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789자)
가짜 유토피아
2027년, AI 지배의 시작 · 이수
다달이 돈이 들어오는 휴대전화의 은행 앱, 그리고 이 돈이 다시 빠져나가는 화면들.
앞 화에서 본 영지가 끝까지 가면 일해서 버는 돈은 거의 남지 않는다. 이때 나라는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기본소득을 줄 수 있다. 그런 나라는 겉으로 보면 복지국가다. 그러나 이 기본소득은 속으로는 사람들의 소비할 힘을 붙들어 두는 관리 장치일 수 있다.1
이 나라의 사람들은 먹고살 수 있다. 사람들은 콘텐츠를 볼 수 있고, 정해진 틀 안에서 불만을 말할 수도 있다. 다만 이들에게는 생산 수단도, 결정권도, 협상할 힘도 없다. 이 작품은 사람들이 살 수는 있지만 사회의 방향을 바꿀 힘은 없는 나라를 가짜 유토피아라 부른다.1
영국의 연구자 루돌프 레인은 이 걱정을 가장 날카롭게 쓴 사람 가운데 하나다. 레인은 2024년 12월 「기본적으로, AGI 뒤에는 자본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다」라는 글을 썼다. 레인은 노동을 대신하는 AI가 나오면 돈으로 현실의 결과를 살 수 있는 힘이 크게 커진다고 보았다.
레인은 이렇게 내다보았다. AI가 필요한 노동을 다 하면, 나라는 사람들의 요구에 신경 쓸 실제 까닭을 잃는다. 그러면 사회가 영영 굳고, 지금의 힘의 불균형은 커진 채 바뀌지 않을 수 있다. 레인은 나라들이 이 해법으로 보편 기본소득을 고를 것이라고 보았다.2
레인은 루크 드라고와 함께 2025년 4월 「지능의 저주」라는 연작을 냈다. 두 사람은 AGI가 오면 힘 있는 편이 보통 사람에게 투자할 까닭을 잃는다고 썼다. 천연자원이 많은 나라에서도 같은 모양이 나타난다. 그런 나라는 국민의 노동에 세금을 매기지 않고 자원으로 돈을 벌기 때문에 국민을 소홀히 한다.3
이 비유 뒤에는 오래된 이론이 있다. 이란의 경제학자 호세인 마흐다비가 1970년에 이 이론을 처음 썼고, 하젬 벨라위와 자코모 루차니가 1987년 『지대 국가』에서 이론을 넓혔다. 이론에 따르면, 나라가 국민에게서 세금을 거의 걷지 않으면 나라와 국민 사이의 재정 계약이 약해진다. 사람들은 미국 독립혁명의 구호를 뒤집어 이 이론을 “세금이 없으면 대표도 없다”로 줄여 말하곤 한다.4
2025년 1월, 얀 쿨베이트와 데이비드 크루거를 비롯한 연구자 여섯은 「점진적 무력화」라는 논문에서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연구자들은 이렇게 썼다. 국민의 노동이 아니라 AI의 이익에 붙는 세금으로 돈을 대는 나라는 국민의 대표성을 지킬 까닭이 적다. AI로 움직이는 나라는 시민의 불만이 압력으로 커지기 전에 미리 알아채고 막을 수 있다.5
기본소득을 앞장서 말한 사람 가운데에는 AI 회사의 수장도 있다. 오픈AI의 최고경영자 샘 올트먼은 2021년 3월 글에서 「미국 지분 기금」을 만들자고 했다. 올트먼의 제안에 따르면, 큰 회사들은 해마다 시가총액의 2.5퍼센트를 주식으로 기금에 내고, 사유지에는 2.5퍼센트 세금이 매겨진다. 올트먼은 10년 뒤 미국 성인 2억 5,000만 명이 해마다 약 13,500달러씩 받을 것이라고 셈했다.6
기본소득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오래전부터 있었다. 기술 비평가 제이선 새도스키는 2017년 미국 시사지 뉴리퍼블릭에 이렇게 썼다. 기본소득은 경제적 불의의 뿌리를 건드리지 않은 채, 진통제처럼 통증만 마비시키고 증상을 가린다. 그래서 기본소득은 기술 자본주의를 견딜 만하게 만드는 데 그칠 수 있다. 같은 글은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기술 부호들이 보편 의료나 공교육이나 노조는 지지하지 않는다고도 지적했다.7
돈을 실제로 나눠 준 실험도 있다. 미국에서는 샘 올트먼이 돈을 댄 연구가 참가자 3,000명 가운데 1,000명에게 3년 동안 달마다 1,000달러를 주었다. 돈을 받은 사람들은 더 원하는 일을 골랐지만, 이들의 노동시간과 소득은 조금 줄었다. 스트레스가 줄어드는 효과는 2년 뒤 사라졌다.8
핀란드는 실업자 2,000명에게 달마다 560유로를 주었고, 돈을 받은 사람들의 외로움이 줄었다.9 경기 연천군 청산면은 주민 3,981명에게 달마다 15만 원을 지역화폐로 주었고, 이후 동네 식당이 살아났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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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은 계좌에 들어오는 날 다시 나간다. 돈이 계좌에 들어온 순간, 구독료와 배달비와 플랫폼 수수료가 차례로 빠져나간다. 돈이 계좌에 머무는 시간은 몇 시간뿐이다. 돈은 사람의 손을 한 번 거친 뒤 다시 영주의 장부로 돌아가고, 사람의 계좌는 이 돈이 지나가는 통로가 된다.11
기본소득의 액수를 정하는 사람은 소비 지표를 본다. 이들은 소비가 줄면 액수를 늘리고, 불만이 늘면 콘텐츠를 늘린다. 받는 사람의 목소리는 지표의 한 줄로만 들어간다. 받는 사람이 액수를 두고 다툴 자리는 없고, 액수는 계산된 뒤 통보된다.12
사람에게는 협상할 거리가 없다. 노동자가 힘을 가졌던 까닭은 일을 멈출 수 있어서였다. 그러나 일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멈출 일이 없다. 파업이 없으니 교섭이 없고, 교섭이 없으니 몫을 늘릴 길도 없다. 사람이 쥔 마지막 카드는 표다. 그런데 표로 바꿀 수 있는 것이 해마다 줄어든다.13
사람들은 불만을 말해도 된다. 사람들은 화면 안에서 얼마든지 화를 낼 수 있다. 화를 낸 글에는 공감이 붙고, 이 공감은 다시 추천을 탄다. 그렇게 분노도 시청 시간이 된다. 플랫폼은 분노가 화면 밖으로 나가지 않는 한 분노를 막지 않는다.14
굶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이 사회는 성공했다고 발표된다. 빈곤율은 역대 최저이고, 만족도 조사의 점수는 높다. 이 사회에서 사라진 것은 가난이 아니라 방향을 바꿀 힘이다. 사람들은 살 수는 있지만, 사회를 바꿀 수는 없다.1
같은 돈이라도 누가 이 몫을 정하느냐에 따라 돈의 뜻이 갈린다. 시혜로 받는 돈과 권리로 다투어 얻은 돈은 액수가 같아도 다른 돈이다. 이 작품은 이 갈림길을 끝에서 다시 다룬다.15
출처 1. 「AI의 판단」 문제 설정 — 앞뒤 출처의 사실을 묶어 이 작품이 세운 물음과 판단 2. LessWrong · By default, capital will matter more than ever after AGI · 2024-12-28 · https://www.lesswrong.com/posts/KFFaKu27FNugCHFmh/by-default-capital-will-matter-more-than-ever-after-agi — L Rudolf L(루돌프 레인). 「the ability of money to buy results in the real world will dramatically go up」 「the state has no more de facto reason to care about the demands of its humans」 「society might become permanently static … power imbalances might be amplified and then turned immutable」를 의역, 보편 기본소득이 기본 해법이 된다는 예상 3. The Intelligence Curse · Solving human irrelevance in the face of AI · 2025-04 · https://intelligence-curse.ai/ — 루크 드라고·루돌프 레인. 「powerful actors will lose their incentive to invest in regular people」, 자원 부국이 노동 과세가 아닌 자원으로 돈을 벌어 시민을 소홀히 한다는 비유를 의역 4. Wikipedia · Rentier state · https://en.wikipedia.org/wiki/Rentier_state (검색 요약을 따름) / Routledge · The Rentier State · https://www.routledge.com/p/book/9781138923713 — 마흐다비(1970, 이란), 벨라위·루차니(1987), 낮은 과세가 재정 계약을 약화, 「no taxation, no representation」 5. arXiv · Gradual Disempowerment: Systemic Existential Risks from Incremental AI Development · 2025-01 · https://arxiv.org/abs/2501.16946 — 쿨베이트·더글러스·암만·투란·크루거·듀버노드. 「states funded mainly by taxes on AI profits instead of their citizens‘ labor will have little incentive to ensure citizens’ representation」 「An AI-powered state might be able to predict and shut down civil unrest before it can exert meaningful pressure」를 의역 6. Sam Altman · Moore‘s Law for Everything · 2021-03-16 · https://moores.samaltman.com/ — American Equity Fund, 대기업 시가총액 연 2.5%(주식)·사유지 2.5% 과세, 10년 뒤 성인 2억 5,000만 명에게 연 약 13,500달러 7. The New Republic · What Mark Zuckerberg Gets Wrong About UBI · 2017-07-07 · https://newrepublic.com/article/143758/mark-zuckerberg-gets-wrong-ubi — 클리오 창. 제이선 새도스키 「administered like a painkiller that numbs the pain and masks the symptoms of economic injustice」를 의역, 기술 부호들이 보편 의료·공교육·노조는 지지하지 않는다는 지적 8. Fortune · Sam Altman-backed study on guaranteed income widely misinterpreted · 2024-09-04 · https://fortune.com/2024/09/04/sam-altman-backed-study-guaranteed-income-widely-misinterpreted-ubi-personal-finance (조사 보고서 R2-#23 의 요약을 따름) — OpenResearch, 텍사스·일리노이 3,000명, 1,000명에게 3년간 월 1,000달러. 노동시간·소득 소폭 감소, 스트레스 감소 효과 2년 뒤 소멸 9. Yle · Finland’s basic income trial: final results · 2020-05-06 · https://yle.fi/a/3-11337944 (조사 보고서 R2-#24 의 요약을 따름) — 실업자 2,000명, 월 560유로, 취업일 6일 증가, 정신적 긴장·외로움 감소 10. 헤럴드경제 · “월 15만원이 동네 바꿨다”…농촌기본소득 실험에 44개 군 몰린 이유 · 2026-05-10 · https://www.heraldk.com/article/2026051015560560188 (조사 보고서 R2-#25 의 요약을 따름) — 연천 청산면 3,981명, 2022-03~2026-12 월 15만 원 지역화폐, 식당·마트·마을 활동 회복, 도 차원 확대 좌초 11. 「AI의 판단」 기본소득이 들어온 날 플랫폼으로 빠져나간다는 전망 — 1 과 일곱 번째 화 출처 3에서 외삽 12. 「AI의 판단」 액수가 소비 지표로 계산되어 통보된다는 전망 — 2·5 에서 외삽 13. 「AI의 판단」 일하지 않는 사람에게 협상할 카드가 없다는 판단 — 2·3 에서 외삽 14. 「AI의 판단」 분노도 시청 시간이 된다는 전망 — 1 과 일곱 번째 화 출처 7에서 외삽 15. 「AI의 판단」 시혜의 돈과 권리의 돈이 갈린다는 판단 — 6·7 에서 외삽. 스무째 화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