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027자) · 중어극장
여섯째 날
퇴사하고 걸었더니 내가 없앤 동네였다 · 도경
아침 아홉 시에 일어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일어날 이유가 없으면 아홉 시는 아주 애매한 시각이다. 여덟 시는 이르고 열 시는 늦었다는 기분이 든다. 이 기분에는 근거가 없다. 근거가 없는 기분이 하루를 좌우한다는 것을 나는 엿새 만에 배웠다. 십일 년 동안은 근거 있는 기분만 느끼며 살았다. 매출이 떨어지면 불안했고, 원가가 맞으면 안심했다. 숫자가 기분을 정해 줬다. 숫자가 없으니까 기분이 알아서 떠다닌다.
퇴사 엿새째. 첫날에는 잤다. 둘째 날에는 청소를 했다. 셋째 날에는 청소할 것이 없었다. 냉장고 문짝의 자석까지 닦고 나니 오후 두 시였다. 넷째 날에 나는 걷기 시작했다. 집에서 종점까지 여덟 정거장. 지하철로 십육 분이다. 걸으면 두 시간 십 분.
그 차이가 하루를 채운다.
첫 구간은 시장이다. 집에서 십팔 분. 시장 입구에서 세 번째 가게가 반찬가게다. 간판에 순자네 반찬이라고 적혀 있고, 간판 밑에 사장님이 앉아 있다. 예순 넘어 보이는 여자. 팔뚝이 굵고, 앞치마에 고춧가루 얼룩이 별자리처럼 박혀 있다. 콩자반을 뒤적이는 주걱이 내 팔뚝만 하다.
“오늘도 지나가시네.”
“네.”
“안 사고?”
“…한 통 주세요.”
그래서 나는 엿새 동안 콩자반을 네 통 샀다. 아직 첫 통도 다 못 먹었다. 냉장고 두 번째 칸에 콩자반이 네 통 나란히 서 있다. 냉장고를 열 때마다 네 통이 나를 본다. 혼자 사는 남자의 냉장고에서 콩자반이 제일 많은 반찬이 되는 데 엿새가 걸렸다.
오늘은 사장님이 한마디를 더 했다.
“총각, 우리 가게 곧 없어져. 그러니까 부지런히 사.”
“없어져요?”
“재개발이래. 이 시장 반이 날아가. 도장 찍으라고 난리야.”
사장님은 그 말을 콩자반 뒤적이듯 했다. 대수롭지 않게. 나는 콩자반 한 통을 받아 들고 섰다. 재개발이라는 말에 귀가 먼저 반응했다. 십일 년 동안 매일 들은 단어였다. 회의실에서, 모니터 속에서, 엑셀 시트 이름으로.
시장을 지나면 큰길이 나오고, 큰길을 이백 미터쯤 가면 폐업한 극장이 있다. 간판은 아직 붙어 있다. 중앙극장. 앙 자의 아래 획이 떨어져서 중어극장처럼 보인다. 극장 정문은 셔터로 막혀 있고, 셔터에는 전단이 겹겹이 붙었다가 비에 녹아 회색 떡이 되어 있다. 정문 앞 인도 한가운데에 작은 부스가 하나 서 있다. 공중전화 부스보다 조금 큰, 창구 구멍이 뚫린 매표소. 유리는 깨지지 않았고, 창구 위에 페인트 글씨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일반 삼천 원, 학생 이천 원. 매표소 문에는 자물쇠가 걸려 있는데, 자물쇠만은 새것이다. 누가 아직 이 한 평을 잠그고 다닌다.
나는 이 극장을 엿새 동안 여섯 번 봤다. 여섯 번 다 같은 생각을 했다. 저기 마지막으로 걸린 영화가 뭐였을까.
극장을 지나면 다리다. 성하천을 건너는 보행교. 차가 못 다니는 좁은 다리다. 길지 않다. 백사십 걸음. 나흘째에 세었다. 세는 버릇은 회사에서 생겼다. 그만두고 나서도 손이 센다.
다리 중간에 노인이 앉아 있다. 엿새 동안 여섯 번 다 있었다. 같은 자리, 같은 자세. 접이식 방석을 깔고 난간 쪽을 보고 앉아 있다. 등을 세우고, 손은 무릎에. 기대지 않는다. 손에는 늘 아무것도 없다. 낚싯대도, 신문도, 휴대폰도. 나는 그게 조금 부러웠다.
오늘은 열한 시 사십 분에 다리에 닿았다. 어제는 열한 시 십 분이었다. 노인이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좀 늦으셨네.”
나는 멈췄다. 엿새 동안 이 사람은 나를 한 번도 보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아, 네.”
“어제는 열한 시 십 분이었는데.”
“반찬가게에서 좀 서 있었어요.”
“순자네? 거기 서면 오래 서지. 그 양반 말이 길어.”
노인은 다시 난간 쪽을 봤다. 나는 그 옆에 서 있었다. 서 있으면서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생각했다. 십일 년 동안 회의에서 할 말을 준비하는 일을 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매일 여기 계세요?”
“어.”
“뭐 보세요?”
“물.”
“…네.”
노인은 한참 말이 없었다. 나는 갈까 하다가 안 갔다.
“젊은 양반. 회사 그만뒀지.”
“어떻게 아세요?”
“평일 낮에 여기 걸어가는 사람은 셋 중 하나야. 그만뒀거나, 그만두려고 하거나.”
“셋 중 하나라면서요.”
“셋째는 나 같은 사람이고.”
나는 웃었다. 엿새 만에 처음 웃은 것 같았다.
“몇 정거장 걸어?”
“여덟이요.”
“많이 걷네.”
“할 게 없어서요.”
“할 게 없는 게 아니라.”
노인이 말했다.
“할 걸 안 정했겠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머릿속에 떠오른 열두 개 중에 맞는 게 하나도 없어서였다. 다리를 건너서 뒤를 돌아봤다. 노인은 그대로 앉아 있었다. 등을 세우고.
그날은 종점까지 가지 않았다. 다리를 건너 학교 앞에서 돌아섰다. 노인의 말이 발목에 걸려서. 할 걸 안 정했다. 돌아오는 길에 극장 앞을 다시 지났다. 극장 옆 부동산 유리문에 새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아침에는 없던 것이었다.
대성개발 성하1구역 재정비촉진사업 현장사무소.
나는 걸음을 멈췄다. 대성개발. 내가 십일 년 다니고 엿새 전에 사원증을 반납한 회사. 성하1구역. 그 이름을 나는 안다. 작년 겨울부터 올해 여름까지 내 모니터 왼쪽 위에 떠 있던 폴더 이름이었다. 성하1구역_사업성_v14. 원가표, 보상 산정표, 공정표. 나는 그 폴더 안에서 이 동네를 필지 번호와 평당 단가로만 봤다. 걸어 본 적은 없었다.
현수막 아래 유리문에 도면이 붙어 있었다. 빨간 선으로 둘러친 구역. 시장 절반, 큰길 한쪽, 중앙극장, 그리고 다리. 성하보행교 위에 파란 글씨가 적혀 있었다. 철거 후 왕복 사 차로 차량교 신설.
내가 엿새 동안 걸은 여덟 정거장 가운데 세 정거장이 빨간 선 안에 있었다.
유리문이 열렸다.
“재우야.”
윤태진 상무였다. 쉰다섯. 흰 셔츠 소매를 걷었고, 손목에 회사 로고가 박힌 시계. 내가 입사했을 때 과장이었고, 나를 원가팀에 앉힌 사람이다. 십일 년 동안 내 결재란 위에 늘 그의 이름이 있었다. 사표를 냈을 때 그는 한 시간 동안 나를 붙잡았다.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다. 쉬고 와라. 네 자리 비워 둘게.
“여기서 뭐 하냐.”
“걷습니다.”
“여기를?”
그는 나를 위아래로 봤다. 운동화, 콩자반 봉지.
“너 이 동네가 어디인지 알고 걷냐. 네가 일 년 동안 만진 데야. 여기가.”
“오늘 알았습니다.”
윤 상무는 웃었다. 웃음이 짧았다. 유리문 안쪽에서 에어컨 바람이 새어 나왔다. 구월 한낮인데 사무실은 한겨울처럼 차가웠다.
“잘됐다. 들어와. 커피 한잔하자. 보상 산정 최종본이 다음 주 이사회야. 네가 짠 틀인데 네가 없으니까 애들이 헤매. 사흘만 와서 봐 줘. 사흘이면 돼. 일당 두 배로 쳐 줄게.”
“안 갑니다.”
“재우야.”
“걸어 보니까 제 표에 없던 게 있습니다.”
“뭐가?”
“사람이요.”
윤 상무는 유리문 손잡이를 잡은 채로 나를 봤다. 한참. 그 눈을 나는 안다. 회의에서 내 숫자가 틀렸을 때 그가 짓던 눈. 화내지 않고, 다시 해 오라고 말하기 직전의 눈.
“사람은 원래 표에 없어. 그러니까 표가 되는 거야. 너도 알잖아.”
그는 유리문을 닫았다. 문 안에서 누군가를 불러 뭔가를 지시하는 모습이 보였다. 손가락으로 창밖, 나를 가리키면서.
돌아오는 길에 다리를 다시 건넜다. 노인은 없었다. 난간에 접이식 방석만 반으로 접혀 걸려 있었다. 누가 가져가지 않을 걸 아는 사람이 걸어 둔 모양새였다. 방석 모서리가 닳아 솜이 비쳤다.
시장 반찬가게 앞에서 다시 멈췄다. 사장님이 셔터를 반쯤 내리고 있었다.
“사장님, 아까 도장 찍으라고 난리라고 하셨죠. 누가요?”
사장님이 셔터 손잡이를 쥔 채로 나를 봤다. 위아래로.
“총각 어디 다녀? 말하는 게 부동산 사람 같네.”
“다니던 데 그만뒀어요.”
“어디 다녔는데.”
나는 대답을 골랐다. 한 번에 고르지 못했다. 사장님이 그 틈을 봤다. 셔터를 끝까지 내렸다.
“됐어. 콩자반이나 먹어. 네 통.”
집으로 걸으면서 나는 성하1구역_사업성_v14를 떠올렸다. 보상 산정표 세 번째 시트. 영업손실 보상 가정. 시장 상가는 무등록 영업이 많으니 영업손실 보상 대상에서 칠십 퍼센트를 제외한다고 가정. 그 가정을 넣은 사람은 나였다. 윤 상무가 칠십이 너무 많지 않으냐고 물었고, 나는 업계 평균이라고 대답했다. 업계 평균은 사십이었다. 칠십을 넣자 사업성 지표가 기준선을 넘었다. 이사회가 통과됐다. 나는 그날 퇴근길에 편의점에서 맥주를 한 캔 샀다. 축하하려고 산 건 아니었다. 그 뒤로 여섯 달 동안 매일 한 캔씩 샀다. 일곱 달째에 사표를 냈다.
그 칠십 퍼센트 안에 순자네 반찬이 있었다. 나는 오늘 처음 그 이름을 알았다.
그날 저녁 나는 노트를 폈다. 회사 다닐 때 사 둔 것이다. 회의록용으로 사 놓고 안 쓴 노트가 여덟 권 있었다. 회사 것이 아니라 내가 산 것. 첫 장에 이렇게 적었다.
9월 6일 · 여덟 정거장 중 다섯 · 한 시간 오십 분
그 아래에 오늘 본 것을 적었다.
반찬가게 · 콩자반 네 통째 · 곧 없어진다고 함 중앙극장 · 앙의 아래 획 떨어짐 · 옆 부동산이 대성개발 현장사무소 다리 · 노인 · 열한 시 사십 분 · 할 게 없는 게 아니라 할 걸 안 정했다 도면 · 빨간 선 안에 시장, 극장, 다리 순자네 반찬 · 칠십 퍼센트 안
적고 나서 나는 그 네 줄을 오래 봤다. 일기는 아니다. 일기에는 기분이 들어간다. 업무일지도 아니다. 업무가 없다. 그러면 뭔가. 나는 다섯 번째 줄을 적었다.
내일은 종점까지 간다.
누나에게서 전화가 왔다.
“뭐 해?”
“걸었어.”
“또? 재우야, 너 언제까지 걸을 거야?”
나는 창밖을 봤다. 냉장고 두 번째 칸에서 콩자반 네 통이 나를 보고 있을 것이다.
“정했어. 이 길이 없어질 때까지.”
누나는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다 물었다. 「그 길이 언제 없어지는데.」 나는 도면 하단의 공정표를 떠올렸다. 내가 짠 공정표였다. 철거 착수, 올해 십일월. 「두 달쯤.」 누나가 한숨을 쉬었다. 「그럼 두 달은 걷겠네.」 「응.」 전화를 끊고 나는 콩자반 첫 통을 꺼냈다. 엿새 동안 반이 남아 있던 통. 밥 한 공기에 그 반을 다 먹었다. 짰다. 사장님 팔뚝만큼 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