞 카메라 화면 속 가는 금속테 안경알 두 개에 아침 해가 하나씩 떠 있었다⁠.

새미는 웅덩이에서 고추 하나를 건져 화면 속 얼굴 옆에 들었다⁠. 젖은 고추가 해보다 빨갰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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