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018자) · 줄자
두 번째 인상
도서관 창고에서 엄마의 연애편지가 나왔다 · 유하람
기획안은 A4 두 장이었다. 부임 닷새째 아침, 직원 여섯 명 책상에 한 부씩 놓여 있었다. 스테이플러 심이 왼쪽 위 모서리에 비스듬히 박혀 있었다. 누가 서두르다가 찍은 각도였다.
하반기 운영안.
1. 밤의 도서관 — 매주 금요일 밤 열 시까지 개관. 2. 첫 책 — 이 동네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책 한 권. 3. 3층 향토자료실 상시 개방.
여름은 세 번째 줄에서 멈췄다. 그리고 첫 번째 줄로 돌아갔다.
회의실에서 여름이 먼저 입을 열었다.
“3층을 열자고요.”
“네.”
“거기 온도 조절 안 되는 거 아시죠. 1970년대 자료 있습니다.”
“압니다.”
“열면 상합니다.”
“그래서 스캔부터 하려고요.”
“예산은요.”
“신청했습니다.”
“승인 안 날 겁니다.”
“안 나면 제가 냅니다.”
이 대목에서 여름은 이 사람이 진심이라는 걸 알았다. 알았지만 인정하지는 않았다. 아는 것과 인정하는 것은 다르다. 여름은 그 차이를 잘 쓰는 사람이었다.
“금요일 밤 열 시는 반대합니다.”
“이유를 물어도 됩니까?”
“마을버스 7번이 아홉 시 반에 끊깁니다. 여기 오시는 분들 절반이 그 버스 타고 오세요. 열 시까지 열면 그분들은 여덟 시에 일어나서 가셔야 됩니다. 그러면 밤의 도서관은 차 있는 사람들 도서관이 됩니다.”
민지가 손을 들었다.
“저, 두 번째 거요. 첫 책. 아기한테 무슨 책을 줘요? 아기는 못 읽잖아요.”
“부모가 읽어 줍니다.”
“그럼 부모 책이네요.”
회의실에 웃음이 잠깐 돌았다. 도현은 웃지 않고 민지 쪽을 봤다.
“맞습니다. 부모가 그 책 받으러 여기 한 번 옵니다. 한 번 오면 두 번째가 쉽고요.”
민지는 그 말을 받아 적었다. 여름은 받아 적지 않았다. 계산이 너무 빨랐다. 아이 하나에 이용자 둘. 그 셈이 틀렸다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 셈을 이렇게 빨리 하는 사람은 아이를 숫자로 먼저 보는 사람이라고, 여름은 판단했다.
도현은 그 자리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볼펜 뚜껑을 한 번 닫았다가 열었다. 여름은 그것을 반박 못 한 것으로 읽었다. 회의실 사람들이 서류를 챙기는 소리가 났다. 민지가 여름 쪽을 보고 입 모양으로 「이겼다」고 했다. 여름은 모르는 척했다.
그날 오후 두 시, 3층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3층에 사람 목소리가 들리는 일은 드물다. 여름은 계단을 두 칸씩 올라갔다. 향토자료실 문이 열려 있었고, 작업복 차림의 남자 둘이 줄자를 벽에 대고 있었다. 한 사람은 서가 번호를 휴대폰으로 찍고 있었다. 셔츠 가슴에 수놓인 글씨가 보였다. 새봄문화개발.
“뭐 하시는 겁니까?”
“실측이요. 건물 실측.”
“누가 허가했습니까?”
남자가 서류철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보여 주었다. 시청 문화체육국 공문이었다. 「매곡분관 활용 방안 검토를 위한 시설 현황 조사 협조 요청.」 결재란 맨 끝에 도서관정책과장 오세진의 이름이 있었다. 그 아래 참조란에 한 줄이 더 있었다. 「매곡분관장.」
여름은 공문을 쥔 채 서가 앞으로 가서 섰다. 줄자가 닿으려던 자리였다.
“여기 자료실입니다. 실측이면 복도만 하세요.”
“서가 간격도 재야 돼서요.”
“서가는 도서관 물건입니다. 새봄문화개발 물건이 아니고요.”
남자 둘이 서로를 봤다. 한 사람이 휴대폰을 꺼내 어딘가에 전화를 걸려고 했다. 그때 복도 끝에서 도현이 올라왔다. 계단을 뛰어 올라왔는지 숨이 조금 가빴다.
“한 선생님.”
“관장님, 이거 보셨어요?”
여름은 공문을 들어 보였다. 참조란이 보이게.
“봤습니다.”
“보시고 허가하셨어요?”
“공문이 왔으니까요.”
도현은 여름을 보지 않고 작업복 남자들에게 말했다.
“복도하고 계단 먼저 재십시오. 자료실은 제가 입회해서 따로 시간 잡겠습니다.”
남자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복도로 나갔다. 여름은 서가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줄자가 말려 들어가는 소리가 복도에서 들렸다. 차르륵.
“입회해서 따로 재 주시겠다고요.”
“네.”
“여기를 뜯을 사람들한테요.”
“뜯는다는 말은 아무도 안 했습니다.”
“배문수 의원이 로비에서 했습니다. 월요일에요. 관장님도 계단에서 들으셨잖아요.”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것이 여름에게는 두 번째 대답이었다. 첫 번째는 월요일 계단 위의 빈 얼굴이었다.
남자들이 복도를 재는 동안 여름은 자료실 안에 남아 있었다. 3층 공기는 오후 두 시에 가장 무겁다. 창 하나로 들어온 햇빛이 서가 끝에 비스듬히 걸리고, 그 빛 속에서 종이 먼지가 아주 천천히 돈다. 서가에는 상자가 사백 개 넘게 있다. 마을 회보, 초등학교 졸업 문집, 새마을 부녀회 회의록, 누가 기증한 결혼식 사진첩, 1970년대 버스 시간표가 적힌 마분지. 상자마다 여름 글씨로 번호가 붙어 있고, 번호 옆에 내용이 한 줄씩 적혀 있다. 팔 년 전 여름이 처음 이 방에 들어왔을 때, 상자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열어 봐야 알았다. 여름은 한 해에 백 개씩 열었다. 열 때마다 오래된 종이 냄새가 훅 올라왔다. 곰팡이와 풀과 누군가의 서랍 냄새가 섞인 냄새. 그 냄새를 맡으면 여름은 늘 조금 조용해졌다. 여기 있는 것들은 다른 어디에도 없다. 본관에도, 시청에도, 인터넷에도. 이 상자 사백 개가 트럭에 실려 나가면 그다음은 없다.
줄자 소리가 복도 끝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여름은 계단을 내려오면서 판단을 하나 더 얹었다. 숫자만 보는 사람, 넉 달 있다 갈 사람. 그리고 하나 더. 문을 열어 주러 온 사람.
자리에 앉자마자 여름은 시청에 전화를 걸었다. 도서관정책과. 신호가 여섯 번 가고 주무관이 받았다. 여름이 공문 번호를 불러 주자 주무관은 「담당자 바꿔 드릴게요」 하고 여름을 대기 음악 속에 넣었다. 음악은 비발디 「사계」 중 봄이었다. 칠월에 봄을 삼 분 들었다. 다른 주무관이 받았다. 그 주무관은 「과장님 결재 사항이라서요」라고 했고, 과장님은 회의 중이라고 했고, 회의가 언제 끝나느냐고 묻자 「오늘은 좀」이라고 했다. 여름은 메모지에 「오세진」 세 글자를 적고 밑줄을 두 번 그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수화기에 남은 제 손바닥 땀을 소매로 닦았다. 봄은 끝까지 안 끝나고 끊겼다.
카운터에 정 선생이 와 있었다. 반납 카트를 밀어 놓고, 여름 얼굴을 한 번 보더니 물었다.
“싸웠어?”
“안 싸웠어요.”
“싸운 얼굴인데.”
정 선생은 카운터 뒤 접이식 의자를 펴고 앉았다. 앉는 데 한참 걸렸다. 무릎이 먼저 앉고 허리가 나중에 앉는다.
“여름아.”
“네.”
“저 관장, 어릴 때 여기 살다시피 했어.”
여름은 고개를 들었다.
“네?”
“3층에서. 하루 종일 앉아 있었어. 여덟 살 때. 창가 자리. 내가 그때 여기 있었으니까 알지.”
“…그 얘길 왜 이제 하세요.”
“이제 생각났어. 오늘 아침에 계단에서 인사하는데, 고개 숙이는 게 똑같더라고. 그 애가 인사할 때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였거든.”
정 선생은 그러고 나서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여름이 물으려고 했을 때는 이미 카트를 밀고 서가 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리고 한 시간 뒤, 여름은 어린이실 앞에서 정 선생이 젊은 엄마 둘에게 하는 말을 들었다.
“새 관장이 여기서 태어났대. 3층에서.”
여름은 그걸 바로잡으러 가지 않았다. 오늘은 기울기를 바로잡을 힘이 없었다. 젊은 엄마 하나가 「어머, 그럼 여기가 고향이네」 하고 3층 쪽을 올려다봤다.
그날 밤 여름은 늦게까지 남았다. 문단속을 핑계로 3층에 올라갔다. 복도에 새봄문화개발이 붙이고 간 분홍색 테이프가 줄자 눈금 자리마다 붙어 있었다. 여름은 그걸 하나씩 떼면서 걸었다. 떼어 낸 테이프가 손가락에 달라붙었다. 스물세 개였다. 줄자 눈금마다 하나씩, 이 층을 몇 칸으로 나눌지 미리 그어 둔 자리 같았다. 벽 페인트가 테이프를 따라 조금씩 벗겨져 나왔다. 삼십 년 된 벽이라 칠이 약했다. 떼어 낸 자리마다 손톱만 한 흰 자국이 남았다. 여름은 그 자국을 손바닥으로 문질러 보았다. 지워지지 않았다. 붙일 때는 아무 흔적도 없을 것처럼 붙였을 테이프였다.
향토자료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도현이 창가 자리에 있었다. 기운 의자에, 기운 채로. 1998년 축쇄판이 펼쳐져 있었다.
여름은 문가에 섰다. 손가락에 분홍 테이프가 뭉쳐 있었다.
“아직 계셨네요.”
“버스 끊겼습니다.”
“차 있으시잖아요.”
“차는 본청 주차장에 두고 왔습니다. 오늘 버스 타 보려고요. 아홉 시 반 막차.”
여름은 테이프 뭉치를 쥔 채 서 있었다.
“타 보셨어요?”
“놓쳤습니다. 아홉 시 이십팔 분에 나갔는데 이미 가고 없었습니다. 기사님이 이 분 일찍 가신답니다. 손님이 없어서.”
여름은 그 말을 오래 붙들었다. 이 분 일찍 가는 막차. 여름도 아는 사실이었다. 팔 년 동안 알았다. 회의 때 그 사실을 넣지 않은 것은, 넣으면 논리가 약해 보여서였다. 손님이 없어서 일찍 가는 버스라면, 밤에 손님이 생기면 늦게 갈 수도 있다.
“오늘 회의 때 제가 한 말이요.”
“어느 거요.”
“어르신들 못 오신다는 거요.”
“맞는 말인데요.”
“맞는 말인데.”
여름은 거기서 멈췄다. 준비한 문장이 아니었다.
“이기려고 했습니다.”
도현은 축쇄판을 덮었다.
“저도요.”
“뭐가요.”
“첫날에 삼 년 동안 아무것도 안 하셨다고 한 거요. 대출 기록 다 보고 왔습니다. 독서 모임 열 개 만드신 것도 알고요. 그렇게 말해야 회의가 짧게 끝나니까.”
“오늘 실측은요.”
도현은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그건 아직 말씀 못 드립니다.”
여름은 그 문장을 한쪽에 따로 두었다. 사과와 비밀이 한 입에서 같이 나왔다.
“1998년 자료에서 뭘 찾으세요.”
“이 분관 개관 기사요. 사진에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축쇄판을 다시 폈다. 여름은 옆으로 가서 봤다. 흑백 사진이었다. 개관식. 현수막 아래 사람이 스무 명쯤 서 있었다. 앞줄 맨 오른쪽에 아이가 하나 있었다.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이고 있었다.
“이 아이가.”
“저입니다.”
여름은 사진을 더 봤다. 아이 옆에 여자가 서서 아이 손을 잡고 있었다. 짧은 파마머리에, 소매를 걷어붙인 블라우스. 여름은 그 얼굴을 알았다. 그 소매 걷는 버릇을 알았다.
“…이분.”
“아세요?”
여름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 사람은 여름의 어머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