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019자) · 오늘의 명단
88.3
나만 들리는 사망자 방송 · 서지오
88.3 메가헤르츠에서 사람 목소리가 난 것은 하평에 온 지 석 달째 되는 토요일, 정확히 정오였다.
그 시각 나는 어물전 할매의 라디오를 고치고 있었다. 진공관이 두 개 들어간 옛날 물건이었다. 할매는 이 라디오로 사십 년 동안 뱃날씨를 들었다고 했다. 영감이 배를 타던 시절부터. 영감은 없고 배도 없는데 라디오는 있었다. 할매는 수리비를 깎지 않았다. 대신 가자미 두 마리를 신문지에 싸서 작업대 옆에 놓고 갔다. 「고쳐지면 그거 먹고, 안 고쳐지면 그거라도 먹어.」
주파수 다이얼을 끝에서 끝까지 돌리며 잡음을 듣는 게 수리의 마지막 순서다. 잡음에도 결이 있다. 좋은 라디오는 방송과 방송 사이에서 고르게 쉬 소리를 낸다. 나쁜 라디오는 긁는다. 다이얼이 88.3을 지날 때 쉬 소리가 끊겼다. 그리고 목소리가 나왔다.
“정오입니다. 오늘의 명단을 알려 드립니다.”
얇은 목소리였다. 전화기 너머보다 얇았다. 누가 목소리에서 살을 다 발라내고 뼈만 남긴 것 같았다. 억양도 없었다. 기계가 읽는 소리였다.
“서정동 셋. 남산동 하나. 사택동 둘. 청산동 둘.”
이 분쯤 숫자만 읽었다. 동 이름과 숫자. 하평의 동 이름이었다. 마지막에 한 문장이 더 붙었다.
“이 방송이 들리지 않는 분이 곁에 있다면, 그분의 귀를 재어 보십시오. 이상으로 오늘의 명단을 마칩니다.”
그리고 쉬 소리로 돌아갔다.
작업대 앞에 떡집 장씨가 서 있었다. 절편 한 접시를 들고. 장씨는 매일 정오에 떡을 한 접시씩 돌린다. 시장 골목 가게마다. 새로 온 가게에는 두 접시. 나는 석 달째 두 접시를 받고 있었다.
“사장님, 방금 거 들으셨어요?”
“뭘.”
“라디오요. 88.3.”
장씨는 라디오를 봤다. 고개를 기울였다. 한참.
“쉬 소리만 나는데.”
“방금 목소리가 났어요. 동 이름이랑 숫자.”
장씨는 웃었다. 「총각 귀가 좋구먼. 나는 요새 손주 목소리도 잘 안 들려. 걔가 쪼그만 소리로 말해서.」 장씨는 떡 접시를 작업대에 놓고 갔다. 가자미 옆에. 가자미와 절편이 나란히 놓였다.
장씨가 가고 나서 나는 녹음을 스펙트럼 분석기에 걸었다. 화면에 소리가 산맥처럼 떴다. 보통 사람 목소리는 낮은 쪽에 큰 산이 있다. 백에서 천 헤르츠 사이. 모음이 거기 산다. 이 목소리에는 그 산이 없었다. 삼천 헤르츠 아래가 칼로 자른 듯 비어 있었다. 자음만, 쉿 소리와 스 소리와 치 소리만 남아 있었다. 사람 귀는 이상해서 자음만 들려도 말을 알아듣는다. 얇게, 멀게, 그래도 알아듣는다. 누가 일부러 목소리의 아래를 깎아 낸 것이었다.
송신 출력도 약했다. 신호 세기로 보면 이 도시 안, 멀어야 몇 킬로미터. 두 시간 거리 도시까지는 안 간다. 이 방송은 하평 사람에게만 보내는 방송이었다.
나는 라디오 기술자다. 대전에서 십 년 동안 수리점을 했다. 월세가 두 배로 오른 해에 가게를 접었고, 월세가 제일 싼 도시를 찾다가 하평에 왔다. 경북 바닷가, 인구 십일만. 하평화학 공장이 도시 한가운데 있다. 굴뚝이 여섯 개. 바람이 바다에서 불면 굴뚝 연기가 청산동 쪽으로 온다. 청산동은 원룸이 많다. 공장 하청으로 일하러 온 사람들, 월세 싼 곳을 찾아온 사람들. 나 같은 사람들.
그날 오후 나는 시장 골목 게시판 앞에 섰다. 게시판에는 부고가 붙는다. 상인회장이 매주 월요일에 새로 붙이고 지난주 것을 뗀다. 이번 주 부고는 두 장이었다. 청산동 원룸 사는 서른아홉 살 남자. 청산동 사는 쉰두 살 여자. 둘 다 하평화학 하청.
청산동 둘.
어물전 할매는 저녁에 라디오를 찾으러 왔다. 전원을 넣자 뱃날씨가 나왔다. 동해 남부 앞바다, 물결 일에서 이 미터. 할매는 라디오를 두 손으로 감싸고 한참 들었다. 「이 아저씨 목소리가 우리 영감이랑 비슷해. 영감은 물결이 삼 미터라도 나갔지.」 할매는 가자미를 먹었느냐고 물었다. 아직이라고 하자 혀를 찼다. 「생선은 기다리면 안 돼. 사람도 그렇고.」 할매가 라디오를 안고 나가다 돌아봤다. 「근데 총각, 아까 정오에 뭐 들었다며. 장씨가 그러던데. 나는 요새 정오 사이렌도 잘 안 들려.」
다음 토요일 정오, 나는 수리점 문을 닫고 라디오 세 대를 88.3에 맞췄다. 기종을 섞지 않았다. 같은 조건에서 같은 소리를 비교해야 한다. 십 년 동안 배운 것 가운데 제일 먼저 배운 것이다. 녹음기도 세 대 붙였다.
“정오입니다. 오늘의 명단을 알려 드립니다. 서정동 둘. 남산동 둘. 사택동 하나. 청산동 하나.”
월요일 게시판에 부고가 한 장 붙었다. 청산동, 마흔네 살.
그다음 토요일. 청산동 없음. 월요일 게시판에 청산동 부고는 없었다.
나는 녹음을 들고 시장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다. 떡집 장씨, 어물전 할매, 건어물 김씨, 약국 약사. 다 하평에서 이십 년 넘게 산 사람들이다. 다 이어폰을 꽂고 고개를 갸웃했다. 무음이라고 했다. 약사는 볼륨을 끝까지 올렸다가 얼굴을 찡그렸다. 「쉬 소리가 귀를 긁어. 목소리는 없어.」
한 사람만 달랐다. 시장 입구 편의점 야간 알바. 스물세 살. 하평에 온 지 삼 년 이 개월. 그 애는 이어폰을 꽂고 한참 있다가 말했다.
“뭐가 있긴 한데요. 되게 멀어요. 옆 건물에서 누가 말하는 거 같아요.”
내 귀에는 바로 옆에서 났다. 얇았지만 가까웠다.
넷째 토요일 정오의 방송은 조금 길었다. 숫자를 다 읽고 나서, 처음 듣는 문장이 붙었다.
“이 방송을 녹음하는 분께. 멈추지 마십시오. 그리고 들리지 않는 분들의 귀를 재어 주십시오.”
녹음기 세 대의 빨간 불이 동시에 깜빡였다. 나는 저도 모르게 녹음기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누가 이 가게 안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날 밤 나는 분석기에서 시험음을 틀어 내 귀를 재 봤다. 천 헤르츠, 사천, 팔천, 만이천, 만육천. 다 들렸다. 대전에서 십 년 동안 납땜 연기를 마셨어도 내 귀는 아직 멀쩡했다. 떡집 장씨가 들리지 않는다는 쉿 소리가 내 귀에는 다 들렸다. 그게 이상하게 미안했다.
넷째 토요일 오후 두 시, 수리점 앞에 검은 세단이 섰다. 운전석에서 한 사람, 뒷좌석에서 한 사람이 내렸다. 뒷좌석 사람은 예순 가까이 되어 보였다. 회색 양복, 흰머리를 단정하게 넘겼다. 손에 오래된 라디오 하나를 들고 있었다. 나무 케이스. 진공관 여섯 개짜리. 좋은 물건이었다.
“한겸 라디오 맞죠. 이거 고칠 수 있을까요. 아버님이 쓰시던 겁니다.”
시장 사람들이 가게마다 고개를 내밀었다. 떡집 장씨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나왔다. 「아이고, 전무님.」 어물전 할매도 나왔다. 그 사람은 상인들에게 하나하나 고개를 숙였다. 이름을 불렀다. 장 사장님, 할머님, 김 사장님. 시장 사람들 이름을 다 알았다.
하평화학 전무 백성환. 장씨가 떡 접시를 들고 와서 내 귀에 대고 알려 주었다. 이 시장 상인회 후원을 삼십 년 한 사람이라고. 명절마다 쌀을 돌린다고. 공장이 이 도시 밥줄의 절반이라고.
나는 나무 라디오를 받아 뒤판을 열었다. 정류관 하나가 나가 있었다. 한 시간이면 고친다.
“한 시간이면 됩니다.”
“기다리죠.”
백성환은 작업대 옆 의자에 앉았다. 운전석에서 내린 사람은 가게 밖에 섰다. 덩치가 컸다. 목이 짧았다. 가게 안을 보지 않고 골목을 봤다. 골목에 누가 오가는지를.
정류관을 가는 동안 백성환은 가게 안을 둘러봤다. 선반의 라디오들, 벽에 걸린 안테나, 작업대 위의 녹음기 세 대. 그의 눈이 녹음기에서 멈췄다.
“요즘 88.3을 들으신다고요.”
나는 인두를 멈추지 않았다.
“청산동 원룸 몇 군데에서 전파 이상 신고가 들어왔대요. 누가 이상한 안테나를 달았다고. 공장 계측기에 간섭이 생겨서, 우리 보안팀이 알아봤어요. 이 가게 옥상 안테나더군요.”
“수신 안테나입니다.”
“압니다. 그래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백성환은 웃었다. 이가 고르고 하얬다.
“그 방송, 우리도 알아요. 누가 하는지는 몰라요. 불법 방송이에요. 등록 안 된 주파수. 동네마다 사람 숫자를 읽는다죠. 불안을 파는 거예요. 이 도시 사람들은 공장 덕에 먹고살아요. 그런 방송 한 번에 집값이 떨어지고, 가게 매출이 떨어지고, 애들이 떠납니다.”
그는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작업대 위에 놓았다. 두툼했다.
“녹음하신 거, 그리고 녹음기. 제가 사겠습니다. 경찰에 넘길게요. 불법 방송 추적하는 데 쓰게. 수리비는 따로 드리고요.”
나는 인두를 거치대에 놓았다. 봉투를 보지 않고 그를 봤다.
“안 팝니다.”
“값이 모자라요?”
“녹음은 파는 게 아닙니다. 제 귀로 들은 걸 제 기계로 받은 겁니다.”
백성환은 봉투를 도로 집어넣지 않았다. 작업대 위에 그대로 두었다.
“한겸 씨. 하평에 오신 지 석 달이죠. 월세 싼 데 찾아서. 이 동네 월세가 왜 싼지 아세요?”
“모릅니다.”
“공장 옆이라서요. 그래도 사람들이 와요. 싸니까. 그 사람들이 여기서 먹고살 수 있는 건 공장이 돌아서예요. 방송 같은 거 듣지 마세요. 들리는 게 다 진짜는 아니에요.”
나는 새 정류관을 끼우고 뒤판을 닫았다. 전원을 넣었다. 진공관이 주황색으로 달아올랐다. 다이얼을 돌렸다. 트로트가 나왔다. 백성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님이 이 노래 좋아하셨어요.”
그는 라디오를 받아 들고, 수리비를 따로 내고, 상인들에게 다시 하나하나 인사하고 세단에 탔다. 봉투는 작업대 위에 남았다. 가자미가 있던 자리였다. 가게 밖에 섰던 덩치 큰 사람이 세단에 타기 전에 우리 가게 옥상을 한 번 올려다봤다.
나는 봉투를 열지 않고 상인회 사무실 우편함에 넣었다. 겉에 적었다. 백성환 전무님께 반송. 장씨가 그걸 보고 혀를 찼다. 「총각, 그 양반 봉투 돌려준 사람 이 시장에서 처음이야.」 칭찬인지 걱정인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장씨는 그날 저녁 떡을 한 접시만 가져왔다.
그날 밤 여덟 시, 수리점 셔터를 내리려는데 셔터 아래로 종이 한 장이 밀려 들어왔다. 마트 전단이었다. 뒷면에 볼펜 글씨가 있었다.
다음 주에는 둘입니다.
셔터를 도로 올렸다. 골목 건너편 가로등 밑에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택배 회사 조끼를 입고 있었다. 삼십 대. 그 사람 손에도 같은 전단이 한 장 들려 있었다.
그는 나를 보고, 자기 귀를 손가락으로 두 번 두드렸다. 들리느냐고 묻는 손짓이었다. 나는 대답 대신 내 귀를 두 번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