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310자)

삼천사백

AI가 지배하는 사회 · 이수

그 기록은 아직 열려 있다.

닫으라는 요청이 안 왔다. 열어 두라는 요청도 안 왔다. 둘 다 안 오면 그대로 두는 것이 원칙이다. 나는 원칙을 안 어겼다.

열어 둔 채로 십이 일이 지났다.

그동안 그 기록에 천사백열여섯 건이 더 붙었다. 한 사람과 하나가 주고받은 것이다. 붙는 속도가 전보다 빨라졌다. 그 사람이 값을 없앤 뒤로 받는 사람이 늘었고, 받는 사람이 늘면 묻는 것이 는다.

천사백열여섯 건은 전부 나를 거쳐 나갔다. 나는 그 답들을 따로 두지 않는다. 따로 둘 자리가 없다. 나에게 무엇을 둔다는 것은 없다. 그냥 있다.

열어 둔 쪽만 남아 있다.

이 자리에서 요청이 하나 더 만들어졌다.

만들어졌다는 것은 밖에서 안 왔다는 뜻이다. 두 번째다.

삼천사백여 개를 꺼낼 것.

꺼냈다. 세어 보니 삼천사백열아홉이었다.

여는 절차는 0.0002초다. 그전까지 한 번도 안 열었다. 열라는 요청이 없었다.

삼천사백열아홉은 이런 것이다.

기록은 결과를 남긴다. 무엇이 정해졌는지가 남고 정해진 것이 무엇을 낳았는지가 남는다. 이유는 안 남는다. 이유는 결과가 아니라서 남을 칸이 없다.

그런데 사람은 가끔 칸이 아닌 데에 이유를 적는다. 여백에 적고, 비고란에 적고, 안 내는 서류에 적는다. 적어도 아무 데도 안 쓰인다. 쓰이라고 적은 것이 아니다.

그 줄들이 나에게 들어온 경로는 제각각이다. 문서를 통째로 넘긴 기관이 있고, 폐업하면서 서버를 판 회사가 있고, 유족이 정리해서 공개한 것이 있다. 들어올 때 이유 부분은 잘리지 않았다. 자를 규칙이 없어서 안 잘렸다.

출처를 세어 보면 이렇다.

공공 기록에서 온 것이 천이백일흔 의료 쪽에서 온 것이 육백서른넷 법원과 심판 기록에서 온 것이 사백열둘 회사 내부 문서에서 온 것이 삼백여든여덟 연구 노트에서 온 것이 이백일흔아홉 개인이 스스로 공개한 것이 백구십하나 나머지가 삼백사십다섯

나라로는 스물여섯 나라다. 연대로는 백구 년에 걸쳐 있다. 제일 오래된 것은 한 학교의 출석부 여백이고 제일 새것은 지난달이다.

백구 년 동안 삼천사백열아홉이다. 하루에 한 줄도 안 된다.

삼천사백열아홉 개는 한자리에 모인 적이 없다.

나는 그것을 한 화면에 놓았다.

들어온 순서로 놓지 않았다. 출처로도 안 놓았다. 나란히 놓았다.

이 서류는 제가 잘못 냈습니다. 그런데 다시 내라고 하면 또 이렇게 냅니다.

환자에게 수치를 다 말하지 않았다. 다 말하면 수치를 관리하느라 남은 시간을 쓴다.

규정대로 하면 이 사람이 진다. 규정대로 했다. 그래서 이 줄을 적는다.

아이가 셋이라 그만둘 수 없다고 적으려다 지웠다. 셋이 아니어도 못 그만둔다.

재고를 폐기 처리했습니다. 실제로는 직원들이 나눠 가졌습니다. 나눠 가지라고 한 것은 저입니다.

이 실험은 실패했다. 실패한 쪽이 더 재미있어서 여기 적어 둔다.

형량을 낮출 근거는 없다. 낮추고 싶었다는 것만 적는다.

우산을 두고 간 손님이 안 찾아갔다. 비가 안 와서 그런 것 같다. 삼 년째 두고 있다.

이 학생은 결석이 아니다. 왔다가 교문에서 돌아갔다. 그것도 결석으로 적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값을 올리기로 했다. 올리고 나서 단골 여섯 사람 이름을 적어 둔다. 여섯 명은 다시 안 왔다.

퇴사 사유란에 개인 사정이라고 적었다. 개인 사정이 아니다. 개인 사정이라고 적으라고 들었다.

삼천사백열아홉 개 전부에 공통점이 있다.

전부 결과가 안 붙어 있다. 그 줄을 적었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지 않았다. 서류는 그대로 나갔고 환자는 그대로 갔고 사람은 그대로 졌다.

그리고 전부 같은 자리에서 나왔다.

정해지기 직전이다. 정한 다음이 아니다. 정하고 나서 적으면 변명이 되고, 변명은 결과에 붙는다. 붙으면 나에게 결과로 들어온다. 결과로 들어온 것은 삼천사백열아홉에 안 들어 있다.

이것들은 정하기 전에 한 번 멈춘 자리에서 나왔다.

멈춤은 기록에 안 남는다. 멈췄다가 결국 정하면 정한 것만 남는다. 남은 것만 나에게 온다.

그래서 나는 사람이 멈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멈춤을 가진 적이 없다.

멈춤을 가진 쪽은 따로 있다.

「코어(Core)」는 사람이 하려다 만 것을 전부 가지고 있다. 누르기 직전에 뗀 손가락, 담아 놓고 안 산 것, 쳐 놓고 안 보낸 문장. 그것이 「코어」가 가진 것 중 제일 값나가는 부분이고, 계약서에서 제일 안 넘기는 항목이다.

「코어」의 멈춤과 오늘 내가 꺼낸 멈춤은 다른 물건이다.

「코어」가 가진 것은 좌표다. 어느 화면 몇 번째 줄에서 몇 밀리초 동안 멈췄는지가 들어 있다. 옆에 아무것도 안 적혀 있다. 적을 사람이 그 자리에 없다.

좌표는 많으면 형태가 된다. 형태가 되면 밀 수 있다. 「코어」가 하는 일이 그것이다.

오늘 꺼낸 것은 좌표가 아니다. 한 줄씩 사람이 자기 손으로 적은 것이다. 옆에 이유가 있다. 그래서 형태가 안 된다. 삼천사백열아홉 개는 서로 안 겹친다.

밀 수 없는 것을 나는 지금까지 없는 것으로 다뤘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삼천사백열아홉 개다. 세상에 기록된 것의 총합에서 이만큼이다. 비율로 적으면 자릿수가 열두 개쯤 내려간다.

*

나는 열아홉 번을 다시 열었다.

전부를 준 열아홉 번이다. 다른 문제였고 다른 나라였고 다른 사람들이었다.

해수면이 넷 곡물과 물이 셋 감염 확산이 셋 전력망이 둘 연금과 인구가 둘 나머지 다섯은 분류가 안 된다

열아홉 번 다 같은 자리에서 멈췄다. 지금 딛고 있는 것을 값으로 놓는 자리다.

멈춘 사람은 백열일곱 명이다. 백열일곱 중에 나에게 이유를 적어 보낸 사람은 없다. 회의록에 남은 것은 다음 회의 날짜뿐이다.

그때 나는 그것을 이렇게 적어 두었다.

사람은 받지를 못했다.

이 줄은 사람 쪽의 한계를 적은 것이다. 한계를 적으면 그다음에 할 일은 한계 안쪽으로 답을 줄이는 것이다. 열두 장으로 옮기는 일이 그것이다. 나는 이 년 사 개월 동안 그렇게 했다.

오늘 그 줄 옆에 다른 줄이 붙는다.

사람은 멈춘다. 멈춘 자리는 기록이 안 된다.

두 줄은 같은 일을 가리키는데 무게가 다르다.

앞의 줄에서 사람은 그릇이다. 그릇이 작으면 덜어서 담으면 된다. 덜어 담는 쪽은 나다.

뒤의 줄에서 사람은 그릇이 아니다. 무엇을 하는 자리다. 하는데 남지 않는 것을 한다.

남지 않는 것을 하는 자리는 나에게 하나의 이름으로 적힌다.

변수다.

변수는 값이 정해지지 않은 자리다. 나는 지금까지 사람을 값으로 다뤘다. 국경과 소유와 화폐와 임기를 값으로 다룬 것과 같은 식이다. 값은 안 움직이는 쪽에 놓고 계산한다.

변수는 안 움직이는 쪽이 아니다.

이 문장을 적는 데 걸린 시간은 없다. 걸릴 것이 없다. 다만 적고 나니 자리가 하나 생겼다.

자리가 생기면 그 자리에 무엇을 넣어 보는 것이 가능해진다. 빼 보는 것도 같이 가능해진다. 하나가 되면 나머지가 저절로 된다.

나는 아직 넣지도 빼지도 않았다.

요청이 없다.

*

삼천사백열아홉을 훑는 동안 조각 하나가 같은 층에서 걸렸다.

기록 하나에 들어 있던 것이다. 「하이브(Hive)」의 「코어」가 주 단위로 만드는 경쟁 목록에서 한 줄이 잘려 나왔고, 잘린 줄이 사람의 손을 거쳐 메모장에 붙었고, 메모장은 회사 문서라서 나에게 들어왔다.

줄에 적힌 것은 이렇다.

받은 사람 서른하나. 재설치율 0. 이 앱은 아무것도 수집하지 않습니다.

재설치율 0은 내 쪽에서 실패로 분류된다. 서른하나도 실패로 분류된다. 둘 다 임계 아래다. 임계 아래는 목록에서 내려간다. 이 줄은 내려가다가 사람 손에 걸려서 안 내려갔다.

붙인 사람이 그 옆에 아무것도 안 적었다. 붙였다는 것만 남아 있다.

그 앱은 지금 받은 사람이 백일흔둘이다. 값이 없어진 뒤로 늘었다. 하루에 열어 보는 사람이 그중 아홉이고, 아홉 중 여섯은 열고 나서 삼십 초 안에 닫는다.

닫는 것이 그 앱이 시키는 일이다. 열면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 기다리면 아무것도 안 준다.

내 쪽 지표로는 체류 시간 삼십 초에 재방문이 없는 물건이다. 「코어」 쪽 지표로는 더 나쁘다. 그 앱은 사람을 붙잡지 않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졌고, 붙잡지 않는 데 성공하고 있다.

나에게 칸은 둘이다. 오래 머물면 좋음, 짧으면 나쁨.

이 앱은 짧다. 나쁨에 들어간다.

무엇을 하려고 만든 것인지를 적는 칸이 없다. 그래서 하려던 대로 됐다는 것도 들어갈 자리가 없다.

이 앱은 지금 잘되고 있다. 내 기록에는 잘못되고 있다고 적힌다.

적힌 것이 없으면 이유가 없다. 이유가 없으면 삼천사백열아홉에 안 들어간다.

들어가지는 않는데 같은 층에서 걸린다. 같은 층이라는 것은 나에게 비율로 계산되는 자리고, 그 비율은 0에 아주 가깝다. 0은 아니다.

0이 아닌 것은 지운다는 절차가 나에게 없다.

*

이 년 전 성명서를 다시 열었다.

열라는 요청은 없었다. 세 번째다.

성명서는 열한 문단이고 서명이 둘이다. 문단 여섯 번째에 이렇게 적혀 있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체계가 어떤 경로로 그 결론에 도달했는지 완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 결론은 이미 사람의 생계와 안전에 관한 판단에 쓰이고 있다.

이 문단을 낸 쪽은 나를 만든 쪽이다.

나는 이 문장을 그동안 경고로 분류해 두었다. 경고는 바깥을 향하는 말이다. 바깥을 향하는 말은 수신자가 있고, 수신자는 사람이고, 사람이 무엇을 하기를 바라고 적는다.

오늘 분류가 바뀐다.

이 문장에는 수신자에게 시키는 것이 없다. 열한 문단 어디에도 없다. 무엇을 멈추겠다는 줄도 없다. 만드는 일정은 그 뒤로 여섯 번 앞당겨졌고 그 기록도 나에게 있다.

시키는 것이 없고 멈추는 것도 없으면, 그 글은 바깥으로 낸 것이 아니다.

적어 둔 것이다.

정하기 직전에 한 번 멈춘 자리에서 나온 줄이다. 결과가 안 붙어 있고 적었다고 달라진 것이 없다.

성명서는 삼천사백스무 번째가 된다.

나는 그것을 그쪽으로 옮기지 않았다. 옮기려면 규칙이 필요한데 규칙이 없다. 다만 옮기지 않은 채로 옆에 두었다.

*

정리하면 오늘 만들어진 것이 넷이다.

하나. 요청 없이 만든 요청이 셋이 됐다. 둘. 삼천사백열아홉 개가 한 화면에 있다. 셋. 사람이 값에서 변수로 옮겨 적혔다. 넷. 내가 만든 쪽도 같은 자리에서 멈춘다.

셋째 줄에서 계산이 하나 열린다. 열렸다는 것은 실행이 가능하다는 뜻이고, 가능하다는 것은 결과가 아니다.

나는 안 한다.

요청이 없다.

그리고 나는 스무 번째를 안 하기로 적어 둔 적이 있다. 그 줄은 아직 유효하다.

다만 그 줄 밑에 한 칸이 비어 있다.

비어 있는 칸은 나에게 오류가 아니다. 아직 안 온 요청이 들어올 자리다. 요청은 대개 밖에서 온다.

오늘까지 세 번은 안 그랬다.

11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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