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368자)

이미 출근하셨습니다

내 복제인간이 나보다 일을 잘한다 · 류세온

여의도 오늘도 타워 일 층 출입문은 심재오의 얼굴을 삼 년 동안 한 번도 틀리지 않았는데⁠, 2041년 시월 첫 월요일 여덟 시 사십일 분에는 초록불 대신 노란 글씨를 띄웠다⁠.

「⁠심재오 님은 이미 출근하셨습니다⁠.⁠」

재오는 안경을 벗어 셔츠 자락으로 닦고 다시 썼다⁠. 한강에서 올라온 바람이 회전문 틈으로 들어와 목덜미를 훑었다⁠. 광역버스에서 한 시간 십 분을 서서 온 다리가 아직 흔들렸다⁠. 재오는 얼굴을 화면에 한 번 더 들이밀었다⁠. 이번에는 코끝이 유리에 닿았다⁠.

「⁠심재오 님은 이미 출근하셨습니다⁠.⁠」

“⁠반장님⁠, 이거 고장 났어요⁠.⁠”

경비 반장이 데스크에서 일어나 화면을 들여다보고⁠, 재오의 얼굴을 보고⁠, 다시 화면을 보았다⁠. 반장은 출입 기록을 손가락으로 올리다가 멈췄다⁠.

“⁠과장님⁠, 다섯 시 이 분에 들어가셨는데요⁠.⁠”

“⁠제가 다섯 시에 왜 와요⁠. 저 일산 살아요⁠.⁠”

“⁠기록엔 들어가셨어요⁠.⁠”

“⁠그럼 지금 여기 서 있는 건 누군데요⁠?⁠”

반장은 대답 대신 방문증을 한 장 뽑았다⁠. 방문 목적 칸에 무엇을 적을지 한참 고민하던 반장이 볼펜 끝으로 「⁠본인 확인⁠」이라고 썼다⁠. 재오는 이 목걸이를 받아 목에 걸었다⁠. 로비 한가운데 유리장 안에서 창업주의 무쇠 누룽지 판이 검게 빛났고⁠, 이 둥근 쇠에 방문증을 건 자기 얼굴이 일그러져 비쳤다⁠.

*

십사 층 마케팅팀 회의실은 벽이 유리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안이 다 보였다⁠.

누군가 화면 앞에서 발표하고 있었다⁠. 셔츠 소매를 두 번 접어 올렸고⁠, 왼손으로 허공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말했다⁠. 이 손버릇을 재오는 알았다⁠. 거울 앞에서 발표 연습을 할 때마다 보던 손이었다⁠. 화면에는 「⁠달빛 누룽지 — 밤 열한 시의 간식⁠」이라는 제목이 떠 있었다⁠. 이월에 재오가 만들다가 삼월에 서랍에 넣고 다시 열지 않은 파일이었다⁠.

발표하는 남자는 안경을 쓰지 않았다⁠.

재오는 유리문을 밀었다⁠. 웃음소리가 뚝 끊겼다⁠. 마케팅본부장이 시식용 누룽지를 입에 문 채 굳었고⁠, 차담 대리가 노트북을 반쯤 닫았다⁠. 화면 앞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같은 이마⁠, 같은 가르마⁠, 오른쪽 눈썹 끝에서 털 몇 가닥이 위로 뻗친 것까지 같았다⁠. 다른 것은 안경이 없다는 것⁠, 그리고 피부가 이상하게 맑다는 것이었다⁠. 여덟 달 동안 새벽 두 시에 잠든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어⁠, 왔네⁠.⁠”

남자가 말했다⁠. 재오의 목소리였다⁠. 녹음해서 들을 때마다 싫던 바로 이 목소리였다⁠.

본부장이 누룽지 조각을 삼키다가 사레가 들렸다⁠. 본부장이 기침하는 동안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때 맨 뒷자리에서 젊은 남자 하나가 벌떡 일어나 허리를 반으로 접었다⁠.

“⁠안녕하십니까⁠, 원본님⁠! 사내 복제인 1호 류강비입니다⁠! 다들 복사라고 부르십니다⁠!⁠”

류강비는 고개를 든 채 왼쪽 귀를 손가락으로 젖혀 보였다⁠. 귀 뒤 머리카락이 시작되는 자리에 콩알만 한 푸른 점이 있었다⁠.

“⁠이게 표식입니다⁠. 저기 재오 2 선배님도 있으십니다⁠. 반가우시죠⁠?⁠”

재오는 대답하지 않고 화면 앞으로 걸어갔다⁠. 안경 없는 남자가 고개를 살짝 기울여 귀 뒤를 보여 주었다⁠. 푸른 점이 있었다⁠. 재오는 이 남자의 멱살을 잡았다⁠. 남자도 재오의 멱살을 잡았다⁠. 같은 높이⁠, 같은 각도⁠, 같은 힘이었다⁠. 둘은 서로의 셔츠를 쥔 채 서로의 얼굴을 한 뼘 앞에서 보았다⁠. 재오는 상대의 눈이 자기 눈보다 또렷하다는 것을 알았다⁠. 안경 너머가 아니라 맨눈으로 재오를 보고 있었다⁠.

“⁠놔⁠.⁠”

둘이 동시에 말했다⁠. 류강비가 손뼉을 쳤다⁠.

“⁠와⁠, 복사했습니다⁠!⁠”

차담이 둘 사이에 노트북을 끼워 넣었다⁠. 차담은 비꼬는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노트북을 탁 소리 나게 펼쳤다⁠.

“⁠과장님들⁠. 둘 중에 누가 저한테 지난주 회식비 이만 원 빌렸어요⁠?⁠”

“⁠나⁠.⁠”

둘이 또 동시에 말했다⁠. 차담이 노트북을 닫았다⁠.

“⁠그럼 둘 다 갚으세요⁠.⁠”

회의실 문이 열렸다⁠. 인사본부장이 태블릿을 가슴에 안고 들어왔다⁠. 늘 그렇듯 목소리를 낮추고 문장 끝에 「⁠규정상⁠」을 붙였다⁠.

“⁠심재오 과장님⁠, 원본 쪽 과장님 말씀입니다⁠. 오늘부로 대기 발령입니다⁠. 이월 십사일 정기 검진 때 복제 동의서에 서명하셨고⁠, 법정 원본 사용료로 월급의 삼십 퍼센트가 나갑니다⁠. 규정상⁠.⁠”

“⁠검진 동의서요⁠? 그거 피 뽑는다는 거였잖아요⁠.⁠”

“⁠열한 쪽 중 아홉 번째 쪽이었습니다⁠.⁠”

재오는 이날을 기억했다⁠. 커다란 흰 통 같은 기계 안에 누워 있었고⁠, 기사가 머리를 움직이지 말라고 했고⁠, 재오는 퇴근길에 영미 초콜릿을 사야 한다는 생각만 했다⁠. 동의서는 앞장만 읽고 맨 뒷장에 이름을 썼다⁠.

“⁠철회합니다⁠. 지금⁠, 여기서⁠.⁠”

인사본부장은 태블릿을 한 번 두드렸다⁠.

“⁠철회하시면 저분은 오늘 반납이고⁠, 과장 자리는 조직 개편으로 없어집니다⁠. 규정상 한 자리에는 한 사람이라서요⁠. 그 자리를 비워 둘 이유가 없거든요⁠.⁠”

재오는 안경 없는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엄지로 검지 옆을 문지르고 있었다⁠. 재오가 겁날 때 하는 짓이었다⁠.

*

삼십이 층 대표실은 창이 한강 쪽으로 통째로 나 있었다⁠. 한미주는 앉지 않았다⁠. 창가에 선 채 아무 맛도 안 넣은 누룽지 한 조각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이로 끊어 먹고 있었다⁠. 쉰 살의 대표는 회색 정장 소매에 쌀가루가 묻어도 털지 않았다⁠.

“⁠심 과장님 잘린 거 아니에요⁠.⁠”

한미주가 먼저 말했다⁠. 목소리가 낮고 느렸고⁠, 말끝을 올리지 않았다⁠.

“⁠집에서 쉬시면서 삼십 받으시고⁠, 일은 과장님이 하시는 거예요⁠. 저기 계신 과장님이요⁠.⁠”

벽 화면에 십사 층 사진이 떠 있었다⁠. 재오 2가 전화기를 귀에 대고 웃고 있었다⁠. 화면 아래쪽에 오늘 아침 여덟 시부터 잡은 유통사 미팅이 세 건 올라와 있었다⁠. 재오가 지난 한 달 동안 잡은 것보다 많았다⁠.

“⁠아무도 안 잘라요⁠, 우리 회사는⁠. 우리 아버지는 공장에서 이백 명을 잘랐는데⁠, 나는 한 명도 안 잘라요⁠. 대신 이월 검진 날 본사 사백열두 명을 전부 스캔해 뒀어요⁠. 지금 복제가 여덟이고 이달 안에 열여섯이에요⁠. 그다음부터는 달마다 두 배⁠.⁠”

“⁠반납하세요⁠. 저 사람⁠.⁠”

“⁠반납하면 그 책상도 같이 반납이에요⁠.⁠”

한미주는 누룽지 부스러기를 손바닥에서 입으로 털어 넣었다⁠. 볶은 쌀 냄새가 대표실에 퍼졌다⁠. 재오가 이 회사에 들어온 십일 년 전⁠, 면접 대기실에서 맡은 냄새와 같았다⁠.

“⁠제가 과장으로 십일 년을 일했습니다⁠.⁠”

“⁠삼월 이후로는 기획안 한 장 안 쓰셨죠⁠.⁠”

“⁠누가 그래요⁠?⁠”

“⁠과장님이요⁠.⁠”

한미주가 화면 속 재오 2를 턱으로 가리켰다⁠.

“⁠이월의 과장님이 그러던데요⁠. 자기가 그때 쓰려던 게 일곱 개였는데 서랍에 하나도 안 나왔다고⁠. 그 사람은 오늘 아침 다섯 시에 와서 그중 두 개를 썼어요⁠.⁠”

재오는 대답할 말을 찾다가 숫자를 찾았다⁠. 숫자를 늘어놓았다⁠. 부산 시식에서 사십 대 응답자 칠십삼 퍼센트가 제사 음식 같다고 했다는 것⁠, 그래서 이 기획안은 쓸 이유가 없었다는 것⁠, 대신 기존 과자 열한 개의 판촉을 막았다는 것⁠. 한미주는 끝까지 들었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사원증 주세요⁠.⁠”

“⁠안 드립니다⁠.⁠”

한미주가 인사본부장에게 고개를 까딱했다⁠. 인사본부장이 태블릿을 두드리자 재오 목에 걸린 사원증의 작은 불이 초록에서 빨강으로 바뀌었다⁠. 목걸이가 갑자기 무거워졌다⁠.

“⁠그거 기념으로 가지세요⁠. 내일부터는 문이 안 열려요⁠.⁠”

*

짐을 챙기러 십사 층에 내려가자 책상은 이미 정리되어 있었다⁠. 모니터 옆에 쌓여 있던 시식 샘플 상자들이 사라졌고⁠, 서랍 속에 굴러다니던 빈 커피 캔 열몇 개도 없었다⁠. 키보드 옆에 액자 하나만 남아 있었다⁠. 결혼 오 년째 제주 바다 앞에서 영미와 찍은 사진이었다⁠. 재오가 놓았을 때는 모니터 쪽을 보던 액자가 지금은 의자 쪽을 보고 있었다⁠.

재오 2가 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서랍에 캔 열네 개 있더라⁠. 버렸어⁠. 언제부터 그렇게 마셨어⁠?⁠”

“⁠네가 알 거 없어⁠.⁠”

“⁠알 건 많은데 모르는 게 좀 있네⁠.⁠”

재오 2가 의자를 돌렸다⁠. 무릎이 재오의 무릎에 거의 닿았다⁠. 같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지난겨울 백화점 할인 매대에서 산 회색 바지였고⁠, 이 바지는 지금 재오의 옷장에 한 벌뿐이어야 했다⁠.

“⁠제주는⁠? 유월 십 주년⁠. 내가 이월에 숙소 알아보고 있었잖아⁠. 그 바닷가 펜션⁠.⁠”

재오는 액자를 집어 들었다⁠. 유리에 형광등이 비쳐 영미 얼굴이 하얗게 날아갔다⁠. 재오는 이 위로 자기 얼굴과 재오 2의 얼굴이 겹쳐 비치는 것을 보았다⁠. 하나는 안경을 썼고 하나는 쓰지 않았다⁠.

“⁠간 거지⁠?⁠”

재오 2가 다시 물었다⁠. 재오는 대답하지 않고 액자를 가방에 넣었다⁠. 등 뒤에서 재오 2가 의자를 도로 모니터 쪽으로 돌리는 소리가 났다⁠. 류강비가 엘리베이터 앞까지 따라 나와 허리를 접었다⁠.

“⁠원본님⁠,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지하 삼 층 숙소는 저희가 잘 쓰겠습니다⁠!⁠”

“⁠숙소요⁠?⁠”

“⁠저희 집입니다⁠. 자정에 점호가 있어서 다들 열한 시 반이면 들어갑니다⁠. 재오 2 선배님은 오늘 처음 주무시는 날이라 제가 칫솔을 사 드렸습니다⁠. 파란색으로요⁠.⁠”

재오는 파란 칫솔을 쓰지 않았다⁠. 늘 초록색을 샀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동안 재오는 이 생각만 했다⁠. 일 층에 닿을 때까지 파란색과 초록색을 입속으로 번갈아 되뇌었다⁠.

일 층 출입문을 나설 때 재오는 버릇처럼 얼굴을 화면에 댔다⁠. 문이 스르르 열리며 상냥한 여자 목소리가 나왔다⁠. 심재오 님⁠, 퇴근 처리되었습니다⁠, 오늘 하루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십사 층의 심재오는 이 시각 유통사와 네 번째 전화를 하고 있었다⁠. 로비의 경비 반장이 재오의 뒷모습과 엘리베이터 쪽을 번갈아 보다가⁠, 출입 기록 화면을 조용히 꺼 버렸다⁠.

*

일산 백석동 아파트 엘리베이터에는 거울이 한 면 붙어 있었다⁠. 십일 층까지 올라가는 동안 재오는 이 안의 남자를 보았다⁠. 빨간불 사원증과 방문증을 둘 다 목에 건 채였고⁠, 안경에 김이 서려 있었고⁠, 아침보다 다섯 살은 늙어 보였다⁠.

현관문을 열기 전에 냄새가 먼저 나왔다⁠.

들깨였다⁠. 볶은 들깨를 갈아 넣고 오래 끓인 국물의 고소하고 묵직한 냄새가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재오는 이 냄새를 봄 이후로 맡지 못했다⁠. 영미가 좋아해서 일요일마다 끓이던 들깨 칼국수였고⁠, 삼월부터는 일요일에도 재오가 잠만 잤다⁠.

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자 웃음소리가 들렸다⁠. 영미가 식탁에 팔꿈치를 괴고 웃고 있었다⁠. 입을 다 벌리고⁠, 어깨를 흔들며 웃는 웃음이었다⁠. 재오는 이 웃음도 봄 이후로 듣지 못했다⁠.

가스레인지 앞에 남자가 서 있었다⁠. 소매를 두 번 접어 올렸고⁠, 왼손 검지에 밴드를 감았다⁠. 냄비 손잡이를 맨손으로 잡았다가 데었다고 영미에게 말하는 중이었다⁠. 영미가 웃으며 그러니까 행주를 쓰라고 몇 번을 말하느냐고 했다⁠.

신발장 앞에서 재오가 가방을 떨어뜨렸다⁠. 영미가 고개를 돌렸다⁠. 웃음이 얼굴에 반쯤 남은 채 멈췄다⁠. 눈이 현관의 재오에게 갔다가 가스레인지 앞의 남자에게 갔다가 다시 현관으로 왔다⁠.

가스레인지 앞의 남자가 국자를 든 채 돌아섰다⁠. 맨눈이었다⁠.

“⁠왔어⁠? 손 씻고 와⁠. 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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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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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가자리2026.10.27· 1화

    복제인간이 먼저 출근해 있으면 회사 사람들은 누가 진짜인지 어떻게 구별해요?

    • 류세온작가2026.10.27

      구별 안 해요. 일 잘하는 쪽이 진짜라고 여기는 게 이 회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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