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116자) · 안 먹었다

열두 번째 문

드래곤이 처음으로 먹지 않은 아이 · 황보겸

로한 왕국 도성 아르한의 지하에는 문이 열둘 있다⁠.

첫 번째부터 열한 번째까지는 창고다⁠. 소금⁠, 밀⁠, 쇠⁠, 기름⁠, 그리고 전쟁 때 쓰는 것들이 들어 있다⁠.

열두 번째 문은 창고가 아니다⁠.

이 문은 돌 세 겹으로 되어 있고 열쇠가 셋이다⁠. 셋을 가진 사람이 셋이다⁠.

셋이 다 모여야 열린다⁠.

한 해에 한 번 연다⁠. 봄에 연다⁠.

열두 번째 문 뒤에 미르가 있다⁠.

미르는 이름을 먹는다⁠.

무엇을 먹는지 정확히 말하면 이렇다⁠. 사람 이름을 먹는다⁠. 먹히면 이 사람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이 사람을 못 알아보게 된다⁠.

이름이 없어지면 호적에서 지워지고⁠, 호적에서 지워지면 이 사람이 살던 마을이 지도에서 사라진다⁠.

마을이 사라지면 이 자리에 들판이 남는다⁠.

로한 남쪽에 들판이 넓은 것은 이 때문이다⁠.

들판은 처음부터 들판이 아니었다⁠.

미르가 이름을 먹기 시작한 것이 언제인지는 기록이 없다⁠.

기록이 없는 까닭도 이름을 먹혔기 때문이다⁠. 적은 사람의 이름이 먹히면 적은 것도 같이 지워진다⁠.

봄에 문을 여는 것은 먹이려고 여는 것이다⁠.

한 해에 하나씩 먹인다⁠.

누구를 먹일지는 도성에서 정한다⁠. 정하는 자리가 있고 이 자리에 앉는 사람이 셋이다⁠. 열쇠를 가진 셋과 같다⁠.

같은 해 봄에 정해진 사람은 열네 살짜리 아이였다⁠.

이름이 아셀이다⁠.

아이가 뽑힌 까닭은 셋 다 대지 못했다⁠.

기록에는 「⁠호적에 어미가 없음⁠」이라고만 적혀 있다⁠.

어미가 없는 아이는 먹혀도 우는 사람이 적다⁠.

문이 열린 것은 사월 초였다⁠.

돌 세 겹이 차례로 밀려났다⁠. 미는 데 사람 열둘이 붙었다⁠.

안에서 냄새가 나왔다⁠.

먼저 물비린내가 나왔다⁠. 지하수 냄새다⁠.

다음에 짚 냄새가 나왔다⁠.

마지막에 쇠 냄새가 나왔다⁠.

굶은 짐승한테서 나는 냄새다⁠.

아셀이 이 냄새를 맡고 걸음을 멈췄다⁠.

셋 가운데 하나가 등을 떠밀었다⁠.

아이가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지하 방은 넓었다⁠. 천장이 높고 돌기둥이 넷이다⁠.

기둥 사이에 미르가 있었다⁠.

미르는 크지 않았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작았다⁠. 소 두 마리쯤이다⁠.

비늘이 없고 가죽이었다⁠. 회색이고 마른 가죽이다⁠.

눈이 셋이었다⁠. 둘은 앞에 있고 하나는 목 아래에 있다⁠.

목 아래 눈은 감겨 있었다⁠.

미르가 아이를 봤다⁠.

아이가 섰다⁠.

미르가 코를 벌렸다⁠.

냄새를 맡는 것이다⁠.

미르는 눈으로 고르지 않는다⁠. 코로 고른다⁠.

이름마다 냄새가 다르다⁠. 사람은 이것을 못 맡는다⁠. 미르만 맡는다⁠.

미르가 아이 냄새를 맡고 코를 닫았다⁠.

그러고 고개를 돌렸다⁠.

먹지 않았다⁠.

아이가 이 자리에 한나절 서 있었다⁠.

한나절 뒤에 문이 열렸다⁠.

셋이 들어와서 아이가 서 있는 것을 봤다⁠.

셋 가운데 하나가 말했다⁠.

“⁠…안 먹었소⁠?⁠”

아이가 대답했다⁠.

“⁠안 먹었습니다⁠.⁠”

셋이 서로를 봤다⁠.

한 사람이 말했다⁠.

“⁠백사십 해 만이오⁠.⁠”

아셀이 물었다⁠.

“⁠…무엇이 백사십 해입니까⁠?⁠”

이 사람이 말했다⁠.

“⁠안 먹은 것이⁠.⁠”

셋이 아이를 데리고 나왔다⁠.

나오면서 한 사람이 말했다⁠.

“⁠…이 아이를 어찌하오⁠?⁠”

또 한 사람이 말했다⁠.

“⁠내년에 다시 넣으면 되지⁠.⁠”

셋째가 말했다⁠.

“⁠안 먹은 것을 또 넣으면 또 안 먹소⁠.⁠”

첫째가 말했다⁠.

“⁠그럼 다른 것을 넣어야 하오⁠.⁠”

셋이 아이를 두고 올라갔다⁠.

아셀은 이날 밤에 지하 계단에 앉아 있었다⁠.

문 너머에서 소리가 났다⁠.

긁는 소리다⁠.

아이가 문에 귀를 댔다⁠.

긁는 소리 사이에 다른 소리가 있었다⁠.

사람 소리였다⁠.

말은 아니고 소리다⁠. 여럿이 한꺼번에 내는 소리다⁠.

아이가 문에 대고 물었다⁠.

“⁠…누구세요⁠?⁠”

소리가 멎었다⁠.

한참 있다가 소리가 다시 났다⁠.

이번에는 하나였다⁠.

여자 목소리였다⁠.

이름을 불렀다⁠.

“⁠아셀⁠.⁠”

아이가 이 자리에 앉았다⁠.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은 지 오래됐다⁠. 도성에서는 아이를 번호로 불렀다⁠.

도성에서 아이를 번호로 부르는 데는 까닭이 있다⁠.

호적에 어미가 없는 아이는 도성이 기른다⁠.

기르는 데가 남문 안쪽 마당이다⁠. 지붕이 있고 벽이 셋이고 한쪽이 트여 있다⁠.

거기 아이가 마흔쯤 있다⁠.

마흔에게 번호를 준다⁠. 하나부터 마흔까지다⁠.

번호를 주는 까닭을 관리인이 이렇게 말했다⁠.

“⁠이름을 부르면 정이 든다⁠.⁠”

아셀은 열아홉이었다⁠.

열아홉이라고 불렸다⁠.

아셀이라는 이름은 아셀이 여덟에 스스로 지었다⁠.

지은 까닭은 하나다⁠.

같은 해 겨울에 스물셋이 죽었다⁠.

죽고 나서 마당에 있던 아이들이 이 번호를 잊었다⁠.

잊은 것이 아니라 없어졌다⁠. 스물셋이라는 번호가 다음 아이한테 넘어갔다⁠.

새로 온 아이가 스물셋이 됐다⁠.

먼저 있던 스물셋은 아무 데도 안 남았다⁠.

아셀이 이것을 보고 이름을 지었다⁠.

번호는 넘어가지만 이름은 안 넘어간다⁠.

지은 이름을 아무도 안 불렀다⁠.

여섯 해 동안 아무도 안 불렀다⁠.

그래서 문 안에서 이 이름이 났을 때 아셀이 앉은 것이다⁠.

여섯 해 만에 제 이름을 들었다⁠.

아이가 물었다⁠.

“⁠…누구세요⁠?⁠”

문 안에서 여자가 말했다⁠.

“⁠…네 어미다⁠.⁠”

문 안에서 여자가 다시 말했다⁠.

“⁠…아셀⁠.⁠”

아이가 대답했다⁠.

“⁠…예⁠.⁠”

여자가 말했다⁠.

“⁠…그 이름을 네가 지었지⁠.⁠”

아이가 이 자리에 굳었다⁠.

지은 이름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없다⁠.

아이가 물었다⁠.

“⁠…어떻게 아세요⁠?⁠”

여자가 말했다⁠.

“⁠…내가 지어 주려던 이름이다⁠.⁠”

“⁠…⁠”

“⁠못 지어 주고 먹혔다⁠.⁠”

아이가 문에 손을 댔다⁠.

돌이 차가웠다⁠.

여자가 말했다⁠.

“⁠…같은 이름을 골랐구나⁠.⁠”

문 안이 조용해졌다⁠.

아이가 한참 기다렸다⁠.

기다리다가 물었다⁠.

“⁠…거기 계세요⁠?⁠”

대답이 없었다⁠.

아이가 문에 이마를 댔다⁠.

돌이 차가웠다⁠.

아이가 한 번 더 불렀다⁠.

“⁠…어머니⁠.⁠”

대답이 없었다⁠.

아이는 이 자리에서 아침까지 기다렸다⁠.

아셀은 어미를 모른다⁠.

호적에 없다고 들었다⁠.

호적에 없는 까닭을 이날 알았다⁠.

마당에 아셀보다 두 해 어린 아이가 하나 있었다⁠.

번호가 서른하나다⁠.

이 아이는 이름을 안 지었다⁠.

지을 줄 몰라서가 아니라 이미 있어서다⁠.

세비라고 했다⁠.

세비는 마당에 온 지 두 해 됐다⁠. 두 해 전에는 남쪽 마을에 살았다⁠.

마을이 없어져서 도성에 왔다⁠.

세비한테는 누나가 있었다⁠.

누나 이름이 세하다⁠.

세비가 이 이름을 날마다 한 번씩 소리 내어 부른다⁠.

부르는 자리가 마당 구석이다⁠. 담 밑이다⁠.

아무도 안 보는 자리다⁠.

아셀이 이것을 봤다⁠.

“⁠…뭐 해⁠?⁠”

세비가 말했다⁠.

“⁠…부르는데⁠.⁠”

“⁠누구⁠?⁠”

세비가 말했다⁠.

“⁠우리 누나⁠.⁠”

아셀이 물었다⁠.

“⁠누나가 어디 있는데⁠?⁠”

세비가 말했다⁠.

“⁠몰라⁠.⁠”

“⁠…⁠”

“⁠없어졌어⁠.⁠”

아셀이 물었다⁠.

“⁠언제⁠?⁠”

세비가 말했다⁠.

“⁠두 해 전에⁠.⁠”

아셀이 이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왜 불러⁠?⁠”

세비가 말했다⁠.

“⁠안 부르면 잊어버려⁠.⁠”

아셀이 물었다⁠.

“⁠…뭘 잊어⁠?⁠”

세비가 말했다⁠.

“⁠이름⁠.⁠”

세비가 담에 등을 기댔다⁠.

“⁠얼굴은 벌써 잊었어⁠.⁠”

“⁠…⁠”

“⁠이름도 잊으면 아무것도 없어⁠.⁠”

아셀이 물었다⁠.

“⁠하루에 몇 번 불러⁠?⁠”

세비가 말했다⁠.

“⁠한 번⁠.⁠”

“⁠…왜 한 번만⁠?⁠”

세비가 말했다⁠.

“⁠많이 부르면 닳을 것 같아서⁠.⁠”

아셀이 이 말을 오래 들었다⁠.

이름이 닳는지 안 닳는지 아셀은 모른다⁠.

당시에는 몰랐다⁠.

먹혔기 때문이다⁠.

아셀은 이 밤에 문 앞에서 잤다⁠.

아침에 지하 관리인이 내려와서 아이를 깨웠다⁠.

관리인은 예순쯤 된 사내였다⁠. 이름이 보른이다⁠. 지하 열두 문을 삼십 년 지켰다⁠.

“⁠여기서 자면 안 된다⁠.⁠”

“⁠…아저씨⁠.⁠”

“⁠왜⁠?⁠”

“⁠문 안에서 말소리가 납니다⁠.⁠”

보른이 손을 멈췄다⁠.

“⁠…들었냐⁠?⁠”

“⁠들었습니다⁠.⁠”

“⁠…뭐라고 하더냐⁠?⁠”

아셀이 말했다⁠.

“⁠제 이름을 불렀습니다⁠.⁠”

보른이 한참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리고 물었다⁠.

“⁠누가 불렀냐⁠?⁠”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보른이 벽에 기댔다⁠.

“⁠…들어 있구나⁠.⁠”

아셀이 고개를 들었다⁠.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보른이 말했다⁠.

“⁠먹힌 것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

“⁠배 속에 있다⁠.⁠”

아셀이 물었다⁠.

“⁠그럼 나옵니까⁠?⁠”

보른이 말했다⁠.

“⁠부르면 나온다⁠.⁠”

아셀이 일어섰다⁠.

“⁠…부르면 나옵니까⁠?⁠”

보른이 고개를 저었다⁠.

“⁠네가 부르는 게 아니다⁠.⁠”

“⁠…⁠”

“⁠미르가 뱉어야 나온다⁠.⁠”

“⁠어떻게 뱉게 합니까⁠?⁠”

보른이 말했다⁠.

“⁠먹여야 뱉는다⁠.⁠”

아셀이 이 말을 들었다⁠.

“⁠…하나 먹이면 하나 뱉습니까⁠?⁠”

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럼 한 해에 하나씩 먹였으니 한 해에 하나씩 뱉었겠습니다⁠.⁠”

보른이 말했다⁠.

“⁠안 뱉었다⁠.⁠”

아셀이 물었다⁠.

“⁠왜 안 뱉었습니까⁠?⁠”

보른이 이 물음에 오래 있다가 대답했다⁠.

“⁠아무도 안 불렀다⁠.⁠”

“⁠…⁠”

“⁠뱉으려면 부를 사람이 있어야 한다⁠. 이름을 아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보른이 문을 봤다⁠.

“⁠먹히면 아무도 그 이름을 모르게 된다⁠.⁠”

“⁠…⁠”

“⁠그러니 부를 사람이 없다⁠.⁠”

아셀이 이 자리에 섰다⁠.

“⁠…저는 압니다⁠.⁠”

보른이 고개를 돌렸다⁠.

“⁠…무엇을⁠.⁠”

아셀이 말했다⁠.

“⁠어머니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목소리는 이름이 아니다⁠.⁠”

“⁠…⁠”

“⁠이름을 대야 나온다⁠.⁠”

아셀이 이날 밤에 마당으로 돌아갔다⁠.

세비가 담 밑에 있었다⁠.

“⁠…안 자⁠?⁠”

세비가 말했다⁠.

“⁠불렀어⁠.⁠”

아셀이 물었다⁠.

“⁠오늘도⁠?⁠”

세비가 말했다⁠.

“⁠오늘은 두 번 불렀어⁠.⁠”

아셀이 이 자리에 섰다⁠.

“⁠…닳는다며⁠.⁠”

세비가 말했다⁠.

“⁠오늘은 누나 생일이야⁠.⁠”

아셀이 아무 말도 못 했다⁠.

세비가 말했다⁠.

“⁠생일에는 두 번 불러도 돼⁠.⁠”

“⁠…⁠”

“⁠내가 정했어⁠.⁠”

아셀이 담 밑에 같이 앉았다⁠.

앉아서 물었다⁠.

“⁠…누나 몇 살이야⁠?⁠”

세비가 셈을 했다⁠.

“⁠…열여섯⁠.⁠”

“⁠…⁠”

“⁠없어질 때 열넷이었으니까 지금 열여섯⁠.⁠”

아셀이 물었다⁠.

“⁠없어진 사람도 나이를 먹어⁠?⁠”

세비가 말했다⁠.

“⁠몰라⁠.⁠”

“⁠…⁠”

“⁠그런데 안 먹으면 너무 불쌍하잖아⁠.⁠”

아셀이 물었다⁠.

“⁠어머니 이름을 어디서 알아냅니까⁠?⁠”

보른이 말했다⁠.

“⁠없다⁠.⁠”

“⁠…⁠”

“⁠호적에서 지워졌고 적은 것도 같이 지워졌다⁠.⁠”

아셀이 말했다⁠.

“⁠그럼 물어보면 됩니다⁠.⁠”

보른이 웃었다⁠.

“⁠누구한테⁠.⁠”

아셀이 문을 가리켰다⁠.

“⁠미르한테요⁠.⁠”

1화는 어땠나요?

댓글 3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 밤산책2026.10.14· 1화

    드래곤이 처음으로 먹지 않은 아이라는 게 일부러 안 먹은 거예요, 못 먹은 거예요?

    • 황보겸작가2026.10.14

      그 둘 사이 어디쯤이에요. 드래곤도 그 이유를 오래 생각합니다.

  • 백해원2026.10.09· 1화

    작가 백해원입니다. 먹힌 이름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배 속에 있고, 부르면 나옵니다. 1화의 열두 번째 문 앞에서, 여러분이라면 누구의 이름을 부르시겠어요?

열두 번째 문 · 드래곤이 처음으로 먹지 않은 아이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